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마나 폭발과 후폭풍 (1)
직속부관의 생각대로였다.
루빈은 두 가지 상이한 전략을 펼쳤다. 에릭, 달리아를 노리는 전략과 다른 시험관들을 노리는 전략.
수세적인 에릭, 달리아에게서 마법사부대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한 번의 큰 유인이 필요했고, 반대로 시험관들을 꾀어낼 때에는 지속적인 습격과 패퇴가 필요했다.
시험관들과의 전투에서 패퇴를 기만적으로 펼치는 중에 병력의 손실이 이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건 실제 전쟁이 아니다. 그의 목표 또한 승리가 아니었기에.
‘폰드리안 예프.’
사실, 에릭과 달리아 그리고 다른 시험관들로부터 마법사부대를 이끌어낸 건, 순전히 하네케의 능력이었다.
하네케가 시키는 대로 전황판 위에서 손을 움직였을 뿐. 덕분에 전부 다 감쪽같이 속아넘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폰드리안이 이끄는 청색군대만큼은 달랐다. 여기선 하네케의 전략이 아닌, 루빈의 암행이 빛을 발했다.
“…….”
천막 밖으로 잠시 나온 폰드리안.
하늘을 쳐다보면서 날씨를 확인했다. ‘라스키엔 대난전’의 기후는 실제 역사에 기록된 흐름을 따르고 있었다.
‘이제 곧 장대비가 쏟아질 거다. 응시생들은 꽤 당황하겠지.’
전쟁이라는 환경도 생경한데, 비가 쏟아지면 틀림없이 당황할 터.
시험관들에게는 이런 예정된 날씨 흐름이 익숙했지만, 응시생도들은 ‘라스키엔 대난전’을 처음 접해보는 것이었으니.
쓱쓱-
폰드리안은 자신의 전황판에 손을 갖다 댔다. 부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며, 이미 각지에 척후병들을 보내 전장을 확인한 뒤였다.
견고한 방어에 즉각적인 공세가 가능하도록 짜인 균형잡힌 진영. 흡족한 미소와 함께, 폰드리안은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전황판을 계속 확인했다.
‘슬슬 나가볼까.’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원을 행군할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루든 포이넨을 찾아내면 좋겠는데.
그때였다.
천막 저 너머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폰드리안이 이제 곧 천둥이 치겠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고원이 크게 울렸다.
쏴아아아아. 쿠쿠쿠쿵.
번쩍번쩍, 번개 줄기를 바라보던 폰드리안.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목에 날카롭게 닿는 무언가를 느꼈다.
“……!”
마법생도로 그리고 장교생도로 기품 있게 성장해왔으니, 살면서 화살촉이 목에 닿는 느낌이 어떨지 알 리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다.
“체스였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체크메이트라고.”
등 뒤에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 천둥과 벼락이 다시금 고원을 뒤흔들었다.
폰드리안은 천막 벽면에 비치는 자신 이외의 그림자를 확인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경비가 허술하네요, 위장님. 실제 전쟁에서는 지휘관이 암살되는 경우도 다반사라던데.”
폰드리안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적국의 대장군이 단독으로 군영에 침투하리라고 예상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녀석이 마도무인이었다는 사실을 경계했어야 하는데!
“소리치면 바로 죽일 겁니다. 실제로 죽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꽤 기분 나쁜 경험일 거예요.”
“나 하나 죽인다고 네 점수가 높게 책정되는 게 아니란 걸 잘 알텐데.”
“상관없어요.”
상관없다라? 폰드리안은 루든이 허풍을 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겁을 줘보기로 했다.
“날 죽이면, 너도 발각되어 죽을 거다. 그럼 어떻게 될까? 결국 손해 보는 건 너야, 루든.”
“글쎄요. 전 여길 무사히 빠져나갈 예정인데요.”
“어쨌든 마도무인이라는 거냐? 기고만장하군.”
“그건 두고보면 알겠죠. 그리고 사실, 우승하는 게 제 목적이 아니기도 하고요.”
“…뭐?”
“위장님도 말했잖아요. 응시생도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걸 바라는 건 아니라고. 군대를 어떻게 운용하는지가 중요하다고요.”
날카로운 화살촉 끝으로, 위장의 목으로부터 피가 한 방울씩 맺혔다.
폰드리안은 대장군의 갑옷을 착용한 상태였지만, 거기에 내장된 방어마법은 대장군끼리는 무용했다. 루든은, 이 또한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단신으로 적진에 침투하다니. 한 국가의 대장군이 이토록 부주의하게 행동하는 건 명백한 실책이다. 지휘관으로서도 패착이고.”
