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징벌 (4)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마차.
마차의 문틀에 매달린 채로, 데이몬이 루빈을 돌아봤다.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알았어.”
데이몬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마차의 마부석에서조차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은밀한 도약이다.
뒤이어 루빈이 복면을 올려 썼다. 그 옆에는 호출당한 티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루빈, 훈련받는 동안 티나가 그 역할인 것이다.
“도련님의 훈련을 위한 거라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비르코가 티나를 째려봤다. 그러자 티나로부터 돌아오는 건 막내 도련님이라면 절대 짓지 않을 괴상한 표정이었다.
“어허, 무엄하도다! 당장 궁둥이를 얻어맞고 마차 밖으로 쫓겨나고 싶은 게냐.”
“이, 이게…….”
그때, 준비를 마친 루빈도 마차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착지할 지점을 가늠했다.
“티나, 얌전히 있어. 쿠제는 티나가 난동부리지 않게 잘 단속하고.”
“난동은 무슨!”
“알겠습니다, 도련님. 훈련 잘 받으시지요.”
루빈이 몸을 밖으로 날렸다. 어둠이 순식간에 그의 형상을 집어 삼켰다.
“…….”
마차 문이 닫히자 들이치던 바람 소리도 멎었다. 조용해진 마차 안에서, 쿠제는 티나를 예의주시했다.
비르코와 샤르코마저 대놓고 자신을 째려보자, 티나는 불만스레 눈을 감아버렸다.
“나중에 루빈이 가주가 되면, 너희는 다 죽은 목숨이다, 이거야…. 앗, 실수! 속마음이 밖으로 나와버렸네.”
한편, 마차에서 벗어난 루빈.
멀어져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그는 이내 주변을 돌아봤다. 파무크 대로의 밤은 적막했다. 드넓은 도로 양옆으로는 평야만이 펼쳐져 있었고, 인적도 없었다.
현재 구간은 밤중 통행이 완전 통제되고 있었다. 은밀한 수련을 하기에는 적당한 조건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지금도 마차가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는 것. 두 사람에겐 마차를 이용해 대륙을 횡단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검을 빼시지요.”
“진검을?”
“그렇습니다. 전력을 다하셔야 할 겁니다. 오러를 사용하셔도 됩니다.”
데이몬의 태도는 이전에는 없던 엄중함이 가득했다. 자신을 도련님으로 대하면 어쩌나 싶었던 루빈으로선 차라리 다행이었다.
“엄격한 잣대로 보자면, 이 훈련은 암살검가의 규약에 위배되는 행동이란 걸 아실 겁니다. 심지어 본가의 도련님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알고 있어. 너는 내 로이넨서가 아니기 때문이지.”
본래, 암살검가의 자제는 오직 로이넨서에게만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게 ‘2차 선택’이 특별한 이유였다. 자신을 성장시켜줄 로이넨서를 직접 고르는 것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제가 여기에 서 있는 이유. 가주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죠.”
“…….”
“가주님께선 도련님의 성장을 원하고 계십니다.”
로이넨가의 가신에게 가칙이나 규약은 두 번째다. 그들에게 절대적인 건 암살검가 가주의 의지뿐이다.
막내아들을 데리고 오는 임무를 내주면서, 세이렌은 데이몬에게 그 성장도 이끌어보라고 짧게 덧붙였었다. 어떤 방식으로, 얼마큼의 성장을 이끌라는 구체적인 지시는 없었지만.
‘가주님께서도 막내 도련님의 경지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겠지. 벌써 5성에 다다랐단 걸 아신다면, 뭐라 하실지.’
그때였다. 루빈이 빼든 핏빛서리에 오러가 발현되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하려는 자세를 잡은 것이다.
위우우웅.
오러가 공간을 울린다.
데이몬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시겠지만, 암연과 오러는 엄연히 다릅니다.”
제 가문의 검식을 완벽히 체득한 다음에야 발현되는 게 오러. 즉 검식의 완성체가 오러라 할 수 있다.
반면, 암연은 거꾸로다. 성위(星位)가 검식을 가능하게 한다. 그만한 암연을 갖춰야만 그에 맞는 검식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원래 계획은 5성의 검식을 선보이는 것이었는데.’
‘그림자 점화’, ‘그림자 불꽃’. 그 외 5성급 검식들.
순전히 루빈의 최대 경지가 4성일 거라는 가정하에 세워진 계획이었다.
루빈이 지금 당장 체현할 수는 없겠으나, 자신의 검식을 보고 자극을 받으라는 의도였다.
