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황제와 대면하다 (1)
루빈과 세이렌의 기습적인 방문에 앞서.
“술이 떨어졌다.”
구름보다 높은 상공에서 하늘을 유영하는 그랑버드. 룰포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두 로이네크로우를 눈치채지 못한 채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졸음에 반쯤 내려앉은 눈. 그가 들고 있던 술잔을 까딱거렸다. 옆에서 대기 중인 칙명부의 하급 간부가 다가와 술을 따랐다.
“너도 마실래?”
“…괜찮습니다.”
하급 간부는 난처한 듯 대답했다.
룰포가 즐겨 마시는 술은 독사의 맹독이 함유된 술. 어지간한 독사도 아니고, 괴수의 피를 주입시키며 키운 독사라 간부들도 힘겨워하는 술이었다.
‘이럴 땐 넙죽 받아마시던 로젠탈러가 아쉽단 말이지.’
룰포는 짜증이 묻어나는 손짓으로 하급 간부를 물렸다.
지금 그랑버드의 정중앙에는 상좌에 앉아 있는 룰포를 비롯해 칙명부 간부들이 집결해 있었다.
하급 간부 이십여 명에 로젠탈러, 히탄 격의 고위 간부도 다섯이나 있었다.
이 정도로 휘하 간부들을 데려왔다는 건 룰포로서도 간단치 않은 외출이었다는 뜻.
물론, 그랑버드 위에는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제국군 3개 소대도 있었지만, 그 파견병들은 실속이 없었다. 황명의 격을 높이기 위해 배치해놓았을 뿐, 심지어 이 병사들은 암살검가의 존재조차 몰랐으니까.
크르르르.
크아아아아!
맹수의 날이 선 외침. 룰포는 끌끌끌 웃으며 맹독의 술을 홀짝였다.
암살검가의 향방은 내일에나 결정이 날 터. 무료한 시간을 달랠 겸 눈요기나 마련해두었던 터였다.
적흑사자라 했던가. 로이넨 저택이 위치한 대륙 동남반구에만 서식하는 맹수다.
태어날 땐 흑색 털을 지닌 채로 태어난 이 사자들은 성체가 되어서는 온몸의 털이 적색으로 물든다고 했다.
자신이 로이넨 저택에 가 있는 사이, 간부들에게 적흑사자 두어 마리를 잡아다 놓으라고 시켰던 룰포였다.
크르르카아!
칙명부 소속의 마법사들이 염동으로 창살을 점점 좁히는 중이다. 안에 갇힌 적흑사자 두 마리는 억지로 싸워야만 했다.
졸다가 깨기를 반복하는 룰포는, 아직도 둘 중 하나가 죽지 않은 적흑사자를 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잠꼬대를 하듯, 낮은 음성으로 끌끌끌 웃으면서.
암살검가의 꼴이 마치 저 적흑사자 두 마리 같군.
흑영이 일으키는 균열. 암살검가는 그렇게 서서히 와해되겠지. 훗날의 정벌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사전 작업이었다.
“어찌 결정 나려나…….”
그런 혼잣말을 내뱉어보는 그때.
그우우우우우!
그랑버드가 갑자기 울부짖었다.
“……!”
휴식을 취하던 칙명부 간부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두 각자의 무기를 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동요하는 그랑버드로 인해, 룰포가 쥐고 있던 술잔이 크게 찰랑거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암살검가가 반기라도 든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지. 암살검가에 대한 통제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위우우우웅.
간부들 중 일부는 칙명부의 비전 오러를 발현했다. 노란 오러가 검신을 덮는다. 마법사들도 긴장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잠시 흐트러진 찰나, 적흑사자를 에워싼 철창에 틈이 생겨나고 말았다.
크르르카아!
피를 흘리며 싸우던 적흑사자 한 마리가 룰포를 향해 돌진한 것도 그때였다. 적흑사자는 누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이건 뭐야?”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앞발을 들어 올리는 적흑사자. 룰포는 한숨을 푹 내쉬곤 들고 있던 술잔을 휘둘렀다.
쿵.
적흑사자가 쓰러졌다. 술잔의 테두리를 따라 노란 오러가 작열했다. 룰포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쩝, 입맛을 다셨다.
“술 아깝게…….”
남은 한 마리의 적흑사자도 룰포를 향해 달려들었다. 룰포가 또다시 한숨을 내쉬는 그 찰나.
소동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술기운에 반쯤 감겨있던 그 눈꺼풀이 크게 떠지는 일이 벌어졌다.
쿵.
달려들던 적흑사자가 픽 쓰러졌다. 룰포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행동하기도 전에 죽어버린 거니까.
룰포는 눈앞에서 적흑사자의 목을 관통한 검을 놓치지 않았다. 룰포만이 알아볼 수 있는 위력적인 속도였다.
그 검은 제국군의 것이었지만, 그걸 던진 사람은 따로 있었다.
“세이렌……?”
