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징벌 (5)
또다시 밤이 되었다.
어느덧 수련을 시작한 지 이틀째.
이번에는 평야에 세 명이 서 있었다. 그로칼이 참관자를 자처한 것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 가신들이 자리를 비워도 마부들은 그러려니 할 겁니다. 주변을 경계하기 위함이라 생각할 테죠. 마차엔 도련님 역할을 하는 티나가 있으니까요.”
참관이 허락되지 않을 걸 걱정했는지, 루빈이 묻기도 전에 이유부터 말하는 그로칼.
결국 참관 허락을 받은 그는, 두 사람과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곤 지난밤 데이몬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정이 끝나기 전에 막내 도련님이 6성 검식을 모두 막아낼지도 모른다 했었지.
‘아무리 데이몬 님이 하신 말씀이라지만…….’
본가의 가신들이라면 으레 그렇듯, 그로칼은 데이몬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 깊이는 세이렌을 키워냈다는 킬리언에 못지않았다.
심지어 데이몬과 검을 겨뤄본 적 있는 그였다. 그래서 6성 검식을 다 막아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어떤 의미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머지않아 6성에 다가설 거라는 뜻이잖아. 지금 루빈 도련님의 나이가 열셋이니까… 넉넉히 스물에 6성에 다다른다 해도, 세상을 깜짝 놀래킬 만한 일이야.’
그때.
“데이몬.”
루빈이 입을 열었다.
“나보고 전력을 다하라고 했었지?”
“예. 도련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런 수련의 기회는 흔치 않으니, 그 기회를 붙잡으시라는 뜻입니다.”
“그래, 흔치 않은 기회지. 그래서 이번엔 나도 다양한 수를 써보려고 해.”
지켜보는 그로칼은 팔짱을 꼈다. 뭘 하려는 거지? 그러던 그의 눈이 저절로 커지는 일이 일어났다.
처음은, 핏빛서리가 만들어내는 눈보라였다. 루빈의 영혼무구를 처음 목격하는 그로선 거기에서부터 놀랄 수밖에 없었다.
휘이이이이이이.
눈보라는 핏빛서리의 의지에 따라, 루빈과 데이몬을 중심으로만 몰아쳤다. 마치 마법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이 하얀 도화지 속에 갇히는 듯했다.
이어지는 루빈의 두 번째 수.
“……!”
데이몬과 그로칼이라면 못 느낄 수 없는 흐름. 루빈의 암연이 뭔가를 일으킨 것이다. 두 가신으로선 처음 보는 암술이었다.
위우우우웅.
‘그림자 역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암연이 반구형으로 펼쳐지더니, 공기의 흐름을 멈춰 세웠다.
휘이이이… 사아아앗…….
몰아치던 눈보라가 일제히 멈추었다. 사그라들거나 그친 게 아닌, 말 그대로 ‘멈춘 것’이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시간을 멈추기라도 한 겐가?
상황을 주시하던 하네케가 끼어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놀란 듯했다.
‘효과는 비슷하지만 개념은 완전히 다릅니다. 중력을 없앤 거거든요.
적의 움직임을 늦추는 ‘그림자 역장’. 하지만 이번만은 그 쓰임이 달랐다. 눈보라를 완벽한 무중력에 가둬버린 것이다.
방금까지 ‘하얀 도화지’를 연상했던 그로칼은, 이제는 정말 두 사람이 도화지 속에 들어간 격이라고 생각하며 감탄했다.
“정말 묘수로군요.”
그들을 에워싼 채로 공중에 멈춰버린 듯한 눈보라의 알갱이가, 역장 속을 가득 메웠다.
이 속에서 검을 휘두르면, 그 궤적이 훤히 보일 것이다. 마치 하얀 도화지 속에 그려지는 물감처럼.
게다가, 이 모든 눈보라의 알갱이는 루빈에게 온전히 전달되었다. 루빈은 이 역장 안에서 휘둘러지는 모든 검궤를, 제 피부처럼 느낄 것이다.
루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시작할까.”
“…예. 시작하겠습니다.”
데이몬이 6성 검식을 펼쳐나갔다. 하얀 도화지가 검의 궤적에 따라 사사사삿 그어져 갔다. 눈의 결정체들이 미세하게 움직였고, 루빈은 그걸 읽어나갔다.
