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24화 (124/258)

제124화. 각성의 사슬 (1)

쿵.

오스카가 쓰러졌다. 핏빛서리가 만들어냈던 얼음회오리도 점차 흩어지면서, 대련 현장이 훤히 드러났다.

“어… 루든이 이겼어?”

“오스카가 진 거야?”

“엥? 진짜?”

다들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상황을 제대로 알아차린 사람이 없어 보였다.

갑자기 생겨난 얼음회오리가 오스카의 ‘물의 탄환’을 얼려버렸다. 그러나 생도들 눈에는 전부 오스카가 시전한 마법처럼 보였을 터. 루빈의 소행이라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핏빛서리가 일으킨 얼음회오리가 시야를 차단하면서, 대련장 상황을 볼 수 없게 만든 덕이었다.

-일단 기절은 시켰고, 이제 어쩔 텐가?

하네케의 물음이었다.

루빈이 어째서 오스카를 대련 상대로 정했고 이런 식으로 대련을 마무리 지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검은 잎’을 주입할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거였겠지.

하지만 교내에서는 단순한 마법약조차 복용할 수 없도록 통제되어 있는데, 어쩌려는 건지 의문이었다.

-물론 교실에선 마법약 복용이 가능하다지만……

지금처럼 모든 생도가 지켜보는 한가운데서 행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때, 솔라나 교수가 끼어들면서 루빈의 대답이 미뤄졌다.

하네케는 잠자코 기다렸다. 곧 루빈의 계획이 무엇이고, 어떻게 풀어나가려는지 알 수 있을 테니.

“기절했네?”

대련장 안으로 들어온 솔라나 교수는 별거 아니란 태도로 오스카를 흔들어보았다.

그러고는 그가 입고 있는 대련용 갑주를 확인했다. 원래대로라면 마법에 따른 타격을 감지하자마자 방어 마법이 발현됐어야 했는데.

“조교, 갑주들 죄다 확인해 봐. 오작동이라도 있었는지.”

“네, 교수님.”

“흠… 얘를 어쩐다?”

정신을 잃긴 했지만, 부상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공격마법학 교수답게 기초적인 치유마법 정도는 알아두고 있는 솔라나였다.

자기가 치유하면 그만이긴 하다만.

교칙이 문제였다.

“별일 없을 것 같아서 퀴닝을 안 불렀더만…….”

수업 중 마법생도가 부상당할 경우에는, 무조건 치유마법학 조교나 교수가 확인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루든? 얘 업고 따라와. 조교, 생도들 좀 통제하고 있어.”

루빈은 솔라나가 시키는 대로, 축 늘어진 오스카를 업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또각. 또각. 또각.

솔라나는 빠르게 걸었다. 루빈이 사람 하나를 업고 있다는 사실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듯이.

그러다가 냉담한 얼굴로 슬쩍 뒤를 보더니, 땀도 한 방울 맺히지 않은 루빈 모습에 어깨를 으쓱였다.

“루든 포이넨, 네 녀석이 마도무인인 줄은 몰랐는데. 의외야.”

“…….”

-흠, 솔라나도 자넬 마도무인이라 생각하는군.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도 아니지.

루빈을 대신하듯, 하네케가 끼어들었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솔라나에게 전달되지 않았지만.

‘오해할 만하죠. 저들에겐 그것 말곤 납득할 만한 거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마도무인.

누구에게나 환은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텅 빈 환을 지닌다면, 누군가는 오러의 환으로써 무인이 되고, 다른 누군가는 마나의 환으로써 마법사가 된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하나의 환에 두 개의 힘이 함께 담기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을 지칭하는 말이 바로 마도무인이었다.

‘베니테즈 교수는 이 아이가 마도무인이라는 걸 알고 선점했던 건가? 마도무인은 한계가 있다는 걸 알 텐데?’

솔라나 교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생각했다.

오러와 마나를 전부 가진 자, 마도무인, 이들 존재는 엄청난 파란을 일으킬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최대 용량이 정해진 하나의 환에, 두 개의 힘이 난립하는 셈이었으니. 오러나 마나, 어느 쪽으로도 정상에 서기 힘들다는 건 자명했다. 마법사로도 무인으로도, 애매한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단순 용량 문제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운용 방식의 차이다. 마나와 오러는 전혀 다른 힘이니만큼, 운용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평범한 마법사, 무인들에 비해, 마도무인은 능숙하게 운용하는 데까지 두 배의 노력이 드는 셈이었다.

어쨌든.

‘마법사 사회에서도, 무인들 틈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게 바로 마도무인인데…….’

하지만 또 모르지.

한계를 뚫고 이름을 떨치는 마도무인이 될지도. 예컨대, 환의 용량 자체가 굉장히 큰 자들. 그리고 남들보다 빠르게 운용법을 익히는 자들. 이른바 천재들 말이다.

카포티니 역사를 헤집으면, 그런 인물이 한두 명쯤은 나오니,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루든이 그래 보이진 않지만.’