그런데 로젠탈러와의 사투를 지켜보니 그 예상이 커다랗게 빗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솔직하게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출가 2년 만에 5성에 오른 자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세이렌조차 앞지르는 성장 속도인 것이다.
‘게다가 암연을 지니고도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다는 것도… 도저히 믿기질 않아.’
‘흑칠의 오러’로 향하는 데이몬의 눈길.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기이하고 심오한 일이었다.
물론, 그로서는 판단이 불가했다. 오러와 마법까지 발현이 가능해진 도련님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건 오직 세이렌뿐일 테니까.
결국, 데이몬은 성위를 하나 높인 6성급 검식을 선보이기로 했다.
‘6성의 검식. 이것은 지금껏 스스로 쌓아왔던 걸 무너뜨려야 가능한 경지인데… 도련님이 이해할 수 있을지.’
데이몬은 반신반의하며 단검을 쥐었다.
“저는 6성의 검식을 펼칠 겁니다. 도련님은 그걸 막아내시기만 하면 됩니다. 검식의 첫 합부터 마지막 합까지 막아낸다면 15분이 걸릴 겁니다.”
“막아내지 못하면?”
“그대로 중지하고, 마차를 뒤쫓으면 됩니다. 마차를 따라잡고 10분의 휴식을 취할 겁니다. 그다음, 다시 같은 방식으로 저의 검격을 막아내시면 됩니다.”
애초부터 훈련의 방식은 정해져 있었다. 루빈을 찾아온 이유는 호위가 아닌 특별수업 때문인 것 같았다.
데이몬이 한 발 다가섰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움켜쥐고 있는 단검을 내뻗으며 검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막아내는 것으로 6성의 검식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라는 거구나. 최대한 많이 막아내면서 검식의 처음과 끝을 기억해둬야겠어.’
1회에 데이몬의 검식을 모두 파악하리라 마음먹은 루빈. 역공을 작정하지 않고 오로지 방어에만 신경 쓰면 된다. 어려울 게 하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고작 일곱 합.
그 정도 만에 데이몬의 칼끝이 루빈의 피부에 온전히 닿았다. 만약 마음만 먹었다면 그대로 검이 살갗을 뚫고 지나갔을 터였다.
“…….”
루빈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데이몬의 단검을 바라봤다.
“마차를 쫓으시지요.”
그게 끝이었다. 별다른 첨언이 없는 데이몬. 그는 도로 위로 걸어 올라가더니 앞서나간 마차를 쫓아 질주하기 시작했다.
“뭐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루빈. 그 역시 마차를 따라 도로 위를 내달리면서도, 머릿속엔 방금 전 상황에 매몰되어 있었다.
‘궤적을 완전히 놓쳤어.’
데이몬의 검식은 단단하면서 유려했다. 바위덩이 같다가도 시냇물 같았다. 맺음과 펼쳐짐이 수없이 번복되어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았다.
‘5성과 6성은 천지 차이라더니.’
괜히 6성의 암연에서 고유한 특성과 저주가 발현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러자 내부에서부터 어떤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회귀하고 나서는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아득하게 멀어져 있던 좌절감이 다시 돋아나는 것이다.
싫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후에도 수업의 풍경은 처음과 비슷했다.
마차를 쫓으시지요. 이 말의 반복.
매회 루빈이 받아내는 검격은 늘어나기도 했지만 또 줄어들기도 했다. 다시 말해, 검식의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아아아아.
‘어렵군.’
루빈은 또다시 마차를 쫓고 있었다. 이제는 몇 번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검식의 초반부를 넘질 못하고 있으니, 마차와 거리를 크게 벌리지도 못했다.
질주하기 무섭게, 어둠 속을 내달리는 마차의 뒷모습이 보인다. 앞서 출발한 데이몬이 마차의 후미에 올라타 있다.
루빈도 속도를 올리다가 바닥을 박찼다.
마차의 후미에 탁, 매달렸다.
마차에서 휴식하는 10분 동안. 그들은 탑승석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마부들을 속이며 수련을 해나가려면 탑승석을 들락날락하는 것보단 후미에 매달리는 게 나았다.
“이제 곧 날이 밝겠군요. 이번이 첫 수련의 마지막입니다. 다음 수련은 다시 밤이 되어야 가능할 겁니다.”
“알겠어.”
낮에는 파무크 대로를 이용하는 다른 여행객들도 많다. 수련은 오직 통행이 제한된 밤에만 해야 했다.
‘밤을 꼬박 투자했는데도 첫 단계를 못 나아갔다니.’