‘계승된 검식이 아닌, 데이몬만의 검식.’
루빈은 지난밤 데이몬이 해주었던 충고를 떠올렸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암살검가의 검식이라는 관념부터 버려야 했다. 1성부터 5성까지 이어져온 검식과는 다른, 검 스스로가 발산하는 흐름을 읽어야 했다.
‘6성의 암연을 지닌 자들은 모두 개개인의 고유한 암연을 지닌다. 그 암연은 그들을 검식의 창안자로 이끈다.’
루빈은 검이 아닌, 데이몬의 암연에 집중했다. 검에 집중하는 건 무중력 속에 멈춰 있는 핏빛서리의 눈보라 몫이다.
현재 루빈에겐 두 겹의 눈이 있는 셈이었다. 핏빛서리가 검의 궤적을 읽고, 루빈은 데이몬의 암연을 읽어나간다.
챙! 채앵!
계속해서 이어지는 검날의 격돌. 가르치는 데이몬도, 참관하는 그로칼도 점차 눈동자가 떨려갔다. 지난밤 있었던 마지막 회차의 기록을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챙! 타닷. 챙!
챙! 채챙!
계속되는 검격에, 어느덧 칠십 합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
한쪽에 의해 대련이 끝났다. 멈춘 쪽은 루빈이었다. 그는 일부러 방어를 포기했다.
데이몬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도련님. 더 막아내실 수 있다는 거, 압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려고. 나는 네 검의 궤적을 좀 더 정확하게 새기고 싶거든.”
단 한 번이라도 모든 합을 막아내면, 그 시간부로 데이몬과의 수련이 종료되리라는 걸 알았다.
전략적으로 데이몬을 이용해야 했다. 데이몬의 검식을 빨아들일수록 루빈한테서도 6성 검의 싹이 움틀 테니까.
데이몬으로선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수업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으니.
사아아아아…….
루빈의 그림자 역장이 없어지자, 무중력에서 풀려난 눈보라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가주님께 드릴 말씀이 점점 많아지는군.’
데이몬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로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다 어처구니없는 표정.
그러나 본가의 새로운 희망이 움트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기에, 그 표정 너머엔 흡족감 또한 서려 있었다.
“출발하자. 마차가 벌써 멀어졌어.”
어느새 루빈은 대로 위에 올라가 있다. 검격을 오래 받아낸 만큼, 마차와의 거리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앞으로는 매번 더 벌어지겠지. 마차를 따라잡는 것도 또 하나의 훈련이 되어버렸다.
* * *
로이넨 저택.
저 멀리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일시에 멎는 곳.
그 어떤 바람도 저택을 둘러싼 안개를 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안개는 성벽과도 같았다. 견고하고, 한순간도 멎지 않으니까.
로이넨 저택은 고차원의 탐지마법이나 그에 준하는 마도구로도 찾을 수 없다. 저택을 둘러싼 안개가, 하루에 수십 번씩 공간을 뒤틀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이 안개에 갇힌다면, 저택의 자비가 없는 한 그 결말은 죽음뿐.
졸졸졸졸.
안개 속 어딘가에서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안개를 뚫고 나아가보면 거기엔 시냇물이 아닌, 수통에서 흘러나오는 술을 들이켜는 노인이 서 있다.
오래전 세이렌의 로이넨서였던 가신, 킬리언이었다. 그는 여전히 로이넨의 가문주(酒) ‘오아쿰’을 시도 때도 없이 들이켜곤 했다.
저택에서 키워낸 블루베리와 파출리를 혼합하여 술을 담갔고, 안개의 독성이 가장 강해지는 때를 골라 안개의 성벽을 거닐며 오아쿰을 홀짝이는 것. 그의 오랜 취미 중 하나였다.
지금 그는 자신이 생각해낸 최적의 조건 속에 술을 마시는 셈이었다. 하지만-
“역시… 혼자서는 감흥이 안 난단 말이지.”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
이유도 모르지 않겠다, 생각난 김에 술잔을 부딪칠 사람에게로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터벅터벅.
정원을 가로지르는 킬리언을 발견하자, 곳곳에 은신해 있던 가신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예를 갖췄다.
그에 대고 손을 휘휘 저어 보인 킬리언은, 곧장 본채를 지나쳤다. 별채가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빨라졌다.
“…얘야.”
