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80화 (180/258)

제180화. 돌아오다 (1)

한편, 파무크 대로.

마차가 대로를 달리는 매일 밤, 데이몬과 루빈의 수련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음만 먹으면 끝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수련 회차를 늘려가는 루빈이었다. 그만큼 데이몬의 검식을 최대한으로 흡수했다.

‘물론, 내가 데이몬의 검식을 모두 새긴다 한들, 그게 내 검술이 될 수는 없겠지.’

암연의 6성 검식. ‘암연이 검을 이끈다’는 말처럼 저절로 발산하는 검식은 오직 그 창안자의 소유였다. 흉내 낸다 해서 발현할 수 있는 게 아닌, 고유한 경지인 것이다.

다만, 루빈은 데이몬의 검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더 빨리 나아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도련님. 이제 저택까지 3일 남았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파무크 대로를 벗어날 겁니다. 오늘은 제 검의 끝을 보아야 합니다.”

데이몬이 마지막이 왔음을 알렸다.

루빈은 군말 없이 그 말을 따랐다. 며칠은 더 수련하길 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림자 역장’과 핏빛서리의 눈보라를 이용해 데이몬의 검을 받아냈다. 검의 마지막 숨결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사아아아아.

“고마웠어, 데이몬.”

눈보라를 거두고, 흑칠의 오러마저 잠재운 루빈. 이후,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거리가 벌어진 마차를 쫓았다.

마차를 따라잡아 그 후미에 안착했을 땐, 두 사람 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도련님.”

땀을 식히던 와중.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이번 장례식에는 ‘여덟 대가문’이 소집되었습니다.”

“여덟 대가문, ‘흑영가’라 불린다고 들었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퓌레가 알려줬거든. 가장 강한 여덟 명의 가주들이라고.”

“그렇습니다. 흑영 8인. 혹, 현재 흑영가주들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저택에 도착하기 전, 데이몬이 일러둘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마침 현시점의 흑영에 대해 궁금했던 루빈은 설명을 해달라는 의미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데이몬이 흑영 8인의 이름을 죽 나열했다.

“릴 제파드, 아논 아스칼지, 카반 크로키슨, 데스릴 릴덴스, 샤케스 페아르, 디븐 칼둔, 마렉 헬리드, 베닉 베나르. 이렇게 여덟 명입니다.”

한 번쯤 들어봤던 이름들이었다. 특히 몇몇은 이름보다는 이명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무영귀 릴’, ‘유령검 아논’, ‘괴령연무 카반’, ‘지옥연환 데스릴’.

전생에선 방계 사람을 마주한 경험이라곤 함께 시험을 본 자제들이 전부였다. 그랬기에 이들 중 만나본 적 있는 건 쿤의 아버지인 카반뿐이다.

그런데 현시점 최강의 가주들과 마주하게 됐다니. 다시 태어나 새롭게 인생을 펼쳐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실감 났다.

“흑영 8인이 한자리에, 그것도 본가의 저택에서 모이는 건 아주 드문 일입니다. 사실, 저로서도 단 한 번뿐인 경험이었죠.”

“한 번이라면, 우리 로이넨가의 주인이 바뀌었을 때뿐이겠구나.”

어머니가 가주를 계승할 때라면, 스무 해도 더 전의 일이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흑영은 꽤 많이 바뀌었습니다.”

임무 중에 죽었거나, 흑영의 자격을 두고 사투를 벌이다가 죽었거나, 가주를 내려놓았거나.

“정점의 무위(武威)를 실현하는 것에 뜻을 둔 자들입니다. 그래서 암살자라기보다는 순수한 무인의 성격을 띠죠.”

사실이 그랬다. 칙명부에서도 흑영가주에게는 의도적으로 암살 임무를 덜 내주었으니까.

칙명부는 역사가 깊은 흑영가일수록 그 자제와 가신들을 쓸 만한 암살검으로 배출해낸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단, 흑영의 지위를 잃는 순간, 그들 목숨을 위협할 만한 까다로운 임무들이 주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데이몬, 너는 경계하고 있구나.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상황을.”

“…그렇습니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본가의 위세가 강한 때입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선 암살검가를 징벌하려 하고, 그 자리엔 흑영이 함께 하고 있으니. 게다가…….”

거대한 시련을 예감하는 듯한 데이몬의 눈.

“그 자리에 하필… 도련님도 함께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

“황제 폐하, 칙명부, 그리고 흑영 8인. 모두 도련님의 경지를 알지 못합니다. 일찌감치 도리언 도련님을 뛰어넘은 도련님의 경지를 말이죠.”

