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셀록 (1)
‘오러’란 무인이 응집시키는 힘. 응집되지 않으면, 그저 무인의 육체 주변을 불안정하게 떠다니는 미약한 힘에 불과했다.
물론 그 자체로도 육체를 강인하게 만들지만, 응집 상태에 비하면 미약했다.
그래서 무인에게는 오러를 응집시킬 수 있는 매개가 중요했다. 그들이 오러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 좋은 무기를 욕심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비행하는 검, 비검. 저거였군.’
빙격뢰가 만들어낸 얼음 파편들. 그 틈으로 보이는, 노란빛으로 현현한 오러의 비행.
루빈이 놀라는 이유는 단순히 검이 주인의 손아귀로 날아든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저 비검, 오러의 섭리를 벗어났다.’
어떤 무기든, 몸과 떨어져서는 오러를 발현시킬 수 없다. 루빈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화살촉에 오러를 발현시킨 궁수를 보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위우우웅.
로젠탈러의 검은, 제 주인과 떨어진 상태에서도 분명 검신을 빛내고 있었다. 저건 로젠탈러의 능력이 아니다. 온전히 저 검의 능력인 것이지.
‘로젠탈러를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저런 대단한 검을 지닌 로젠탈러가 그만큼 위험해서? 아니다. 로젠탈러를 죽이고, 비검을 얻고자 함이었다.
비록 저것이 핏빛서리라는 영혼무구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루빈의 남은 한 손에 들리기에 충분했다.
‘지금 당장은 공격부터 막아야겠지만.’
그 순간. 루빈의 바로 등 뒤까지 도달한 검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루빈은 로젠탈러를 휘감았던 몸에서 힘을 풀고, 빠르게 뛰어올랐다.
애초부터 검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는 건 자명했다. 또, 로젠탈러를 방심하게 하려면 계산적으로라도 피를 보여줄 필요도 있었고.
검이 자신의 왼쪽 팔뚝을 스쳐 지나갈 정도로만 회피하는 루빈이었다.
쉬이이익.
비검이 살갗을 스치며 따끔한 통증을 남긴다. 직후 로젠탈러의 오른손으로 회귀하는 비검.
루빈은 피가 주루룩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팔뚝을 부여잡은 채, 로젠탈러에게서 뒷걸음쳤다. 그러곤 혼란스러운 척 연기했다.
“너, 로젠탈러였나?”
루빈이 복면을 벗으며 제 얼굴을 보여주었다.
“대답해! 로젠탈러냐고!”
로젠탈러도 제 검은 복면을 벗었다. 그의 표정 또한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가이젠, 이 새끼가!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가이젠?”
검신에 싸인 오러는 아직 스러지지 않은 상태. 그걸 바라보자니, 스친 상흔의 열감이 짙어지는 느낌이었다. 지지짓. 불에 그슬리는 듯한 통증에 어쩔 수 없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크윽. 가이젠이라니? 학교 안에 칙명부 사람이 더 있었던 거냐?”
루빈은 모르는 척 파고들었다. 로젠탈러를 압박해 나갔다.
“대답하시지, 로젠탈러.”
“제기랄, 집어치워. 네가 알 바 아니다.”
“몰라도 된다고? 장교육성위도 그렇고, 가이젠도 그렇고. 너희, 날 죽이려고 작정한 거냐?”
로젠탈러는 검을 다시 패검하곤 몸에 묻은 전투의 흔적을 털어냈다.
“루빈.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주… 빌어먹을 착오가 있었던 거지. 그래도 이렇게 나랑 검을 맞대봤으니, 너도 나름 괜찮지 않았나? 제법 수련도 됐을 테고.”
“뚫린 입이라고.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그래, 마지막엔 나도 깜짝 놀랐거든. 그땐 나도 정말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어. 뭐, 솔직히 좀 놀랐다. 애송이여도 본가의 혈통은 혈통이라는 건가.”
루빈은 잔뜩 구겨진 표정과 함께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다행이다. 놀랐다고는 하지만, 로젠탈러가 자신을 위험요소라고까지 인지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전투 내내 쌓여가던 궁금증이 해결된 것처럼 개운해 보였다.
하긴, 자신이 진짜 페르였다면 오히려 더 납득하기 어려운 싸움 내용이긴 했다.
“근데 너…….”
로젠탈러는 외투를 쥐어 들며 물었다.
“마법을 쓸 줄 알았던 거냐?”
빙격뢰를 말하는 것이다. 놈은 루빈이 칙명부에서 제공한 가짜 마나의 환을 지닌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페르가 무인의 면모를 보이는 게 말이 안 되듯, 루빈이 마법사의 면모를 보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피격당할 수밖에 없었던 얼음 파편들. 그리고 그것들을 몸 곳곳에서 뚝뚝 떼어내는 로젠탈러.
루빈의 말이 이어졌다.
“마적석이야. 가이젠 교수가 주더군. 무슨 일 있으면 쓰라고.”
“무슨 일 있으면?”
“그래, 나한테 말한 것보다 훨씬 강한 마법이 담겨 있었지만.”
