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야외 수업 (3)
가이젠 교수 앞에 선 루빈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야외 수업 장소는 고르셨나요?”
“그래, 어제 결정했다. 멀지 않아. 그리고 다양한 마핵초들을 채집할 수 있는 곳이지. …여기 앉아라, 루든.”
루빈은 가이젠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녀석의 진짜 용건이 나올 때였다.
“톰슨 조교가 말하던데, 엔조 로렌치니 대담집을 읽고 싶다고? 그건 정식 출판본이 아니야. 가제본이지. 그래서 따로 신청해야 한다는 거였어.”
루빈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이, 가이젠에게 저놈이 바로 페르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통째로 기억이 희미해졌던 지난날, 루빈이 암시마법약을 먹여 그런 생각을 심어놨다는 것은 짐작조차 못한 채였다. 가이젠은 그저 자기 자신이 교묘하고 이성적이라며 착각할 뿐이다.
“루든, 그 책에 왜 관심이 있는지 말해봐. 그걸 알고 싶군.”
“가이젠 교수님.”
“……?”
“엔조 로렌치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대화를 기록한 게 교수님이 맞나요?”
“뭐?”
아,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건가. 아무래도 루든은 자신이 담화집을 집필한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가이젠은 머리를 굴렸다. 그걸 기회로 삼아보려는 것이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중요하고말고요.”
“왜지?”
“어째서 중요한지, 제가 교수님께 말씀드리면… 교수님은 그 비밀을 지켜주실 수 있으십니까?”
가이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비밀이라?”
“네, 대신 꼭 교수님만 아셔야 합니다. 교수님을 믿기 때문에 밝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엔조 로렌치니 대담집과 관련된 비밀이라는 거군?”
딱히 대답은 없었지만, 루빈의 얼굴은 긴장한 상태였다. 심지어 손짓 하나하나에도 긴장한 겐깃든 상태.
이번에도 루빈의 완벽한 연기에 놀아나고 있음을, 가이젠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 다음 이어질 루빈의 말에도 화들짝 놀랄 수밖에.
“실은… 엔조 로렌치니가 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가이젠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턱 내뱉었다. 너무 무방비한 상황이었던지라 어색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넌 루든 포이넨인데.”
“아뇨. 제 본명은 페르 로렌치니입니다.”
“……!”
지금껏 가이젠을 그토록 괴롭혀왔던 그 이름,페르 로렌치니. 그동안의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에, 가이젠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됐다! 찾았다, 드디어!’
그는 내심 환호성을 내질렀다. 자신이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섰음은 전혀 모른 채로.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가이젠은 우울한 얼굴의 루빈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네가 엔조의 아들이었다니. 놀랍군.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니까, 신분을 숨기고 학교에 들어왔다는 거잖아?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겠지?”
“…….”
“비밀은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교수님, 그 얘긴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언제쯤 책을 받아볼 수 있을까요?”
“…음, 시일이 좀 소요될 거다. 아마 야외 수업 이후에나 볼 수 있겠군.”
이에 루빈은 실망한 척 고갤 끄덕였다.
‘물론 그러겠지, 그런 책은 애초부터 없을 테니까.’
가이젠이 힘겹게 기쁨을 숨기는 게 보인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반면, 루빈의 연기는 가이젠을 완벽히 속이고 있었다. 얼마나 감쪽같이 속고 있는지, 눈앞의 가이젠이 이토록 안쓰러워 보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때마침 루빈의 내면에서 하네케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자기가 죽으리라는 것도 모르고 좋아하는 꼴이라니. 안쓰럽구나.
‘그러게요. 이제부턴 로젠탈러와의 전투만 생각하면 되겠어요.’
로젠탈러와의 결전이 남았다. 하지만 하네케에게는 아직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있는 모양이었다.
-루빈. 일전에 말하길, 가이젠을 죽이는 건 로젠탈러의 몫이 될 거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 말은 곧, 이번 싸움에서의 목적이 로젠탈러 제거에 있지 않다고 봐도 되겠나?
‘역시. 눈치채셨네요.’
이번 싸움은 일종의 전초전. 그러나 로젠탈러 입장에선, 그저 가이젠의 실수가 만들어낸 불상사로 여겨져야 했다.
‘로젠탈러의 경지를 파악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으니까요.’
나중이라고 해도,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전초전의 성과가 나오면, 언제든지 로젠탈러의 죽음을 앞당길 수 있게 될 테니까. 이는 페르와 엔조, 루빈까지,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전초전이라…. 지금의 자네라면 로젠탈러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전력을 다한다면 말이지.