데이몬이 덧붙이진 않았지만, 루빈 기준으로 보자면 도리언을 뛰어넘은 건 예삿일이었다.

그가 정말로 대외적으로 숨기고 싶은 건, 같은 나이대 세이렌보다도 루빈의 성장이 가파르다는 사실이었다.

“도련님께선, 그 경지를 최대한 감춰야 합니다.”

데이몬은 그것이야말로 황제의 분노를 앞둔 암살검가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니.”

루빈의 생각은 달랐다.

“황제 폐하와 칙명부 앞이라면 동의하지. 아직은 ‘때’가 아니니 숨겨야겠다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 어떤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데이몬은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저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할 거라고 단정했다.

한결 단단해진 루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흑영들에겐 달라.”

“예?”

“지금 흑영은 어머니의 압도적인 무위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여도, 아마 어머니를 본가의 마지막 불꽃 정도로 생각할 거야.”

“그 말씀은, 그들에게 도련님의 경지를 드러내시겠다는 겁니까?”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상황이 온다면 숨기지 않겠다는 거야.”

“…….”

이건 경고가 될 것이다. 흑영을 비롯한 모든 암살검가를 향한 경고.

텔마흐가 어떤 속내를 가지고 흑영가주들을 소집했는지 단정할 수 없지만, 암살검가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것도 배제할 순 없었다.

방계가문의 이탈 혹은 배신?

전생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암연의 ‘일족’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이번엔 흐름이 달랐다. 전생에는 없었던 텔마흐와 칙명부의 계략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모른다.

한 사람이 모든 권위를 짊어질 때 동반되는 위험성. 그건 흑영가주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흑영의 지위를 잃고 나면 제 가문의 위상이 현저히 줄어드는 걸 직접 보아왔고, 몇몇은 겪어 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들은 어머니 하나만 없어지는 상황을 고대할지 모르지.’

물론, 어머니가 없다 해도 킬리언과 데이몬, 여러 척살조를 비롯한 수준급의 가신들이 한동안은 버텨낼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뛰어난 계승 후보의 존재감엔 못 미친다.

그게 적당한 때에 루빈이 흑영가주들에게 자신의 경지를 드러내려는 이유였다.

“데이몬.”

“예, 도련님.”

“흑영 8인의 성향을 말해줄 수 있어? 알고 있다면 그들의 경지까지도 함께.”

다각도로 전략을 세워두어야 했다. 텔마흐가 어떤 징벌을 내리느냐에 달려있었다.

흑영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해야 할 수도, 어쩌면 그들을 완전히 본가의 일원처럼 결속시켜야 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흑영 8인에 대한 정보가 중요했다.

“여덟 명 중에서 15년 넘게 흑영의 지위를 지키는 건 네 명뿐입니다.”

“나머지 넷은?”

“15년 안에 세대교체를 당할 겁니다. 흑영에서 한 번 지위를 잃은 자는 다시 탈환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드문 사례라 한다면… 베닉 베나르입니다. 그는 흑영으로서 반환과 탈환을 수십 년째 반복하고 있습니다.”

데이몬은 곧바로 덧붙였다.

“베닉 베나르를 포함, 하위 네 명은 6성이 확실합니다.”

“그럼 상위 네 명 중에는 7성도 있을 거란 말이야?”

“예, 릴 제파드, 아논 아스칼지, 카반 크로키슨, 데스릴 릴덴스 중에는 7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릴, 아논, 카반, 데스릴…….”

루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당히 의외인 사실이었다. 루빈이 기억하는 15년 이후 시점으로는 상위 네 명 중 아무도 흑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상한데.’

쿤의 아버지 카반은 임무 중에 죽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제외한다 해도.

나머지 릴, 아논, 데스릴의 행적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15년쯤 뒤, 저들 셋은 어디에 있는 거지?’

심지어 그들 중 7성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면, 어째서 암살검가의 일원으로 텔마흐에 대항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 그보다… 방계 가주에 한해서 최강의 무인이었으면서 어떻게 고작 15년 사이에 이 세상에서 증발할 수 있는 거지? 텔마흐가 저들부터 제거했던 걸까?

의문이 연달아 이어졌지만,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라는 건 분명했다.

‘이 의문들은 나중에 풀기로 하고, 우선은 지금 닥친 문제에 집중하자.’

이후, 루빈은 데이몬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데이몬은 흑영도 상위와 하위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두 무리는 경지에서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면에서도 간극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상위 4개 가문은 십수 년째 흑영의 지위를 누리면서 무위를 체현하는 반면, 하위 4개 가문은 흑영에 연연하는 것.