“…가이젠, 이 개자식.”
“아마 너까지 죽이려 했나 본데.”
그때였다.
“……!”
두 사람은 주변의 공기가 뒤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살기?
조금 전까지 공터에 가득했던 살기는, 두 사람이 각자의 검을 거두면서 흩어진 뒤였다.
그런데, 아직도 살기가 떠돌고 있었다. 루빈과 로젠탈러, 고작 두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크르르르카!
크르르.
괴수의 소리와 함께,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로젠탈러로부터 튀어나왔다.
공터의 가장자리를 메우고 있던 해바라기 같은 놈들. 그저 독특한 식물인 줄 알았더니만, 그 정도가 아니었다. 얼음 파편을 뒤집어쓴 놈들이 괴수가 되어 깨어나고 있었다.
아주 기괴한 모습. 꽃잎 부위는 칼날이 되었고, 수십 갈래의 꽃술은 눈알로 빼곡이 변했다. 점점이 박힌 눈알이 얼마나 끔찍한지, 보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올라왔다.
스윽. 스윽.
크르크크!
이름도 모르는 식물형 괴수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물론 루빈도, 로젠탈러도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저 어이가 없었을 뿐이지.
“로젠탈러,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가이젠한테 한 방 먹은 것 같은데.”
“…….”
로젠탈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분노에 차 잔뜩 뻘게진 눈으로 괴수들에게 분풀이할 뿐.
그의 검신에서 뿜어지는 오러가 공간 전체를 진동시켰다. 그렇게 장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괴수들이 서걱서걱 쓸려나갔다.
‘오히려 잘됐군. 이참에 로젠탈러 놈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겠어.’
반면 루빈은 일부러 괴수들을 죽이지 않고 회피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그러면서 로젠탈러가 싸우는 모습을 찬찬히 분석해나갔다.
콰콰콰쾅!
스응! 스응!
공터가 울린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잔광이 번쩍거린다.
그에 맞서는 괴수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 자체만으로 위협이 될 놈들은 아니었지만, 베는 족족 땅속에서 계속 튀어나오고 있음은 달갑지 않았다.
죽으면 새로운 놈.
죽으면 새로운 놈.
가이젠이 제대로 준비한 모양이었다.
“제길, 지겨운 새끼들.”
“벌써 포기하는 거냐, 로젠탈러.”
“아니. 이놈들을 다 짓밟아도 가이젠 그 새끼를 죽이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릴 거라는 결론이 섰다.”
검을 내려놓는 로젠탈러.
“룰포한테 꾸중 좀 듣겠네?”
“닥치는 게 좋을 거다, 샌님아.”
그 말과 함께, 로젠탈러는 벽을 차오르며 절벽 위로 향했다.
끝을 맺진 않았지만, 5성 오러의 위용은 확실했다. 로젠탈러가 있던 자리엔 괴수들이 조각조각 난 채로 산을 이뤘다.
“…….”
낭떠러지 위로 펄쩍 도약한 로젠탈러는, 아래를 슬쩍 내려다봤다. 그러곤 괴수들의 공격을 피하는 데 급급한 루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보니까, 오러가 아니면 벨 수 없는 놈들 같은데. 네놈이 백날 베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뜻이다. 살고 싶으면 그냥 도망치는 게 나을걸?”
로젠탈러는 검은색 복면을 다시 머리에 둘렀다.
“뭐, 그냥 거기서 죽어줘도 나쁘지 않고.”
“로젠탈러, 잠깐만.”
“……?”
“네 검, 뭐라 부르지? 곧 죽을 목숨인데, 이름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호오, 진심인가 본데? 좋아. 새겨들어라. 이건 롭슨의 비검이다.”
그게 끝이었다. 로젠탈러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통로를 되짚어 돌아간 그가, 버섯을 이용해 다시금 나무뿌리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빈은 피식 웃었다. 나가자마자 서둘러 문을 닫아버리는 로젠탈러의 뒤처리가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냥 가주면 나야 고맙지.’
이제 연기는 끝났다.
청소의 시간이다.
로젠탈러가 충분히 멀어졌다는 걸 감지한 루빈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장 아공간 주머니를 펼쳐, 핏빛서리를 움켜쥐었다.
‘우선 상처부터.’
로젠탈러에게서 얻은 상흔이 욱신거렸다. 상흔이 잉걸불처럼 서서히 타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빈은 핏빛서리의 칼끝을 상흔에 갖다 대며, 한기를 불어넣었다.
사아아아아.
타들어가던 상흔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상처는 이걸로 해결했고.
“롭슨의 비검이라.”
장검이라는 건 아쉬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뛰어난 대장장이를 찾아야 했던 차였으니까.
1급 마적석으로 탐지 마도구를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라면, 롭슨의 비검을 단검으로 개량할 수도 있겠지.
‘의뢰를 받을 대장장이가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일감들이 쌓이고 있군.’
그때였다. 루빈은 식물괴수들이 뭔가 변화를 일으켰다는 걸 깨달았다.
“어라?”
크르르르.