로젠탈러는 5성 무인이다. 그것도 최소의 경지. 로젠탈러가 다섯 겹의 오러를 보였다고 해서, 그게 그의 최대치일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그래서 루빈은 승리를 확신하지 않았다. 물론, 패배할 거라 비관하지도 않았다. 하네케 말처럼, 다시 태어나서 쌓아 올린 모든 능력을 동원한다면,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5성과 4성의 암연. 그리고 3성의 오러. 최근 익히고 있는 운신마법 ‘파공’과 ‘연파공’에, 쿠제와 함께 창안한 첫 고유암술인 ‘그림자 역장’까지.
전력을 다한다면, 승리 확률은 반반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의 나날이 아직 한참 남은 상황에서, 확률이 반반인 싸움에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언제든 원할 때, 놈을 죽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다. 이번 싸움이 전초전인 이유였다.
‘제 계획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모든 게 끝날 겁니다. 만에 하나 제 정체를 들키면, 텔마흐를 죽이겠다는 계획이 노출되고, 그럼 모든 게 끝장입니다.’
-그렇겠지. 황제 앞으로 보고가 올라갈 거고, 그럼 분명 자네 가문에까지 불똥이 튀겠지. 반역죄도 충분히 성립되고 말이야.
반역자의 말로가 어떠한지는, ‘빛과 반역의 탑’ 견학 때 이미 두 눈으로 확인한 둘이었다. 회귀 전의 비극이 당장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은 확률이 부족해요. 좋게 생각해서 같은 5성끼리의 싸움이라고 해도, 놈은 저보다 전투 경험이 훨씬 많습니다.’
-이해했네.
그러니, 오늘 싸움에선 최대한 숨겨야 한다.
‘일단 내가 루빈이라는 걸 절대 들켜선 안 돼. 핏빛서리도 감춰야 하고, 브리온 오러도 숨긴다. 마법을 전투에 적용하는 것도 피해야 해.’
답답한 싸움이 되겠지만, 많이 감출수록 훗날의 전투에선 유리해질 것이다. 중요한 순간 결정적인 승리를 위한, 전략적 은폐인 셈.
이번 싸움은 전초전, 목표는 ‘탐색’이다. 놈의 보구는 어떤 힘을 지녔는지, 놈이 사용하는 칙명부의 비전검술은 얼마나 강할지 그리고 파훼법은 있을지.
-그날, 자네 얼굴부터 가려야겠군.
‘그거라면 미리 생각해놓은 게 있습니다.’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네.
그게 바로 루빈이니까. 하네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치밀함과 교묘함. 지금까지 루빈에게서 그런 면모를 충분히 보아왔고, 그중 단 한 번도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인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회귀 전 루빈이 5성 초입의 경지에도 불구하고, 끝내 차기 가주로 대우받았던 데에는 무인 외적인 능력도 한몫했을 거라 짐작하는 하네케였다.
-어쨌든 이번 일이 성공하면, 칙명부는 더 곤란해지겠어.
‘그걸론 부족하죠. 언젠가 박살을 내버릴 겁니다. 언젠가는.’
* * *
“…하여, 다음 주 중에 오전과 오후 시간을 합쳐 당일 야외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어요. 각 반은 하루씩 순차대로 진행할 텐데, 우리 C반은 셋째 날입니다.”
종례시간.
베니테즈는 학교장의 승인이 떨어진 마법약제조학의 야외 수업에 관해 설명 중이었다.
그 옆으로는 가이젠 교수가 진지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설명대로, 그는 학급별로 날을 나누어 야외 수업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이틀에 걸쳐 각각 A반과 B반의 수업이 먼저 진행될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때는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거고.
앞선 수업이 말짱했다면, C반 순서 때 문제가 발생해도 가이젠의 혐의는 훨씬 가벼워질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가이젠 교수님, 질문있습니다.”
“뭐지?”
“혹시 보물 같은 것도 숨겨져 있나요?”
손을 번쩍 든 오스카가 장난스레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가이젠의 서슬 퍼런 눈길이었다. 그러자 오스카의 목소리가 한층 위축된다.
“아니면… 공격마법을 단련시켜 줄 괴수라도 맞닥뜨리게 되나요?”
이번에도 농담조였지만, 사실 생도들 역시 비슷한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채집 장소가 교외 지역의 외딴 동굴이라 했으니, 불안한 게 당연했다.
“이미 안전 점검은 끝난 상태니, 괴수와 관련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
가이젠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곤 말을 덧붙였다.
