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새벽의 특별 수업 (4)
“그런데 교수님. 사실 저는 마나의 환이 그다지 견고하지 못합니다. 남들에 비해 오히려 열악한 편이라고 할 수 있죠.”
베니테즈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무인들은 하나의 환에 오러와 마나를 함께 담아야 하기에. 다른 마법생도들에 비해 마나의 경지가 열악한 건 당연했다.
“괜찮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파공은 마나 소모가 가장 적은 마법 중 하나거든요.”
루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아는 바와는 달랐다. 예습하기 위해 전날 봐두었던 책에서는, 파공의 마나 소모 또한 다른 기초 공격마법과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아, 혹시.’
마나가 적게 든다는 베니테즈의 말은, 아마 이물(異物)의 방해가 없는 허공에서의 파공만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단, 이물이 없는 허공에 한해서만.”
공격마법이 아닌, 운신마법으로서의 파공이어야만 마나 소모량이 적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루빈으로서는 너무나도 좋은 조건이었다.
“다행이네요.”
“꼭 다행이지만은 않을 거예요. 목표가 허공이면, 그만큼 시전 지점을 정확히 계산하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해보겠습니다.”
루빈이 각오가 됐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베니테즈가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좋아요. 이제부터 파공의 휘식을 그려볼 겁니다.”
“언제까지 하면 될까요?”
“기숙사의 다른 생도들이 기상할 때까지면 충분하겠군요. 파공 자체를 부드럽게 발현시키려면 오늘만이 아니라, 이번 주 내내 해야 할 거예요. 자, 그럼 시작해요.”
루빈은 정신을 집중하고, 파공의 휘식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다 됐네요, 루든 생도.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나도 아침부터 고학년 수업이 있는 터라.”
루빈의 얼굴 앞에서 그려지고 있던 마나선이 파지짓, 꺼져버렸다.
“어때요, 할 만해요?”
“쉽진 않네요.”
그러나 베니테즈는 피식 웃었다.
겸손하긴. 아니면, 음흉한 건가.
베니테즈는 두 시간 동안 이어진 루든의 휘식 훈련을 떠올렸다.
‘아무리 마도무인이라지만, 저렇게 예리한 감각을 지닐 수 있는 건가?’
루빈이 보여준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물론 마도무인이라는 걸 감안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예상치를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시전 지점을 정확하게 계산, 짚어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허공의 정확한 지점을 정해 공기를 터뜨림으로써 몸을 튕겨내는 것. 개념만 보면 언뜻 간단할 거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선, 성공적인 시전을 방해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파공의 위치와 강도.’
베니테즈로서도, 파공을 운신마법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이 두 가지가 가장 난해한 문제였다.
첫 번째, 시전 지점이 정확하지 못하면 파공은 운신마법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두 번째, 위치가 정확하다 해도 강도가 절묘하지 못하면 육신에 피해만 누적된다.
아무리 몸과 맞닿은 허공을 터뜨리는 것이라지만, 몸이 그 파장을 견디어낸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흐음.”
베니테즈가 사감실을 나설 준비를 할 때조차도, 루빈은 너무도 안정적으로 파공을 시전하고 있었다.
오늘 수업에서 드러난 문제라면, 그저 루빈이 마나선을 유려하게 다루지 못한다는 것뿐. 그것만 능숙해진다면, 파공을 얼마큼 활용할지는 순전히 루빈의 몫이 될 터였다.
‘엄밀히 말해, 마법 수준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육체적 감각이 월등했다.
루든의 경우, 파공의 시전 지점이 틀어질 때마다 몸을 움직였다. 이미 ‘숨은 상인’으로 한번 마주해보았던 그 믿을 수 없는 순발력과 속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다른 무인들과는 달라. 근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대체 뭘까.’
무인과 마도무인의 차이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제까지 알고 있는 무인들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가 감지하는 그 미묘한 차이가 암연과 오러의 극명한 차이라는 걸 베니테즈로서는 알지 못하겠지만.
…한편, 루빈은.
‘쉬운 듯하면서, 쉽지 않네.’
첫 번째 수업이 마무리되고, 루빈은 그렇게 평했다. 겸손과는 거리가 먼, 있는 그대로의 불만이었다.