얼음회오리가 갑자기 시야를 가로막기 전까지 지켜봤던 루든의 모습은, 그런 천재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스카의 마법을 피하는 것만 보면 움직임은 날렵한 것 같다만. 뭐, 그것만으로 판단하기엔 한계까 있었다.

‘대체 어떻게 쓰러뜨린 거지?’

직접 보지 못한 부분들을 상상으로 채워 루든을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 솔라나는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세한 건 오스카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뭐.’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어떤 상황이었는지 대충은 추측할 수 있었다.

물의 탄환을 얼음으로 얼리는 과정에서, 오스카의 마법이 뒤엉킨 것이다. 4원소 공격마법에 이어 얼음계열 마법까지 연속해서 시전했으니, 신입생도로서는 무리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스스로에게 과부하를 준 것이지.

거기다 마도무인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도 몰랐을 테니, 충분히 루든이 이기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이게 정답인 것 같았다.

‘따로 물어볼 필요는 없겠군.’

여기까지가 솔라나가 가진 상식의 한계였다.

이 세상엔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이 있고, 오직 그들에게만 계승되는 고유의 힘 있으리라는 건, 그녀로선 꿈에도 모를 테니.

-그나저나, 루빈. 페르를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알고는 있나?

하네케는 궁금한 듯했다. 루빈의 계획이 어디까지 짜여 있는지 말이다. 대장군답지 않은 호기심에, 루빈은 씩 웃었다.

‘걱정되십니까? 수가 틀릴까 봐?’

-아니, 그건 아니네만. 그냥 궁금해서. 난 당연히 치유마법학 교수를 부를 거라 생각했거든.

물론 그게 일반적인 절차이긴 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떤 ‘특수한 상황’이 겹쳤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직접 부상자를 옮기는 것이었다.

‘직접 마법치유실로 가는 겁니다.’

-마법치유실?

‘네.’

솔라나에게 묻지도 않았으면서, 루빈은 지금 향하는 곳이 마법치유실이라는 걸 확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왜? 직접 교실로 부르면 되지 않나? 마법치유학 교수나 조교 말이네.

‘카포티니 마법학교의 교칙 때문이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마법치유실을 비울 수 없다’는 교칙이요.’

-음, 그 말은……

‘마법치유학 교수는 지금 부재중이거든요. 그러니 조교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죠.’

-오호. 그런 정보까지 미리 알고 있었군?

하지만 그렇게 물었던 하네케는 금방 생각을 바꾸었다. 그저 ‘알고만 있었던 게’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혹시… 자네가?

애초에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가 아는 루빈은, 어떻게든 최적의 상황을 만들고도 남을 녀석이니까.

또각. 또각.

때마침 도착한 마법치유실.

솔라나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며 짜증스레 외쳤다. 그녀의 시선은 마법치유학 교수 브첸코의 텅 빈 의자를 향하고 있었다.

“브첸코는 왜 하필 이런 날 자리를 비운 거지?”

“헙, 솔라나 교수님!”

지도교수가 없는 날, 마음 편히 마법치유실이나 지키고 있으려던 퀴닝이 헐레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슨 월요일부터 여는 학회가 있다는 거지?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퀴닝?”

“네? 아, 저도 전서구로 학회 초대장을 받는 건 처음 보긴 했습니다만.”

“뭐, 전서구? 이거, 건수 잡고 놀러 간 거 아냐?”

퀴닝은 머리를 긁적였다.

“대련용 갑주가 있으니까, 그러니 공격마법학 수업은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하시긴 했는데요.”

“문제가 없긴.”

솔라나는 뒤에 서 있는 루빈을 가리켰다. 그제야 퀴닝은 환자를 업고 있는 루빈을 발견했다.

“기절한 애 하나 있으니까, 좀 봐줘.”

“어, 오스카 투니오 생도네요? 마법 대련 하다가 부상 입은 건가요?”

“응, 심각한 건 아니고.”

서둘러 오스카를 환자용 침대로 이끄는 퀴닝. 침대에 눕히고 곧바로 상태를 진단했다. 피이이잉. 그녀의 두 손에서 잠시 빛이 발했다.

“…교수님 말씀처럼 심각하진 않네요.”

그때, 루빈의 내면에서 하네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전부 다 일부러 한 건가?

‘당연하죠.’

-영악하구만, 영악해.

어째서 루빈이 양호실엘 온 건지 뒤늦게 깨달은 하네케는, 혀를 끌끌 찼다.

오스카에게 ‘검은 잎’을 주입하기 위해, 루빈이 어떻게 판을 짰는지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얼른 치료해 줘, 데려가게.”

“저… 그게, 불가능합니다. 솔라나 교수님.”

“왜?”

“치유마법학 교수님이 교내에 없을 땐 조교는 자의적으로 치유마법을 쓸 수 없거든요.”

“진짜야?”

“…네. 제가 아직 학위가 없어서요. 위급 상황일 땐 가능하지만, 보다시피 지금은 위급 상황이 아니기도 하고…….”

“그러면 얘는 어떡해?”

“규정상으론 지금 할 수 있는 건 마법약 수액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당장 깨우는 게 아니라, 그냥 마나 흐름만 부드럽게 해주는 마법약이고요.”

