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65화 (165/258)

제165화. 암살 명령 (1)

“나와 위더스푼 가문은…….”

엔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자신이 하는 말에 클로이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그를 압박해 오는 것이다.

“…각성의 사슬에 묶이기 전부터, 난 위더스푼 가주와 알고 지냈어. 그러니까 페르가 태어나기도 전, 내가 한참 어렸을 때였지.”

죽 이어지는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루빈 앞에선 거짓이 무의미해 보였으니까. 눈앞의 이 아이는 얼마든지 진위 여부를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별다른 대꾸 없이 묵묵히 이야기를 듣는 루빈.

…마침내 기나긴 이야기를 끝냈을 때, 루빈의 자세는 처음 그대로였다. 하지만 엔조는 자신을 억누르던 왠지 모를 압박감이 흩어졌다는 걸 알아챘다.

“하나만 물을게요.”

“……?”

“위더스푼 가문이 아저씨와 페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부속 섬’까지 준비해 놓고 있다면, 어쩌시겠어요?”

“뭐? 사실을 말하는 거야?”

“사실이라 가정해 보죠.”

“그렇다면…….”

뜸을 들이는 엔조의 모습에, 루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걱정하는 건 페르가 아니라, 아저씨입니다. 페르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을 갖췄으니까요. 하지만, 아저씬 아니죠.”

“…만약 그렇다면, 기꺼이 그곳에서 지내야겠지. 아메릭마나의 부속 섬이라면 안전은 보장된 셈이니.”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루빈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게 끝인가? 엔조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클로이, 그 아이는 무사한 건가?”

“네. 저도 친구가 된 아이를 직접 제거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다만?”

“아저씨를 위한 방책 하나 정도는 만들어둬야겠죠.”

방책? 엔조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루빈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려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위더스푼 가주한테 밀서를 보내세요. 아저씨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증표와 함께.”

“그건 어렵지 않아. 페르가 너한테 알려준 그 문양 있지? 신뢰의 문양 말이야, 감옥에서 네가 나한테 증명했던 거. 내가 그걸 알려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매큐언 위더스푼이야.”

“그 정도로 그를 신뢰한다는 거군요. 잘됐네요.”

“근데, 밀서의 내용은 뭐라 하지?”

“클로이에게 페르를 찾아가라고 해줘요. 시간은 2주 뒤, 장소는 이엘로스 가문의 영지. 그날 그곳에서 연회가 있을 텐데, 거기에 페르가 나타날 거라고, 그렇게 써주세요.”

“그게 단가?”

“네. 그게 답니다.”

“뭘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도 안 알려주겠지?”

당연한 소릴. 루빈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장한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던 검은색 로브를 벗고, 마법생도 로브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비밀장소를 나서기 전에 이렇게 덧붙였다.

“걱정할 거 없습니다. 로렌치니 가문과 위더스푼 가문. 두 가문의 결속을 강화해 줄 테니까 말이죠.”

* * *

-루빈.

“…….”

엔조의 비밀공간에서 나오는 길. 하네케가 불렀지만, 루빈은 대답을 미룬다. 그는 곧바로 기숙사의 제 방으로 돌아왔다.

반나절 만에 기숙사 방이 절반이나 비워졌다. 모두들 흉흉한 도시를 떠나 임시 피신한 것이다. 또, 남아있는 생도들 중 상당수가 내일 중에 카포티니를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하네케.’

마법사 로브를 벗으며, 루빈의 뒤늦은 대답이 이어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아요. 엔조의 말을 믿을 수 있겠냐는 거죠?’

하네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엔조를 믿을 수 있느냐는 것보다, 위더스푼가를 믿을 수 있느냐는 쪽에 가까웠다.

“…….”

이윽고, 엔조가 들려줬던 이야기를 떠올려보는 루빈.

엔조와 위더스푼 가문의 이야기는 클로이를 살리려는 엔조의 다급한 말소리로 채워졌다. 여차하면 자신 때문에 클로이가 죽을 수도 있었기에, 그는 진심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로렌치니 가문과 위더스푼 가문.

두 가문은 생각보다 인연이 깊었다. 페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친교를 맺어왔던 사이.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엔조 아버지 대에서부터 삼휘와 원휘의 차이를 메우며 우정을 쌓아왔던 것이다.

제국귀족과 평민 마법사 가문의 우정. 동화처럼 비현실적이지만, 클로이의 성정을 보면 납득이 가기도 했다.

클로이 성격은 제 아비 매큐언 위더스푼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리고 이 7성의 대마법사 역시 세간에서는 ‘이상주의자’라 불리는 부류.

‘매큐언의 이상주의자적 면모는 나중에 더 도드라지지만.’

루빈의 기억 속엔 ‘통합 마법학교 설립’ 같은, 마법사 사회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미래의 사건들이 있었다.

