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폭죽 소리가 가까스로 닿는 곳 (4)
‘흥! 엉큼한 놈, 모르는 척 따라오기는.’
말을 빠르게 몰고 있는 엔조.
실은 엔조가 아닌, 그로 변신한 티나였다.
연회장을 나온 지 20분. 그녀 뒤로는 적당한 거리 차를 두고 따라오는 로젠탈러가 있었다. 저놈은 자신이 미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역으로 유인에 말려든 꼴이었다.
그러기까지, 티나는 연회장에서 일부러 얼굴을 보이며 놈을 자극해야 했다.
‘하여간, 루빈 이놈은 쓸데없이 섬세하다니깐.’
엔조로 변신하기 전, 로젠탈러가 먼저 목격했던 건 죽은 가이젠의 모습이었다. 가이젠을 닮은 남자로 먼저 변신하라는 건 루빈의 생각이었다. 녀석을 자극하려면 그 순서가 더 효과적일 거라나 뭐라나.
‘그래선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일단 유인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됐지!’
어려울 건 없었다. 엔조의 얼굴을 알고 있는 건 오스카뿐인데, 오스카는 연회장에 늦게 도착했으니까.
게다가 외부인이 말을 타고 막 돌아다녀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만큼, 영지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영지를 가로지르는 연회 참석자들도 더러 있었고, 하인과 관리인들 역시 연회에만 집중하는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슬슬 추격전을 벌일 때가 됐나.’
티나는 루빈이 준비해놓은 표식들을 하나씩 발견해 가면서, 속도를 높일 시점을 정했다. 빨간색 표식 다음엔 노란색, 노란색 표식 다음에는 초록색.
그리고 이제부터.
두두두두두두두.
“……!”
티나가 갑자기 말의 속도를 올렸다. 말이 신나게 울어 젖히며 로젠탈러와 거리 차를 벌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뒤를 슬쩍 돌아보니, 로젠탈러도 말의 속도를 올려 따라붙고 있었다.
이제 저놈은 이렇게 생각할 터였다. 엔조가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도망을 시작한 거라고.
‘보인다!’
버려진 창고가 나왔다.
티나는 서둘러 말을 멈춰 뛰어내렸다. 그냥 가도 되지만, 말의 머리를 한쪽 방향으로 끌어내고 말 궁둥이를 힘껏 갈겼다.
로젠탈러는 성격이 더럽기 그지없는 무인. 괜히 가는 길 앞에 거치적거리다간 애먼 목숨을 날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 쓰레기한테 걸리기 전에 얼른 도망가라!’
두두두두두.
로젠탈러를 태운 말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티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루빈이 만들어놓은 입구를 찾았다.
다행히 로젠탈러가 말에서 내리기 직전에, 입구를 발견했다. 그녀는 바위틈으로 냉큼 몸을 밀어넣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쉬워진다.
‘흠, 뭐로 변하지? 쥐…는 안 돼. 로젠탈러 저놈은 쥐를 혐오하는 것 같으니까.’
가이젠의 집에서, 로젠탈러가 거슬리는 쥐들을 마구잡이로 죽여 댔던 장면이 떠올랐다. 결국, 쥐 대신 티나가 택한 건 원숭이였다.
피이이이잉.
우끼끼! 우끼끼!
원숭이로 변한 티나는 루빈이 기다리는 심층부로 풀쩍풀쩍 내려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로젠탈러 역시 안으로 들어왔다. 놈은 망설이지 않았다.
엔조가 시야에서 벗어났지만, 밑으로 내려갔으리라는 확신에 따라붙었다. 역시, 5성의 무인이었기에 두려워할 게 없는 것이다.
쿵! 쿵!
암살자의 유려함과는 거리가 먼 둔탁한 도약이 이어졌다.
그때, 티나의 시야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루빈이 나타난다.
‘보인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마지막엔 착지를 제대로 못 하면서 바닥을 나뒹구는 티나.
콰당!
“아야, 아파라…….”
“수고했어, 티나.”
어둠 속에서 루빈이 걸어 나왔다. 이 꼬맹이가 점점 강해질수록, 믿음직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둘은 짧은 눈 맞춤만으로 자세한 설명을 대신했다.
“이제 피해 있어. 최대한 안전한 곳에.”
이윽고.
쾅!
둔중한 울림과 함께 로젠탈러가 바닥에 착지했다. 아직 루빈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과 함께 주변을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와인이 담긴 수많은 오크 통들.
파지지짓.
