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폭죽 소리가 가까스로 닿는 곳 (1)
“…루든?”
클로이가 손을 내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루빈을 불렀다.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떴지만, 틀림없다. 차분한 발소리를 끝내며 그녀 맞은편에 서는 흑발의 마법생도.
셀레스네조차 숨을 턱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그녀가 연회장 내부에 설치해둔 나팔꽃 모양의 마도구. 그건 움직임을 잡아내는 휴대용 마도구인데, 루빈의 움직임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루든 도련님, 여긴 무슨 일이죠?”
그러나 루빈이 페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먼저 밀회의 이유를 밝혀야 하는 쪽은 페르였으니까.
“무슨 일이긴, 파티에 왔지. 달리아를 축하해 주러.”
역시 우연인 건가?
그러면서도 셀레스네 눈빛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분명 내부에 펼쳐놓은 마도구뿐만 아니라, 외부의 결계 역시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들어왔다는 거지?
그때, 루빈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시간을 착각한 건가. 왜 아무도 없는 거지?”
“루든, 정말로 연회 때문에 온 거 맞아?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니야?”
“다른 이유라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누굴 기다리고 있었거든.”
클로이가 루빈 쪽으로 걸어 나갔다. 셀레스네가 멈춰 세우려 했지만, 클로이는 팔뚝을 붙잡는 시녀의 손을 부드럽게 내렸다.
“셀레스네,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아가씨, 하지만…….”
또각또각. 클로이의 구두 소리가 울린다.
클로이가 루빈을 향해 다가갈수록, 나팔꽃처럼 생긴 마도구가 그녀 움직임에 반응한다. 나팔꽃의 꽃잎이 어둠 속에서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뭐지? 마도구가 이번엔 반응하잖아. 왜 루든 도련님한테는 반응하지 않고?’
셀레스네는 불안했다. 왠지 모를 직감. 루빈과 클로이를 떨어트려 놓아야 할 것만 같았다.
평소 루빈에게 품어왔던 의문들이 적지 않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 의문들 중 단 하나도 증명해 보일 수 없었다.
루빈이 지닌 비정상적인 침착함. 공포라는 걸 모르는 것 같은 초연함. 측정되지 않는 무인의 재질….
증명할 수 없었기에 사그라들지 않던 의문들이었다. 그렇기에 셀레스네는 마법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루빈에게 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셀레스네가 화났나 보네.”
“…지금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어서, 셀레스네가 약간 긴장 상태야.”
한 걸음씩 다가가며, 클로이가 대답했다.
“응, 그렇게 보여. 그리고 클로이 너도 평소랑은 좀 다른 것 같고.”
“정말? 난 똑같은데. 드레스를 입어서 그렇게 보이는 걸 거야.”
“그러고 보니까 입학식 무도회 때 입었던 그 드레스구나.”
클로이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곤 루빈 맞은편에 섰다.
클로이로선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야 루빈과 눈을 맞출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보니, 왠지 더 신비롭게 다가오는 듯한 루빈의 검은 눈동자.
‘블루캣 호에서도, 학교에서도. 별별 일들이 다 있었네.’
이제 페르가 나타나면, 그래서 아메릭마나로 돌아가면 다시 볼 기회가 없기 때문일까. 문득 루빈과의 일화들이 떠올랐다.
블루캣 호에서의 우연한 동승, 악토니아라는 바닷속 신비로운 생물체를 목격했던 일, 잠수하는 배 안에서 밤새 보드게임을 했던 것, 그의 불안정한 마나를 다스려줬던 일… 그리고 필리몬드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2년까지.
그 외에도 많았다. 카포티니에서 우연한 재회. 이후에 알게 된 루빈의 놀라운 면모들…….
“루든, 나 갑자기 묻고 싶어졌는데.”
“……?”
“너는 왜 마법사여단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 거야? 장교육성위 시험에서 1등 했다며.”
“그건 대답해줄 수 없겠는데.”
“대답해줄 수 없다니. 내가 못 알아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미래 빼고는 알아내지 못할 게 없다’라는 말 알지?”
루빈은 가볍게 웃었다.
“제국귀족의 권세를 경외할 때 쓰는 표현이지.”
“그래,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지만 클로이. 위더스푼 가문이라 해서 모든 걸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야.”
루빈이 클로이의 말을 잘랐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위더스푼 가문조차 접근할 수 없는 진실들은 너무도 많다.
어떤 진실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목덜미에 검날이 겨눠지는 법이다. 이를테면 암살검가의 실체에 접근하는 경우처럼.
“클로이. 아까 누굴 기다린다고 했었지. 그게 누구인 거야?”
클로이는 싱긋 웃었다. 그러면서 방금 전 루빈이 했던 말을, 그 목소리를 흉내 내며 돌려줬다.
“그건 대답해줄 수 없겠는데. 어때? 한 방 먹었지?”
그러면서 클로이는 고개를 돌려 뒤편의 셀레스네를 바라봤다.
“셀레스네, 아직이야?”
