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27화 (127/258)

제127화. 각성의 사슬 (4)

금요일,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루빈과 쿠제는 카포티니를 나섰다.

한밤의 밀행이었다. 카포티니에서 충분히 멀어진 이후부터는 말을 구해 쉬지 않고 내달렸다.

덕분에 날이 밝아올 즈음, 베야네그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웅성웅성.

베야네그로는 이른 시간부터 활기로 가득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노랫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상업이 번성한 도시 특유의 생기에다가 축제의 열기마저 더해졌던 것이다.

“하필 저희가 올 때 축제가 있군요.”

1년마다 열리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축제로 인해 밀행은 더 안전해진 셈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점창고 관리자가 그만큼 그들을 발견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관리자에게 전언을 보내놓긴 했는데… 늦지 않게 찾아올지 모르겠군요.”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두 사람은 베야네그로 거점창고의 위치를 알지 못했다. 그건 두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임무 수행 중인 암살자 역시 똑같았다.

반출품은 도시 어딘가에서 접촉하여 인계 받는 식이었으니까. 그들 쪽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두 사람은 시장 구역으로 들어갔다. 인근 도시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갖가지 특산물들을 늘여놓고 행인들을 불러대는 중이다.

“저 멀리 트룸벨에서 가져온 고급원단이 있습니다!”

“제도에서만 구할 수 있는 책 팝니다!”

시장에는 상인들만 많은 게 아니었다. 시장을 오가는 동안 휙휙 지나쳐가는 암연이 하나둘이 아닌 걸 보니, 암살검가 사람들도 많이 섞여있는 듯했다.

‘역시 거점창고가 있는 도시답네.’

그들 각자의 동선이 사방으로 얽히다 보니, 암연만으로는 정확히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쿠제.”

“네, 도련님.”

“여기에 있자.”

“여기서요?”

어느 포목점 앞에서, 루빈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도련님이 뭔가를 알아챈 걸까? 쿠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포목점 주인? 쿠제는 너부데데한 포목점 주인을 쳐다봤지만, 그는 아니었다. 암연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우당탕탕! 근처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동이 일어났다.

루빈으로부터 불과 2미터. 남자 둘이 뒤엉켜 주먹다짐을 벌이고 있었다. 살기가 등등해서 예사 싸움은 아닌 것 같았다.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포목점 주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싸우는 저 둘은 각각 이곳에 터를 잡은 용병단과 상단 소속이었다. 붉은 두건을 쓰고 있는 자가 용병단에 속한 자였고, 푸른 팔목대를 한 자가 상단 소속.

“저치들만 저렇게 으르렁대는 게 아닙니다. 저 용병단이랑 상단은 허구한 날 싸워대니까요. 가끔 사람도 죽어나가요. 보아하니, 오늘도 사람 하나 죽어나가겠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쿠제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일반인의 눈에는 죽일 듯한 싸움이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저들의 정체는 그들이 감추지 못하는 암연에 드러나 있으니까.

“…도련님. 아무래도 저 두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쿠제의 머릿속에 또 다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 어쩌면 두 사람 다일 수도 있겠군요.”

“아냐.”

“네?”

그러면서 루빈의 눈길이 향한 곳은 다른 쪽이었다. 싸움 구경을 위해 모여든 상인들과 행인들을 헤치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리가 있다.

두 사람의 귓가에 포목점 주인이 내쉬는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휴, 다행이네요. 저치들을 다잡는 분이 오셨네요.”

“다잡는 분?”

“팰리스틴가의 자제이십니다. 이 도시에서는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이죠. 용병단도, 상단도 저 가문 앞에서는 온순해지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을 헤치며 나타난 청년이 싸움 현장에 끼어들었다. 갖가지 욕설까지 섞어가며 주먹을 내지르던 두 사람을 움찔하게 하는 호통과 함께.

“이것들, 어디서 소란을 벌이느냐!”

청년의 한마디와 함께 소동은 종료. 루빈은 쿠제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보기엔 셋인 것 같은데.”

용병단, 상단만이 아니다. 지금 나타난 저 귀족 자제에게도 암연이 느껴졌다.

게다가, 세 사람 모두 일개 가신이 아니었다. 가신들만이 갖는 인위적인 암연이 아닌, 선천적인 암연이 온전히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흠, 저 사람들 삼형제인가?’

용병과 상인이 벌인 소동을 정리한 뒤, 이쪽으로 걸어오는 귀족가 자제를 보며 루빈은 짐작했다. 뭐, 두고 보면 알 일이다.