그때.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무결하리만치 숨겨져 있던 인기척이 뒤늦게 감지됐다.
로젠탈러의 눈길이 불꽃 쪽으로 향하고, 거기엔 덤덤한 얼굴로 서 있는 루빈이 있었다.
“이게… 뭔?”
이제 시작이다.
로젠탈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나는 분명…….”
쫓던 대상이 엔조라는 걸 떠올리자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머릿속으로 연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여러 사실들.
지금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낯설지가 않다. 가이젠을 죽게 만든 그의 실수. 그 동굴에서도 지금과 비슷한 조우가 있었지.
‘그땐 페르, 이번엔 엔조…….’
그런데 그때에도 이번에도, 정작 마주하게 된 건 다름 아닌 루빈이었다.
로렌치니 부자를 붙잡는 줄 알았던 기대를 깡그리 깨부수는 놈. 우연이라기엔 지독히도 고약한 우연이다. 아니,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직감에, 로젠탈러는 분노로 몸이 들끓는 기분이었다.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린 연회장에서 접선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그러고서 그는 무인의 천성대로 루빈 손에 들려있는 무기부터 확인했다.
한눈에 봐도, 지난번 싸움에서와는 다른 단검이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예사롭지 않았다. 심지어 등에 착검해둔 ‘롭슨의 비검’이 반응할 정도다.
비검 정도의 보구는 적대적인 살기에 당연히 반응할 뿐만 아니라, 심상치 않은 무기도 알아차린다.
그 말은 곧, 롭슨의 비검에 준하는, 어쩌면 비검보다 뛰어난 무기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야, 살기가 짙다, 루빈.”
“당연하지. 널 죽일 거니까.”
“농담은 집어치워라. 암살 종자.”
그러나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도, 가면을 쓸 필요도 없었던 루빈은, 자신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알려주었다.
휘이이이이이.
짙게 떠도는 살기에 맞춰, 핏빛서리가 눈보라를 일으킨다. 맹렬한 혹한이 자신을 엄습하자, 로젠탈러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너한테 그만한 무기가 있었나?”
어쩌면 저거, 영혼무구가 아닐까.
파악하고 있던 정보와 달랐다. 물론 암살검가 본가 자제이니 세세히 파악해둘 수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이건 심각한 정보 누락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로젠탈러의 손이 등 뒤로 향했다. 비검을 쥘 수밖에 없었다.
“로젠탈러.”
루빈의 목소리가 혹한의 공기를 떠돌았다.
“룰포의 암살 명령이 내려왔다.”
“그 대상이 나라는 거냐?”
“아니었으면, 내가 이러고 서 있을까.”
피식,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는 말이다.
룰포가 암살 명령을 내리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 해도, 아직 암살 교육 중인 저 어린놈을 보냈을까.
“오늘 하루 날 웃기려고 작정한 거냐? 너를 돌보는 가신이 왔어도 믿을까 말까 할 장난인데 말이지.”
“그래?”
그 순간, 로젠탈러는 루빈에게서 방출되는 극렬한 암연을 느꼈다. 루빈은 임무를 더는 미루지 않았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럼 믿게끔 해줘야지!”
챙!
핏빛서리와 비검이 부딪쳤다. 검을 빼 들어 공격을 막은 로젠탈러는 루빈의 공격이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만 더 방심했다면,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었을 뻔했다.
“너 이 새끼, 정말로 미쳐버린…….”
말을 끊어내며 루빈의 공격이 또 이어진다. 암살검가의 검식이 연쇄적으로 쇄도했다. 공격을 막아낼수록, 로젠탈러의 머릿속은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때와 너무 다르잖아?’
동굴에서의 싸움. 그때 가늠했던 루빈의 경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때도 번뜩이는 공격들이 있었지만, 지금 이어지는 공격들은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막아내는 게 힘들 만한…….
푸슉!
일순간, 루빈의 검이 허벅지를 갈랐다.
로젠탈러는 인상을 구기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크흑, 제기랄! 다리를 내려다봤더니 바지가 피로 물들고 있다.
“이제부터는 더 진지해져야 할 거야, 로젠탈러.”
로젠탈러는 이미 진지한 상태였기에 불필요한 충고였다.
위이이잉.
비검의 검신에 샛노란 오러가 덧씌워졌다. 오러는 공기의 흐름을 또다시 바꾸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의 기압이 올라가고 있었다.
“루빈. 지금 나한테… 아주 이상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예감 하나가 떠올랐거든.”