셀레스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의 결계는 여전하다. 아직 페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도대체 페르는 어디에 있는 거지? 혹시나 위험해진 건 아닐까. 그러다 불현듯, 어쩌면 엔조의 편지가 가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안하지만, 루든. 지금 내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결계에 감지되면 그땐 네가 자리를 피해줘야 해.”
클로이가 다시 루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빈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사람인가 보구나. 아니면 부끄럼쟁이거나.”
“부끄럼쟁이? 음, 그건 모르겠는데.”
농담이 재밌는지 클로이가 풉, 웃음을 참았다. 그때 이어지는 루빈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나직했으며 견고했다.
“혹은, 인생 대부분을 도망치며 살아온 사람이거나.”
“……!”
클로이는 눈을 크게 떴다. 도망치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페르를 말하는 건가? 눈앞의 루빈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때였다. 클로이를 더욱 혼란하게 할 말들이 이어졌다.
“클로이. 카포티니에서 다시 만났을 때, 기억나지?”
“무도회장에서?”
“그때와 똑같이 해볼까 하는데.”
“…춤을 추자는 거야, 루든?”
루빈은 부드럽게 웃는다. 고개를 내저으며.
“방음막을 말하는 거야. 너의 마법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견고한 방음막.”
그제야 클로이의 머릿속에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입학식 무도회장에서, 죽은 줄 알았던 루빈을 발견했던 클로이. 먼저 다가가 춤을 신청했고,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방음막을 직접 만들었었다.
“뭐, 여긴 연회장이니 춤을 추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러면 인사할 때마다 춤을 추게 되는 거잖아.”
“인사할 때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되묻자마자 이해가 됐다. 자신이 카포티니를 떠나 아메릭마나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루든은 알고 있는 거야.
피이이잉.
클로이는 루빈의 요구에 곧바로 따랐다. 견고한 방음막이 만들어지면서, 이제부터 두 사람의 대화가 비밀에 잠겨들었다.
“루든. 방금 했던 그 말들… 뭘 알고 하는 거야?”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 그에 비해 루빈의 목소리는 너무나 단단했다.
“페르에 대해.”
“…그럼, 역시 네가?”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셀레스네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줘. 네 시녀까지 납득시키기엔 나한테 시간이 모자라거든.”
“셀레스네를?”
“응, 오늘은 내가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할 일이 많다는 것, 일상적인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전쟁을 앞둔 군인처럼, 왠지 모를 비장함마저 묻어났다.
‘내 말을 잘 따라줄까? 그렇지 않으면…….’
클로이를 설득시키기 위해 몇 마디 더 하려고 했다. 역시나 조금 망설이는 듯한 클로이. 설득을 위해 루빈이 입을 떼려는 순간, 클로이가 순순히 그의 부탁을 들어줬다.
“…아가씨?”
방음막에 이어 셀레스네를 밀어내는 결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피이이이잉!
두 사람 주위로 진공의 테두리가 나타났다. 테두리를 넘어 두 사람 쪽으로 접근하려는 사람은, 예외 없이 염동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염동괴제에 버금가는 재능이라더니.’
염동마법은 4원소 마법보다 상위의 마법.
걸음마를 떼기도 전, 클로이가 최초로 시전했던 마법이 바로 염동마법이었다. 위더스푼의 혈통을 기준으로 봐도, 클로이만큼 염동에 특화된 마법사는 없었다.
끼이이익. 끼이이익.
클로이가 염동을 계속 펼친다. 곳곳에 퍼져 있던 나팔꽃 모양의 마도구들을 종이 구기듯 구겨버린다.
“약속 장소에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으니, 이제 이런 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
“역시 넌, 이런 걸 보고도 겁을 내지 않는구나.”
이 정도로 위협적인 염동을 발현할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거나 무서워했는데. 그러지 않는 루든이 신기했다.
“네가 기다리는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또 다른 조건이 있는 거야?”
“위더스푼가만이 할 수 있는 마법을 해줬으면 해.”
“우리 가문만이 할 수 있는 마법……?”
“너도 알겠지. ‘위더스푼의 정언명(定言命)’이라고.”
또다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위더스푼이 대륙에서 유명한 건 틀림없지만, 이들만의 고유한 마법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까.
엔조가 알려줬나?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가능성이라면 그것뿐이었다.
아버지인 매큐언 위더스푼이 엔조에게, 엔조는 그의 아들인 페르에게 알려준 것이리라.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말고, 마법부터 시전해 줬으면 좋겠어, 클로이.”
“뭘… 어떤 약속을 바라는 거야?”
“페르 그리고 엔조의 안전.”
위더스푼의 정언명.
그건 말 그대로 조건 없는 맹약이었다. 대개의 맹약마법은 목숨(命)을 걸지만, 위더스푼가의 맹약마법은 좀 달랐다.
위더스푼에게 목숨이란, 다른 게 아니다. 바로 마법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마나의 환이었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시, 마나의 환이 얼어붙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위더스푼의 정언명’이 그들 가문의 자랑거리였다. 제국귀족이 되기 이전의 그들 말이다.
