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54화 (154/258)

제154화. 야외 수업 (4)

종례가 끝난 뒤.

생도들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것도 미룬 채, 야외 수업 이야기로 한참을 더 떠들었다.

야외 수업은 다음 주다. 게다가 마법을 제한한다는 공지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들뜨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이게 이렇게나 들뜰 일인가? 이해가 안 되네.”

달리아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 근처에는 루빈을 비롯한 조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 루빈이 입을 열었다.

“그럴 만도 해. 입학하고 나서 이만한 사건도 없었잖아.”

“사건이 없었다고? 그래도 장교육성위 시험이 있었잖아.”

“달리아. 다른 애들한테는 장교육성위 시험은 흐릿한 기억일 뿐이라는 거 잊었어?”

“아, 그랬지.”

사실, 생도들 대부분은 장교육성위의 시험을 치렀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시험의 세세한 과정은 모두 망각마법에 의해 잊었다.

망각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건 최종 3인, 루빈과 달리아와 에릭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조에는 장교육성위 시험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잖아? 이럴 수가.”

박수까지 치는 오스카. 그를 향해 달리아가 쏘아붙였다.

“오스카. 어차피 넌 일찌감치 탈락했잖아. 너라면 기억하고 말 것도 없을 텐데.”

“아, 그랬나. 왜 내 기억엔 최종 직전까지 올라갔던 것 같지? 설마, 달리아 너… 지금, 기억 제대로 못 하고 거 아냐?”

“…한심해.”

달리아 조의 조원들은 야외 수업이 일으킨 반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침착했다. 조원 중 들떠 있는 사람은 딱 둘밖에 없었는데, 당연하게도 하나는 오스카였다.

“뭐, 어찌 됐든. 다음 주가 기대되는 건 사실이잖아? 난 말이지, 엄청 비싼 마핵초 찾을 거거든. 그래서 가이젠 교수한테 엄청 비싸게 팔겠다는 거지. 흐흐…. 야, 달리아! 그런 한심한 눈으로 안 쳐다보면 좋겠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매사에 유쾌한 클로이.

“아니면, 클로이. 너희 가문에서 사주는 건 어때? 내가 발견할 전설의 마핵초를 말이야. 너라면 내가 특별히 할인해줄 수도 있는데.”

“아주 특이한 거면 사줄게! 얼마에?”

“천만…릴크는 어떨까?”

“천만 릴크? 흠, 나 지금 충격받았어, 오스카.”

“역시, 내가 너무 높게 불렀지?”

“엥? 아니? 천만 릴크로 전설의 마핵초를 살 수 있다곤 생각도 못 했단 뜻이야. 그 정도라면 지금 당장도 줄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못 사가게 너한테 선금 걸어놓아도 될까?”

클로이가 아공간 주머니를 열자, 오스카는 고양이처럼 팡팡 뛰어오르며 손을 열심히 내저었다.

“사, 사실 농담이었어. 누가 천만 릴크에 마핵초를 사겠어. 근데 클로이. 천만 릴크면 엄청난 돈이야. 알고 있지? 모른다고 하진 말아줘. 나, 네가 무서워질 것 같거든…….”

“풋, 오스카. 나도 사실 농담이었거든!”

학기가 계속될수록 클로이와 오스카는 죽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아무리 친구로 받아주겠다 해도, 위더스푼의 막내딸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드문 게 사실이었다. 아니, 희귀하다는 게 맞는 표현일 터.

그런데 오스카가 바로 그 희귀한 성격이었던 것이다.

“오스카!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보다 못한 달리아가 오스카를 째려보며 말했다.

“특히 너, 동굴 들어가면 어디로 새지 마.”

“옙, 조장님!”

조장의 말대로 입을 닫는가 싶던 오스카가 잠시를 못 참고 입을 열었다.

“근데 뭐가 걱정이야, 마법을 못 쓴다고 해도 우리 조에는 루든이 있잖아. 안 그래?”

“마도무인만 믿겠다는 거니?”

그때, 루빈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나는 따로 다녀야 돼, 오스카.”

“응? 네가, 왜 그래야 하지?”

“교수님과 함께 다니기로 되어 있어. 교수님이 아까 불러서 내게 말씀해주신 거야.”

“왜! 어째서!”

“그야 보조학생이니까.”

루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가이젠의 속셈이야 빤했다. 보조학생이라는 건 핑계일 뿐이고, 루빈을 따로 떨어트려 놓으려는 것이다.