로젠탈러는 단번에 다섯 겹의 오러를 드러냈다. 더 이상의 방심은 없을 거라는 경고였다.
“그 예감이 뭐냐면 말이지, 그날 동굴에서… 가이젠이 착각해 너를 데려왔던 게 아니라는 거야. 어쩌면 네가 가이젠을 정말로 착각하게 만든 게 아닐까. 뭐, 그런 기분 더러워지는 예감이다.”
“로젠탈러.”
“……?”
“그렇게 말하면, 내가 똑똑하다고 칭찬이라도 해줄 줄 알았나?”
“…뭐?”
“그래서 네가 멍청하단 소릴 듣는 거야. 너무 늦게 알아차렸잖아.”
이번엔 루빈 차례였다.
휘이이잉.
핏빛서리가 또다시 눈보라를 일으켰고, 그 눈보라 속에서 검신에 오러가 발현됐다.
흑칠의 오러. 똑똑히 보고 있는데도, 로젠탈러로서는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네가, 정말 네가 했던 짓이라고?”
엔조를 잃고 히탄을 죽이도록 했던 ‘협곡 감옥’의 탈옥 사태. 그곳에 남아있던 오러의 흔적!
모든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퍼즐이 맞춰질수록 드러나는 빌어먹을 그림. 모든 일들이 눈앞에 있는 암살검가 막내아들의 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단 하나만 빼고.
“…네놈들은 오러를 발현시킬 수 없을 텐데?”
당연하게도, 이어지는 대답은 없다.
파앗!
루빈의 공격이 이어진다. 이제부터는 단순한 검의 부딪침이 아니었다. 오러를 품은 검들의 충돌이었으니까.
콰콰쾅! 쾅!
땅이 울렸다. 와인 오크 통들이 일제히 들썩였다. 검의 궤적이 늘어났고, 섬광이 일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이었지만, 끊임없는 검의 부딪침에 너무나도 밝았다.
와인이 담긴 오크 통들이 펑 소리와 함께, 하나둘씩 터져버렸다. 와인이 쏟아졌고, 바닥은 적색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젖은 바닥 위에서 두 사람의 발소리는 거의 울리지 않았다. 운신의 경지가 모든 소리를 억누를 정도였던 것이다.
콰콰쾅! 쾅!
그런데 어쩌다 가끔,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이는 분명 전투의 흐름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럴 때마다 와인이 아닌, 누군가의 피가 한 움큼씩 쏟아졌다.
* * *
한편, 그 시각 연회장.
아주 멀지는 않은 어디에선가,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처절한 분위기와 상반되게 이곳은 축제가 한창이었다.
와아아아!
짝짝짝짝!
비록 예정보다 한 시간 반이나 늦게 시작됐고, 장소도 실내가 아닌 야외 정원으로 바뀌었지만 참석자의 여론은 아주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잔디 위에 서서 웃는 얼굴로 술을 들이켜는 참석자들. 간이 무대에 올라가 공개적으로 축하를 받는 달리아와 에릭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심지어 화를 냈었던 귀빈들조차 적극적으로 환호하는 중이었다. 클로이가 달리아를 위해 직접 나서준 덕분이었다.
“야전(野戰)에서 하는 급조된 축제 같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군.”
“에겔러, 이 늙다리 놈아. 제대한 지 언젠데 군대 얘길 하는 거냐?”
키건과 에겔러는 넓은 정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평소 이엘로스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던 키건조차 흡족한 표정이었다. 휘황찬란한 불빛들, 미소가 떠나지 않는 사람들.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참석자 숫자는 뜻밖의 효과로 나타났다. 그저 고고한 체하는 귀족가문의 연회를 넘어서서 도시 전체의 축제처럼 느껴졌으니까.
“교장님, 여기 계셨네요.”
베니테즈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얼굴이 살짝 불그레한 걸로 보아, 벌써 와인이라도 몇 잔 들이켠 모양이었다.
“뭐야, 너답지 않게 벌써부터 벌게져서는.”
“멋진 연회이기 때문이지요. 제국귀족부터 평민까지 모두 즐기는 축제라. 솔직히 저는 아까 연회가 엎어지나 했거든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 어찌 됐든 직간접적으로 마법과 관련된 사람들이잖아. 마법사들이 이리 많은데, 빛나는 축제를 꾸며내는 건 금방이지!”
그 말처럼, 마법사들이 모여 있으니 연회의 풍경은 훨씬 다채로웠다. 마법은 누군가와 싸울 때만 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현장이었다.
