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73화 (173/258)

제173화. 폭죽 소리가 가까스로 닿는 곳 (5)

티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감기지 않는 그녀의 민트색 눈동자. 거기에 반사되고 있는 것은 일정한 경지를 갖춘 자여야만 제대로 담을 수 있는 사투(死鬪)였다.

두 개의 검이 부딪칠 때에만 명멸하듯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루빈과 로젠탈러. 섬광을 일으키고 나면, 그들의 형체는 또 눈앞에서 사라지고 바람 소리만 남는다.

그런 직후에는, 빛 다음에 천둥이 치는 것처럼, 갑자기 오크 통들이 박살 나며 적색의 와인이 흩뿌려졌다.

“춥다, 추워.”

티나는 오들오들 떨었다. 원숭이로 변한 그녀의 몸은 강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꼴이었다.

다만 그녀가 뒤집어쓴 건 와인이다. 두 사람의 싸움의 여파로 깨지지 않은 오크 통이 드물었다. 거기에 루빈의 영혼무구가 만들어낸 혹한의 서리까지.

휘이이이이.

눈보라 속에서도 유일한 관람자인 티나는 눈을 빛냈다. 암연을 지녔기에 티나는 전투의 흐름을 대강 따라갈 수 있었다.

콰콰콰쾅!

‘내가 이런 걸 1등석에서 보게 되다니. 그나저나 루빈, 저 괴물 같은 놈…. 언제부터 저렇게 살벌했다니.’

티나로선, 전력을 다해 싸우는 루빈의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필리몬드에서도 그녀는 흑색구역에 들어가지 않았고, ‘협곡 감옥’에서 엔조를 탈옥시킬 때에도 따라나서지 않았으니까.

물론 길리필드 수목원에서 문제를 해결했던 기억으로 남다른 존재라는 건 의식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쿠제에게 루빈의 활약상을 전해 들었던 게 고작이었다.

‘여차하면 변신을 이용해서 루빈을 살리려고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잖아.’

오히려 몸을 사려야 할 쪽은 티나였다. 자칫 싸움에 휘말렸다가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루빈이 피해 있으라고 지시하기도 했고.

‘그런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네.’

이제는 이 결투가 어찌 끝날지 너무나 궁금했다. 순수한 궁금증이자, 승리를 갈망하는 도박사의 기대감이랄까.

절반의 확률보다 살짝 우위에 있는 듯한데, 판돈이 있다면 그녀는 루빈에게 걸었을 것이다.

그때.

“후우, 후우.”

“하아, 하아.”

두 사람이 잠시 검을 멈춘다. 들썩이는 몸에서는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작열하는 오러에선 공기를 뒤흔드는 울림이 이어진다.

찰박찰박.

가만히 발소리가 울린다. 오크통이 거의 다 박살 나면서 바닥 곳곳에 웅덩이가 만들어진 탓에 찰박거리는 소리.

피비린내도 진동했다. 웅덩이에 차오른 것이 와인이 아닌 피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짙은 피비린내였다.

피비린내는 누구에게서 나온 것일까. 루빈? 로젠탈러? 지켜보는 티나로선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유효한 검격의 순간은 찰나에 일어났고, 옆에서 보기엔 두 사람 다 피로 얼룩져있다. 루빈 역시 적지 않은 검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정작 사투를 벌이는 두 무인은 달랐다. 그들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누가 우위에 서 있는지, 누가 죽음에 내몰려 있는지.

그랬기에, 로젠탈러는 마음속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입가를 쓱 닦아내는 로젠탈러.

평생 동안 없어지지 않을 상처가 그의 뺨에 새겨져 버렸다. 흑칠의 오러가 스쳐 지나간 얼굴엔 마비가 일어나는 중이다.

영광의 상처, 따위가 되지는 않겠군. 그런 예감이 로젠탈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왜?

전투를 이어갈수록, 루빈의 역공은 더 교묘해지고 있다. 마치 시시각각으로 자신을 파악해가는 것처럼.