“와아아아아악!”
등 뒤에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퓌레. 그녀는 접시가 담긴 쟁반을 냅다 던지며 비명 질렀고, 킬리언은 인상을 찌푸리며 접시들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척척척 받아냈다. 퓌레가 내던지기 전 그대로였다.
“…이씨.”
퓌레가 미간을 좁히며 제 성깔을 드러냈다. 킬리언이 재밌다는 듯 끌끌 웃었다.
로이넨 저택이라는, 서늘하기 그지없는 장소에선 사뭇 이상해 보일 광경.
그러나 두 사람의 독특한 성정을 생각해보면 이 또한 일상이었다.
모든 가신들과 방계 가주들에게 존경을 받는 킬리언조차, 자신이 어릴 적 데려다가 키운 퓌레에게는 그 고약한 성질을 접어두곤 했으니까.
“뭐가 이리 바쁘더냐?”
“…아버지도 참. 도련님이 곧 오시잖아요!”
“그놈 방을 정리한 지 일주일째라는 거, 잊은 건 아니지?”
“아직 한참 남았어요! 내일은 1층을 정리해야 해요.”
킬리언은 이마를 짚곤 고개를 내저었다.
대륙 곳곳을 정처없이 방랑하다가 최근에야 로이넨 저택으로 돌아온 그였다. 오랜만에 만난 퓌레였지만, 양녀는 아비가 원하는 대로 술친구가 되어주진 않았다.
“그놈은 장례식 때문에 오는 거지, 여기에 눌러앉으려고 오는 게 아니다.”
물론, 퓌레 또한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황제가 장례식을 명했고, 그 너머엔 암살검가에 대한 압박이 있으리라는 것.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가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장례식이 끝나면, 녀석은 새로운 도시로 갈 거다. 이번 장례식은… 그놈한테도, 우리 로이넨가에도 중요한 분기점이 되겠지.”
“…저도 알고 있어요, 아버지.”
착 가라앉는 분위기가 싫은지, 퓌레는 짐짓 경쾌한 걸음으로 루빈의 방을 치워나갔다. 킬리언이 들고 있던 쟁반까지 냉큼 뺏는다.
“그럼 이만! 전 바빠서요.”
“에잇.”
킬리언은 아쉬운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쩔 수 없지. 아쉬운 대로 홀로 수통을 기울여 오아쿰을 마시는 수밖에.
막 돌아서 나가려는데, 한창 방을 치우던 퓌레가 휙, 고개를 돌려 킬리언을 째려봤다.
“그런데, 아버지가 직속가신님을 대신하기로 한 거 아녔어요?”
“맞지. 그놈은 지금 그놈을 데리러 갔으니까.”
“그놈, 그놈…….”
“데이몬을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거냐, 루빈을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거냐.”
“둘 다요! 그건 됐고요, 직속가신님을 대신하기로 한 거면 여기 있으면 안 되죠. 얼른 가주님 옆에 가 있으세요!”
그러나 킬리언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퓌레 말대로 직속가신을 대신하려면 세이렌 옆을 지켜야 하지만, 사실은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이렌 옆에서 거치적대지 않는 게 상책이지. 뭐, 세이렌 스스로 피해 있는 거긴 하지만.’
세이렌은 가문을 떠나 있었다. 오늘이나 내일쯤 돌아올 터. 저택을 벗어나 그녀만의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지간한 무인들조차 발을 내딛기 힘든 곳, ‘괴석지대’. 그곳은 킬리언조차 상대하기 까다로운 괴수들로 들끓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서, 세이렌은 검을 휘두르고 있을 것이다.
세이렌이라면 언제든 그곳의 괴수들을 섬멸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마음껏 검을 휘두르기엔 그만한 장소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번식을 위한 개체들은 남겨두었다.
‘평소라면 수련이겠지만…….’
이번에는 의미가 좀 달랐다. 아무래도 가장 그럴듯한 단어는 ‘애도’가 되겠지.
세이렌은 무의 경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아들에 대한 마음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아무리 죽음을 업으로 삼는 그들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기억하는 의식이라면 일절 치르지 않는 냉혹한 암살검가라 할지라도.
슬픔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으니.
‘게다가 세이렌이라면…….’
킬리언은 세이렌의 인생을 너무도 잘 알았다.