“그건 경계를 게을리해 위기에 빠진 위장님한테 해당하는 얘기 같은데요.”
천막 너머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보인다. 쏴아아아아. 마치 폰드리안의 자존심이 땅에 쏟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한 번 살려드린다면, 좀 더 잘 해보실 수 있겠어요?”
“…건방지군, 루든. 선 넘지 마라.”
“진심입니다.”
하지만, 루빈의 말투엔 조롱기가 가득했다. 마치 일부러 자극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폰드리안은 분노에 잠겨 눈이 멀어버렸다. 원휘의 마법가문, 고위장교로서의 자존심이 제대로 구겨진 것이다.
이대로 몸을 빼내기만 한다면, 폰드리안은 틀림없이 마법사부대를 이끌고 자신을 지구 끝까지 쫓을 것이다. 루빈은 확신할 수 있었다.
‘폰드리안은 마법사부대를 가장 잘 지휘한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이놈은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모르겠지만.’
감찰보고서에도 적혀 있었다. 폰드리안의 주력은 마법사부대였고, 그는 그들의 능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려 활용할 수 있다고.
그러니 폰드리안을 도발하는 건, 이 청색군대의 마법사부대를 도발하는 것과 같은 효과였다.
쓱쓱―
화살촉을 폰드리안 목에 가져다 댄 상태로, 루빈의 한쪽 손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전황판 속 붉은군대를 계속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중이다.
다행히, 다른 적국들의 마법사부대도 수월하게 유인되고 있다.
“…….”
자신을 암살하러 왔으면서, 여유롭게 전황판까지 쓰고 있다고? 폰드리안으로서는 더 굴욕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답은 안 하셨지만, 그래도 위장님 목숨을 살려드리겠습니다. 제가 한 수 물러드리는 겁니다.”
이 정도에서 빠지면, 폰드리안이 추격해 오기엔 충분할 것이다.
“그럼, 이만.”
“자, 잠깐!”
루빈은 목을 겨누던 화살촉을 슬쩍 빼내곤, 망설임 없이 천막을 빠져나왔다.
“건방진……!”
폰드리안은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잠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천막 안에 루빈이 없다는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고 숨만 헐떡댈 뿐.
그러다가 갑자기.
“이, 빌어먹을!”
의자를 박차며 일어나 전황판을 휙휙 움직였다. 그는 서둘러 마법사부대에 전원 야전용 우비를 입고, 말에 올라타도록 지시했다.
“감히 날 능욕하다니… 마도무인으로 얼마나 날뛸 수 있나 보자.”
분노에 눈이 충혈되어 천막에서 나왔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온몸이 젖어갔다. 상관없었다.
그는 곧장 말에 올라탔고, 마찬가지로 말에 올라타 있는 마법사부대를 지휘했다.
‘분명 저 새낀 날 죽이러 온 게 아니야. 그저 날 유인하려는 거지.’
하지만 폰드리안에게도 생각은 있었다.
아마 루든은 자신이 추격할 때 기병을 운용할 거라 생각했을 거다. 왜 기병을 유인하려 하는지 그 꿍꿍이는 모르겠지만,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마법사부대로 쫓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라스키엔 대난전’에서 마법사부대를 운용하는 능력만큼은 마법사여단 내 최고라 자부하는 폰드리안이었다.
그는 전황판을 움직여, 마법사부대를 진격시키곤 직접 그 선두에 섰다.
그러곤 마법사부대에게 광범위한 탐색 마법을 시전하도록 명해, 암살을 시도한 적국 대장군이 어디로 숨었는지 샅샅이 뒤지고자 했다.
마법사부대에 부여된 한정된 마나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음이 확인됐지만, 상관없었다.
시작부터 건방지게 굴어 마음에 안 들었던 꼬맹이를 제대로 혼쭐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찾는 게 어렵지도 않았고.
아니나 다를까.
‘찾았다!’
마법사부대의 탐색망에 붉은 점 하나가 잡혔다. 그는 말의 옆구리를 힘껏 차며, 마법사부대를 이끌고 나아갔다.
‘마나 제한 규칙만 없었으면, 이런 귀찮은 일도 없었을 텐데.’
시험 중에 마나의 환이 제한됐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끼는 건, 수년 전 마법생도로서 이 시험을 처음 치른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 * *
평정심을 잃고 루빈을 쫓다 보니, 어느덧 폰드리안의 마법사부대는 고원의 정중앙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젠장할!”
