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돌아오다 (4)
“미친 소리다, 루빈. 본가를 우습게 만들 셈이냐?”
도리언은 노한 기색을 드러내며 속삭였다. 반응을 보아하니 쉽게 검을 빌려주진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눈속임용으로 가져온 보잘것없는 단검이라도 써야 하나.
그때였다.
“루빈 도련님, 제 거라도 괜찮겠습니까!”
디븐 칼둔이 순순히 제 애검을 내놓았다. 그는 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비록 단검은 아니지만!”
그 말처럼 단검이라기에는 검신이 길었다. 특이한 점은, 검신에 비늘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 게다가 검신의 색깔은 흐릿한 초록빛이다. 문양과 색 때문에라도 뱀으로 착각할 만했다.
“나름 이름도 있지요! 사태검(蛇態劍)!”
역시 이름에도 뱀이 들어가 있었다. ‘뱀의 모양을 한 검’이라는 건가.
곧 그것이 이름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곧바로 깨달았다. 사태검의 검신이 순간적으로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걱정 마십쇼! 검의 주인이 아닌 바에야 전투 중에 이놈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을 테니.”
“순간적으로 뻗어 나가기라도 하는 건가요?”
“그뿐입니까! 이놈은 휘어지기도 하죠. 뱀처럼 말입니다! 물론 검의 강도는 거의 유지된 채로요!”
디븐 칼둔의 목소리가 우렁찬 만큼 무기에 대한 자부심이 뿌리 깊은 것 같았다.
그 말대로라면, 미명(美名)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긴, 이들은 하위의 흑영이라 할지라도 현시점 암살검가 정상부에 머무르는 자들. 그들을 그 자리까지 이끈 무구라면, 최소 보구일 것이다.
“그렇군요. 이 검의 진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칼둔 가주님과 비무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네요.”
“아쉬워하실 거 없습니다! 마렉의 무기 또한 예사 것은 아니니.”
마렉을 바라봤다. 그는 입술을 길게 늘이며 잔잔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단검인가? 손에 뭔가가 들려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분간되지는 않았다.
“시작하도록 하죠. 피차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으니.”
바라던 바였다.
루빈과 마렉은 몇 걸음 떨어져 나왔다. 안개가 그들을 에워쌌다. 단 몇 걸음 옆으로 옮긴 것만으로도 도리언과 디븐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느낌.
물론, 눈으로 볼 수 없어도 참관자들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쩔 땐 암연으로 인영을 감지하는 방식이 더 섬세한 관찰이 될 수도 있으니까.
‘데이몬은 하위 흑영들이 모두 6성일 거라고 했지.’
6성의 경지부터는 ‘암연이 이끄는 검’이다.
“괜찮다면, 제가 선공을 해도 되겠습니까?”
마렉의 물음. 이 역시 바라던 바였다.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루빈은 이 비무에서 반격이나 역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렉의 검을 온전히 받아내는 데 집중할 것이다. 파무크 대로에서 데이몬의 검을 받아냈던 것처럼.
물론 이번엔 오러와 ‘그림자 역장’, 핏빛서리의 눈보라를 이용할 수 없다.
‘검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지.’
두 흑영을 놀라게 함으로써, 세이렌 이후 누가 본가를 이끌 것인지 선포하는 것. 그게 루빈의 목적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선언함과 동시에 마렉은 제 무기를 드러냈다.
주먹을 쥔 손. 손가락 사이사이로 ‘장침’이라 해야 할 것들이 각각 세 개씩 튀어나왔다. 피부를 뚫고 나온 것은 아니었고, 장침을 손가락 사이에서 끼워 붙들고 있는 것이다.
‘장침이라기엔 꽤 두껍군.’
무기의 끝은 뾰족했지만, 몸체는 화살대처럼 두꺼웠다. 검이 부딪친다 해도 끊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렉이 팔을 뻗는 것으로 비무가 시작됐다.
슈우우웅!
마렉은 왜소하지만 팔만큼은 확연히 길었다. 주먹을 내지르는 셈이었지만, 손가락 사이엔 장침이 끼워져 있었다. 상당한 길이를 품고 공격하는 것이다.
‘사마귀 같군.’
루빈은 몸을 뒤로 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마렉의 창백한 인상과 그 전투 방식을 보니, 꼭 그래 보였다.
“호오!”
“어허!”
이제 시작이었지만, 작은 탄성과 큰 탄성이 울렸다. 각각 마렉과 디븐이었다. 루빈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회피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역시나 암살검가의 계승된 검식을 벗어난 공격들.’
