제118화. 마법약제조학 수업 (3)
“…….”
입을 다물고 있는 가이젠. 그런 그의 귓가에 퀴닝의 치유 마법이 만들어내는 울림이 이어진다.
피이이이잉.
클로이와 달리아가 연거푸 눈을 깜빡였다. 형체가 하나둘씩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와,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괜찮아, 달리아?”
“…괜찮아.”
“루든! 설마 이번에도 멀쩡한 거야? 진짜?”
클로이가 물어왔지만 루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루빈과 가이젠이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이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몰랐던 루빈의 면모에 다시 한번 감탄할 뿐.
반면, 달리아는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루빈을 쓱 쳐다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교실 앞쪽으로 가버렸다.
“루든 생도. 꽤 잘 버티는군.”
손가락을 펼치고 있지 않았다는 걸 들켜버렸다. 가이젠은 짜증이 배어나는 헛기침을 한번 뱉어내곤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10분만 더 기다려 보도록 하겠다. 조금 늦게 발현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교수님.”
교수는 잠자코 기다리지 않았다. 앉아 있는 루빈의 주변을 걸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돌았지만 루빈의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실명은 발현되지 않았다.
“이거 굉장히 흥미로운데. C반 보조학생은 확실히 제대로 뽑은 것 같군.”
말은 그렇게 해도, 그의 모습에서는 흡족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빤히 보였다.
사실, 가이젠으로서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수업 덕분에 생도들의 마법약 저항력을 파악했으니.
이 기록은 앞으로 페르 로렌치니라는 의문의 생도를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별종 놈만 빼면…….’
저항력이 아직 확인되지 않은 단 한 명의 생도. 가이젠은 거슬렸고 짜증 났다. 자신의 예측이 벗어났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굴욕감이 느껴졌다.
‘체질 때문이 아니야.’
마법약에 특화된 체질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도 정도가 있기 마련이다. 체질만으로는, 5단계를 버텨내지 못했을 터.
마법약의 6단계는 선천적 마나의 깊이를 감안한 것이었다. 덕분에 클로이와 달리아의 저항력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놈은 뭐지? …마법약에 대한 숙련도가 높은 것도 아니야. 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마나가 깊다는 건가?’
하지만 그 비교 대상이 누구였던가. 어지간한 마법가문이 아니다. 무려 위더스푼가의 클로이였다.
클로이보다 더 강력한 마나의 환을 지닌 생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면, 설마 이 녀석이 페르인가?’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저 페르 로렌치니라는 이름만 알 뿐, 재능이나 경지에 대해선 듣지 못했지만.
‘날 협박하면서까지 추적하는 걸 보면, 분명 보통 녀석은 아니겠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직감일 뿐. 명백한 근거는 없었다.
뭐, 어쨌든. 루든만 빼곤 모든 생도들의 저항력 수치를 알게 되었으니. 계속 찾다 보면 곧 알게 될 것이다.
가이젠은 퀴닝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퀴닝. 여기 루든 생도를 치유해 주도록.”
“네? 교수님, 아직 10분 안 지났는데요? 6단계 마법약이 발현되는지 확인하려면 아직 5분은 더 지나야 합니다.”
퀴닝은 모래시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실명’의 모래층은 첫 번째 모래층만큼 양이 꽤 많았다. 발현되는지 제대로 확인하려면 퀴닝의 말대로 몇 분은 더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발현되기 전에 그냥 치유하라고.”
“저, 그러면 루든 포이넨 생도는 6단계 마법약을 체험할 수 없을 텐데요…. 그리고 마지막 7단계도 아직 남아 있는데…….”
가이젠은 퀴닝의 연이은 대꾸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선을 루든 쪽으로 돌리며.
“루든 생도.”
“네, 교수님.”
“나도 네가 마법약을 체험하길 바라지만, 오늘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군.”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오늘 수업은 내가 생도들의 마법약 저항력을 파악하는 목적도 있었다. 다만 6단계까지 버틸 생도가 있을 줄은 몰랐어.”
“…….”
“물론 아직 6단계 약효가 발현되려면 몇 분 정도 남았지만. 이 정도면 버텼다고 봐도 무방하지. 다만 진짜 문제는-”
가이젠은 고개를 들어, 모두에게 들으란 듯 말했다.
“6단계와 7단계 사이의 폭을 지나치게 넓게 설정해 두었다는 거다. 단순 한 단계 차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6단계와 20단계 정도의 차이거든.”
앞선 여섯 단계는 고작 전조현상에 불과했고, 마지막 단계야말로 이 마법약의 핵(核)이었다.
퀴닝 조교의 간단한 마법으로도 간단히 치유된 앞선 단계와 달리, 마지막은 그게 불가능했다. 그만큼 강력한 약효였다.
“해보나 마나, 넌 못 버틸 거다. 약효가 너무 강해서 네 정확한 저항력 측정도 어려울 거고. 무의미한 체험이다, 이 말이지. 이해했나?”
“이해했습니다.”