다만, 모든 휘식이 한자리에 모인 마법학교가 정말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소식만 들었을 뿐, 실제 학교가 설립되기 전에 루빈 본인이 죽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엔조가 들려준 말에 따르면, 매큐언 위더스푼은 ‘각성의 사슬’에 놓인 엔조를 한동안 비호해 주었다는 것이다.

최고의 마법명가 가주답게 그는 ‘각성의 사슬’ 개념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고, 그들 부자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각성의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것. 누구도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법사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는 방법이었다.

그에 따라, 매큐언은 엔조에게 아들을 카포티니로 보내라고 조언했고, 그 아이를 보호해줄 제 딸 역시 그곳으로 보냈던 것이다.

-정말 위더스푼 가문이 로렌치니 부자를 보호해 줄까?

‘클로이라면 기꺼이 그러겠죠. 매큐언도 그럴 것 같고요. 하지만… 모든 위더스푼이 그 두 사람 같진 않겠죠.’

-그래, 클로이의 두 오빠도 있고.

‘하지만 속도(屬島)에 자리 잡을 수만 있다면, 페르에겐 엄청난 기회가 될 거예요.’

루빈 얼굴에 떠오르는 만족스러운 미소.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하네케가 수염을 쓸어내린다.

-엄청난 기회…? 설마 자네, 위더스푼가를 페르의 수련장으로 생각하는 겐가?

만약 페르 혼자였다면, 감히 해볼 수 없었을 생각. 그러나 현재의 그에겐 반신의 지성체, 셀록이 있었다.

셀록의 존재가 증명하듯, 그는 단순한 삼휘 마법사가 아니었다. ‘선택받은 마법사’. 이전에 그런 자격을 부여받은 자는 무려 ‘사라진 대마법사, 글레이튼’이었다.

‘사실, 페르를 어떻게 대마법사로 만들지 고민이었어요.’

전생의 페르는 아비를 잃은 분노와, 암살검가를 향한 복수심으로 눈이 멀었었다. 이번 생에선 아비를 잃지 않는 대신, 스스로의 성장으로 대마법사가 되어야 했다.

-하긴, 셀록이 깨어났다 한들, 그가 마법을 가르쳐주는 건 아니니까.

‘셀록은 보호하는 역할, 아메릭마나는 마법을 가르쳐주는 역할. 그거면 충분해요.’

-흠. 그 말대로면, 아메릭마나 최초의 삼휘 마법사가 되겠는데?

‘대마법사의 탄생 이야기로는 적당하죠.’

하지만 위더스푼 가문 내부 정세가 어찌 흐를지는 루빈의 영역 밖이었다. 페르는 셀록 덕분에 위험해지는 일이 없다지만, 엔조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엔조를 위한 방책을 세워두겠다? 하지만, 2주 후 연회라면… 로젠탈러를 제거하기로 결정한 날이잖나.

하네케조차 짐작이 안 되는 모양이다. 대장군의 답답함이 전해졌지만, 루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날, 클로이 손을 잡고 춤을 출 생각이거든요.’

-뭐, 춤? 그런 농담으로 넘어가려는 겐가?

루빈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

한 가지 문제를 마음속으로 매듭짓자, 밀어두었던 다른 문제가 떠올랐다.

지금쯤 카포티니의 칙명부 안가에서 숨죽이고 있을 문제적 무인.

자신의 행동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을 로젠탈러였다. 틀림없이 놈은 자신이 룰포의 눈 밖에 난 건지 불안해하고 있겠지.

‘슬슬 방문자가 올 때가 됐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순환 경계 근무 중인 각 학년 교수들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이 길게 하품을 늘이며, 랩소디관과 허밍관 기숙사 사이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 * *

며칠 후, 한낮. 루빈은 기숙사를 나와 쿠제의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휴교 기간 중 기숙사를 나서려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교수들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아야만 나갈 수 있었는데, 그나마 루빈이었기에 몇 가지 절차를 생략할 수 있었다.

루빈이 마도무인이라는 것. 그 행선지가 마탑구역 경계에 위치한 본인 가문의 서점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루빈은 매일 이곳에 들러 수련에 열중할 수 있었다.

스으으으으으.

핏빛서리가 만들어낸 눈보라. 그 사이사이로 루빈의 인영이 점멸한다. 그의 검이 선을 긋고, 점을 찍으며 눈보라의 궤적을 멈칫거리게 한다.

이번 검투는 하네케와의 가상전투가 아니다.

루빈의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는 허공에 맺혀 있고, 그가 내지르는 검격은 한결같은 체구를 염두에 두고 있다.

로젠탈러. 루빈은 지난날의 전초전을 끊임없이 복기하는 중이었다. 로젠탈러가 미처 감추지 못한 전투 습관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며.