지금의 그녀가 존재하기까지, 잃어간 것들이 무엇인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세이렌조차 잊어버린 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킬리언은 다시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회상에 잠겼다. 입속 오아쿰의 잔여물이 씁쓸했다.
그날 밤. 아직 가주 세이렌이 돌아오지 않은 때. 가주를 대신하여 저택을 지키고 있던 킬리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저택으로 다가오고 있는 꽤나 강대한 암연.
이를 느끼자마자, 킬리언은 수통의 뚜껑을 꽉 잠갔다. 처음엔 데이몬이 돌아오는 건가 싶었지만, 가만 보니 아니었다.
정체는 곧 밝혀졌다.
‘흑영가주 중 한 명인가 본데. 왜 이리 빨리 온 거야? 세이렌도 없는데.’
여덟 대가문의 가주들은 내일부터 속속 도착할 거라 예상했던 킬리언으로선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흑영을 맞이하기 위해 정원을 가로질러 갔다. 문지기 가신에게 전음을 보내 문을 열도록 시켰다.
두두두둥.
둔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견고한 안개의 성벽이 드러난다. 저벅저벅.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영이 하나 보였다.
“어허, 킬리언인가?”
목소리를 듣자마자, 킬리언은 피식 웃었다.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흑영가 ‘베나르’가의 가주, 베닉 베나르였다.
어둠 속 안개를 헤치며 킬리언 앞에 마주선 베나르. 그는 누가 봐도 섬뜩할 만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아주 기괴했다. 콧잔등이 완전히 잘려나갔기에, 밋밋한 얼굴 한가운데 구멍만 두 개 나 있었다. 왼쪽 귀도 잘려나갔고, 오른쪽 눈동자도 텅 비어 있었다. 두 눈을 감으면 송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나이를 가늠하게 하는 흰머리는 뒤쪽에만 겨우 남아 있다.
베닉의 나이가 구십은 됐던가. 킬리언보다도 이십 년은 더 살았을 만한 가주였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까지도 가주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의 자식 나이가 육십은 되었고, 손자 나이 또한 서른이었는데.
‘끔찍이도 흑영의 지위에 집착하는 늙은이.’
그러니까 그의 기괴한 얼굴은, 수십 년 동안 흑영의 자리에 ‘들락날락’할 수 있게 해준 영광의 흔적인 셈이다.
‘그래도 말단이 가장 먼저 도착했네.’
흑영의 자리를 내주었다가, 되찾기를 수십 년째 반복하는 말단. 8인 중 가장 약하기로 공인된 가주였다.
“어서 오시지요. 베닉 베나르. 하지만 어쩌죠, 지금 가주님이 출타 중이신데.”
킬리언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어지간한 방계가주들에게도 말을 내려놓는 그조차, 흑영들에겐 존대를 하는 편이었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보군.”
쇠를 할퀴는 듯한 음성. 듣는 이가 킬리언이 아니었다면, 필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을 것이다.
베닉은 잃어버린 콧잔등 쪽으로 손을 가져가려다 멈칫거렸다.
“최근에 얻은 상흔이라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 흐흐.”
“…그러시군요. 날이 습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킬리언이 베닉을 저택 안으로 안내하려 하려던 그때.
두 사람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가늠할 수 없이 광막한 암연이 육박해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느릿하게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곧 킬리언의 얼굴에 반색이 돌았다.
“다행스럽게도, 마침 저희 가주님께서 돌아오시는군요.”
“다행인 거 맞나? 아직도 살기가 가라앉지 않으신 것 같은데.”
안개의 성벽을 건너오는 인영.
세이렌이 다가옴에 따라, 온 안개에 피비린내가 묻어난다. 얼마나 많은 괴수를 몰살하고 오는 길인지. 안개가 들러붙어도 피비린내가 희석되지 않는다.
“어서 오세요, 베닉. 오랜만이군요.”
얼굴을 제외한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는 세이렌. 그녀 자신이 흘린 피는 단 한 방울도 없으리라.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베닉에게 짤막한 인사를 남긴 뒤, 그대로 두 사람을 지나쳤다.
저벅저벅.
그렇게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세이렌. 그녀가 지나간 자리엔 피에 젖은 발자국이 남았다.
“…….”
“…….”
뒤에 남은 두 사람은, 그녀가 남긴 흔적을 살피느라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