이전에, 고작 한 번의 검투만 있었을 뿐인데…….

지난번의 검투를 떠올리던 로젠탈러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저 새낀, 애초부터 모든 걸 계획했던 거였어. 지난번 싸움도 날 파악하기 위함이었고!’

그런데, 뭘 노리는 거지?

자연스레 뒤따르는 의문. 루빈이 페르와 엔조에 대해 알고 있었고, 칙명부의 계획들을 뒤엎으려 한다는 건 분명했다. 지금은 자신을 죽이려는 일념 하나로 목숨을 걸었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저러는 거지?

‘저놈이 원하는 건 내 목숨만이 아니다?’

로젠탈러는 조금 다른 각도로 루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유. 그 이유는 나를 이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나를 넘어서서 얻어내야 할 뭔가가 있는 거지.

‘저놈이 원하는 건 칙명부일까. 아니면 그 너머……?’

그 순간, 로젠탈러의 머릿속에 어떤 형상이 그려졌다. 칙명부 수장 룰포 곁에 있는 동안 딱 한 번 영접했던 존재.

대륙을 발아래에 두는 유일무이한 인간. 그저 로젠탈러는 저 멀리서 그의 그림자만 훔쳐봤을 뿐이었다.

“이봐.”

로젠탈러가 입을 여는 그때.

쿨럭!

입 밖으로 한 움큼의 피가 터져 나왔다. 제기랄. 전투의 균형추가 무너졌다는 걸, 이제는 감출 수 없게 됐다.

게다가, 말을 내놓았어도 루빈에게선 아무 대꾸도 없었다. 잠깐 멈추었던 사투를 다시 이어나갈 뿐.

찰랑…….

웅덩이엔,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서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파문만 남았다.

그리고 로젠탈러의 시야에, 서늘한 안광을 빛내는 괴물 같은 놈이 육박해온다.

콰콰콰쾅!

다시금 검의 부딪침이 이어졌다.

* * *

그 시간, 연회장.

고귀함을 자아내는 음악이 울리는 중이다. 대륙에 널리 알려진 기악곡 중 하나였다.

연회장 상공에는, 마법으로 만들어낸 다채로운 빛깔의 베일이 하늘하늘 떠다닌다.

다채로운 색의 베일은 음악에 반응하도록 되어 있어서, 음악이 절정에 다다를수록 더 신비롭게 비쳤다.

그러나 이 순간, 단연 참석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따로 있었다. 춤을 취는 제국귀족. 오스카를 리드하는 클로이의 모습이었다.

“애들아, 오스카 쟤 봐봐. 무슨 감전된 사람처럼 춤을 추냐.”

“헐, 저 정도면, 마법이라도 맞은 거 아냐?”

“근데, 둘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거 맞지? 왜 내 눈에는 오스카가 계속 놀라는 것처럼 보이냐.”

“당연한 거 아냐? 꿈처럼 느껴지겠지.”

춤이 계속되는 동안, 오스카의 동작은 꼴사나울 정도로 어설펐고 그 표정은 우습기 그지없었다.

C반 생도들은 오스카의 잔뜩 긴장한 모습에 마구 웃어댔지만, 그 이유는 그들 예상처럼 제국귀족과 춤을 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구경꾼들은 두 사람만의 내밀한 대화를 알 수 없었다. 감전된 사람처럼 반응하는 건 춤이 어설퍼서가 아니라, 머릿속에 울려대는 클로이의 전음이 하나하나 놀라워서였으니까.

모든 진실이 몰려드는데, 평범한 표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

-아냐, 거짓말이야. 맞지, 거짓말이지?

클로이 또한 불과 몇 시간 전에 진실을 알게 됐던 터라 그 충격이 이해가 됐다. 심지어 그 내막의 한가운데에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있으니 더 충격적이겠지.

-이 모든 걸 루든이 해주었다고?

-…….