5성의 벽을 넘기는커녕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었다. 6성으로 나아가는 길은 사막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물론, 루빈만의 절망은 아니겠지. 수많은 방계 가주들 또한 똑같은 벽 앞에서 무릎 꿇어야 했을 거다. 그걸 넘은 자들만이 ‘흑영’의 자리에 도전할 마음을 품을 수 있을 터.
다르게 말하자면, 훗날 흑영가주들조차 경외할 만한 로이넨 가주가 되기 위해선 꼭 6성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6성은 수많은 계단 중 하나일 뿐이었다.
“도련님.”
데이몬의 나직한 목소리. 두 사람은 후미에 매달려, 마차가 지나온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
“지금까지 쌓아온 것을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6성 암연의 검이 보일 겁니다.”
“잊어야 한다고?”
데이몬은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하고, 루빈에게 턱짓했다. 오늘의 마지막 훈련을 시작하자는 의미였다.
곧이어 도약하는 데이몬을 따라 루빈도 마차에서 내려왔다. 아침이 찾아오면서 어둠이 가시고 있었다.
루빈은 데이몬의 말을 되뇌었다. 잊어야 보인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내려 했다.
“시작하지요.”
데이몬이 단검을 움켜쥐었다. 눈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 하루에만 수없이 반복했던 검의 궤적을 그리며, 루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말로나 간단한 거지, 이제까지의 검식을 의식하지 않는 게 쉬울 리 없지.’
6성 검식의 핵심은, 기존 암살검가의 검식에서 탈피한다는 점에 있었다.
암연의 검은 5성까지는 ‘계승’된다. 그러나 6성부터는 다르다. 그때부터 실현되는 검식은 모두 자기 자신이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
‘만약 도련님이 그러한 진리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진다면, 막아내는 검격의 수도 늘어날 터.’
챙! 챙! 챙!
검격이 이어진다. 검식 초반부에는 여전히 기존 암살검가 검식의 자취가 배어 있다. 그러나 후반부가 될수록, 그건 암살검가를 탈피한 데이몬 고유의 검이 된다.
이른바 검의 발산.
챙! 챙! 챙!
‘호오…….’
검격이 늘어나고 있었다. 일곱 합을 넘었다. 앞서 어느 때보다 많이 버텨내고 있었다.
챙! 타앗. 챙!
어느새 이십 합이 넘어가고 있다. 데이몬의 눈빛에 기대감이 실렸다.
“…….”
결국 이십오 합에 만에, 검 끝이 루빈의 피부에 닿았다. 검식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데이몬은 모르지 않았다. 눈앞의 도련님이 비로소 6성 경지를 체감했다는 사실을.
‘실마리를 잡았다.’
루빈은 씩 미소를 지었다.
이후, 다시 마차로 돌아온 두 사람. 때맞춰 해가 떠올랐고, 파무크 대로는 여행객들과 제국의 수송 행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밤새 멈추지 않았던 마차가 말을 교대하고 다시 내달렸다.
“빨리 날이 저물었으면 좋겠군.”
루빈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록 그 자신이 6성에 올라서는 건 아니지만,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또 하나의 눈이 새겨지는 듯했다. 시야가 트이면 곧 그곳을 올라가는 길도 보일 것이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척살조장 그로칼의 한마디.
그는 밤새 이어진 훈련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훈련이 끝난 루빈이 마차 후미에 매달릴 때마다, 그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데이몬이 어떤 식으로 훈련을 할지 알고 있던 그들이었다. 마차 후미에 매달리는 시간 간격으로, 루빈이 데이몬의 검술을 얼마큼 막아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저 자신감이 절망감으로 바뀌는 데 얼마나 걸릴지.’
그로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역시 벽을 넘지 못하고 6성으로 올라서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절망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무리 재능 있는 도련님이라고 해도, 이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데이몬 님. 여정 중에 도련님께서 얼마나 진일보할 거 같습니까?”
그로칼의 전음이 데이몬에게 향했다. 가차 없는 대답이 이어지리라는 예상과 함께였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마지막 회차 때 검의 맥과 결을 짚으신 것 같다.
-예?
-어쩌면, 여정이 끝나기 전에 내 검격을 모두 막아내실지도 모르지.
루빈을 맞은편에 앉힌 채로 이어지는 품평. 둘만의 전음이었기에, 좌절한 루빈의 기를 살려주려는 건 아니었다. 데이몬의 저 말은 진심이었다.
-허, 설마요.
그로칼은 루빈을 바라봤다. 루빈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도 밤새 이어질 데이몬과의 수련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저 눈을 감고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훈련을 시작한 지 고작 이틀 만에, 루빈은 실마리를 찾아냈다.
‘이제야 알겠군. 데이몬의 검식을 알아갈 수 있는 묘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