파공은 회피나 역공의 기술로 쓰이겠지만, 당장 전투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건 나만의 고유한 능력이 될 거야.’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낮은 수준에 불과할지라도, 나중엔 다를 테니까.
파공을 장착한다는 것은, 암연이 순간적으로 증폭시키는 육체적 능력에 또 다른 힘을 얹는 것과 같았다.
‘이제까지 마나의 환을 지닌 암살자는 없었지.’
그뿐일까. 두 개의 암연, 오러, 하네케, 쿠제, 고유한 암술 그리고 영혼무구…. 이 모든 기연을 손에 쥔 현생은 전생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작 열세 살에 5성과 4성, 두 암연을 지녔으니, 전생의 루빈은 상상 속에서도 다다르지 못할 경지에, 이미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루빈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모든 게 이전보다 나아졌지만, 아직 텔마흐를 대적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는 않았다.
루빈이 기억하는 놈은 반신(半神)에 가까웠다. 처절한 전투를 펼쳤음에도, 놈의 경지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 탓에 매일 새로운 경지를 향해 나아감에도, 루빈은 현재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자, 이만 나갈까요?”
베니테즈 교수의 부드러운 말씨가, 루빈을 현실 세계로 끌어당겼다.
“…예, 교수님.”
어느새 사감실의 드넓은 초원에는 해가 떠오르는 중이다. 야행성 동물들은 일찌감치 자취를 감춰버렸다.
우르르르르.
아침 조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짐승들이 문 쪽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매일 새벽, ‘파공’ 특별 수업을 빠짐없이 듣고 있는 루빈. 그런 룸메이트를 보고 오스카는 혀를 내둘렀다.
“너 진짜 독종이었네. 나는 상점을 100점 준다 해도 절대 안 할 건데 말야. 야, 제국귀족들도 그렇게 빡세게 살진 않는다고.”
루빈은 피식 웃었다. 암살검가의 빡빡하고 서늘한 일상에 비하면, 새벽의 특별 수업은 안온하기 그지없는 일과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루빈이 보충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올라올 때였다.
스레힘 사감은 아침마다 층계참의 창문을 열어두었는데, 오늘은 거기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
랩소디관에는 흔하디흔한 게 짐승이었건만.
이번에는 묵묵히 서서 그 고양이를 쳐다보는 루빈이었다.
-티나. 무슨 일이야?
스레힘의 짐승들이 자신의 변신을 눈치챌까 봐, 기숙사 안에서는 잘 돌아다니지 않던 티나였다.
그런데도 창문턱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그만큼 빨리 전해줘야 할 사실이 있다는 뜻이겠지.
냐아아옹.
고양이답게 몸을 뉘면서도 역시 실상은 몹시도 다급했던 모양이다.
-루빈, 난 또 네가 곧바로 마탑으로 간 줄 알았잖아!
-천천히 말해. 아직 시간 있으니까.
-네 생각이 맞았어. 이번에는 로젠탈러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고!
그 말에, 루빈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난 며칠 동안 티나의 임무는 가이젠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것이었다. 로젠탈러가 가이젠을 찾아올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놈이 가이젠한테 접촉했다는 거야?
-그래, 오늘 새벽에! 내가 어제 생쥐로 변해서 가이젠 집에 있었는데…….
하지만 루빈은 티나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러곤 계단을 다시 올라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티나, 더 자세한 이야긴 내 방에서 해. 곧 아침점호 시간이거든. 스레힘의 짐승들이 여기 계단으로 올라올 거야.
장소를 옮긴 후, 루빈은 티나의 이야기를 찬찬히 듣기 시작했다.
…아까 이야기했던 대로, 티나는 생쥐의 모습으로 변신해 가이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어제저녁쯤, 학교에서 퇴근한 가이젠은 마법약제조학에 관한 연구 때문에 밤늦게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깨어났다. 누군가가 자신을 거칠게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흐으으어헉!”
예상치 못한 방문자에, 가이젠은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그럴 줄 알았던지, 로젠탈러는 곧장 입안에 헝겊을 쑤셔 박았다.
“소리 지르지 마, 가이젠. 소리 지르면 죽는 사람이 늘어난다.”