연회장 곳곳에서 눈과 귀를 사로잡는 마법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키건의 말이 이어졌다.
“베니테즈. 아마 며칠 안에 자네 학급 인원이 변동될 거야.”
“네? 갑자기 무슨.”
“달리아랑 에릭, 저 두 아이. 소속이 바뀌었거든.”
소속이 바뀌었다? 그 말을 읊다 보니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사여단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장교생도의 예비 후보였던 두 사람을 정식으로 차출하는 것이다.
“여기 오기 직전에 연락을 받은 거야. 아직 저 둘은 몰라.”
“마법사여단이 내부적으로 상황을 잘 정리한 모양이군요. 이제 카포티니에서도 고위장교가 나오겠는데요?”
“제국군 장교가 좋은 것만은 아닌데. 뭐, 저들 가문은 기뻐 날뛰겠지만. 그나저나, 루든 그 아이는 어찌 차출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거부할 권리 같은 게 없는 건데 말이지.”
“아, 그렇죠. 루든이 사실상 우승자였으니…….”
베니테즈는 생각난 김에 루빈을 찾아보려고 했다. 밤하늘 아래에서 펼쳐지는 축제였지만, 마법으로 인해 정원은 엄청나게 밝았다.
마법생도들의 면면이 보였지만, 어디서도 루빈은 찾아볼 수 없었다.
‘페르도 오늘은 혼자로군.’
저 아래쪽엔 혼자서 열심히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오스카가 있었다.
베니테즈는 클로이와 셀레스네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유일하게 오스카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 키건의 지시에 따라, 오스카를 카포티니로 데려왔었기 때문이다.
거의 언제나 오스카 곁에는 루빈이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입학식 땐 제국귀족의 춤을 못 봤는데, 오늘은 볼 수 있으려나.”
그때 또 한 명의 교수가 나타났다. 솔라나 교수였다.
“솔라나 교수님, 어서 오시죠. 교수님 말씀 들으니까 생각나네요. 저도 춤추는 클로이를 못 봤거든요.
“우리 모두, 선점 학생 정하느라 못 봤죠.”
“잊은 거 아니죠? 그때 루든이 마도무인인 걸 알고 있던 건 베니테즈 교수뿐이라는 거. 그래서 그 아이를 선점했었잖아요.”
“하하, 그건 오해입니다. 정말로요.”
“클로이 위더스푼이 그 루든에게 춤을 신청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설마요. 정말이지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믿어주세요, 솔라나 교수님.”
그들이 입학식 무도회 이야기를 하는 그때.
때마침 연회의 순서는 춤으로 넘어갔다. 다들 기대하는 눈으로 주변 사람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법을 활용해서 만든 간이 무대는, 이 많은 사람들이 둘씩 짝을 지어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또각또각.
“어라? 오늘도 클로이는 거침없네요. 이번에도 누굴 선점한 것 같은데요.”
솔라나 교수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클로이는 입학식 때처럼 이번에도 먼저 다가가 춤을 청하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상대를 누구로 할지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오스카, 나랑 춤추자.”
“…응? 나, 나?”
놀란 것은 오스카뿐이 아니었다. 이를 지켜보는 귀족들과 생도, 교수들은 벌어진 입을 가리기 바빴다.
“왜? 싫어?”
“아, 아니.”
오스카는 시뻘게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만큼은 그 모습이 우습지 않아 보였다. 그는 힘겹게 답했다.
“…클로이. 마법대련 하자는 것보다 더 무서운 말 같은, 끄윽.”
오스카는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꿈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눈을 비비고 볼을 꼬집어 봐도, 정말로 눈앞에는 클로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걱정할 거 없어. 너랑 춘 다음에 다른 친구들하고도 출 거거든. 그럼 너만 주목받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닌데.”
“음? 아, 춤 걱정이라면 내가 잘 알려줄 테니까 그것도 걱정하지 마. 그리고-”
그러면서 클로이는 오스카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춤추면서 너랑 나눌 진지한 얘기가 있거든.”
진지한 이야기?
오스카는 클로이가 내미는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그러곤 무대로 향하면서, 주변을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루든을 찾는 거지?”
“응, 얜 어디 간 거지?”
“두리번거리지 마. 어차피 걘 여기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 이후로 우리는 걔를 못 볼지도 몰라.”
“그건 또 무슨 말이고?”
그때, 클로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오스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얼른 내 눈을 마주치고 허리에 손을 올리기나 해. 음악이 시작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