공허하게 울리는 목소리. 클로이는 루든에 관해서라면 해줄 대답이 없었다. 다만 클로이 역시 오스카만큼이나 그에 대해 알아내고 싶었다.

‘위더스푼의 정언명’으로 얽히지만 않았더라면, 기꺼이 그리했을 것이다. 루든의 실체를 밝혀내려 제국귀족의 모든 권력이라도 동원했을 것이다.

“…스카. 오스카.”

“…어?”

잠깐 넋을 잃었던 오스카가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클로이가 말똥말똥 그를 쳐다보는 중이다.

“나, 괜찮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받아들일 수 있어. 아버지만 만날 수 있다면.”

“정말 괜찮아?”

“그런데 꼭 자정쯤에 랩소디관으로 가야 해? 지금 가면 안 돼? 루든이 그랬다고?”

“그 시간에 가야만 네 아버지가 나타날 거라고 했어. 네 아버지를 만나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고도 했지. 어쩌면 루든에 대해서도 알게 될지 몰라.”

“알았어…. 난 괜찮아.”

오스카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시도해봤다. 그러지 않으면 기절할 것만 같았다.

“정말로 괜찮아? 그러면… 이제 왼발 좀 내려줄래? 지금 내 발을 밟고 있거든.”

오스카가 화들짝 놀라며 발을 빼냈고, 클로이는 조그맣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둘은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아주 잠깐이지만 땅이 흔들렸던 것 같은 느낌. 오스카와 클로이는 서로의 눈을 쳐다봤다. 방금 진동이 느껴졌는데, 뭐지?

그들이 상상력을 동원해 봐도, 순간적으로 지나간 진동이 5성의 경지를 지닌 두 무인의 격돌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엘로스가의 정원을 메운 천여 명의 사람들 모두가 똑같았다. 키건이든 셀레스네든 마찬가지였다.

휘이이이이… 펑!

휘이이… 펑! 펑!

“폭죽이다.”

그저 참석자들은 밤하늘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을 볼 뿐이다.

당연하게도, 마법사들의 불꽃놀이엔 어떤 대도시에서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함이 깃들어 있었다.

펑, 펑 터지는 폭죽은 단순한 문양에 그치지 않고 인물이나 문자를 만들기도 했다.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다채로운 색감으로 물들었고, 얼굴엔 자연스러운 미소가 깃들었다.

…그 순간.

저 멀리 버려진 와인 창고에서는, 로젠탈러의 괴성이 울리는 중이다.

“끄하아아아악!”

흑칠의 오러가 로젠탈러의 왼쪽 어깨를 꿰뚫고 나온 상태. 핏줄이 터졌는지 로젠탈러의 눈동자가 불거진다. 입안에 머금었던 피를 토해냈다.

‘아직은 아니야.’

루빈은 가만히 생각했다. 이 공격이 결정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끝낼 정도는 아니다. 승리의 균형추는 내 쪽으로 넘어왔어도 어쨌거나 이놈은 5성의 무인.

“빌어먹을 암살 종자!”

검을 쥐고 있는 루빈의 오른손을 덥석 잡아버리는 로제탈러. 그 상태로 루빈의 팔을 잘라버릴 심산인 것이다.

‘비검… 역시 욕심나는 만큼 귀찮네.’

앞선 루빈의 공격이 로젠탈러한테서 검을 떼어냈지만, 비검의 특성 앞에선 무의미했다.

로젠탈러가 손바닥을 쥐었다 오므리자, 위이이잉 소리와 함께 비검이 다시 날아드는 것이다.

휘이이이잉!

루빈은 인상을 찌푸렸다. 제때 빼내지 않는다면 날아드는 비검에 잘려나갈 것이기에, 하는 수 없다. 적의 어깨에 박아 넣었던 검을 빼냈다.

슈우우웅!

루빈이 팔을 빼내기 무섭게 허공을 가르는 비검. 그 상태로 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크흑!”

로젠탈러는 비검을 땅에 박고 몸을 지탱했다. 고통 속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폭죽 소리, 들리지?”

