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야외 수업 (1)
티나는 숨을 죽인 채, 가이젠과 로젠탈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발을 헛디디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역시, 모든 건 루빈의 예상대로였다. 가이젠은 자신의 머릿속에 품고 있는 생각, 그러니까 루빈이 페르인 것 같다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루빈이 심어놓은 공포감과 암시마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페르의 정체가 빨리 확인될수록, 자신의 수명을 재촉한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그놈이 페르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있다? 지금 무슨 수작이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 그거야?”
그러면서도 로젠탈러는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이젠을 질책하긴 했지만, 그라고 해서 마땅한 대안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히탄이 죽고 나서, 로젠탈러가 ‘페르-엔조 작전’의 새로운 책임자로 임명됐지만, 아직까지 지지부진한 것은 사실이었다.
엔조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남은 희망은, 위장 신분으로 학교에 숨어 있는 페르 로렌치니뿐. 그놈부터 찾아야 새로운 수가 나온다…….
‘다행히 신입생 중에 학교를 이탈한 놈은 없는 것 같고…. 누가 페르지?’
이 작전의 핵심은 암살검가를 속여야 한다는 것. 칙명부 수장이 모든 걸 설명해주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흐름만은 알 수 있었다.
‘페르-엔조 작전’의 궁극적 표적은 결국 암살검가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작열하는 오러와 함께 울어대는 비검을 내려다봤다.
‘루빈, 그놈을 이용할 수 없는 게 답답하군.’
페르를 찾는 건 루빈에겐 일도 아닐 터. 하지만 놈에게 이 일을 맡기면, 틀림없이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이딴 구린내 나는 마법사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니.’
결국, 로젠탈러는 오러를 거둬들였다.
오러가 사그라지자 방 안을 가득 메웠던 기압이 스러졌다. 검의 울음도 잠잠해지면서 둘 사이엔 적요만이 남았다
“…….”
“후, 후…….”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일은 없다는 걸 깨달은 가이젠이, 숨을 내쉬었다.
로젠탈러는 한결 나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봐라. 네가 말한 페르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일단 학교에 출근하자마자, 특정 반에 안내문을 배포합니다.”
가이젠의 입술이 바쁘게 들썩였다.
“특정 반?”
“페르로 의심되는 생도가 속한 반이죠.”
“그게 누군데?”
“…그건,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아, 그래. 알겠어, 알겠다고! 네가 확실하게 찾아내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 말해줄 필요는 없지.”
찍―찍.
오러가 사라지자, 생쥐들이 겁도 없이 그들 근처에까지 다가들었다. 그때마다 로젠탈러는 얼굴을 구기며 비검을 움직였다. 생쥐가 한 마리, 한 마리씩 비검에 의해 관통되었다.
“그 안내문에는 입고 예정인 도서 목록이 있을 겁니다. 이, 이번 주부터 저는, 도서관의 1학년 서고 담당이거든요”
“그리고?”
“그 책들 중에는…….”
…그러나 로젠탈러도, 가이젠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암살검가의 가신이 듣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살생을 역겨워하는 환혈족이자, 루빈의 로이네크로우인 티나. 그녀가 불쌍한 생쥐들의 죽음과 함께, 가이젠이 말하는 계략을 찬찬히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생각지도 못했다.
* * *
-그랬군. 잘 알았어. 가이젠이 어떻게 나올지.
-루빈, ‘검은 잎’이나 암시마법약으로 가이젠을 좀 더 작업해둬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랬다간 가이젠의 몸이 견디질 못할 거야.
가이젠의 머릿속에서 고통스러운 기억이 지워졌다 해도, 그의 몸만큼은 ‘검은 잎’을 기억하고 있었다.
‘검은 잎’을 두 번 음독시키는 건, 그자를 죽이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암살자들도 일생에 단 한 번, 가신으로서의 통과의례로 음독하는 것이니.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거네. ‘검은 잎’을 먹이지 못하면, 암시마법약도 소용없을 테니까.
제조학 교수답게 가이젠의 마법약저항력은 수준급이었다. 지난번에도 겨우 ‘검은 잎’으로 저항력을 뚫어낼 수 있었던 터였다.
-방법이 없다는 말이 아냐. 미리 알았으니 된 거지. 대비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운 거야?
-간단해. 녀석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면 돼.
바라는 대로 움직여준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지만, 루빈과의 대화를 더 이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흐아아암!”
때마침 잠에서 깨어난 룸메이트. 오스카가 눈을 부비며 루빈에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루든, 벌써 아침이네.”
“얼른 준비해, 오스카.”
오스카는 잔뜩 찡그린 채로 흐느적흐느적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오스카가 쉬지 않고 다양한 주제를 오가며 루빈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이, 어느새 티나는 창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잘 됐군.’
초조해하는 티나에 비해, 루빈은 침착했다. 가이젠이 어떻게 나오느냐가 궁금했던 거지, 어쨌든 움직이리라는 건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으니.
‘엔조의 이름으로 페르를 유인하겠다? 제법 머리를 굴린 것 같다만…….’
어림도 없다. 가이젠이 오스카를 마주할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다만, 루빈이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5성의 오러, 로젠탈러. 티나가 목격한 게 놈의 전부일까? 로젠탈러가 지닌 그 비검은, 대체 어떤 보구일까?
확실해진 건 로젠탈러가 칙명부의 비전검술을 익혔다는 것과, 결국엔 언젠가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뿐이었다.
페르와 엔조를 위해서는, 로젠탈러를 최대한 빨리 카포티니에서 치워버려야 했다.
‘계획대로 간다. 가이젠을 이용해서 로젠탈러와 싸울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밖에.’