로젠탈러만의 보폭과 보법. 비검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그 윤곽을 드러내는 칙명부의 비전검술. 그때마다 언뜻언뜻 루빈의 시야에서 점멸하는 로젠탈러의 약점들.

로젠탈러의 가상전투 속에서 루빈은 지기도 했고, 이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훈련은 끝나지 않았다. 곧바로 다음 전투로 이어질 뿐.

사사사사삿.

루빈은 벽을 향해 뛰어들었다. 벽에 부딪치기 직전, 1급 마적석을 작동시키며 ‘그림자 장막’을 시전했다.

다음 순간, 그 몸은 벽과 충돌하지 않고 그 내부에 스며든다.

‘은신 기술로는 손색없지만, 여전히 전투 기술로는 부족하군.’

마나큐브 속, 몸을 웅크린 상태로 ‘그림자 장막’의 완성도를 되짚는 루빈.

그때, 티나가 고양이의 모습으로 지하 공동으로 내려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양이처럼 냐아옹 울음을 연발하던 그녀는 대뜸 짜증이 났는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여기 없냐, 루빈!”

아까 분명 내려가는 거 봤는데, 착각이었나? 결국 루빈을 찾지 못한 티나가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이후, 그녀는 이번엔 쿠제를 데리고 내려왔다.

“봐봐, 없잖아.”

“흠…….”

쿠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루빈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핏빛서리가 일으킨 한기로 보아 방금 전까지 여기에 있었던 게 분명한데.

“쿠제, 그냥 우리끼리 밥 먹자. 원래 세이렌 그쪽 식구들은 식사 건너뛰는 게 수련이라니까?”

그런데 그때, 벽에 스며들어 있던 루빈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스스.

쿠제와 티나 관점에선 벽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것이었으니 제아무리 암살자라 해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티나는 고양이 모습으로 펄쩍 뛰어오르며 울어댔다.

“너, 진짜!”

“도련님! 그림자 장막 속에 계셨군요.”

새로운 암술을 몇 번인가 봤지만, 두 사람 다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나큐브 내부가 액체로 변하면서, 아무리 암연을 펼쳐도 감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우리까지 놀래키진 말자. 벽에 들어갈 때, 쪽지라도 붙여놓고 가든가!”

피식 웃는 루빈. 손으로 머리를 적신 물을 털어낸다. 물이 제 쪽으로 튀기자 티나는 또 껑충 뛴다.

“그래도 배는 고팠나 보네. 밥 이야기 하니까 나오는 거 보니.”

“…그게 아냐, 티나.”

“배고파서 나온 거 아녔어?”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 그래서 나온 거야.”

“서점 손님?”

티나는 장난스레 물었지만, 그 옆에 서 있던 쿠제는 알고 있었다. 루빈이 느꼈던 걸 그 역시 뒤늦게 감지한 것이다.

넓게 펼친 경계용 암연 위. 골목을 걸어 이쪽으로 오는 인영 하나가 있었다.

“암연을 지닌 자입니다.”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 네가 환혈족인지 모르는 암살자니까 조심해. 로이네크로우로 변신해서 떨어져 있는 게 낫겠어.”

그 말에야 심각해진 티나가 진지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곧 세 사람은 계단을 올라 서점으로 나갔다. 티나는 루빈의 지시대로 로이네크로우로 변신하여 카포티니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누구일까요?”

“칙명부의 암살 명령을 받은 암살자겠지.”

“암살 명령이라면… 그 대상은…….”

“로젠탈러밖에 더 있겠어?”

“도련님은 이렇게 흘러가리라고 예상하셨군요.”

로젠탈러가 일을 키워도 너무 키워버렸으니까.

야외 수업 때 제 모습을 드러냈다면, 가이젠을 죽여서는 안 됐다. 만약 죽일 수밖에 없었다면, 죽음을 위장했어야 했다.

벌써 카포티니의 마법교수 살인사건은 인근 도시까지 널리 퍼진 뒤.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룰포가 마음을 결정하는 데 몇 시간이나 걸렸을까.

모르긴 몰라도, 로젠탈러 제거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시간을 가장 오래 잡아먹은 건, 황제 알현일 터. 그걸 빼면 모든 건 순식간에 결정됐을 것이다.

‘그런데… 로젠탈러는 도련님의 목표인데?’

생각이 거기에 닿은 쿠제의 시선이 루빈에게 향했다.

칙명부가 암살자를 배정했다면 루빈의 계획이 틀어지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걸 예상했던 건지, 루빈은 태연하기만 했다.

“누가 오든 달라지는 건 없어. 로젠탈러는, 내가 혼자서 제거할 거니까.”

바로 그때.

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리며 방문자가 들어왔다. 자연스러운 기품이 배어나는 중년의 귀족. 그는 루빈과 눈을 마주쳤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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