1시간 뒤.

루빈과 쿠제는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응접실에 들어와 있었다.

하녀가 고급 음료수와 다과를 내왔고, 자신을 집사라고 소개한 남자는 극진한 예를 갖춰 루빈을 대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팰리스틴 가주님께서 나오실 겁니다.”

“예.”

“옷을 갈아입으시겠습니까? 저희 도련님께서 공자님의 옷을 더럽힌 걸 계속 신경 쓰고 계십니다.”

“괜찮습니다.”

집사의 얼굴에선 부드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귀족가의 집사처럼 보였다.

1시간 전, 시장에서 팰리스틴 가의 공자는 루빈에게 다가오면서 사소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염료 상점의 가판대를 넘어뜨리면서 루빈의 옷을 더럽혔던 것이다.

팰리스틴 가의 공자는 미안한 마음에 루빈과 쿠제를 저택으로 초대했고, 그리하여 응접실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명망 있는 팰리스틴 가문다운 수습이었다.

이 모든 게 루빈과 접촉하기 위해 구성된 극본이라는 사실은, 오로지 이 자리에 있는 자들만 알았다.

루빈은 눈을 굴려 저택 곳곳을 살폈다.

만인의 눈에 집사로 보일 이 남자도, 다과를 내왔던 하녀도, 두꺼운 대문을 열었던 경비병도 모두 암살검가의 가신이었다.

이들은 모두 위장신분을 취하고 있었고, 그건 루빈 또한 마찬가지. 이 역할극은 이곳의 가주가 등장한 다음에야 끝이 날 것이었다.

“아, 가주님이 오시는군요.”

때마침 팰리스틴 가주가 등장했다.

저벅저벅.

우람한 덩치에 사나운 눈매가 돋보이는 사내. 중년의 기품이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그는,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집사와 하녀부터 내보냈다. 그러고는 무정한 눈으로 쿠제를 바라봤다.

이 로이넨서까지 내보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물론 쿠제의 위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건 그가 아닌 루빈이었다.

“쿠제와 함께 있겠다.”

“알겠습니다.”

가주는 곧바로 수긍했다.

그는 본가의 자제를 향해 예를 표하고, 가짜 신분을 벗어버렸다.

“도련님, 처음 뵙는군요. 저는 네이프 그리어스입니다.”

귀족가문 팰리스틴이 아닌 암살검가 그리어스, 그게 이들의 실체였다.

로이넨 가문의 방계이자 베야네그로의 거점창고를 관리하는 가문.

‘그리어스 가문이라…….’

회귀 전에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아마 없을 것이다.

루빈이 죽기 전에 실제로 만나본 방계 가문은 극히 적었고, 해봐야 출가 이전 9살, 11살에 시험을 함께 치렀던 가문들이 전부였다.

다만, 만나본 적은 없어도 그리어스라는 가문 이름은 꽤 여러 번 들었던 것 같다.

“루빈 도련님, 그리어스를 아십니까?”

“글쎄.”

“암살검가의 계보를 펼쳐보자면, 그리어스는 로이넨과 밀접한 가문이지요. 초대 그리어스는 당시 로이넨 혈통과 사촌이었습니다.”

형제 중 가장 강한 자가 가주가 되고, 나머지는 출가해 방계 가문을 꾸리는, 암살검가의 오랜 관습.

그리어스 가주의 말대로라면, 방대한 역사 속에서 그들은 암살검가의 본류로 보아도 무방했다. 이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본가의 피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이들도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들이 수 대째 베야네그로 거점창고를 맡아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누가 거점창고 관리인을 하는지는 오직 본가 가주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암살검가의 역사가 제국의 역사보다 오래됐기에, 황제의 칙명부조차 여기에는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생각나는 것 같아. 암살검가의 본류에 속하면서, 동시에 양지에까지 영향력을 뻗치는 자들.”

루빈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그리어스 가주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팰리스틴이라는 귀족 가문은, 거점창고를 운영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가짜 신분이었고, 그 상태로 이어져 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가주 네이프만 해도 태어날 당시 암살검가의 혈족이었으나, 양지에서는 팰리스틴이라는 2등귀족으로 살아왔다. 둘 중 어느 것이 위장신분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완벽한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네이프는 팰리스틴 귀족가로서, 이 도시에서 명망을 쌓고, 정치적으로 영향력까지 끼칠 정도였다.