마렉의 검식은 점멸하는 불빛 같았다. 찌르기 위주이지만, 단순한 반복이 아니었다. 공격지점이 미세하게 비틀리면서 완고한 방어에 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챙! 챙! 챙!
‘역시 가장 취약한 지점만을 노린다는 거지’
역시나 마렉이 6성이 되어 개화한 특성은 눈.
무리 중에서 최약체를 찾아내는 건 부차적인 능력일 뿐, 본연은 전투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챙! 챙! 챙!
“……!”
루빈의 예상처럼, 마렉의 시야엔 붉은 점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 점은 루빈의 약점 위에 겹쳐졌고, 그곳을 노리도록 유도했다.
“칫!”
마렉의 얼굴에 짜증이 돋아난다. 표시된 약점을 그대로 노리는 공격인데도, 번번이 루빈이 사태검을 움직여 방어해내는 것이다.
챙! 끄르르릉! 챙!
막고, 막고, 막는다.
‘…데이몬과의 수련이 아니었다면.’
시작하자마자 공격을 허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며칠간의 수련 덕분에 루빈은 ‘암연이 이끄는 검’을 막아낼 만큼 충분히 성장했던 터였다.
챙! 챙!
-루빈.
갑자기 하네케의 목소리가 울린다.
-적당히 놀래줄 셈인가? 크게 놀래줄 셈인가?
전투의 흐름을 읽어나가고 있는 하네케였다. 비록 루빈의 시야만 공유받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눈에는 마렉의 틈이 너무나도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마렉처럼 붉은 점으로 표시되지는 않을지라도, 하네케에게는 보였다. 역공이 가능하고, 꽤 주효할 것이다.
-내가 보는 걸 자네가 못 보고 있을 리는 없겠지.
‘예, 고민 중입니다.’
분명 위협적이고 또 놀라운 공격이지만.
그러기엔 마렉은 지나치게 틈이 많았다. 상대방의 약점을 알아내는 눈을 갖췄기 때문에, 거꾸로 생겨난 약점들.
‘아무래도 큰 충격을 주는 게 낫겠죠?’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본래 계획보다는 좀 달라진 상황이었지만, 흑영들에게 남기는 충격은 클수록 좋았다.
‘오러’나 ‘그림자 역장’만 없다면.
‘저들의 놀라움이 공포로까지 번지진 않겠지.’
이윽고, 루빈의 반격이 시작됐다.
“크흐으억!”
우렁찬 감탄성! 지켜보고 있다가, 마치 검에 찔린 사람이 자신이라도 되는 듯 놀라 소리치는 디븐 칼둔이었다.
* * *
‘헬리드가의 마렉과 싸우고 있군.’
빠른 걸음으로 ‘뼈의 정원’으로 향하는 세이렌.
킬리언, 데이몬, 쿠제가 그녀 뒤를 따랐다. 그들은 본가의 두 아들과 흑영 두 명이 훈련장에 함께 있다는 가신의 보고를 받고 그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비무의 상황을 가장 먼저 판별해낸 건 세이렌.
그녀는 ‘뼈의 정원’에 들어서기 전부터 전투의 흐름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상식대로라면 당연히 루빈이 심각한 열세여야 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킬리언 님. 루빈 도련님과 겨루고 있는 흑영이 누군지 아십니까?”
데이몬이 킬리언에게 슬쩍 물었다. 흑영에 대해서라면 직속가신보다 킬리언이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던 터였다.
“마렉 헬리드. 생긴 것도 전투 방식도 사마귀 같은 가주야.”
“헬리드 가주… 암연으로 느끼기엔 창을 무기로 쓰는 것 같군요.”
“보통 땐 침형(針形) 수리검이지. 그걸 손가락 사이에 끼고 싸우는데, 그게 창으로 조합이 가능하기도 해.”
“독특한 무기군요.”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
“예?”
“마렉이 창으로 바꿔서 싸운다는 건, 그만큼 싸움에 애먹고 있다는 거거든. 루빈 도련님께서 아주 신나게 신고식을 벌이는 중이라는 거지!”
앞선 데이몬의 보고를 통해 루빈의 계획을 알고 있던 그들이었다. ‘기회가 온다면, 흑영들에게 제 경지를 드러내겠다’는 루빈의 계획 말이다.
일찌감치 ‘비무’의 성격에서 벗어나버린 두 사람의 싸움. 이게 루빈의 계획이었던 걸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싸움은 멀리서 감지했던 대로 백중세였다. 누가 더 유리하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둘 다 피도 꽤 흘린 상태.
