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각성의 사슬 (3)
페르의 아버지를 살리고, 페르를 대마법사로 만들겠다. 암살검가가 아닌, 황제를 겨누는 대마법사로.
이런 다짐과 함께, 루빈은 페르 로렌치니를 바라봤다. 어느덧 ‘검은 잎’의 효능이 끝나가고 있었다.
-엔조가 칙명부 관리하에 있다고 확신하나?
“거기 말곤 달리 있을 곳이 없어요.”
-그를 칙명부에게서 빼내려면,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할 텐데…….
침음을 흘리며, 하네케가 지적했다.
지금 페르의 아버지, 엔조는 숨은 상태다. 페르를 찾아내기 힘들었던 것처럼, 엔조를 찾아내는 것 역시 쉽지 않을 터.
게다가 상황은 긴박했다. 칙명부가 페르의 잠재력을 알아보는 그 즉시, 엔조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의 죽음을 암살검가에게 뒤집어씌울 수단 또한 이미 준비되어 있을 테지.
하지만 하네케가 보기에 루빈은 여유롭기만 했다. 무슨 수라도 있는 것인지.
-자네, 엔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군.
‘대충은요.’
지금 이 순간, 엔조는 칙명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 루빈은 중요 인물을 대하는 칙명부의 방식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엔조는 그들에게 꼭꼭 감춰야 하는 존재예요. 엔조를 안심시킬 수 있고, 그들이 원할 때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그런 곳에 있을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죠.’
-그게 어디지?
루빈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루빈의 추측이 맞는지는 곧 알게 될 테니. 다만, 그 전에 페르에게서 알아내야 할 게 하나 있었다.
증표.
각자 흩어져 숨은 둘 사이에는 분명 그들만의 증표가 있을 것이다.
엔조를 찾아낸다고 해도 그가 루빈의 말을 믿을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칙명부가 ‘각성의 사슬’을 노리고 있다고 말해봤자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
엔조를 설득할 둘만의 증표를 확보해야 했다.
“페르.”
“…….”
“오랫동안 도망자 신세였단 걸 잘 안다. 아버지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경계하며 살아왔을 거야. 그렇지?”
“…….”
“그러니 언젠가 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 서로를 보증할 증표가 분명히 있겠지. 그게 뭔지 알려줘.”
그러자 피이이잉, 소리와 함께 페르의 얼굴 앞으로 뭔가가 나타났다.
마나선이었다. 다만, 마법을 발현하는 휘식으로서의 마나선은 아니었다.
페르의 마나선이 특정한 문양 하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일종의 서명과 같았다. 루빈은 그 문양을 기억에 담았다.
“…슬슬 끝나가는군.”
‘검은 잎’이 흐릿해지면서, 음독 상태가 끝나가는 중이었다. 페르가 그린 마나선 문양도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심문을 끝낼 때였다. 루빈은 페르의 어깨와 허리에 두 손을 얹은 다음, 그를 조심히 눕혔다.
“깨어날 때까지 좀 편안히 있어라.”
페르가 알아서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심문할 수도 있었지만, 그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 순간부터 페르는 제거 대상이 아닌, 함께 황제의 목을 겨눌 동료였으니.
때마침, 펼쳐두었던 암연의 영향력 안에 퀴닝이 들어왔다. 루빈은 서둘러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 * *
오스카가 깨어난 건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난 뒤.
“오스카 생도? 괜찮아요?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어요?”
“퀴닝 조교님, 저, 물 좀…….”
오스카는 퀴닝이 건넨 물을 입으로 가져가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사이, 퀴닝은 마법을 통해 오스카의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어라, 마나 상태가 아직도 불안하네요? 수액을 맞았는데도… 이상하네. 금방 깨어날 것 같았는데 시간도 꽤 걸렸고.”
마법약 수액은 도중에 버려지고, 대신 ‘검은 잎’이 채워졌으니 당연했다. 갸웃거리는 퀴닝을 향해 오스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요. 조금씩 호전되는 것 같아요.”
퀴닝이 보기에도 그랬다. 진단하면서 느꼈지만, 오스카의 마나의 환은 꽤 견고했다. 덕분에 깨어나자마자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었다.
오스카는 아직 무거운 머리를 마구 흔들어보고는,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엄청 이상한 기분이에요.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을 꾼 것 같아요. 기억은 안 나는데…….”
“마법 대련 중 기절이 처음이라면, 그럴 수 있어요. 조금 더 있다가 점호 전에만 기숙사로 돌아가면…….”
“조교님! 지금 몇 시죠?”
오스카는 퀴닝의 말을 잘라내며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 오후 다섯 시요. 공격마법학 수업은 이미 끝났어요.”
“다섯 시? 휴, 저녁 식사 놓친 줄 알았네.”
안도하던 오스카는 갑자기 눈에 힘을 주었다.
“근데 사기꾼 룸메이트는 아직 안 왔나요?”