물론, 루빈으로선 차라리 다행이었다. 오스카나 클로이 등등, 방해요소가 적을수록 로젠탈러와의 일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에라이, 망했네. 망했어! 됐고, 이제 기숙사로 가자. 저녁이나 먹어야겠어.”

오스카가 씩씩대며 친구들을 이끌고 기숙사로 향했다.

* * *

며칠 뒤. C반이 야외 수업 전날 저녁.

루빈은 서점에 와 있었다. 책들을 이것저것 꺼내어 보면서, 쿠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루빈. 너 쿠제를 어디에 보냈다고?”

쿠제로 변신한 상태인 티나가 물어왔다.

“혹시 모르니까 존댓말 써, 티나. 그리고 그건 오면 물어봐.”

“…네, 도련님. 그럴게요, 그럴게!”

“존댓말.”

“그럴게요!”

입을 비죽 내민 티나가 서점 안을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며 중얼거렸다.

“흠, 어제 쿠제가 어디 간다고 했더라? 무슨 동굴을 간다고 했었는데. 아닌가, 도굴이었나?”

루빈이 쿠제에게 따로 내린 지시였다. 내일 떠나는 야외 수업 장소에서, 쿠제가 미리 해줄 일이 있었다.

“어, 쿠제 왔다!”

쿠제의 귀환을 알아차린 티나는 빠르게 다른 생물로 변했다. 이번엔 쿠제가 선호하는 카나리아. 조그마한 새였다.

푸드드득.

티나는 루빈의 어깨에 올라앉고는, 쿠제가 서점에 들어오자마자 냉큼 물었다.

“야,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다녀왔습니다, 도련님!”

“내가 묻잖아!”

“아, 티나 님도 계셨군요. 야외 수업 장소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거긴 왜?”

“어제오늘, A와 B반 수업이 있었죠. 도련님께서 그 두 개 반이 야외 수업할 때 따로 조치를 해두라고 하셨거든요.”

조치란, 동굴 출입구 인근에 가벼운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먼지를 인위적으로 발생시키라는 것이었다.

인체에 큰 이상은 없어서 야외 수업 자체를 취소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먼지를 일으키기 위해 엔조의 도움을 받았는데, 쿠제 말로는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가이젠이 C반 수업 때는 대비해둬야겠다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생도들 호흡기를 보호해줄 복면을 착용시키겠답니다.”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우리가 그런 조치를 안 했어도, 가이젠 쪽에서 뭔가를 했을 거야. 내일 동굴로 숨어들 로젠탈러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가릴 수 있으니까, 녀석에게도 좋은 일이지.”

다만 가이젠이 못 미더워서 루빈이 먼저 확실하게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루빈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로젠탈러가 도련님 얼굴을 못 알아보겠군요. 복면 때문에요.”

“맞아. 진짜 페르인 줄 알겠지.”

가이젠이 페르라고 지목한 아이가 사실은 루빈이었다는 걸 알면, 로젠탈러는 덤벼들지 않을 것이다. 대신, 잘못짚은 가이젠을 죽이겠지.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복면을 쓰고 있다면? 루빈의 말대로, 못 알아보고 당장 죽이려 달려들 것이다.

“야, 루빈, 진짜 괜찮겠어? 그놈 아주 무시무시한 놈이라니까.”

걱정스레 묻는 티나. 여기서 로젠탈러의 경지를 직접 확인한 건 그녀 밖에 없었다.

그러나 루빈한테서는 두려운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쿠제를 바라보며 또 물었다.

“쿠제, 엔조와의 암술 연구는 어때?”

로젠탈러와 싸우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 하나. 바로 새로운 암술 연구의 진척도였다.

‘엔조는 7할 정도라고 했었지’

랩소디관에 은신해 있는 엔조와 서점을 지키는 쿠제. 이 두 사람은 마적석을 통해 긴밀한 소통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루빈이 해주는 일은 며칠에 한 번씩 자신의 피를 유리병에 담아 전달하는 것뿐, 암술 연구의 전권은 두 사람에게 있었다.

“완성도는 8할 정도입니다.”

엔조의 분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어쨌거나 이 정도 속도라면 가까운 시일 내에 완성된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터.

“지금 말하고 있는 게, ‘그림자 장막’인가, 그거지? 루빈의 신기술.”

‘그림자 장막’. 그 이름을 처음 제안했던 건 쿠제였고, 루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보다 더 적절한 이름은 없을 것이다.