“읍읍…읍읍!”
“일단 내가 묻는 것에 대답부터 해. 페르 로렌치니는 찾았나? 그리고 죽였나?”
그제야 가이젠은 로젠탈러가 자신을 협박하는 정체불명의 조직에서 온 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
가이젠의 침묵에 로젠탈러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어. 혹시나 네가 페르를 찾아 죽였을까 봐 걱정했던 내가 한심하군.”
그 한마디에 담긴 살의를 느낀 걸까.
로젠탈러가 검을 빼 들기도 전에, 가이젠은 눈을 부릅뜨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틀어막힌 입에도 불구하고, 그럴 방법이 있었다.
파지짓 소리와 함께, 그의 눈앞에 마나선이 생겨났다. 그걸로 황급히 무언가를 써 갈기기 시작했다.
“하여간, 마법사 새끼들…….”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휘식일 거라 예상했던 로젠탈러. 허탈하게 웃으며 허공에 떠오르는 문장을 바라봤다.
-그 말은,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까?
“그래. 상황이 바뀌었지. 페르를 절대 죽여선 안 돼. 이젠 어떻게든 생포해야 한다.”
이제 칙명부에게 페르는 제거 대상이 아닌, 생포 대상이었다. 페르를 찾아야 다시 엔조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페르를 죽여서 엔조를 각성시키는 건 그다음 문제였다.
“어차피 상관없어. 내가 보니까, 너는 아직 페르의 그림자도 못 밟은 거 같으니까. 정말로 사용가치가 없는 놈이었다는 소리지.”
로젠탈러가 검을 쥐었다. 가이젠의 마나선이 또다시 다급하게 움직였다.
-페르를 찾아낼 좋은 방법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게다가 유력한 후보도 찾아놨다고요!
로젠탈러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는 가이젠의 입안에서 헝겊을 빼냈다.
그러면서도, 가이젠이 허튼 생각을 품지 않도록, 자신의 경지를 드러내 보였다. 일순간 ‘롭슨의 비검’ 검신에 오러가 씌워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한 겹, 두 겹… 모두 다섯 겹의 오러. 5성의 경지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순간, 검신을 중심으로 공기가 울어댔다. 지진이 난 것처럼 사방의 벽이 통째로 흔들렸다.
그때.
찍―찍!
천장 어디선가 뚝 떨어진, 생쥐 한 마리.
로젠탈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쥐를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비검을 슬쩍 그쪽으로 가져갔다.
작열하는 오러에, 생쥐는 바들바들 떨면서 도망조차 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느릿하게 다가드는 검에 뱃가죽이 찔리는가 싶더니.
펑!
“……!”
“마법사들은 죄다 깔끔한 줄 알았더니, 아니네. 더럽게도 사는군. 쥐새끼들로 득실득실하잖아.”
칼이 닿기도 전에, 오러의 파장으로 생쥐가 그대로 터져버린 것이다.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 개 무섭네.’
…티나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눈앞에 있다가, 발을 헛디디면서 바닥에 떨어진 생쥐의 명복을 빌었다. 지금까지 천장 구조물에 함께 붙어 있던 녀석이었다.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가이젠의 집에 생쥐가 많아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지금 저 밑에서 산산조각 난 생쥐가 자신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티나는 몰랐겠지만, 사실 이 생쥐들은 전부 마법약의 실험체들이었다. 인체에 적용하기 전에 무조건 생쥐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마법약제조학 규정 때문이었다.
-일부러 풀어놓은 생쥐들입니다. 마법약의 경과를 지켜봐야 해서요.
입이 자유로워졌는데도, 가이젠은 자기도 모르게 마나선으로 표현했다.
“말로 해, 교수. 대신 그딴 쓸데없는 소리 말고, 페르에 관해서만.”
침을 꿀꺽 삼키는 가이젠.
무려 다섯 겹의 오러다. 5성의 경지를 보았으니, 눈앞의 이 남자를 마법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
“말해보라니까. 후보가 있다며. 걔가 누군데?”
“아, 아직은 후보일 뿐입니다.”
“이름은 알잖아?”
“물론 그렇습니다만,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나랑 장난하나?”
“하, 하지만, 그놈이 페르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