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74화 (174/258)

제174화. 폭죽 소리가 가까스로 닿는 곳 (6)

루빈이 사투를 벌이는 그때.

쿠제는 제 나름대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검을 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몸은 사투를 벌이는 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아, 하아.”

털썩.

무릎이 꿇린 쿠제가 떨리는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분노로 몸을 떠는 그리어스 가주가 서 있었다. 분개를 넘어선 살기. 당장이라도 쿠제를 죽이고 싶은 것 같았다.

그의 일갈이 이어졌다.

“그러고도 네가 로이넨서라 할 수 있느냐!”

암살자들에겐 오러가 없었기에 루빈이 싸우는 환경과는 사뭇 달랐다. 기압이 팽창하지도 않았고 열기로 들끓지도 않았다.

그러나 쿠제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 로이넨서의 입을 열기 위해, 네이프가 검을 들었던 것이다.

명실상부 그리어스가의 가주이자 5성의 암살자. ‘그림자 점화’, ‘그림자 불꽃’ 등. 5성급의 검술이 쿠제 몸을 짓이겼다.

검상이 낭자했고, 바닥엔 쿠제가 흘린 피로 흥건했다. 쿠제는 반격이나 회피하지 않았다. 묵묵히 네이프의 징벌을 받아냈던 것이다.

“이 빌어먹을! 어찌 그런 무모한 계획을 세웠더냐!”

방금 전, 쿠제가 침묵을 깼으므로 네이프는 모든 걸 알게 됐다. 그건 네이프의 검에 굴복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 역시 루빈의 지시였으니까.

‘…도련님이 말씀하신 시간이 지났다.’

쿠제는 바닥을 짚으며 몸을 들썩였다. 지독한 고통이 몰려들었다.

로이넨서로서 자격이 없다는 네이프의 일갈이 머릿속에서 한 번 더 울렸지만, 쿠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도련님을 사지로 내모는 로이넨서로 비쳐도 어쩔 수 없다. 네이프가 보지 못하는 걸 쿠제는 보고 있었으니까.

제국과 암살검가의 기나긴 악연을 끊어내겠다는 도련님이었다. 도련님의 목표가 원대했으니, 로이넨서 역시 정도(正度)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

물론, 그걸 알 리 없는 네이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당연했지만.

‘제기랄, 너무 방심했다.’

참담했다. 너무 안일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전 경험을 통해 본가의 막내아들이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건 충분히 깨달았던 터.

페르나 엔조에 대한 정보가 없는 그로선 로젠탈러의 죽음과 루빈의 욕망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었다.

루빈이 ‘협곡 감옥’에서 마법사를 구출했을 때에도, 그 너머의 진실을 알아내지 않고 덮어둔 게 이만한 과오로 돌아올 줄이야.

루빈이 죽는다면, 세이렌이 어찌 나올지 알 수 없다.

“비켜라!”

그러니 지금이라도 가야 했다. 최악이 아니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네이프 님, 이미 그쪽은 끝났을 것입니다.”

“뭐라?”

“도련님이 제게 말씀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말이었다. 네이프는 쿠제의 목을 움켜쥐고 그를 일으켰다.

“널 죽이는 건, 도련님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이다.”

벽 쪽으로 쿠제를 날려버렸다. 날아간 몸이 벽에 부딪쳤고, 피를 토해내는 쿠제.

그런데 그때였다.

“……!”

쿠제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창고 주변으로, 자신과 네이프를 제외한 또 다른 암연이 느껴지는 것이다.

하나가 아니다. 둘… 아니, 도합 셋이 더 있었다.

그리어스가의 가신들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한 눈으로 네이프를 쳐다봤는데, 그 역시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누군가가 창고를 나가려는 그의 앞을 막아서듯 서 있었다.

“그로칼 랭?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로칼 랭이라면, 랭 척살조의 조장 아닌가. 암살검가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척살조가, 왜 여기에 있지?

‘티나 님을 쫓던 자들?’

티나가 해줬던 이야기 덕분에 랭 척살조에 대해 알고 있는 쿠제였다. 티나는 저들로부터 도망치던 중에 루빈을 만났다고 했다. 그날이 계기가 되어 그녀가 루빈의 로이네크로우가 되었던 거라고.

“오랜만이군요. 그리어스 가주님.”

그로칼이 창고 안으로 들어온 다음, 그리어스 가주에게 예를 갖췄다.

뒤이어 랭 척살조의 다른 두 명도 모습을 드러내어 예를 갖췄다. 항아리형 체구를 지닌 비르코 랭과 홀쭉한 샤르코 랭.

네이프는 랭 척살조의 복장을 눈여겨봤다.

‘회색의 유령쥐’라는 이명이 존재하는 것처럼, 척살조는 임무 중일 때 회색 망토에 회색 복면을 착용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로칼. 임무 중이 아닌 것 같군.”