시장에서의 소동만 해도 그랬다. 적대적인 양 세력 용병단과 상단은 그리어스 가문이 뒤에서 운영하는 실제 조직이었다.

베야네그로 시민들은 서로 사람까지 죽여 버리는 두 세력이 하나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정확합니다. 도련님.”

“그리고 하나 더.”

“……?”

고개를 갸웃하는 네이프에게, 루빈은 잊고 있던 개념 하나를 떠올리곤, 거리낌 없이 입 밖으로 꺼내었다.

“그리어스와 로이넨이 ‘암연의 맹약’ 관계라는 것도.”

“……!”

순간, 적요하던 네이프의 눈동자에 파장이 일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비린내 나는 귀족사회에서조차 흔들리지 않았는데. 지금, 그의 얼굴엔 숨기지 못한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암연의 맹약.

그건 ‘검은 잎’과 같은 원리로 이뤄지는 일종의 충성서약이었다. 핵심 내용은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암연의 맹약에 따라, 그리어스는 로이넨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이를 어길 시, 그리어스 가주의 생사여탈권은 세이렌에게 있으며, 언제든 그리어스의 혀를 검게 물들여 죽일 수 있다.

‘도련님이 이걸 어떻게 아는 거지?’

세이렌과 네이프만의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건 단 하나만을 의미했다.

세이렌이 지닌 맹약의 권리를 루빈 역시 공유하고 있다는 것.

사실, 네이프로서는 그 사실이 더 비현실적이었다. 세이렌이 어떤 가주인지 네이프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성격은 그녀의 경지가 대변했다. 정점의 무인. 그런 자가 자신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루빈에게 그만한 비밀을 내주었을 리 없었다.

‘그로칼, 킬리언…. 두 사람이 했던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건가.’

4년 전, 랭 척살조장이 그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추적할 암살자는 없었으므로 이날의 방문은 척살조 임무와 무관했다.

그때, 그로칼은 말했었다. 로이넨 가의 막내아들이 세이렌으로부터 꽤나 큰 신뢰를 받고 있다고.

‘사실이었군.’

양 가문 간 체결한 ‘암연의 맹약’까지 말해주었다면, 루빈이 세이렌으로부터 받는 건 ‘꽤나 큰’ 정도의 신뢰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차기 가주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에 가까웠다.

네이프는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몸을 간신히 잠재웠다. 그의 머릿속에 킬리언과 나누었던 또 하나의 대화가 떠올랐다.

‘어쨌든 루빈 그놈이 가주가 될 거야. 만약에라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암살검가는 머지않아 큰 위험에 처하게 되겠지.’

‘어찌 그리 장담하십니까?’

‘루빈, 그놈은 세이렌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세이렌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한때 세이렌의 로이넨서였던 가신이 한 말이었다.

‘내 말 믿어, 네이프. 그러니까 루빈이 제국을 엿 먹일 짓을 벌이려 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도와줘. 그게 내가 자네를 찾아온 이유야.’

그 괴팍한 킬리언이, 임무 외의 이유로 누군가를 찾아간다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잘 아는 네이프였다.

킬리언은 루빈을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이다. 루빈의 위장별채가, 단순 베야네그로 거점창고와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로.

“네이프 그리어스.”

“…예, 도련님.”

“암연의 맹약에 따라, 난 널 신뢰할 거야.”

네이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러니, 너도 내게 충성해라.’

루빈이 이어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말해줄게.”

“…하명하십시오.”

“사람을 좀 찾아야 하거든. 그러려면 확인해야 할 게 있어. 이곳 거점창고의 반출목록.”

“반출목록 말씀이십니까? 사람을 찾는 거라면 제 가문의 정보망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암살검가도 쉽게 알 수 없는 정보거든. 꽤 빡빡한 놈들에 대한 정보라.”

암살검가가 취급할 수 없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그중, 빡빡하단 표현을 쓸 만한 상대라면…….

“도련님, 칙명부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칙명부가 숨긴 사람을 찾아야 해. 그 흔적은 아마 이곳의 반출목록에 남아 있을 거야.”

그리어스 가주는 미간을 찡그리며 잠시 고민했다. 거점창고의 반출목록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창고관리인이 아니면 본가 가주뿐이었다. 쉽게 내어줄 수 없는 정보란 뜻이다.

하지만 그리어스 가주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 맞은편에 있는 루빈은 곧 세이렌 로이넨과 같았기에.

“알겠습니다, 도련님. 곧바로 가져다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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