“다만, 생도들의 개별행동은 엄격하게 제한되며, 전부 조별로만 이동하게 될 것이다. 앞선 수업 때 짰던 그 조대로 말이다.”
조별로 움직일 거라는 소리에, C반 생도들이 다시 어수선해졌다. 이러면, 어느 조가 가장 유리할지는 불보듯 빤하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 대부분의 눈길이 한쪽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루든, 클로이 그리고 오스카가 속한 달리아의 조. 누가 뭐래도 달리아 조는 범접할 수 없는 완벽한 구성이었다.
“이번에도 달리아 조가 1등하겠지?”
“무슨 1등? 이게 무슨 경쟁수업도 아니고, 말 그대로 그냥 야외 수업일 뿐이잖아.”
“멍청하긴! 그럼 뭣 하러 조별로 움직이겠어? 설마 그냥 채집이나 하고 마는 시시한 수업인 줄 아는 건 아니겠지?”
“맞아. 그 동굴 안에 분명 괴물이 살고 있을걸. 동굴트롤이나 거인 같은! 그게 아니면 뭣 하러 교장선생님 승인까지 받았겠어?”
여기저기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 이토록 달리아 조를 우러러보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우선 클로이와 오스카는 공격마법학 수업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보였다.
달리아 또한 앞선 두 사람엔 못 미치더라도 역시 수준급의 마나를 지녔다. 게다가 장교육성위의 예비명단까지 들어가 있는 몸.
거기에다가 장교육성위 차출시험에서 온 관심을 한몸에 받은, 마도무인 루든 포이넨까지.
모두가 저 조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눈길로 쳐다보는 게 당연했다. 만에 하나, 괴수가 나타난다 해도 달리아 조만큼은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는 생도들이었다.
“훗. 뭐지? 저 부러움 가득한 눈길들은? 녀석들, 드디어 이 몸의 천재성을 알아본 것인가?”
“조용히 해, 오스카.”
“달리아 제군? 아무리 그래도, 질투는 금물이다.”
안타깝게도, 가이젠 교수의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오스카였다. 가이젠은 못마땅한 표정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퍼엉.
“으악!”
오스카의 눈앞으로 하얀 밀가루가 폭발했다. 가이젠의 마법이 적중한 것이다.
“잡담은 금물이다, 오스카. 그리고 야외 수업 때, 마법은 금지다.”
“네? 공격마법 금지라는 말씀이시죠, 교수님?”
“아니, 분명히 ‘마법 금지’라고 했을 텐데?”
“네? 마법 금지요? 아예 금지라고요?”
몇몇 귀족 생도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오스카 같은 평민 출신 생도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정말인가요? 그래도 수업 중이잖아요? 이게 무슨 장교육성위 차출시험도 아니고, 또…….”
그때, 베니테즈 교수가 끼어들었다.
“음, 그건 내가 말해줄게요, 오스카. 이제까지 생도들은 도시 안에서 자유롭게 마법을 써왔겠죠.”
“그랬는데, 이제부터는 아닌가요?”
“이제부터가 아니라, 카포티니를 벗어난 다음부터입니다. 카포티니는 마법사 도시이기에 여러분에게 그만한 자유가 주어졌던 거예요. 하지만 바깥은 달라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이 입학하기 전에 겪어본 도시를 잘 떠올려 보세요. 일반인들에게 마법사는 아주 예외적인 존재들입니다. 게다가 제국의 마법부는 마법에 능숙하지 못한 마법생도가 혼란을 일으키는 걸 특별히 경계하고 있고요.”
“하지만…….”
이번에는 가이젠이 눈에 힘을 주면서 오스카를 향해 엄하게 말했다.
“오스카 투니오! 베니테즈 교수님이나 나 같은 마법학 교수들도 같은 처지라는 걸 명심하도록. 그런데 너희 같은 신입생이 가당키나 하겠나?”
“…….”
“물론, 위급상황에까지 금지시키는 건 아니죠. 장교육성위의 차출시험에서처럼 강제하는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마법을 정당하지 않게 썼을 땐… 사후 엄중한 징계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엄중한 징계라. 결국 생도들은 더는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오스카 역시 불만스럽긴 해도 더 따지진 못하겠는지 그저 턱만 긁적였다.
“그럼 전 가겠습니다.”
용건이 끝난 가이젠이 C반을 나섰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루빈은 두 눈에 꼼꼼히 담았다.
‘그렇게 겁줘도 소용없을 거다, 가이젠. 네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까.’
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로젠탈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