그 말에 그로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암살자라면 눈앞의 세 사람이 척살조라는 것도 몰랐을 테지만, 네이프는 거점창고 관리인이었기에 그들의 숨은 정체를 알고 있었다.

“날 왜 찾아온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지금은 긴급하니.”

“…루빈 도련님 때문이겠죠.”

쿠제와 네이프가 동시에 움칫거렸다.

“뭐야, 알고 있었어? 그럼 얼마나 심각한 건지도 알 거 아냐.”

그런데 어쩐지 그로칼은 여유로웠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네이프는 문득, 4년 전 만남 때 그로칼이 루빈을 두고 했던 호평을 떠올렸다. 루빈이 가주 세이렌의 인정을 받는 것 같다고 말해줬었지.

“그쪽이라면 상황이 종료됐습니다.”

그 순간. 쿠제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상황 종료’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 다행이군요.”

“쿠제! 어떻게 상황 종료된 줄 알고 벌써 안도하는 게냐!”

그때, 그로칼의 말이 이어졌다.

“역시 그리어스 가주님보단 쿠제가 도련님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뭐?”

“기우를 접어두셔도 좋을 거라는 뜻입니다.”

“아냐, 내 눈으로 확인해야 돼.”

“게다가, 저라고 아무 대비를 안 해놨겠습니까. 사실, 그쪽 상황은 본가의 가신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자네 척살조와 함께 온 가신이 있다는 건가?”

“예, 물론 ‘그분’은 도련님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았겠지만 말이죠.”

‘그분’이라는 표현. 척살조장인 그로칼 랭이 본가의 가신 중에 높여 부를 만한 이가 얼마나 될까.

네이프의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가신은 둘 뿐이다.

가주 세이렌의 로이넨서였던 ‘킬리언 구트’.

가주의 직속가신인 ‘데이몬’.

킬리언과 데이몬의 암연은 6성이다. 네이프 본인보다도 강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둘 중 누가 됐던 간에, 그자가 루빈을 지켜봤다면 최악의 상황은 없었을 터였다.

“근데, 개입하지 않았을 거라니, 무슨 뜻이지?”

“가주님의 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내 도련님이 하려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명이었죠.”

세이렌의 명이 있었다? 말만 들어보면, 랭 척살조와 또 다른 가신은 애초부터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쿠제가 일찌감치 도련님의 위치를 말해줬다 해도, 나는 그곳으로 갈 순 없었겠군.”

“예, 쿠제 다음으론 저희가 막아섰을 겁니다. 물론 쿠제가 이렇게까지 버틸 줄은 몰랐네요. 로이넨서 몰골을 확인한 도련님한테 미움을 살 수도 있겠는데요.”

그로칼 랭이 밉살스러움을 자처하듯 말했다.

“뭐, 어쨌든 쿠제의 서점으로 가시죠. 저는 도련님이 어떻게 싸웠는지 얼른 듣고 싶으니까.”

척살조원 중 비르코가 쿠제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쿠제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척살조원들을 둘러봤다.

‘며칠 전부터 카포티니에 들어와 있었다는 거잖아? 알아차리지도 못했군. 도대체 이들이 왜 여기에 온 거지?’

그 궁금증을 전달받은 것처럼, 네이프가 척살조장에게 말했다.

“척살조가 여기엔 왜 온 거지? 척살 임무가 아니라고 해도, 여기에 온 목적은 있을 거 아냐.”

그로칼로선 쉬이 대답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당연히 목적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 부분도 서점에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이윽고, 새로 출현한 세 명의 암살자까지 더해져 다섯 암살자가 카포티니의 위장별채로 귀환했다.

* * *

그 직전, 루빈의 상황.

혼자 죽지는 않겠다고 다짐한 로젠탈러가 마지막 일격을 날린 직후였다.

휘이이이잉.

제 주인의 결심을 아는지, 다섯 겹 오러를 품은 검신이 더욱 명징하게 빛났다. 루빈은 날아드는 비검을 바라봤다.

암연이 증폭시킨 감각. 비검의 공격이 정확하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마지막 혼신이라, 이건 인정해줘야겠는데.’

돌이켜 보면, 죽음까지 각오하고 시작한 싸움인데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흘러온 게 사실이었다.

결코 피해가 적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전초전과 반복된 수련의 효과가 컸던 것이다.

전초전을 통해 찾아낸 놈의 약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고, 그로써 싸움의 균형추를 일찍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로젠탈러의 마지막 결심은 예상 밖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면서까지 검을 날릴 줄이야.

‘저걸 맞는다면… 검혼이 새겨지겠지.’

죽음을 각오한 5성 무인의 최후 일격. 그 오러가 만든 상흔은 검혼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 다시금 그 사실이 떠올랐다. 검혼은 평생을 괴롭힐 수 있는 상처가 될 테지.