상처를 억제하기 위해 핏빛서리로 만들어낸 한기. 거기에 식물괴수들이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제된 상태에서 놈들을 일깨운 게 ‘한기’라는 것도, 더 강한 한기일수록 강해지는 특성을 지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놈드르이 몸집이 커졌고, 칼날 역할을 하는 꽃잎과 줄기들은 훨씬 날카로워진 상태.
크르르카아!
스르르르륵. 스르르르륵.
이제 공터는 발 디딜 틈 없이 괴수들로 가득 찼다. 놈들은 사방에서 루빈을 에워싼 채로 다가들고 있었다.
‘차가운 게 그렇게 좋나? 언제까지 좋아하나 보자.’
한동안 쓰이지 않은 핏빛서리도 달래줄 겸.
‘이제 좀 제대로 해볼까.’
루빈의 첫 번째 순서는, ‘그림자 역장’이었다.
놈들의 움직임을 늦출 겸, 그리고 암술을 좀 더 연성할 겸. 루빈은 그림자 역장을 펼쳤다.
두우웅.
루빈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거대한 반구형의 암연. 암연의 돔이 만들어지면서 식물괴수들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붙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움직임이 자유로운 건 오직 루빈 뿐이다.
그 상태로, 땅속에 핏빛서리를 깊이 박아넣었다.
콰직.
그림자 역장, 핏빛서리, 흑칠의 오러…….
로젠탈러와 싸웠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제약을 두어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공간 전체에 핏빛서리의 울음이 퍼지고.
‘어머니의 모습이 다시 그려지는군.’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가 있었다. 회귀한 루빈이 선점하지 않았더라면 핏빛서리의 본래 주인이었을 세이렌.
전생, 로이넨 저택을 사수하던 그때.
달려드는 제국군을 일시에 제거하는 세이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녀 역시 지금 루빈이 그러하듯, 일부러 적군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었다.
그녀 역시 땅에 핏빛서리를 박아 넣었고, 한계 모를 혹한을 방출했다. 어머니를 향해 무기를 내지르던 제국군이 일시에 얼어붙었지.
파파파팟!
지금도 그랬다. 내게 적개심을 드러냈던 모든 것들을 얼려버린 것이다.
“…….”
혹한을 폭발적으로 방출한 루빈은 묵묵히 주변을 돌아본다.
그림자 역장을 거뒀지만, 식물괴수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얼음 그 자체가 된 것이다.
한기에 반응하는 특성조차도 결국 한계가 있을 수밖에. 임계점을 넘어간 혹한은 놈들을 죽일 뿐이다.
루빈이 땅에 박은 칼을 빼냈을 때, 얼어붙은 식물괴수들이 일시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이제 돌아가야겠네.’
루빈은 다시 아공간 주머니를 펼쳤다. 이제 나가야 할 때였다.
로젠탈러는 오늘 이 동굴에서 가이젠의 목숨을 거두진 않을 것이다. 살아나온 루빈을 본다면, 가이젠은 귀신이라 본 기분이 되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핏빛서리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
루빈의 눈이 저절로 부릅떠졌다. 아공간 주머니에 어떤 힘이 진동하고 있었다. 검을 집어넣는 루빈의 손을 단숨에 잡아채는 듯한 느낌.
‘설마.’
그 힘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건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주머니의 한쪽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
‘그리폰의 심장?’
루빈은 빛을 내는 푸른 구슬, 즉 ‘그리폰의 심장’을 바라봤다. 그리폰. 맹금류의 상반신에 커다란 날개를 지닌, 하반신은 범의 모습인 생명체.
그리고 전생에서는, 페르를 지키는 ‘푸른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적수.
그때,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회귀 전, 오스카가 이 자리에 있었구나.’
어떻게 페르 곁에 그리폰이 있었는지 내내 궁금했었는데, 이제 의문이 해결되는 느낌이 든다.
루빈이 먼저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원래대로였다면 페르는 ‘숨은 상인’ 베니테즈 교수에게서 그리폰의 심장을 얻었을 것이다.
전생에선 엔조가 감옥에서 탈주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가이젠의 계략은 동일했을 터.
칙명부의 사주를 받은 가이젠은 자신만 알고 있는 이 비밀장소로 페르를 데려왔을 것이고, 그렇게 로젠탈러와 페르의 싸움이 있었을 거다.
이 모든 게 전생에 실제 있었던 일의 순서였다. 다만, 지금은 루빈이 끼어들어 비틀었을 뿐.
‘여기가 그리폰을 출현시키는 장소였던 거야. 로젠탈러는 여기서 페르의 잠재력을 확인했을 거고.’
오스카는 마법을 사용해 로젠탈러를 상대했을 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리폰이 깨어난 거다.
‘페르가 아니라 루빈이어도 그리폰이 깨어났다. 다른 조건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건가?’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알아내리라.
루빈은 그리폰의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대로 놔두면 아공간 주머니 안에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대로 빼내어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는 루빈. 공터는 얼음 상태로 깨져버린 식물괴수들의 사체로 가득했다.
그리고.
피이이이잉.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큰 울림과 함께 그리폰이 깨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