“좋아. 게다가 7단계에서 막상 약효가 발현되면 퀴닝 조교도 꽤 골치 아플 거야. 틀림없이 치유마법학 교수가 직접 나서야 할 거다. 그러니 발현되기 전에 전소(前燒)시키는 게 나아.”
여기까지 말한 가이젠은 퀴닝을 향해 다시 고갯짓을 했다. 옆에 서서 대화를 들은 덕분에, 퀴닝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곧바로 치유 마법을 준비했다.
그런데.
“교수님. 이게 7단계가 아닌 20단계와 같다면, 교수님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단계가 남아 있는 겁니까?”
“뭐?”
순간, 가이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루든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가이젠의 입장에서 그의 태도는 당돌하다거나 버릇이 없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오는 가이젠. 그야말로 무지(無知)하군. 멍청함 그 자체였다.
“루든 생도. 혹 끝까지 체험해 보고 싶어서 하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7단계 약효가 발현된다면 말이죠.”
“마치 이번에도 발현되지 않을 걸 장담하는 태도군.”
“…….”
루빈은 모래시계를 쳐다봤다. 스스스스. 이 시간에도 모래는 부지런히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발현되기에는 아직도 한참 남았다.
가이젠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 네가 마신 마법약이 20단계라면… 교수로서 내가 만들 수 있는 마법약은 이보다 20단계 정도 더 남았다고 할 수 있지.”
“그럼 이 마법약에 교수님 전력(全力)의 절반 정도가 담겼다는 거네요. 그럼 됐습니다. 오늘 이 마법약 효과가 발현되지 않는다 해도 안심할 수 있겠네요.”
뭐? 안심?
설마, 앞으로도 더 시험해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뭐, 이런 의미인가?
명백한 도발에, 가이젠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회색 머리를 쓱 쓸어 넘기며, 나지막이 경고했다.
“루든. 네가 마법약제조학에 욕심이 많은 것도 알겠고, 나름 재능도 있는 것도 확인했다. 그렇다고, 오만하게 굴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오만하게 굴 생각은 없습니다, 교수님. 전 그저 아까 수업 시작할 때 교수님이 말씀하신 구절이 떠올라서 질문한 것뿐입니다.”
‘죽음은 가장 마지막에 완성하는 마법약이다.’
가이젠 교수가 말했던 잠언이었다. 실제로 루든의 지금 모습은 저 잠언에 꼭 들어맞기도 했다.
그래도 루든의 말은 너무 건방졌다. 이대로 물러나기엔, 가이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만큼이나.
“그래, 그게 용기를 가지고 뛰어들라는 뜻이긴 해. 하지만 루든 포이넨. 그 말에 있는 중의적인 의미도 읽어냈어야지. 바로 용기와 만용(蠻勇)이다. 용기에도 정도가 있는 거야.”
말을 멈춘 가이젠의 손짓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퀴닝을 향한 손짓.
그러나 이번엔 좀 달랐다. 바깥쪽으로 쳐내는 손동작이었으니까. 치유 마법을 펼치라는 뜻이 아닌, 저쪽으로 물러나 있으라는 지시였다.
퀴닝의 눈이 커졌다.
“교수님, 지금 모래가 다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까 교수님 말씀대로라면, 지금 당장 루든 생도를 치유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큰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 퀴닝도 감당하지 못할 참극 말이다.
“기다려. 보조학생이 얼마나 고집을 부릴지 좀 더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하지만…….”
교수의 날카로운 눈빛에 퀴닝은 두 사람한테서 몇 발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의자에 착석해 있던 C반 생도들은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존심 싸움을 숨죽이며 바라봤다.
사실, 몇몇을 빼고는 다 루빈의 편이었다. 다들 가이젠 교수에 대한 비호감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그렇긴 해도, 이러다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냐?”
“그냥 7단계가 아니라잖아. 사실상 20단계라는데.”
“와, 나는 5단계에서도 죽을 뻔헀는데. 20단계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물론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것과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건 달랐다. 다들 루빈의 편을 자처하면서도 이번에는 정말로 마법약이 발현될 거라고 예상했다.
‘진짜로 멍청한 애였잖아.’
달리아는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루빈을 노려봤다.
지키고 싶은 자존심. 그런 점에서 달리아는 루빈을 이해할 수 있었다. C반에서 그녀만큼 강한 자존심을 지닌 사람도 없었으니.
그러나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루빈의 저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 수 있다. 달리아가 보기에도 저 모습은, 교수 말처럼 만용이었다.
‘이제 몇 분 안 남은 거 같은데.’
루빈은 모래시계를 확인했다. 모래가 거의 남지 않았다. 이제 곧 마지막 단계의 약효가 발현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교수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마법약의 마지막 효과는 ‘질식’이나 ‘혼절’처럼 위험한 건 아니야. 다만, 꽤 답답하긴 할 거야. 당장 치유해 달라고 애걸복걸할 만큼 말이지. 치유마법학 교수를 데려오는 데 걸릴 몇 분이 영겁처럼 느껴질 텐데.”