로젠탈러의 경지가 5성이니, 아무리 죽음을 각오했더라도 하네케처럼 영혼으로 깃들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이마저도 맞아줄 생각은 없다. 아니, 스쳐 지나가는 것조차 허락할 수 없지.’

피해를 감수하는 회피론 부족하다. 날아드는 저 비검을 완벽하게 피해야 한다.

‘결국은 보여줄 수밖에 없겠군.’

루빈에겐 아직 이 싸움에서 드러내지 않은 능력이 있었다. 이제는 그 기술들을 써야 할 때였다.

문제는, 자신을 지켜보는 또 다른 눈이 있다는 것. 티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는 싸움 중반부터 느껴졌으니까.

‘그’에게 자신의 면모를 드러내는 게 좋을지 아니면 나쁠지, 잘 모르겠다. ‘그’의 눈은 곧 어머니의 눈이나 마찬가지인데.

달리 선택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루빈의 진면목을 어찌 판단할지는 이제부터 두고 볼 일.

결국, 루빈은 머릿속에 그렸던 그대로 펼쳐나갔다.

일단 ‘파공’이 시작이었다.

“……!”

비검이 날아드는 그 찰나.

로젠탈러는 눈앞으로 마법의 휘식이 떠오르는 걸 보았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그게 ‘파공’일 거라는 건 알지 못했다.

알고 있었다 해도 상관없었다. 루빈은 ‘파공’의 창안자이자 최고 권위자인 베니테즈 다음 가는 실력자였다. 그에게 직접 교습받았으니까.

‘파공의 시전 지점은, 놈과 나 사이. 아주 작은 틈이다.’

펑!

마법이 시전되자 공기가 찢어졌고, 루빈을 억누르던 로젠탈러의 힘도 풀려버렸다.

“……!”

그 찰나의 순간.

루빈은 ‘그림자 역장’을 펼쳤다.

이번 ‘그림자 역장’은 그 어느 때보다 견고했다. 루빈이 지니고 있는 두 암연의 환, 각각 5성과 4성 경지의 암연 중 절반 가까이를 쏟아부었으니 그럴 수밖에.

위이이이…….

그림자 역장에 의해, 비검의 비행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로젠탈러의 상태도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반구형의 암연 속에 갇히면서, 결박된 사람처럼 운신이 제한됐다.

그림자 역장 속에서 자유로운 건 오로지 암연을 지닌 자들뿐.

로젠탈러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해할 수 없겠지. 그 시야 속에서, 루빈은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림자 역장 속에서는 파공을 쓸 수 없다.’

그래서 루빈은 암연으로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도약한 것이다.

다음 순간.

루빈은 로젠탈러의 시야에 다시 나타났다. 단, 칼끝 앞에 서 있던 그는, 이제는 검의 손잡이 쪽에 서 있었다.

루빈은 오른팔을 들었다. 서리를 품은 것처럼 냉혹한 눈빛이었다. 이젠 정말로 끝이 도래했다.

루빈의 의지에 따라, 그림자 역장은 반구형의 암연을 빠르게 줄여나갔다. 반구형의 면적이 줄어들면서, 비검은 검 손잡이를 시작으로 점차 무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비검의 비행 속도를 높여줘야겠지.’

비검의 손잡이 뒤에서, 쥐고 있던 손을 펼치는 루빈. 다시 한번, 파공이었다.

“잘 가라.”

펑!

칼의 손잡이를 겨냥하여 공기를 터뜨리자, 비검의 속도가 증폭했다.

비검은 그림자 역장의 밖에, 로젠탈러는 그림자 역장 속에 있었기에 로젠탈러로서는 비검의 속도를 줄이는 게 불가능했다.

마지막 순간. 그림자 역장은 범위를 줄여나가며 로젠탈러마저 놓아주었다. 움직임의 제한이 풀리는가 싶었지만, 그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없었다.

푸슉!

무중력을 벗어나자마자, 그의 애검이 제 주인의 가슴을 꿰뚫고 들어갔다.

“크헉!”

간결한 단말마. 그리고 절명. 주인의 숨이 끊어지자, 비검을 감싸던 오러도 스스스 사라졌다.

그러나 루빈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로젠탈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곤 힘주어 핏빛서리를 놈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핏빛서리의 혹한을 불어넣었다. 로젠탈러의 심장이 결빙되는 걸 넘어서 와그작 깨질 때까지.

‘네 유품은 내가 잘 써주지.’

검을 빼낼 때, 루빈의 손에는 핏빛서리만 있지 않았다. 왼손에 로젠탈러의 비검이 들려 있었다.

만만치 않았던 전투 끝, 소소한 보상이었다. 대장장이를 찾아 단검으로 개조하기 전까지는 한동안 아공간 주머니에서 나올 일 없겠지만.

‘이름이 ‘롭슨의 비검’이라 했던가?’

여기, 로젠탈러와 함께 사라질 이름이다. 이제 이 검은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로젠탈러의 비검’으로.

“티나, 돌아가자. 서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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