“사기꾼 룸메이트? 아, 루든 생도요. 오스카를 업고 온 게 루든 생도예요.”
“설마 의리 없이 그냥 가버린 건가요? 자기가 기절시켜놓고!”
퀴닝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바깥에 나가 있어요. 좀 전에 클로이 위더스푼 생도가 왔었거든요. 아마 둘이 테라스에 있을 거 같은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스카는 침대에서 일어나 후다닥 뛰쳐나갔다. 퀴닝 말대로 두 사람은 음료수 하나씩 들고 마탑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배신자, 사기꾼!”
“깨어났네?”
“마도무인인 걸 이제까지 숨겼냐?”
대뜸 소리치던 오스카는 급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엔 클로이도 있었지. 바보 같은 말실수였다. 루빈은 자신이 마도무인이라는 걸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루든, 미안…. 소문내려는 건 아니었는데. 클로이, 그게 말이지.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이 뭐냐면…….”
그러자 클로이가 쾌활하게 말했다.
“나도 알아! 루든이 마도무인이라는 거잖아?”
“어, 어? 알고 있었어, 원래부터?”
“응. 너희 둘이 대련할 때 느꼈거든.”
루빈 역시 클로이라면 알아봤을 거라 생각했던 터였다. 어쩌다 보니 정체를 들킨 것도 같지만, 개의치 않았다.
차라리 마도무인으로 받아들여지는 편이 나았다. 마도무인이라 하면, 마법사로서의 성장 한계가 뚜렷하니까.
가뜩이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 특히 셀레스네를 좀 안심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 맞아, 오스카!”
“응?”
“축하해!”
어리둥절한 얼굴의 오스카. 뒤이어 클로이 입에서 나온 건, 그를 즐겁게 해줄 만한 소식이었다.
“너, 엄청난 인기인이 됐는걸?”
“뭐? 내가?”
사실, 이제까지 오스카의 엄청난 자질을 알고 있던 건 루빈뿐이었다. C반 생도들 대부분 오스카를 그냥 수다스러운 놈으로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마법 대련으로, 오스카에 대한 다른 생도들의 인식이 확 달라졌다.
“진짜로?”
“응, 다들 네 얘기만 하고 있어. 너한테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애들도 많던데?”
“오오호, 이런… 나는 그냥 기초마법만 보여줬을 뿐인데.”
그동안 루빈의 말에 반신반의했던 클로이마저 오늘 일로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기초마법이었다고 해도, 네 개의 원소계열을 그토록 유연하게 다루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대련장을 수놓은 그 얼음회오리는 또 어떤가. 사실 루빈의 핏빛서리가 이루어낸 마법이었지만, 그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오스카 본인조차도, 자기도 모르게 우연 혹은 실수로 시전된 마법이라 착각했으니.
실제로도 간혹 그런 일이 일어나곤 했다. 각기 다른 마법 휘식을 연속해서 빠르게 시전하다가, 휘식이 꼬여 전혀 다른 마법이 시전된다든지 하는 실수들.
어쨌든, 클로이는 위더스푼가의 영애로서 오스카의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좀 놀랐는걸?”
“어, 그 말은 설마?”
“설마?”
“너도 다른 여자애들처럼 나한테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뜻?”
한껏 오만해진 오스카를 바라보며 클로이는 눈을 끔벅거렸다. 인정할 건 인정한다지만, 그래도 오해는 짚어줘야 했다.
“헤헤, 미안하지만 그런 뜻은 아니야. 그리고 혹시 나중에 실망할까 걱정돼서 하나 더 짚어주자면…….”
다음 말이 기대된다는 듯 두 눈을 치켜뜨는 오스카에게, 클로이는 방긋 웃어주었다.
“너한테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친구들 중에 여자애는 없었어.”
“뭐라고! 말도 안 돼…….”
잔뜩 풀이 죽은 오스카의 어깨를 다독이며, 그녀가 위로하듯 덧붙였다.
“대신, 오스카 너랑 정식으로 마법 대련을 해보고 싶어졌어. 오늘 보여준 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게 느껴졌거든.”
클로이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응하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대련실을 빌릴 작정으로 보였다.
“아…….”
오스카는 부담스러움과 영광스러움 사이 어디쯤의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국귀족, 그것도 위더스푼가의 영애와 마법 대련이라니!
그렇게 두 감정 사이에서 한참을 줄다리기하다가 결국엔 부담스러움이 승기를 잡았는지, 오스카는 그냥 멋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 그런데 클로이. 넌 대련 어떻게 됐어?”
“나? 벌점 받았어.”
“벌점? 그럼 진 거야? 네가? 누구한테?”
클로이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지만, 대련에서 진 얼굴은 확실히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니, 진 건 아니고…. 실수로 마법방벽을 부숴버렸거든.”
이후, 세 사람은 마탑에서 내려와 교정을 산책했다.