로이넨가의 가주와 그 막내아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간부들이 오러를 형형하게 빛내며 그들과 대치하려 했지만, 룰포는 손을 들어 멍청한 간부들을 제지했다.
“멈춰라. 괜히 목숨 버리지 말고.”
그 명령에 간부들이 하나둘씩 무기를 내렸다. 세이렌의 등 뒤로 난데없는 침입자를 뒤쫓기 위해 제국군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들…. 누구든 가서, 저놈들 좀 진정시켜라. 그리고 저놈들 지휘관이 누구야? 죽여서 이 짐승 새끼들이랑 같이 내다 버려.”
물론 지휘관이 누구든 뚫릴 수밖에 없다는 걸 룰포도 잘 알았지만, 세이렌에게 자신의 불만을 드러낼 필요는 있었다.
“이런 깜짝 방문은 예상하지 못했소만, 세이렌.”
세이렌의 이름이 발음되자, 칙명부 간부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말로만 들었던 그 붉은 머리칼의 여인?
“암살검가의 회의가 막 끝난 참이라 서둘러 찾아왔습니다. 놀라게 했다면 유감입니다.”
“막 낮잠을 자려고 했었지.”
“적흑사자 하나가 수장님께 달려들기에 죽였습니다. 혹 사육할 요량은 아니었겠지요? 필요하면 적절한 품종으로 제공해 드리지요.”
“아니, 그건 됐소. 그냥 가죽이 필요했던 건데, 워낙 정교하게 숨을 끊어줬으니 오히려 잘됐지.”
“다행입니다. 제 아들이 괜한 짓을 한 건가 걱정했는데.”
루빈이? 놀란 룰포는 하마터면 입밖으로 소리낼 뻔했다. 당연히 적흑사자를 죽인 건 세이렌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사실에 룰포는 끌끌 웃었다.
이제 보니 다른 가신이나 흑영은 없고, 그저 루빈 하나만 대동하여 찾아온 것 같았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명료했다.
‘저 아이가 그 정도인가?’
루빈에 대한 세이렌의 두터운 신뢰.
룰포가 이번 로이넨 원정에서 깨달은 것 중 하나였다. 세이렌이 루빈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것.
룰포 자신을 마중하는 임무를 맡겼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함께 움직이는 것도 의미심장해 보였다.
룰포는 놀란 기색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의외군. 고작 적흑사자한테서 날 지켜주려고 공자를 데려온 건 아닐 테고.”
“물론이죠. 함께 와야만 했으니까요.”
“와야만 했다?”
잠깐 대화를 멈춘 룰포는 들고 있던 술잔을 한 번 더 까딱거렸다. 하급 간부가 쪼르르 달려와 술잔을 채웠다.
술잔은 이내 세이렌에게 건네졌다. 세이렌은 거절하지 않았다. 순순히 술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맹독 원료의 술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암살검가의 결정은-”
세이렌은 잠시 말을 멈추고, 부하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게 뭘 뜻하는지는 명백했다.
“아, 내가 실수했군.”
룰포는 휘하 간부들을 모두 물렸다. 다만 하나는 남겨놓았는데, 마법사였다. 그마저도 방음막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윽고, 세이렌이 입술을 떨어트렸다.
“저는 죽은 매피스의 어미로서 본가에 책임이 있음을 통감합니다. 따라서 흑영 제외, 방계가 자제들이 제국군에 복무하는 1안, 흑영 자제들이 황궁에서 지내는 2안이 아닌 또 하나의 방안을 폐하께 내놓으려 합니다.”
룰포는 들어선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그가 품은 오러의 무위가 언뜻 드러난다. 과연 로젠탈러가 충성을 바칠 만한 무인이다.
방음막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진 않겠지만, 그의 팔에 응집된 오러에 의해 웅웅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세이렌은 당황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폐하께서 내려주신 방안에는 본가의 책임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마른세수를 하는 룰포. 그러더니 난데없이 허리를 뒤로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광기로 오해될 만한 웃음이었다.
“…….”
“세이렌…. 로이넨 가주.”
“예, 룰포.”
“재밌는 게 뭔지 아시오?”
어느새 룰포가 무인으로서 내뿜던 기운은 싹 사그라진 뒤였다.
“폐하께선 이 또한 예상하신 것 같다는 거지.”
“……?”
“내가 이곳으로 원정을 오기 전, 폐하께서 말씀하시더이다. 만약 로이넨 가주가 새로운 방안이라도 내놓거든, 지체하지 말고 연결을 시도하라고.”
루빈이 끼어들었다.
“연결이라면, 마적석이겠군요.”
“역시 루빈 공자가 마법학교에 있었던 보람이 있군. 폐하께선 내게 1급 마적석을 내준 터. 로이넨 가주, 그 뜻을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날 거칠 필요 없이 폐하께 직접 이야기 드리시오.”
루빈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하마터면 살기를 표출할 뻔했다. 그러나 곧바로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황제를 마주하게 된다니.