자신들의 마나의 환을 걸고,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선물하는 가문. 그 정도라면 ‘신의의 일족’이라 불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알고서 요구하는 걸까?’
문득 궁금해지는 클로이.
‘위더스푼의 정언명’을 통해 약속을 받아내는 것으로 안전이 보장될 수 있는 건 맞다. 그러나 사실, 이 맹약에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 약속을 파기할 수 있는 자들이 있으니까.’
다시 말해, 앞서 모든 약속을 없애버릴 수 있는, 정말로 절대적인 맹약을 지닐 수 있는 자들은 따로 있다는 뜻이다.
바로 황족이라는 존재. 그리고 1급 마적석.
“…….”
클로이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왼쪽 쇄골 위에 손을 얹었다. 갑자기 거기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모든 위더스푼은 태어나자마자, 쇄골 부근에 1급 마적석을 심도록 되어 있다.
황족만이 주인이 될 수 있는 1급 마적석을 몸에 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위더스푼의 정언명’을 제한하기 위함이다.
황족 아래 있는 모든 이들이 위더스푼으로부터 어떤 약속을 받아내든, 그건 황족 앞에서 무의미했다. 앞선 약속들을 무가치하게 만들 능력과 권리가 그들에겐 있었으니까.
‘그래서, 위더스푼 가주가 새로 나올 때마다 황제를 알현하여 ’위더스푼의 정언명’을 새로이 갱신하는 거지.’
위더스푼으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건 황족뿐.
그러나…….
만약 ‘숨겨진 황족, 루빈’이 정언명을 선점한다면? 그래서 엔조와 페르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면?
클로이는 루빈이 황족인지 모르고 있었다.‘위더스푼의 정언명’이 발현된 다음에야 깨닫게 될 터.
한번 발현된 정언명은 돌이킬 수 없으니, 영원한 맹약이 되는 셈이다. 황제 텔마흐가 아닌, 황족 루빈에 의해.
“알겠어. 너와 엔조의 안전을 보장해줄게.”
클로이는 루빈이 페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너’라고 표현했다. 이제까지 페르를 숨겨주고 보호해준 사람이 있었고, 그게 바로 루빈의 역할이라는 것까진 알지 못한 채.
“시작하자.”
루빈이 클로이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춤을 신청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위더스푼의 정언명’의 절차였다.
클로이는 자신의 오른손을 루빈의 왼손 위에 올렸다. 뒤편에서 그 내막을 알 리 없는 셀레스네가 그녀를 다급히 부르며 소리치고 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나 클로이 위더스푼은 ‘위더스푼의 정언명’에 따라 엔조 로렌치니와 페르 로렌치니가 안전해질 수 있도록…….”
정언명의 기나긴 주문이 외워지는 동안.
루빈은 클로이의 염동에 의해 둥둥 떠다니는 연회장의 사물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그의 시야에 흉내 내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수십 겹의 원이 그려졌다. 정언명의 휘식이 비로소 발현되는 것이다.
이제 클로이는 엔조와 페르를 지키지 못했을 때 마나의 환이 반영구적으로 얼어붙는다.
물론 그런 참사가 일어난다 해도 최악은 아니었다. ‘정언명의 권리’를 지닌 루빈이 죽지 않는 한, 언제든 자신이 채운 족쇄를 없애줄 수 있으니.
‘이제 내가 황족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자신의 쇄골 아래 심어진 1급 마적석이 반응하는 걸 깨닫는 클로이.
쇄골에 피어나는 아득한 통증. 처음엔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녀로서도 ‘위더스푼의 정언명’을 시전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으니까.
“……!”
이제 통증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내려와 심장 부근의 마나의 환까지 닿더니, 일순간 마나의 환에 파장을 일으켰다.
클로이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루빈이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을 터였다.
그녀가 일으켰던 결계와 염동도 모두 멈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물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가씨!”
결계가 사라졌기에 셀레스네가 그들 쪽을 다가올 수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루빈을 향해 공격할 태세였다.
클로이가 중얼거렸다.
“루든, 네가, 네가 정말로?”
“클로이, 나는 페르가 아니야. 하지만 페르와 엔조를 보호하고 있지.”
루빈은 그녀가 다시 중심을 잡고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셀레스네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지만, 클로이가 손을 내저어 다시 물러나도록 했다.
“셀레스네, 루든과 이야기를 마저 끝내야 해.”
“…아가씨!”
“이젠 내 목숨이 달린 일이야!”
위더스푼가에게 마나는 목숨과 같기에, 그리 말해도 어색한 부분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페르와 엔조에 대해 얘기해줄게. 네가 나와 절대적인 계약을 맺어줬으니.”
클로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계약이라니? 계약이란 서로 ‘동등한 입장’일 때 맺는 거래를 뜻한다.
하지만 ‘위더스푼의 정언명’은, 엄밀히 말해 ‘충성 서약’에 가깝다. 한쪽이 한쪽에게 종속되는 일종의 서약인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들을 준비 됐어, 클로이?”
그러나 눈앞의 루든은, ‘위더스푼의 정언명’을 절대 악용할 마음이 없다는 듯, 순수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