“흠, 시간 좀 걸리겠네?”

“네, 수액을 맞는 데만 30분 정도?”

솔라나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여기서 오스카가 스스로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마법 대련이 밀려 있으니, 퀴닝에게 맡기고 가보는 수밖에.

“퀴닝, 부탁하지. 루든, 너도 여기서 지켜보고 있어라. 난 내려가서 수업을 계속 진행할 테니.”

“예, 교수님.”

루빈은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솔라나는 곧바로 구두 소리를 울리며 복도로 나섰다.

그렇게 솔라나 교수가 돌아간 뒤, 퀴닝은 오스카에게 투여할 수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치유실 한쪽 벽에는 약품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각종 마법약이 비치된 곳인데, 당연하게도 인가받은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고차원 결계 마법도 설치된 곳이었다.

“…….”

약품실에서 퀴닝이 수액을 준비하는 동안.

루빈은 묵묵히 오스카를 쳐다봤다. 여전히 암연으로 오스카의 숨결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오스카는 아까라도 정신을 되찾았을 것이다.

-마법치유실이군. 학교 내에서 약물을 사용할 수 있는 곳 중 하나.

‘맞습니다. 교실이나 실험실도 가능하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심문할 순 없잖아요.’

-영리해. 그럼 저 조교는 어쩔 셈인가? 계속 버티고 있을 텐데.

그때, 약품실에서 수액 준비가 끝난 퀴닝이 다가왔다. 그녀는 수액을 걸어두고, 튜브관이 연결된 주사를 오스카의 팔뚝에 찔러 넣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루빈은 대답하는 대신, 시계를 쳐다봤다. 때마침 시곗바늘이 정확히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따르르르.

퀴닝 책상 위에 있던 조그마한 시계가 울어댔다. 시각을 확인한 퀴닝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차차, 잊고 있었네.”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말이죠, 실은 입원해 있는 고학년 생도들을 살펴볼 시간이거든요. 흠, 어쩌지?”

고학년들의 수업엔 위험한 요소가 많았다. 각종 위험한 마법실험부터, 마법생물체들을 돌보는 일 등. 수업 중 으레 입원 생도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입원 병동은 마탑 상층부에 있었고, 매일 오후 두 시, 치유마법학 조교가 입원환자들의 상태를 살피고 기록하기 위해 올라갔다.

루빈이 일부러 가장 먼저 마법 대련을 한 이유였다.

“아, 오스카 때문에 그러시죠?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괜찮겠어요, 루든 생도?”

“어차피 통신석 가져가실 거잖아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루빈은 태연하게 말했다. 퀴닝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입원 병동을 살피러 가는 일은 ‘특별한 이유’에 포함되니, 교칙 위반도 아니었다.

“그럼, 잠시만 부탁할게요. 어차피 30분 안에 돌아와요.”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루빈은 상냥한 미소까지 보여주며 퀴닝을 안심시켰다.

그녀가 예상보다 일찍 돌아온다 해도, 그건 ‘검은 잎’으로 페르와 대화를 나눈 다음일 터.

만약을 대비해 퀴닝의 접근을 막을 티나까지 대기시켜 놓은 뒤였다.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일말의 의심도 없이, 퀴닝은 서둘러 다녀올 채비를 했다. 그동안 루빈은 준비해 두었던 ‘검은 잎’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쿵.

문이 닫혔다.

초침 소리만 울리는, 고요한 치유실 안. 이제부터는 방해가 될 만한 사람조차 없다. 루빈은 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수액을 뜯고 수액통을 기울였다. 검고 농밀한 ‘검은 잎’이 전부 쏟아졌다. 이윽고, 수액이 새롭게 떨어지는 소리가 겹치기 시작했다

똑. 똑. 똑…….

루빈은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검은 잎’을 바라보며, 그것이 튜브관을 타고 오스카의 몸속으로 제대로 들어가는지 확인했다.

“…….”

부르르르.

순간적으로 오스카의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러나 아직이었다. ‘검은 잎’이 더 스며들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오스카의 내면 깊숙이 번지는 어둠.

그리고 그 안에서 창궐하는 공포.

드디어 오스카가 아닌, 페르 로렌치니로서 마주하게 될 마법사.

문득, 지난날에 마주했던 페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핏빛으로 가득했던 파괴적인 마법들. 그 섬뜩한 기억에, 루빈은 지금 오스카가 그러하듯, 자기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오스카 투니오.”

준비가 끝났다. 루빈은 누워 있는 오스카를 일으켜 앉힌 다음, 명령했다.

“네 이름을 말해. 너의 본명을.”

“…페르 로렌치니.”

역시 맞았군. 만에 하나, 오스카가 페르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그였다. 의심이 씻은 듯 사라졌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검은 잎’의 시간.

루빈은 알고 싶었던 진실을 하나씩 확인해 나갔다. 가장 먼저 할 질문은.

“로이넨가에 대해 알고 있나? 암살검가에 대해선?”

이윽고 페르의 입이 열리며, 루빈을 깜짝 놀라게 할 대답이 비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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