* * *
루빈과 오스카가 C반 교실에 들어왔다. 오늘따라 루빈이 재촉하는 바람에, 교실에 가장 먼저 들어온 참이었다.
“이건 뭐래?”
오스카는 하품을 길게 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든 생도들의 책상에 낱장의 종이가 올라와 있었다. 막 그걸 집어 들려는 찰나.
“내가 먼저 읽어볼게.”
루빈이 낚아챘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스카는 심드렁했고, 졸음에 겨워 하품만 길게 늘어뜨렸다.
“하아아암, 그게 뭔데?”
“학교 도서관에 새로운 책이 들어온다는 안내문.”
“안내문? 책을 들여놓을 때마다 이렇게 알려주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아. 이번 주부터 1학년 서고 담당교수가 바뀌었나 봐. 그래서 이 중에 원하는 책이 있으면 자기 연구실로 와서 쪽지에 써두래.”
“담당교수가 누군데?”
루빈은 집어 든 종이를 반으로 접어버렸다. 오스카는 개의치 않았다. 도서관의 책에는 관심도 없어서 안내문을 이러든 저러든 상관없었다.
“가이젠 교수.”
“가이젠? 와, 나는 앞으로도 책 빌리러 갈 일 없겠다.”
“게다가 다 시시한 책들뿐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루빈. 눈으로 인쇄물을 죽 읽어나갔다.
방금 전 오스카에게 했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가이젠은 1학년 서고 담당교수가 되었고, 새로 입고할 책의 관심도를 파악할 겸 이 서류를 돌린 것이다.
다만.
‘C반한테만 돌렸다는 거지.’
루빈은 자신이 가이젠의 우선 목표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동안 페르로 의심받기 위해 일부러 행동한 게 제대로 먹힌 것이다.
-<학교 동문 대담집: 엔조 로렌치니(마법건축가)〉
책 목록 중 가장 마지막 줄에는, 대담집 한 권이 쓰여 있었다.
엔조 로렌치니라는 이름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데다가,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엔 ‘사전에 담당교수에게 독서 안내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말 그대로 유인책이었다.
‘마법건축’이란 게, 신입생도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분야는 아니었다. 게다가 엔조 로렌치니는 세간에 이름이 알려진 유명 건축가도 아니었고.
엔조가 뛰어난 건축가라는 건 숨겨진 사실이었다. 루빈이야 그에 대한 조사를 깊게 했으니까 아는 것이지, 신입생도들에게 엔조 로렌치니란 처음 들어보는, 그저 졸업한 동문에 불과했다.
‘가이젠에게 그 책을 요청할 사람은 나밖에 없겠단 계산이겠지. 좋은 수야.’
물론 상대가 루빈이 아니었을 때에 한해서지만.
루빈은 일단 가이젠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다음부터는 계획대로만 하면 될 것이다. 자신이 엔조의 아들이라는 걸 밝히면, 놈은 준비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지.
놈은 마핵초를 채집하는 야외 수업을 본격적으로 기획할 것이다. 루빈을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학교에서 불상사가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더구나 로젠탈러는 학교에 들어올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그러니, 가이젠의 다음 단계는 빤했다.
‘야외 수업에서 로젠탈러에게 날 넘길 거야. 그럼 로젠탈러는 납치한다는 생각으로 나한테 달려들 거고.’
그다음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늘을 넘길 필요는 없겠지.’
뜸 들일 만한 일이 아니었다. 루빈은 인쇄물을 받은 그날 곧바로 가이젠을 찾아갈 작정이었다.
때마침 점심시간 중에 틈이 생겼다. 루빈은 학생관에서 식사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오다가 친구들에게 대충 둘러댔다.
그런 다음, 곧바로 가이젠의 연구실로 향했다.
‘자리를 비웠나?’
문 너머.
암연이 감지하는 인영은 하나였지만, 가이젠이 아니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미는 사람은 그의 조교 톰슨이었다.
“루든 생도?”
“혹시 교수님 안 계신가요?”
“교수님은 오늘 오전부터 출장 가셨는데.”
“출장이요?”
짚이는 바가 있었지만, 일단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야외 수업을 계획 중이시거든요. 아, 저번에 루든 생도가 제안했다던데?”
“네, 그랬죠. 교수님이 제 의견을 받아주실 줄은 몰랐네요.”
“마핵초 채집할 수 있을 만한 장소를 물색하려 카포티니 밖으로 나가신다고 했어요.”
역시나 가이젠은 야외 수업을 준비 중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특이한 마핵초를 채집할 만한 장소를 찾는다는 것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터.
채집활동 중에 다른 아이들로부터 나를 분리해놓을 만한 장소겠지.
“근데, 루든 생도는 무슨 일로 온 거죠?”
“…교수님 안내문 때문에요. 제가 보고 싶은 책이 있는데, 그건 교수님께 따로 말씀드려야 한다고 했거든요.”
“아, 안내문! 오늘 C반에 배포했죠. 그렇지 않아도 교수님께서, 책 때문에 찾아오는 학생들을 체크해 놓으라고 했거든요. 루든 생도가 두 번째네요. 아까 오전에 클로이 생도가 왔었으니까.”
클로이도 왔었나. 책 목록만 보면 클로이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이 많았으니 그럴 만했다.
“저는 ‘동문 대담집-엔조 로렌치니편’ 때문에 온 거예요.”
“아! 그 책이요…….”
톰슨 조교는 종이 한쪽에 루빈의 이름과 책 제목을 적어 넣었다.
“그럼, 교수님 오시면 말씀해 주세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공손한 인사와 함께, 루빈은 이쯤에서 물러났다.
급한 건 자신이 아닌 가이젠이었다. 놈은 돌아오는 대로, 황급히 자신을 찾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로젠탈러에게 데려다주겠지.
‘얼마 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