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22화 (122/258)

제122화. 검은 잎 (4)

일요일, 쿠제의 서점 지하.

스스스스.

공동(空洞) 한 가운데 꽂혀 있는 핏빛서리에서는 검의 주인을 에워싸는 눈보라가 솟아 나왔다.

흩날리는 서리의 울음 속에서, 루빈의 눈빛은 한층 짙어졌다. 그의 암연이 공동 안 구석구석을 채워나간다

‘전생의 암연.’

루빈은 암연의 환을 두 개나 갖고 있었고, 지금은 전생의 암연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가까스로 5성의 경지에 도달했던 전생. 서른 살에 5성이면 둔재라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수재 또한 아니다.

황제에 의해 십수 년 안에 파멸할 가문을 지켜낼 만큼의 경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아직인가…….’

그렇게 회귀 이후까지 끌려온 전생의 환.

그러나 여전히 불안정했다. 완벽히 다루기 위해서는 현생의 환이 동일한 경지에 올라야 할 터였다.

현생의 암연은 현재 4성.

엄밀히 말해, 이것은 엄청난 경지였다. 열세 살에 4성 암연으로 올라선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암살검가의 수백 년 역사를 통틀어도 그런 사람은 드물었다. 아니, 전무했다. 당장 떠올려 보려 해도 어머니 세이렌 말고는 없는 것 같으니.

‘전생의 환 활성화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암레트에게서 가로챈 ‘기벤라트의 눈물’이 모든 걸 극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수련을 통해 성장 속도를 끌어올리는 만큼, 그를 더 높은 곳을 밀어내는 고룡의 눈물.

이게 없었다면 전생의 환을 복구하는 시점은 아무리 빨라야 스무 살이었을 거다.

‘그 너머가 내 목표다.’

전생의 환을 복구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전생의 경지를 넘어서서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것.

5성을 완전히 다스리고, 그 너머에 발을 디디는 것.

‘하지만…….’

그 순간, 루빈의 고요한 심상이 흐트러졌다.

‘텔마흐에 맞서려면 어느 정도여야 하지?’

스스스스.

불안정하게 퍼져나가는 암연만큼, 핏빛서리도 아슬아슬한 파동을 일으켰다.

텔마흐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고 있기에, 가파른 성장 속도에도 만족할 순 없었다.

최대한 빨리 6성으로 다가가야 한다. 6성 암연에는 ‘저주’가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6성의 저주 따윈… 개화될 고유 특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루빈은 바닥에 꽂힌 핏빛서리를 집었다. 자루를 감아쥐는 순간, 허공을 메웠던 눈보라가 일제히 사그라졌다.

우우우웅.

오러가 담긴 세 번째 환이 요동쳤다. 동시에 흑칠의 오러가 검신을 덮었다.

2년 전 흑색탑에 있을 땐 2성에 불과했던 브리온 오러. 성위를 늘리며 3성이 되었지만, 이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의 내가, 그때의 페르와 싸운다면.’

전쟁터 저 너머에서 광기 어린 폭주를 보여주었던 선봉장 마법사, 페르 로렌치니 또는 오스카 투니오를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이길 수 없을 거야.’

선봉장 페르는 7성의 대마법사였으니까. 지금의 루빈이라면 이길 수 없다. 단순한 경지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아직 얻지 못한, 그리고 얻어야 할 미래의 보물들이 많았으니.

검을 쥔 루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보라가 공동을 깨트릴 것처럼 폭발적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우…….”

그럴수록 마음은 간결하게 다잡았다. 회귀 전의 페르를 이길 수 없지만, 지금 오스카의 목숨을 쥐고 있는 건 루빈이었으니.

마침 기다리던 때가 온 것 같았다.

‘내일은 페르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군.’

* * *

“루빈, 수련은 끝난 거냐?”

지하에서 올라오니 쿠제와 티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티나는 민트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고양이의 모습이었다. 쿠제는 어쩐지 곤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중이다.

“도련님, 티나 님 좀 말려주시면 안 될까요? 위장 신분이긴 해도… 가끔은 정말로 책을 팔고 있거든요.”

티나는 허리를 활처럼 휘면서 앞다리를 책장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톱을 드러내며 꽂혀 있는 책들을 마구 긁어댄다.

“이러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단 말이지.”

“도대체 티나 님한테는 스트레스가 왜 쌓이는 거죠?”

“왜… 스트레스가… 쌓이느냐고…? 상당히 억울한 말인데.”

“후우, 아닙니다. 다음 방문 때는 사나운 고양이 말고, 작고 귀여운 새로 변신하는 건 어떨까요? 카나리아나 참새 같은 걸로요. 부탁드립니다.”

“냐아아옹, 그건 생각해 볼게.”

루빈은 피식 웃으며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에 쿠제가 읽고 있는 책이 들어왔다.

“루빈, 네 로이넨서가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는 것 같던데.”

“꿍꿍이라니요. 새로운 암술을 연구하는 겁니다.”

쿠제가 연구한 새로운 암술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아무리 괴짜같은 발상이어도 말이다.