오래지 않아 루빈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폰드리안은 분개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탐지 마법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마법사부대의 기동력도 극히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험난한 지형에도 빛을 발하는 마도무인의 능력만 확인한 꼴이었다.
‘너무 멀리 왔어. 여기서 포기하고 군영으로 돌아가면, 진창길이라 오히려 내가 위험해질 수 있어.’
기동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기습이라도 당하면, 꼼짝없이 당하는 것이다.
경험많은 그는 가장 효율적인 결정을 내렸다. 군영에 대기 중인 아군 부대를, 자신 근처로 모이도록 지시한 것이다.
‘일단은 여기서 멈추고 다른 부대의 합류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때.
슈우우우웅!
쌔애애앵― 푸슉!
전방 어디선가, 빗줄기를 뚫으며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다행히 화살의 힘이 충분하지 못했던 건지, 마법사 둘만 당하는 데 그쳤다.
“기습 실력이 형편없군.”
루든의 궁병대였다. 분명 먼저 발견했을 텐데도, 루든은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써 위치가 드러나 오히려 역공의 빌미를 제공한 셈.
피식. 놓친 줄 알았던 루빈의 재등장에, 폰드리안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한 수 물러주겠다는 그 판단이, 얼마나 큰 피해로 돌아오는지 제대로 보여줄 작정이었다.
‘일단 언덕 위로 간다.’
쓰윽, 쓰윽.
전황판 위에서 폰드리안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곧 그의 지시에 따라, 마법사부대가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젠 아예 실수까지 하는구나, 루든.’
루빈의 궁병대는 아래쪽에 있고, 폰드리안의 마법사부대는 언덕을 오르고 있다.
아래쪽에 위치해서는 언덕 위에 있는 마법사부대를 공격하기 어려울 터. 반대로, 훨씬 뛰어난 공격 사거리를 지닌 마법사부대였다. 이대로라면, 곧 일방적인 공격을 쏟아부어 줄 수 있으리라.
‘대장군의 갑옷을 벗은 걸 후회하게 해주지.’
게다가 지금, 루빈의 궁병대는 마치 표적을 자처하듯이 전장의 한가운데로 향하는 중이었다.
라스키엔 고원의 한가운데는 여러 언덕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 가장 공격받기 좋은 지점이었다.
확실한 승산을 잡았다고 생각한 폰드리안은 곧바로 마법사부대에게 ‘마화곡포’ 시전을 준비시켰다. 화염계열의 범위마법 중 하나로, 곡사 방식의 화염구였다.
마법을 시전할 최적의 타이밍이 멀지 않았다. 단 한 번이면, 루빈의 궁병대는 초토화될 것이다.
‘좋아, 때마침 날씨도 바뀔 타이밍이군.’
빗방울이 하나씩 멈추더니, 구름도 가시면서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기후의 흐름마저 자신을 도와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때마침, 우왕좌왕하며 폰드리안을 쫓던 루든과 그의 궁병대가, 분지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금이다!”
하지만…….
폰드리안은 알지 못했다.
그가 마법사부대의 마화곡포 시전을 지시하는 순간. 그 지시에 따라 하늘로 손을 뻗은 마법사들에게서 마나가 들끓는 그 순간.
마화곡포를 시전한 것이, 폰드리안 그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언덕에 있던 다른 왕국들의 마법사부대 또한, 그처럼 마화곡포를 시전하고 있음을.
각자 다른 과정을 거쳐 언덕에 도달했지만, 결국 하나의 목표를 노리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루빈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폰드리안 위장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휘이이이이-
어느덧 상공에는 일곱 왕국이 시전한 마화곡포가 동시에 발사된 상태.
루든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수백 구의 화염구가 곡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기이한 광경. 마치 수백 개 유성의 추락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는 듯했다.
모든 마법사부대가 동시에 똑같은 표적을 향해 마법 공격을 한다면?
폰드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한 번도 가능하리라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으니.
휘우우우우우우.
쿠우우우우…….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쏟아지는 여러 방향의 마화곡포가 열기를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빗방울에 젖어있던 그들 모두의 우비가 빠르게 말라 버린다.
그 순간, 모든 출전자의 얼굴은 주홍빛에 물들고, 마침내 전장 한가운데에 수백 구의 마화곡포가 떨어졌다.
콰콰콰콰콰쾅!
충돌하는 동시에, 폰드리안은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걸 느꼈다. 뭔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그토록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걸 본 루빈은 확신했다.
‘계획대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