기숙사 랩소디관 쪽으로 걸어가다가 셀레스네와 마주쳤다. 그녀는 마침 클로이를 찾던 중이었다.
“아가씨, 여기 계셨네요.”
셀레스네는 클로이 옆에 있는 루빈과 오스카를 발견하곤 간단히 예를 표했다.
“솔라나 교수님은 만났어?”
“네, 그분과 함께 학교 행정직원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셀레스네는 대련장의 마법방벽을 부순 클로이 때문에 학교에 온 것이었다.
학교 측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셀레스네는 강요하다시피 밀어붙여 배상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루든, 오스카. 심심하면 이번 주말에 내가 있는 별장에 놀러 오지 않을래?”
기숙사가 가까워질 무렵, 클로이가 제안했다.
오스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루빈을 쳐다봤다. 루빈이 응하지 않으면, 절대 혼자서는 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 돼, 이번 주말엔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야야, 주말에 무슨 일! 나도 한번 가보고 싶었단 말야, 위더스푼의 영애께서 지내는 별장.”
“미안, 오스카. 어쩔 수 없어. 다음에 가도 되지, 클로이?”
클로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거절당한 것은 그녀였지만, 셋 중 가장 상처받은 사람은 오스카처럼 보였다.
이윽고, 갈림길이 나오면서 루빈과 오스카는 기숙사 쪽으로 빠졌다.
“배신자, 사기꾼.”
오스카는 오늘 자신이 패배한 것보다 클로이 제안에 응하지 않은 게 더 억울한 것 같았다.
그에겐 아쉽겠지만 어쩔 수 없다. 오스카의 아버지를 구출하려면 하루라도 서둘러야 했다.
평일에는 수업 때문에 도시를 벗어날 수 없으니, 그나마 가장 빠른 게 이번 주말이었다.
‘일단 지도부터 확인해야겠군.’
오스카가 주저리주저리 하소연을 이어나갈 때, 루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틀 후.
루빈은 저녁마다 쿠제의 서점으로 가 지하 공동에서 수련을 이어나갔다. 그러는 틈틈이 주말에 있을 구출 계획을 정비했다.
“후, 티나 님?”
루빈이 지하에서 수련하는 동안, 쿠제는 루빈이 지시한 대로 특정 도시들의 지도를 추려놓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미어캣으로 변신한 티나가 산만하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심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제발 가만히 좀…….”
“어라, 지도잖아! 베야네그로… 트레스덴…….”
티나는 쿠제의 어깨에 올라타서는 두 눈을 반짝이며 지도를 내려다봤다.
베야네그로는 카포티니에서 가장 가까운 거점창고가 위치한 대도시였다. 페르에게 사용한 ‘검은 잎’의 재료들도 모두 그곳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우리, 드디어 카포티니 좀 벗어나 보는 거야?”
“주말 동안만입니다. 그리고…….”
뜸을 들이는 쿠제의 태도에, 티나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설마, 나 또 안 데려가려고? ”
“도련님이 지시하신 겁니다. 티나 님께서는 저희가 없는 동안, 이곳에서 아주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우와, 정말? 흥분되는걸? 열심히 할게!’라고 할 줄 알았냐?”
미어캣 티나는 쿠제를 향해 위협적인 송곳니를 드러냈다.
미어캣이 원래 송곳니를 드러내는 동물이었나, 잠시 생각하던 쿠제는, 곧 정신 차리곤 변명했다.
“…흠, 혹시라도 로젠탈러가 도련님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를 대비해서 티나 님이 카포티니에 남아 있으셔야 합니다.”
“루빈으로 변신해서 대충 둘러대라는 거군?”
암살검가의 암살자들은 어디까지나 칙명부의 관리 대상이었다. 로이넨서와 살아가며 교육을 받는 자제들이라 해서 예외일 순 없었다.
관리요원의 승인 없이는 시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티나가 남아 루빈 역할을 해줘야 했다.
“이걸 보시면, 티나 님도 여기에 남는 게 더 낫겠다 싶을 겁니다.”
쿠제는 지도 하나를 골라 티나에게 건넸다. 베야네그로와 근접해 있는 트레스덴의 지도였다.
“도련님이 따로 구해놓으라고 하셔서, 거점창고에서 오늘 받아놓은 겁니다.”
그건 단순한 트레스덴 지도가 아니었다. 도심뿐만 아니라, 도시 외곽에 있는 ‘협곡 감옥’까지 나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협곡 감옥’의 간수 전용 지도였다. 암살검가 거점창고에서라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지만, 왜 루빈이 이걸 필요로 하는지는 가늠되지 않았다.
“미친.”
그걸 알아본 티나는 얼른 송곳니를 감추곤 질색했다.
“우리 도련님께서 나들이 계획을 제대로 짜고 계셨네. 제국의 1급 감옥까지 관심을 갖고 말이야. 나는 그냥 여기서 로젠탈러랑 연극 놀이나 해야겠다. 쿠제, 조심히 다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