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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검가 로이넨-171화 (171/258)

제171화. 폭죽 소리가 가까스로 닿는 곳 (3)

“아버지, 이제 어쩌죠?”

“도대체 어떤 놈이 우리 초대장을 위조한 건지……!”

원래대로라면 연회장의 메인 홀로 쓰였을 장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주최 가문의 두 가주와 가신들 그리고 연회의 주인공인 에릭과 달리아였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좋을 수가 없었다. 건물 바깥에서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지는 중이었다. 그럴수록 내부의 사람들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모를 위조 초대장이 카포티니 곳곳에 뿌려졌다. 그 결과, 천여 명의 인파가 가문의 정원을 가득 메워버렸다.

“일단 대책을 세워보자, 대책을…….”

이엘로스 가주가 이마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별다른 대책이랄 게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수밖에. 연회를 파하든가, 지금부터라도 바깥의 인파까지 수용하는 연회를 급조하든가.

“집사장! 현재 귀빈들은 어디에 있지?”

“귀빈들께선 저택 객실들에 흩어져 대기 중이십니다.”

귀빈, 즉 진본 초대장을 받았던 백 명의 참석자들. 조용하면서 부드러운 연회를 예상하고 연회장에 도착했던 그들은 넘쳐나는 인파에 질색했다.

“몇몇 분들은 크게 화를 내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평민들도 섞여 있다 보니.”

“당연히 그러겠지…….”

“아버지, 평민들을 골라내어 그들만 내치고 연회를 시작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가만있던 에릭이 호기롭게 나선다. 너무 형편없는 의견이어서 가주는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이 멍청한 놈! 바깥엔 카포티니 행정부 사람들과 마법학교 교수들이 있다. 심지어 우리 가문과 각을 세우던 키건 교장도 와 있단 말이지!”

“…….”

“그런 상황에서 평민들만 골라내서 내쳐? 가문의 위신을 얼마나 떨어트리려고 그딴 생각을 내놓는 게냐!”

학교에서는 교수들조차 어쩌지 못하는 데다가, D반에는 그를 추종하는 생도들로 가득했던 에릭인데. 여기선 가주의 호통 한 번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죽은 채로 물러나는 그 모습에, 옆에 있던 달리아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때, 델린가의 가주가 나섰다.

“이엘로스 가주님. 일단 삼십 분, 아니 한 시간 정도 연회를 미루도록 합시다.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서, 전부 다 수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 그게 최선이겠지요. 다행히 천 명 규모의 행사도 곧잘 했으니, 가신들도 잘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집사장!”

집사장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가주님, 말씀하시지요.”

“영지에 있는 모든 관리인과 인부들 소집해, 지금 당장! 저 많은 인파를 통제하고 한 시간 안에 연회를 시작해야 하니깐. 경계병들도 최소한만 남기고 다 모이도록 해.”

“그런데 가주님, 만약 영지의 다른 곳에서 사고라도 터지면 즉각적으로 대처하기 힘들 겁니다.”

“지금 이만한 사고보다 더한 게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럴 리는 없겠죠. 알겠습니다.”

집사장이 가주에게 몸을 숙인 뒤, 곧장 건물 밖으로 나갔다.

다음 문제는 귀빈들을 어떻게 달래느냐는 것이다. 백 명의 귀빈들은 두 가문이 엄선하고 엄선한 자들이었다. 대륙 서부권에 한해,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명망있는 자들이었다.

그중엔 이엘로스가보다도 지체 높은 자들도 여럿이었다. 지금 이엘로스 저택에 대기하면서 갖은 불만을 토해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엘로스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 연회에 참석한 게 아니었다. 혹시나 클로이 위더스푼을 영접할 기회라도 있을까 싶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던 터다.

생각이 제국귀족에게까지 미치자, 이엘로스 가주는 제 아들을 호명했다.

“에릭!”

“예, 아버지.”

“클로이 위더스푼 영애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혹 실망하여 돌아가신 게야?”

“…….”

“몰라?”

이엘로스 가주가 또다시 눈을 부라렸다. 장교육성위의 예비 후보가 되었다 할지라도, 가주에게 에릭은 그저 성에 차지 않는 아들이었다. 주홍빛 머리칼만 물려받았을 뿐,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옆에 있던 달리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녀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가만히 다듬으며 눈짓으로 발언권을 요청했다.

“할 얘기가 있으면 하지, 달리아 양.”

이엘로스 가주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아가 감사를 표하고 입을 열었다. 클로이를 높여 말해야 하는 부분에선, 자기도 모르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클로이 위더스푼 영애…께선 언덕 위에 대기하고 계십니다. 제국군 경호부대와 함께요.”

“흠, 그런가.”

가주는 에릭이 대답하지 못한 걸 대신 대답하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달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이엘로스 가주님,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

“불만이 쌓인 귀빈들의 마음을 녹이고, 그들 머릿속에 오늘의 연회를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길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뭐지?”