루빈은 흑영 사이의 간극을 유념해두었다. 그 간극을 이용할 때가 있을 터.

“릴, 아논, 카반, 데스릴 중에서 누가 최강자인지도 모르는 건가?”

루빈의 물음에 데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내부적으론 우열이 가려졌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외적으론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세이렌 때문이었다. 세이렌 이전, 흑영의 경지가 로이넨 가주를 뛰어넘었던 시절엔 그들 스스로 경지를 드러내기에 바빴다. 본가에 대한 압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세이렌이 군림하고 있기에, 흑영은 누가 최강이고 누가 7성에 올랐는지 드러내지 않았다. 흑영의 권위를 위한 전략적인 은폐였다.

‘아쉽군. 누가 최강자인지 알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유도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최강자를 가려내는 방법은 그들과 검을 맞부딪치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 해도 아직까진 흑영에 미치지 못하는 루빈이 확실하게 알아낸다는 보장도 없었다.

‘일단은 텔마흐가 어떤 징벌을 내리는지 그걸 지켜봐야 하는 건가.’

마차가 나아가는 대로 저 끝으로, 교차광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루빈. 생각을 그 정도로 정리했다.

이 교차광장으로부터 분산되는 길을 통하면 곧 로이넨 저택이었다. 마침 데이몬도 그 사실을 알렸다.

“이제 들어가셔야 할 때입니다.”

시간이 더 지나, 루빈 일행이 마차에서 내릴 때가 되었다. 제국에서 내준 마차는 더는 로이넨 저택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저택을 감싼 안개 성벽이 나올 때까지 꼬박 하루를 걸어나갔다.

어둠이 가시고 해가 비치는 새벽쯤, 그들 주변으로 로이넨 저택의 안개가 감싸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왔구나.’

일반인을 미치게 만들 정도의 독성조차 루빈에겐 친숙하기 그지없었다.

처음과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펼쳐졌던 곳이다. 회귀 전에는 텔마흐에 의해 무너졌던 이곳을 이번엔 지켜내야 했다.

저벅저벅.

“…….”

저절로 결의가 깃드는 그때. 루빈은 두꺼운 안개 저쪽에서 자신을 감지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저택 주변에서 산책이라도 하는 흑영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흑영이라기엔 너무도 나약한 암연이군.’

그러자 후보가 빠르게 추려졌다. 데이몬과 랭 척살조가 루빈 뒤쪽으로 물러나는 걸 보면, 그들도 저 앞의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윽고, 안개를 스윽스윽 휘저으며 앞으로 다가오는 인영.

“오랜만이구나, 루빈.”

“형님이셨군요.”

첫째, 도리언이었다. 열두 살 차이가 나는 이부형제. 매피스와는 일전에 한 번 만난 적 있다지만, 도리언과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현재 나이가 스물다섯. 그는 수염을 꽤 덥수룩하게 기른 상태였다.

“멀리서 오는 길이라고 들었다. 오늘쯤 네가 올 것 같았지.”

그러면서 도리언은 루빈 곁을 지키는 면면을 빠르게 확인했다.

데이몬의 얼굴은 알고 있었고, 랭 척살조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들 정체가 척살조인지는 모른다 해도 자신을 데리러 왔던 가신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터.

루빈은 순간적으로 도리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떠오르는 걸 읽어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나이 차가 난다 한들. 이번에 재회한 이유가 매피스의 죽음 때문이라 한들. 어쨌거나 도리언에게 루빈은 경쟁자에 불과했다.

물론, 그 반대쪽에선 경쟁 관계라는 일말의 생각조차 들지 않았지만.

“실례지만, 일단 가주님부터 뵙겠습니다.”

루빈은 슥 도리언을 지나쳤다.

순수한 경지로만 보자면, 도리언이 죽은 매피스보다는 나았다. 이제 막 3성을 건너 4성에 올라선 것 같았다.

그래봤자, 루빈에겐 추월해버린 상대에 지나지 않는다. 데이몬을 비롯한 가신들이 말없이 루빈의 뒤를 따랐다.

“…….”

잠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몸을 부르르 떠는 도리언이 보였다.

그런 도리언을 바라보던 루빈의 머릿속에, 괜찮은 전략이 하나 떠올랐다.

‘이제 막 3성에서 벗어났다면, 그 스스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거야. 분명히 내게 그 경지를 드러내려고 하겠지.’

루빈의 목적은 도리언의 의지를 무참히 짓밟는 데 있지 않았다. 그건 부차적인 효과일 뿐. 정말로 그가 노리는 건 도리언이 아닌, 흑영들.

‘도리언을 이용해서 흑영 몇몇을 휘어잡아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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