“…….”
“그래도 겪어보겠다면, 뭐. 나도 말리지는 않지. 어쩌겠느냐?”
“해보겠습니다.”
그 말에, 가이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는 이 마법약이 어지간한 마법학 교수들도 중화시키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걸 덧붙이진 않았다.
발현되면, 치유마법학 교수도 애를 먹을 게 틀림없다.
오만함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 치르기에는 꽤 큰 비용이긴 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전도유망한 마법생도의 몸을 망가뜨린 교수라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겠지.
‘뭐, 아무리 그래도 죽진 않을 테니까. 건방진 놈.’
그러나 가이젠의 머릿속은 루빈을 뭉개주는 것에만 집착했다.
이런 집요함으로 인해 아베른 시에서의 불법 검투에 휘말리게 됐고, 그것이 결국 자신을 검은 손아귀에 빠트렸다는 걸 떠올리지 못한 채. 그는 수업을 속행했다.
“자리로 돌아가라, 루든. 어차피 발현되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교수님.”
“……?”
“이번 마법약 효과가 정확히 뭔가요?”
“하긴, 궁금하겠지.”
그러면서 가이젠은 루빈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여러 생도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무도 작은 말소리에 아무도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벅저벅.
루빈은 무덤덤한 얼굴로 자기 자리로 돌아왔고, 가이젠 교수는 교단으로 올라섰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군.”
수업이 끝나는 시점도, 모래시계의 남은 모래도 딱 그 정도 남았다.
교수는 생도들을 쭉 훑어봤다. 다들 루빈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그에게 나타날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교수도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루빈만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다.
“좋아. 시작하지. 루든 생도는 일어서서 본 수업의 교재 23페이지부터 읽어가도록.”
루빈이 교수의 말에 따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왼손으로 펼친 책을 쥐었다. 오른팔은 허리 뒤쪽에 붙인 자세.
그렇게 낭독을 시작했다.
“…마핵초는 뿌리와 줄기와 잎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중에서 잎이 결여되어도 마핵초로서의 효과는 가능하다. 그 이유는…….”
찬찬히 이어지는 루빈의 목소리가 교실을 채워 나갔다. 하지만 생도들의 눈길은 책보다는 루빈한테 더 많이 모여들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질식’이나 ‘혼절’은 아니라고 했으니, ‘하반신 마비’일까?
“…따라서, 의도적·비의도적으로 잎이 결여된 마핵초라 할지라도 마법약으로 활용될 수 있다. 다만 이럴 경우에는 잎의 역할인 시간 지연이 불가능하므로…….”
루빈은 계속 책을 읽어나갔다. 23페이지에서 시작했던 낭독은 24페이지, 25페이지로 이어졌다.
시간은 흘러갔다. 모래시계의 아랫면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오스카는 대놓고 고개를 휙휙 돌리며, 교실 뒤편에 있는 모래시계와 루빈을 살폈다.
그러다가 루빈한테 서늘한 눈길을 박아두고 있는 가이젠 교수도 한 번씩 쳐다봤다.
이윽고.
모래시계의 모래층이 모두 내려갔다. 때마침, 오전 수업의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카논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댕! 댕! 댕! 댕!
바로 그때.
“루든, 괜찮아?”
가이젠 교수를 무시한 채, 기어이 목소리를 내는 오스카. 그는 룸메이트한테 벌어질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루빈의 낭독이 멈춰 버렸으니.
“…….”
그때, 생도들 모두 가이젠 교수의 얼굴에 떠오르는 비릿한 미소를 보았다.
교수가 말했던 대로 마법이 발현된 건가?
“퀴닝 조교. 가서 너의 지도교수님을 모셔 와라. 마법약의 농도가 너무 짙어 직접 치료해야 하는 생도가 있다고 말씀드려. 발현 마법은 ‘실어(失語)’이니, 미리 준비해 오시라고 해라.”
실어. 언어 능력을 잃게 하는 마법. 단순히 혀를 묶는 게 아닌, 언어 능력 자체를 일시적으로 상실케 하는 마법이다.
그뿐 아니다. 약효가 너무 강해, 이를 경험하는 자는 마치 무저갱에 추락하는 듯한 정신적 고통을 느끼게 된다.
산채로 혀가 뽑히고 뇌가 토막 나는 듯한, 극도의 고립감에 갇히는 것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다.’
하지만.
“…현 릴리크 제국이 공인하였고, 마법약으로 구현이 가능한 마법휘식은 189개, 아니 191개인데, 이는 일정 시기마다 마법부 산하 기관에서 발표한다.”
“……!”
루빈의 낭독은 계속 이어졌다. 교실 안 모두가 똑똑히 들을 만큼, 선명한 목소리로.
“교수님, 오전 수업이 끝났습니다. 그래도 계속 낭독할까요?”
루빈은 왼손 위에 펼쳐두었던 책을 가만히 덮었다. 그러곤 얼굴이 시뻘게진 가이젠을 빤히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