“벽 속에 상자를 만들어서 은신하겠다는 거, 맞지?”

“…개념은 맞습니다. 정확히는 벽만이 아닌, 거의 모든 지물이죠. 또 상자가 아니라 마나큐브고요.”

“그거나, 그거나.”

최근 티나가 맡은 역할은, 연구에 매진하는 쿠제를 대신하여 그의 모습으로 변신해 서점을 지키는 것이었다.

나 몰라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연구에 제법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는데.”

“……?”

“큐브인가 뭔가 하는 그 상자 안에 은신 공간을 만드는 거라면, 차라리 물이 아닌 공기만 존재하는 공간이 낫지 않아? 왜 힘들게 잠수한 상태로 은신하려는 거야?”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성질 변화’ 마법으로 일시적으로 고체를 액체로 만드는 마나큐브. 그 말은 곧, 은신하는 동안 루빈이 숨을 참아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자 쿠제가 끼어들었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뭔데?”

“효율성 때문이죠.”

이어지는 쿠제의 설명은 일목요연했다.

성질변화 마법의 특성상, 고체에서 기체로 ‘승화’시키는 것보다, 고체에서 액체로 ‘용해’시키는 쪽이 훨씬 마나를 절약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물론 1급 마적석을 사용하면, 이런 절약 따위 필요없겠지만.

“…그거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어?”

“사실 이거야말로 결정적인 이유인데요. 도련님은 암살검가의 습격에도 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

그 말에는 쉽게 납득하는 티나. 그녀 역시 암연을 지녔기 때문에 그리고 한때 척살조에 쫓기는 몸이이었기에, 저 말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만약 루빈이 은신하는 이유가 오러를 지닌 무인이나 마법사들에만 국한된다면, 티나 말처럼 그냥 마나큐브의 공간을 비워놓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루빈은 암살자들로부터도 은신할 수 있는 암술을 원했다.

암연을 지닌 한, 암살자들은 서로를 감지할 수 있다. 암연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해도, 자신의 근처에 암살자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또, 암연의 경지가 더 높을수록, 자신보다 낮은 경지의 암살자를 더 확실하게 감별할 수 있었다.

‘암연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건, 오직 킬리언 뿐이지.’

킬리언은 예외였다. 이 노년의 주정뱅이 암살자는, 암연의 경지 6성에 오르면서 다른 암살자에게 감지되지 않는 고유 특성을 개화했다. 본인 스스로 ‘혹한의 암연’이라 부르는 것.

그 외엔, 예외 없이 서로의 암연을 감지해낼 수 있는 게 바로 암살자들이었다. 그건 루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림자 장막’이라면?

암살자들에게 약간의 혼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울퉁불퉁한 표면에서 빛이 난반사를 일으키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마나큐브 속 가득 찬 액체로 인해, 암살자의 암연이 여기저기 굴절되어 투과될 테니까. 암연은 느껴지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끔 혼란시키는 셈이다.

“효과가 클까? 어쨌든 암연은 느낄 수 있는 거잖아? 대충 주변을 수색하면 바로 찾아낼 수도 있고.”

“그게, 그렇게 쉽진 않습니다. 암연이란 게, 다루기 굉장히 민감하고 예민한 힘이라서요. 조금만 뒤틀려도 수 킬로미터 범위의 오차를 만들어내거든요.”

“아, 맞다. 어렸을 때 훈련받으면서 배웠던 것 같기도 해. 물속에 숨으면 추적하기 힘들어진다고. 맞지?”

“비슷한 원리입니다.”

“오케이. 이해했어!”

때마침, 보던 책을 덮는 루빈. 어느덧 기숙사 점호 시간까지 1시간 남짓 남았다. 슬슬 학교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파닥파닥 정신 사납게 서점 내부를 날아다니던 티나가 혼잣말하듯 물었다.

“로젠탈러 그놈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지금쯤 칙명부 수장이랑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내일 있을 작전에 대해서 말이죠.”

“풉. 페르라고 생각하고 달려들었던 애가 사실 루빈이었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을까? 가이젠은 그 많은 애들 중에서 가장 결백한 놈을 고른 셈이잖아?”

“가이젠 교수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믿게끔 만들었기 때문이죠. 도련님이요.”

쿠제는 그렇게 대꾸하며 루빈을 쳐다보았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지, 대꾸하지 않는 그였지만.

“아무튼, 진지하게 작전 짜고 있을 걸 생각하니까 웃겨 죽겠어. 멍청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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