바닥에 침을 뱉어내며 로젠탈러가 물었다.

그 말처럼, 아득한 저곳으로부터 폭죽 소리 들려온다. 연회가 이상 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사투를 벌이는 두 사람의 처지에서는, 더 아릿하게 느껴졌다.

“함께 못 즐겨서 서운하겠군.”

“…….”

로젠탈러가 끌끌 웃었다.

“저 젖비린내 나는 마법사 애새끼들은 모르겠지. 저들이 친구라고 알고 있던 루빈이, 암살을 존재 이유로 살아가는 놈이라는 걸.”

루빈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시 로젠탈러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는 끝을 내야 할 때.

저벅저벅.

점점 다가오는 루빈을 바라보며, 로젠탈러는 입술을 질끈 깨문다.

그는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 돌연변이 같은 루빈을 상대로 살아 나갈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그렇다고,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순간, 로젠탈러의 눈빛이 달라졌다.

루빈의 쇄도가 이어지고, 로젠탈러는 괴성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점멸하는 루빈의 움직임을 최대한 쫓으며.

쾅! 쾅!

스으으으으 쾅!

검투가 이어졌고, 공간이 울어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로젠탈러는 손에서 비검을 놓았다.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내가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없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로젠탈러는 더는 방어에 전념하지 않았다. 방어를 포기하고, 도리어 루빈을 향해 달려들었다.

푸슉!

“……!”

핏빛서리가 하복부를 그어도 상관없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루빈을 감싸더니 그 몸을 억눌렀다.

필사의 완력.

로젠탈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등 뒤에서 루빈을 붙들었다. 순간, 루빈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생각.

‘자폭하려는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지. 로젠탈러는 마법사도 아니어서 그럴 능력도 없었고, 다른 장비를 준비할 틈도 없었다.

‘아, 알겠군.’

그제야 로젠탈러의 손에 비검이 들려있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어째서 비검을 놓아버린 것인지 알겠다. 혼자 죽지 않겠다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도.

위이이이잉.

주인의 손을 떠난 비검이 울어댄다. 노란 오러를 드러낸 채로 공중에 떠 있었다.

검 끝이 겨냥하고 있는 건 당연하게도 루빈.

그대로 날아든다면, 루빈을 꿰뚫을 뿐만 아니라, 로젠탈러마저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로젠탈러가 원하는 결말.

“너도 살아 나갈 수 없다, 루빈…….”

“죽어서라도 룰포한테 충성하겠다는 거냐? 놈은 널 버렸는데.”

“상관없어. 나중에 충성으로 기억되든 말든.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널 죽이는 거니까.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로젠탈러는 칙명부의 간부였지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부류는 아니다. 그가 정말로 충성하는 대상은 룰포 한 사람이었다.

룰포가 제국에 헌신하고 있기에, 지금 로젠탈러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수장님은 결국 아무것도 모르겠지. 내가 이놈과 함께 죽으면서 뭘 막아냈는지.’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 이 암살검가의 막내아들. 여기서 루빈이 살아 나간다면 칙명부도, 제국도 어찌 될지 모른다. 최악엔 제국이 무너질 수도 있는 거다.

‘얼마나 성장할지 모르는 놈이다. 이대로라면 스무 살 이전에 7성에 오를 수도 있어.’

그때. 루빈의 대답이 이어졌다.

“하긴, 너는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똑같겠지.”

예상과 달리, 덤덤하기만 했다. 그 태도에 로젠탈러의 눈썹이 꿈틀댔다.

뭐야, 이 침착함은? 지금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가.

로젠탈러는 억누르는 힘을 최대한 쥐어짰다. 필사의 일격. 뭐가 어찌 됐든 그로서는 다른 수가 없는 것이다.

애검을 부른다. 비검의 특성은 비행하여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그 속력은 주인이 조절할 수 있었다.

“로젠탈러. 아직도 이만한 힘을 모아두고 있었던 거냐.”

“닥치고, 죽어라!”

사아아아아아.

비검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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