“제가 클로이 위더스푼 영애께 간청하겠습니다. 귀빈들께 이 상황을 설명해주고, 그들 마음을 달래 달라고 하겠습니다.”

“…허.”

제국귀족한테 부탁해서, 귀빈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자고?

그야말로 어처구니없었다. 도대체 어떤 머릿속에 뭐가 들었기에 이딴 생각을 내놓을 수 있는 거지? 머저리 같은 아들놈보다 더한 것 같았다.

물론, 제국귀족에겐 그만한 힘이 있다. 더구나 대륙의 다섯 제국귀족 중에서도 유난히 인기가 많고 권세가 강한 위더스푼가였으니.

그 유명한 마법 천재이자 위더스푼가의 하나뿐인 영애. 그녀 말 한마디면,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는 귀족들 따윈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마치, 성난 고양이들을 진정시키자고 잠자던 호랑이를 깨우는 셈이 아닌가?

연회에 인파가 몰아쳤고 평민들까지 뒤섞인 마당에, 제국귀족의 지금 심기가 어쩔 줄 알고?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군.”

그래도 델린 가주도 옆에 있고 그 가신들도 지켜보는 자리이기에, 이엘로스 가주는 분노를 감추었다. 만약 에릭의 의견이었다면 또다시 호통을 쳤을 거다.

“자신 있습니다, 가주님.”

달리아가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라도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내놓을 것 같은 태도였다.

이 아이가 정말 제국귀족과 친구라도 됐다고 생각하나? 아무리 마법학교에서 같은 학급에 있다지만, 이토록 판단력이 어두울 줄이야.

“달리아 양, 지금 이 자리는 그렇게 경거망동할…….”

이엘로스 가주는 도중에 말을 멈춰야만 했다. 누군가가 연회장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고, 뒤를 잇는 한 무리의 발소리.

‘클로이 위더스푼?’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제국군 장교가 앞서 걸었고, 그 뒤로 클로이가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났다.

두 가주를 비롯한 사람들이 또다시 클로이를 마주하기 위해 우르르 그녀 앞에 섰다.

모두들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참다 참다 꾸짖으러 온 것으로 보였으니까.

“보아하니,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 같네요.”

“…그게, 말씀드리기 죄송하오나…….”

클로이가 이엘로스 가주의 말을 자르며, 눈길을 달리아 쪽으로 옮겼다.

“달리아, 설명해줄 수 있어?”

“아, 그러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연회장의 참석 인원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연회 시작이 잠시 지체되고 있습니다.”

“그런 것 같네. 밖에 있는 사람들, 못해도 천 명은 될 거야.”

순간, 클로이는 루빈의 말을 떠올렸다. 이 연회장 규모로는 참석자 수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 했었다. 그렇다면 바깥의 저 인파도 결국, 루빈이 꾸민 일이라는 뜻.

갑자기 소름이 쫙 끼쳐왔다.

“위조된 초대장이 뿌려졌다 합니다.”

“역시 그랬구나…….”

“……?”

예상했다는 반응에 달리아가 의문이 담긴 눈으로 쳐다봤고, 클로이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수습하느라 정신없지?”

그때, 이엘로스 가주가 다시 몸을 낮추며 목소리를 내었다.

“위조된 초대장이긴 하나, 저들 모두 참석할 수 있는 연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옵니다.”

“이엘로스 가주. 일단 바깥에 있는 참석자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놀이 요소부터 제공하는 게 나을 거예요.”

“곧바로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예?”

클로이는 다시 달리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오히려 축하해줄 사람이 많아진 거라고 생각해, 달리아. 음… 그럼 나는 성격 급한 사람들이랑 방담이라도 나눠볼까?”

“무, 무슨 말씀이온지 이해가 잘…….”

“달리아, 내가 귀족들 모아놓고 상황 설명을 해줄게. 안 그러면, 연회가 어쩌고저쩌고 뒷말들이 많아질 테니까.”

달리아 얼굴에 안도하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는 당당하게 이엘로스 가주와 눈을 마주쳤다.

달리아가 나서서 클로이를 설득한 건 아니었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모르지 않았다. 클로이가 제 친구를 위해 나서주는 것이다.

“귀족들은 지금 저택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달리아.”

두 사람이 곧바로 연회장 건물을 나섰다. 클로이 뒤로 제국군 경호부대가 따라나섰다.

정원을 가득 메운 인파가 순식간에 갈라졌다. 제국군의 호위를 받는 마법사라면 소개조차 필요 없었으니까. 찰랑거리는 금발, 푸른 눈동자의 그녀를 향해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인파 속엔 마법학교의 생도들과 교수들도 있었다. 그들은 저택으로 향해 걸어가는 둘에게 선뜻 길을 터주며 눈짓으로 알은체를 했다.