“음? 근데 왠 마법서적?”

의외였다. 암술 연구에 마법서적을 참고할 일이 있나? 쿠제의 서점은 비마법서적 전문이었으니, 아마 어디선가 따로 구해 온 듯했다.

“봐봐, 꿍꿍이 맞지? 암술을 만든다면서 왜 마법서적을 보고 있냐고.”

“이건 도련님 전용 암술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마나를 지닌 암살자는 도련님밖에 없으니까요.”

“내 전용 암술?”

루빈이 관심을 보이자, 쿠제는 멋쩍게 웃었다.

“도련님, 아직은 발상 단계일 뿐입니다. 좀 더 머릿속으로 굴려보고 가능하다 싶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어, 실험체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루빈.”

루빈을 부르며 티나가 풀쩍 뛰어올랐다.

그녀는 일렬로 잘 세워놓은 책들 위에서 부주의하게 움직였다.

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책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고, 쿠제의 표정은 점점 구겨졌다.

“너, 내일 솔라나 교수 수업 맞지?”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오전 수업과 오후 수업 모두 솔라나 교수의 ‘공격마법의 이해’였다.

지금까지는 마적석과 마핵초라는 마나의 매개물과 관련된 수업이었던 반면, 내일은 직접 마나를 다루는 수업이었다.

“솔라나라면 선조 중에 엘프가 있다던 그 교수 아닌가요?”

“엘프는 무슨, 엘프의 피는 얼굴에만 흐르나 봐. 오크보다 더 호전적인 사람이라던데.”

그러면서 티나는 루빈을 향해 앞발을 휘휘 움직였다.

“솔라나 교수는 첫 수업부터 곧바로 마법대련을 시킨대.”

“마법대련이요?”

“그래, 마법대련. 괜찮겠어, 루빈?”

이미 아는 정보였다. 티나와 쿠제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루빈을 바라봤지만, 오히려 당사자는 평온했다.

“너, 마나는 형편없을 거잖아. 제대로 싸워볼 수 있겠냐고.”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5성과 4성의 암연, 3성의 오러. 그에 비해 마나는 1성이라 부르기에도 창피한 수준이었다.

“많이 아플걸?”

“그래?”

루빈은 가볍게 웃었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쿠제는 차라리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뭔가 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으니까.

“쿠제.”

“네, 도련님.”

“이제 학교로 돌아가야 해. 그러기 전에 ‘검은 잎’ 좀 줘.”

루빈은 애초에 ‘검은 잎’을 두 사람 분량으로 만들도록 했고, 그중 하나는 이미 가이젠에게 쓴 차였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검은 잎을 쓸 때가 된 것이다.

쿠제는 곧바로 지시에 따랐다. 책장 너머 숨겨진 밀실로 들어가 남은 ‘검은 잎’을 들고 왔다.

“도련님, 혹 오스카한테 쓰시려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제한 사항이 많을 겁니다.”

“맞아, 루빈. 나도 그렇게 알고 있어. 학교 마탑에서는, 마법약이든 비약이든 약물을 복용하는 걸 금지하고 있으니까.”

실제러 카포티니 마법학교 곳곳에는, 감시용 마적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역할은 외부로부터 생도들을 보호하는 것도 있지만, 마법생도들이 마도구를 오남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래서 루빈이 가이젠에게 ‘검은 잎’을 쓰기 위해 택했던 장소도 그의 실험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서는 마적석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투약이 가능했다.

하지만 내일 루빈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

그때, 티나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교실이나 교무실이라면 가능한 것 같던데. 거긴 어때?”

“티나 님, 말씀하신 두 곳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검은 잎’을 음독한 사람이 일으키는 반응을 아시잖아요.”

“음, 좀 요란하긴 하지.”

그럼에도 루빈은 모든 게 준비된 상태였다. 서점에 비치된 책들을 살펴보며 태연하게 대꾸할 뿐이다.

“괜찮아, 다 방법이 있으니까.”

* * *

월요일이 밝았다. C반의 오전 수업은 예정된 대로 솔라나 교수의 ‘공격마법의 이해’였다.

그런데 솔라나 교수는 C반의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교실이 아닌 자신의 연구실에서 수업하는 것. 그게 그녀의 오래된 방식이었다. 그녀 수업이 대개 오전과 오후로 연달아 배정된 것도 그 때문이었고.

“다들 왔어?”

생도들은 다소 긴장된 표정이었다. 솔라나 교수를 담임으로 둔 B반 생도들의 하소연을 지긋지긋하게 들어왔던 터였다.

성격이 급하고, 승부욕도 강해서 생도들을 갈아 마시는 것 같은 교수라고.

“다들 내가 에겔러 교수나 키건 교장보다 더 나이 많은 거 알지?”

생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엘프의 피가 이래서 좋은 거야. 그러니 자식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는 걸 바란다면, 너희들도 열심히 엘프의 마음을 훔쳐보도록.”

잡담은 그 정도에서 끝이었다.

또각또각.