“물론, 루빈 공자도 함께해야겠지.”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오. 내 막사에서 통신을 시도하도록 하지.”
룰포가 걸음을 옮겼다. 그랑버드의 한쪽에는 칙명부 수장만을 위한 막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뒤따르기 전, 세이렌이 루빈을 향해 말했다.
“이건 예상 밖이구나.”
“괜찮습니다, 가주님. 폐하 앞이라도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다. 두려워해선 안 돼.”
세이렌은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외우듯, 그렇게 반복하여 말했다.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고, 심호흡을 다시 해보았다.
문제는 두려움이 아니다.
분노를, 다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희석된 적 없는 텔마흐를 향한 분노를 참아낼 수 있을지, 그게 문제일 뿐.
* * *
릴리크의 제도(帝都) 필리아르크.
필리아르크의 전경만으로도 거대도시의 면모는 충분했지만, 이 도시의 특별함은 바로 황궁에 있었다.
대륙 역사상 유일무이한 존재가 기거하는 황궁. 제도의 북쪽을 큼지막하게 차지한 이곳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도시로 착각될 정도였다.
높게 솟은 건축들이 구름을 찌르는데, 가장 압권인 것은 여덟 개의 첨탑이다.
규모도 규모였지만, 각 첨탑 꼭대기에는 그랑버드가 1기씩 발톱을 디디고 있었으니까.
첨탑엔 각각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오래전 대륙의 패권을 두고 싸웠던 여덟 왕국의 문양이었다.
대륙의 패자는 릴리크가 되었고, 각 왕국은 그저 속국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그우우우우우.
여덟 기의 그랑버드가 이따금 울어댄다. 그 소리는 천둥보다도 컸다.
그러나.
그 엄청난 울부짖음도 황궁의 적막을 깨트릴 순 없었다. 대마법사조차 함부로 깨부술 수 없는 결계. 그와 더불어 고차원의 방음막 또한 황궁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궁은 가장 안전한 공간이자, 지극히 적막한 장소인 셈이다.
저벅저벅.
황궁 복도.
서두르는 발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이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푸른색 가면을 쓴 사람. 바로, 황제의 시종장이었다.
황제가 대외적으로 황금가면을 쓸 때, 그를 가까이서 보좌하는 시종장은 푸른가면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황제가 가까이 두는 인물인 만큼, 황궁 내에서도 시종장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었다.
“…….”
지금, 시종장은 옷자락이 휘날릴 정도로 빠르게 걸어가는 중이었다. 황제가 기다리던 일이 발생했으니, 조금이라도 늦어서는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될 터.
그가 향하는 곳은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황제가 낮 동안에 머무는 이곳은 ‘집무실’이라고는 해도 황궁 안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두우우우.
아뢰기도 전에, 집무실의 문이 저절로 열린다.
역시 폐하께선 짐작하고 계셨던 건가. 그런 생각과 함께,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황제가 나타났다.
그러나 집무실은 거대했기에, 시종장과의 거리는 아득할 정도.
역시나 황제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 앞으로 커다란 장막이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너머로 실루엣만 간신히 보일 뿐이다.
“왔군, 시종장.”
거리가 상당함에도, 황제의 목소리는 널찍한 공간을 가득 메웠다. 시종장은 몇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선 곳은 ‘백 보 지점’이다.
집무실에는 ‘백 보’, ‘칠십 보’, ‘오십 보’, ‘삼십 보’, ‘십 보’마다 각 지점이 있는데, 황제가 허락할 때에만 각각의 지점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참고로, 여기서 보폭의 단위는 인간을 기준으로 한 게 아니다. 거혈족의 변신 상태를 기준으로 한 보폭. 즉, 백 보라 해도, 상당한 거리인 것이다.
“가까이 오라.”
시종장에게 허락된 최대한의 위치는 삼십 보.
황제가 가까이 오라 했기에, 시종장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삼십 보 지점까지 나아갔다.
“폐하, 칙명부 수장으로부터 마적석을 통한 대면 요청이 들어왔사옵니다.”
시종장은 황실에서도 칙명부의 존재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만큼 황제가 가까이 두는 인물이었지만, 매일 황제를 마주하고도 푸른가면 속 그 눈빛엔 두려움이 사라진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내 누이와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군.”
장막 너머, 황제의 손이 움직였다. 그 뜻을 알아차린 시종장이 바닥에 조심스럽게 마적석을 내려놓았다.
“나가 보아라.”
“…알겠나이다, 황제 폐하.”
시종장은 서둘러 집무실의 문까지 뒷걸음질 쳤다.
다시 혼자 남겨진 텔마흐. 그는 간단한 손짓으로, 황족만이 작동시킬 수 있는 1급 마적석을 발현시켰다.
곧 마적석에서 빛의 파장이 일어나더니 익숙한 적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얼굴이 땅에 닿을 듯 깊숙이 몸을 조아리고 있었다.
황금가면 뒤, 텔마흐의 한쪽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