인파에서 좀 벗어나, 저택으로 향하는 계단 위.

“달리아.”

“…네?”

“우리끼리 있을 땐 편하게.”

“알겠…어.”

“혹시 너, 오스카 봤니?”

사실, 달리아에겐 그럴 틈이 없었다. 일곱 시 이전까진 연회를 준비하느라 바빴고, 그 시각 무렵엔 예상치 못한 인파로 인해 대책 회의를 하느라 안에만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니 넌 그럴 시간이 없었겠구나.”

“오스카라면…….”

“봤어?”

“저기, 앞에 있는데.”

저택으로 향하는 계단 끝에, 오스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연회에 늦지 않으려 뛰었는지 연신 땀을 닦아내는 중이다.

“저번 입학식 때보다 멋지네.”

“그때 무도회복은 정말 해괴했는데.”

그들 모두가 친하지 않았던 시절이 떠올라 쿡쿡 웃었다.

“쟤, 누굴 찾고 있나 본데… 그게 누굴지 빤하다.”

달리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오스카는 주변을 열심히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자신의 룸메이트를 찾고 있으리라.

“어… 어? 어!”

오스카는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클로이와 달리아를 발견하고,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고 고아한 두 사람에게선 빛이라도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안녕, 달리아. 안녕, 클로이. 너희 진짜 예쁘다. 마법이라도 쓴 것 같아.”

귀족들의 어법과는 확연히 다른 솔직한 반응. 클로이는 풉, 하고 웃었다.

저 아이가 페르란 말이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입으로 막으며, 클로이는 생각했다. 그토록 찾고 있던 페르가 바로 앞에 있다.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판을 만들어 놓은 루빈의 존재가 클로이로 하여금 느긋하게 해주었다.

“오스카, 너 춤 연습 많이 했다며?”

“춤 연습을… 내가…? 모르나 본데, 나 사실 귀족 춤 같은 건 기본적으로 체득해 놔서 연습이란 걸 해본 적 없어.”

“그래? 아까 루든이 그렇게 말하던데.”

“루든이 왔어? 어디 갔어, 그놈!”

루빈의 참석 유무는 오스카뿐만 아니라 달리아도 궁금했던 것이다.

연회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커져버리면서, 이러다간 연회가 끝날 때까지 루든의 얼굴 한번 못 볼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클로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발걸음을 뗄 뿐이다. 루빈에 관해서라면,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애매했다.

“음,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달리아, 얼른 가자. 이러다간 떠나는 귀족이 생길 수도 있어.”

그러고는, 오스카를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오스카, 이따가 봐.”

그 말 한마디에, 오스카는 씩 웃었다. 이제 루빈이 어디에 있는지는 덜 중요한 문제가 됐다. 이기적으로 혼자 돌아다니는 룸메이트보다, 클로이의 마지막 말이 훨씬 중요했다.

“지금, 클로이가 ‘이따가 보자’고 했지. 설마 나랑 춤출 생각인가? 아닌가? 아냐, 아닌 게 아니지. 왜냐면, 아까 춤 얘기도 했잖아? 그럼 그런 건가?”

오스카는 입이 귀에까지 걸린 채로, 정원을 향해 내려갔다. 정원에서는 마법학교의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흉흉했던 시절을 마감하고, 축제를 기다리며 마주하는 얼굴들. 모두 활짝 웃고 있었다.

산적 같은 키건 교장, 온화한 베니테즈 교수, 살벌한 솔라나 교수, 밀가루를 선사했던 에겔러 교수까지.

하지만, 한 시간쯤 지나 연회가 시작한 뒤에도 루든은 그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 * *

버려진 지하창고의 심층부.

타닥, 타닥, 타닥…….

루빈은 타오르는 불을 바라본다.

지금쯤 연회장은 자신이 위조 초대장으로 벌인 일을 잘 수습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클로이가 달리아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을까. 그런 예감이 들었다.

오스카는 열심히 연회장을 휘젓고 있을 것이다. 산해진미를 맛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성공한 두 마법사 가문의 축제이니, 화려한 마법들도 많이 펼쳐지겠지.

루빈의 머릿속에선 연회의 다양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모두 상상이었고, 결코 그가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상상도 상념도 끊어내는 루빈.

‘드디어 왔군.’

넓게 펼친 암연의 테두리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온다. 추격전을 벌이는 것 같다. 그중 앞선 자는 티나일 것이고, 쫓는 자는 로젠탈러일 것이다.

이제는 불을 끄고,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바닥의 흙을 쥐어 불 위에 떨어트렸다. 파스스스, 소리와 함께 불이 꺼지고 어둠이 짙어진다.

루빈은 아공간 주머니를 펼쳤다. 오른손을 뻗어 핏빛서리를 움켜쥐자.

스아아아아아.

핏빛서리가 울며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루빈의 안광도 잠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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