그녀는 강당만큼 넓은 연구실에 구두 소리를 내며 걸었다.

공격마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연구마탑의 1개 층 전부가 그녀의 연구실로 쓰였다.

솔라나 앞으로, 이름 순서로 죽 늘어선 생도들. 그녀는 쭉 걸어 나간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일단 오전 절반은 이론 수업을 할 거야. 그다음은 이론을 토대로 반복 훈련이 있을 거고.”

“오후 수업에는 뭘 하나요?”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한 건 클로이였다.

솔라나 교수답지 않게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법천재로 소문난 클로이와 수업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렸기 때문이다.

“아, 클로이 위더스푼 생도는 아직 모를 수도 있겠구나. 전통적으로 내 수업의 오후 시간은 대련이야, 마법대련.”

클로이가 말똥말똥 교수를 쳐다보았다. 클로이가 생각하기엔 다소 빠른 전개로 보였을 게 분명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마나선을 처음 그려보는 생도도 있을 텐데, 곧바로 마법대련이라니.

그런 의문을 짐작한 솔라나 교수는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설명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설명도 건너뛸 그녀였지만, 저 아이는 제국귀족이니 막 나갈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실전 위주거든. 마법대련을 하면서 몸으로 익혀나가는 거지. 걱정할 거 없어. 대련장의 마법방벽도 견고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일단 이론 수업부터 진행해 보도록 하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솔라나의 조교가 낑낑거리며 바퀴 달린 큰 칠판을 밀어왔다.

삼십 대로 보이긴 해도 노교수였기에 이런 옛스러운 칠판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우선은… 마나선의 개념부터 잡아보도록 하고, 그다음에는 공격마법의 기본 개념을 이어가도록 하지.”

수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그야말로 일목요연. 솔라나의 강의법은 ‘이론은 간략하게, 실전을 풍부하게’였다.

사실, 이건 삼휘 마법사들로서는 최적의 수업 방식이긴 했다.

원휘나 모휘는 한정된 마법가문들이 선천적인 마나의 환을 지닌 채로 태어나기 때문에, 어찌 보면 그 출발선이 동일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삼휘 마법사가 지닌 마나의 환은 후천적인 발현이었던 터라, 그들 수준은 제각각이었다.

어느 한 사람에 기준을 맞추기보다는, 실전을 중시하면서 개인의 역량을 맘껏 펼쳐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았다.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 못 해도, 실전으로 감각을 익히면 되니까.”

솔라나 교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너희를 세 분류로 나눌 거다. 우선, 마나선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으며 원소 마법을 다룰 수 있고, 또 시전 가능한 마법의 수가 열 개가 넘는 사람? 이쪽으로.”

교수는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여 생도들을 상급, 중급, 하급으로 나누었다. 클로이, 달리아, 오스카는 당연하게도 상급으로 향했다.

“루든 포이넨?”

“네, 교수님.”

“정말 하급을 선택한 거야?”

‘솔라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루빈이 마법약 제조학에서 가이젠 교수와 경쟁 아닌 경쟁을 펼쳤다는 소문은 교수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그 정도의 저항력이라면, 당연히 상급일 줄 알았는데.

‘겸손을 떨고 있거나, 베니테즈 교수가 말 그대로 ‘원석’ 자체를 골랐던 거거나. 둘 중 하나겠지.’

이후 시작된 반복 훈련.

생도들은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 ‘화염구’의 휘식을 그려나갔다. 화염구라면 기본적인 공격마법 중 하나였다. 마나 소모도 가장 적은 데다가, 휘식도 단순했다.

‘달리아는 역시… 델린 가문답게 괜찮네.’

솔라나는 눈여겨보던 생도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살폈다.

달리아는 보란 듯이 화염구를 수십 개 띄워놓았다. 화염구는 달리아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를 따라다녔다. 화염구를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클로이는… 뭐, 말할 것도 없겠고.’

솔라나 입장에서 달리아보다 놀라운 건 단연 클로이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위이이잉.

클로이가 띄워놓은 화염구는 하나였다. 달리아처럼 수를 늘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단 하나의 화염구의 크기를 조작했다.

클로이의 화염구는 작은 모래알만큼 작아졌다가, 칠판 두세 개를 합친 것만큼 커지기도 했다.

휘식 운용의 관점에서는, 마법 하나를 발현해놓고 그 상태를 변환하는 것이 마법을 연달아 펼치는 것보다 높은 단계였다.

‘그런데 얘는 이거밖에 안 됐나?’

루빈을 본 그녀 얼굴에 실망감이 배어들었다. 역시 마법약 저항력과 마나의 수준은 별개로 보아야 하나.

루빈은 화염구 하나조차 제대로 띄우지 못하고 있었다. 만들어내는 것부터 안정적이지 못하니 방향을 정해 사출시키는 건 가당치도 않았다.

솔라나는 고갤 가로젓곤 교탁을 탁탁 두드렸다.

“점심시간이다. 오후엔 곧바로 마법대련이 있으니까 잊지 말고. 다들 적당히 토하지 않을 만큼만 먹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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