챙! 챙! 챙! 챙!
루빈과 마렉은 몰입한 나머지, 세이렌의 등장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시 흑영은 흑영이라는 건가.’
루빈이 눈을 부릅뜨며 생각했다.
자신의 역공이 시작되자 비무의 온도가 바뀌었다. 사태검이 마렉의 오른쪽 하복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직후, 마렉에게선 살기마저 배어 나왔다.
무기의 형태를 창으로 바꾼 건 놀라웠다. 장침처럼 보인 무기들이 서로 결합한 것이다. 그 이후로 마렉에게서 느껴지던 희미한 빈틈마저 완벽히 사라진 듯했다.
공격 일변도였다가, 공수 균형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창의 상‧하단부를 분리시키며 역동적인 반격을 시도하기도 했고.
‘…어머니가 왔군. 그럼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하나.’
매우 극악의 확률이긴 했지만, 루빈이 이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더라도, 여기서 흑영을 쓰러뜨리는 건 그다지 좋은 그림이 아니었다.
샤샤샤샤삿.
스릉!
그리고 어머니도 그렇게 판단했으리라.
지시를 받은 킬리언과 데이몬이 제 무구를 빼 들고 비무에 끼어들었다.
“……!”
창을 내려치려던 마렉은 막아서는 두 개의 검에 의해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참아왔던 숨을 내쉬며, 상황을 파악했다.
“하아, 하아…. 오랜만에 집중하다 보니 가주님께서 오신 줄도 몰랐군요.”
디븐 칼둔이 우렁찬 웃음이 끼어든 것도 그때였다.
“크하하하, 가주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보셨습니까? 보셨습니까! 둘이 호각이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봤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 이 말입니다!”
“글쎄요. 삼십 합 안에 무너질 거로 봤습니다만.”
냉엄한 눈으로 루빈을 바라보는 세이렌. 틀렸다 할 수 없는 진단이었다. 루빈 스스로도 슬슬 한계가 오고 있다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다만, 세이렌도 루빈도 알고 있는 숨겨진 사실이라면.
‘브리온 오러까지 썼다면, 아니, 저 아이 손에 제 무기만 들렸다면 패배하는 쪽은 마렉이었을지도.’
그런 생각을 삼키며, 세이렌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렉 님, 디븐 님. 제 아들에게 뜻깊은 경험을 해주어 감사드립니다. 오늘이 중요한 발판이 될 것 같군요.”
“허허, 저 둘이 싸우는 걸 보고도 놀랍지 않으신가 보군요! 역시 가주님께선 도련님의 경지를 얼추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잔뜩 신난 디븐과 달리, 마렉은 침묵을 유지했다. 루빈과 싸운 당사자로서 그가 받은 충격은 그 누구보다 컸다.
‘십수 년을 도전해서 얻어낸 흑영의 칭호인데.’
그래서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처음 흑영에 도전했던 그때에, 루빈은 태어나기나 했을까?
이제 겨우 열세 살에, 아직 암살자 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은 본가의 자제였다. 그런데 호적수와의 대결처럼 막상막하였다니. 평소 침착하던 그조차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역시 세이렌 로이넨의 핏줄이라는 건가. 산 넘어 산이야. 암담하군…….’
창백한 얼굴을 마른세수해 보는 마렉 헬리드. 그의 눈길이 루빈에게 향했고, 때마침 루빈도 그를 바라봤다.
‘어쨌거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말이 오가진 않았지만, 마렉은 그런 의미의 눈빛을 보냈다. 루빈 또한 예우를 갖춰 상체를 숙였다.
한편, 도리언은, 일련의 상황 속에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해일에 조난당한 사람과 같았다.
비천한 놈이라 생각했던 막내의 무위를 바로 앞에서 지켜보면서, 그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켜야 했다.
저런 괴물을 내가 훈육하려 했다고? 너무도 무모했다. 어째서 매피스가 저 괴물의 이름만 나와도 예민한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이미 루빈의 진면목을 봐버린 거야.’
그때. 넋을 잃은 듯한 그에게로, 세이렌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만 나가봐라, 도리언.”
“…알겠습니다, 가주님.”
이미 세이렌은 두 흑영과 가신들 모두 훈련장 밖으로 내보냈다. 도리언이 마지막 순서인 것이다. 루빈을 훈육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세이렌의 관심을 받고 싶었던 도리언은, 고개를 푹 숙였다.
터벅터벅.
그러곤 힘없는 발걸음으로 출구로 향했다.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머니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루빈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