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오크사냥꾼 (1)
다음 날.
푸시시싯.
물을 부어 모닥불을 꺼트리는 쿠제.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였다.
까아아아악.
베닉의 로이네크로우 베르데는 하늘에서 원을 그리며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지만, 티나는 천하태평이었다.
로이네크로우의 모습으로, 어젯밤 베닉이 손수 해준 요리를 즐기는 중이다.
“쿠제! 이거 다음날 먹어도 맛있다! 늪해마 요리로 팔아도 되겠는데?”
“티나 님,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제 이미 배 터지게 드셨잖아요.”
“어제는 고양이 모습으로 먹었잖아! 아, 여우였나? 어쨌든 변신에 따라 미감이 달라지는 거 몰라? 로이네크로우로 먹으면 또 맛이 다르단 말이야.”
“에휴.”
쿠제가 한숨을 내쉬는데, 그 모습마저 우스운 베닉이었다. 그로선 얼마 만에 보는 환혈족인지 몰랐다.
“모험하는 내내 심심하진 않겠어, 쿠제.”
“베나르 가주님, 솔직히 말해 단 하루만이라도 심심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도 환혈족이 대단한 사람들이란 건 인정할 수밖에 없잖나. 틀림없이 도련님에게 큰 힘이 될 테지.”
아침부터 칭찬을 받으니 티나로선 기분이 좋을 수밖에. 하늘을 향해 부리를 치켜세우고는 마구 부딪쳐댔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근데 약간 정정이 필요하겠네요, 베닉. 앞으로 루빈한테 큰 힘이 될 거라는 말은 틀렸어요. 왜냐고요? 이 몸은 이미 루빈에게 엄청난 힘이 되어주고 있으니까요!”
“티나 님!”
무례한 언사일 수도 있지만, 베닉은 개의치 않았다. 끌끌거리며 재밌어할 뿐.
때마침 루빈이 한쪽에 매어놨던 말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베닉이 말고삐를 전해 받았다.
“근데 어제는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자던데, 악몽이라도 꿨어요?”
티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베닉에게 물었다. 칭찬 한마디에 남 걱정까지 해줄 만큼 유해진 그녀였다.
“어제 내 특성만 이야기하고 저주는 말해주지 않았군.”
“저주……?”
“미래를 보지 않을 땐, 늘 악몽에 시달린다네. 제일 고통스러운 순간이 재현되는 그런 악몽이지.”
“매일이요?”
“심지어 선잠을 잘 때도 어김없이.”
“후… 그러면 진짜 저주라 할 만하네요.”
그때, 쿠제가 말에 올라탔다. 옆에 있던 티나도 고양이로 변신하는 동시에 말 등에 제 자리를 잡았다.
“죽게 되면 악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지.”
“…….”
“그래서 어쩔 땐 직속가신 데이몬이 진심으로 부럽단 말이야.”
뜻밖의 이름이었다. 데이몬이 악몽이랑 무슨 상관인 거지?
“내 알기로 데이몬은 6성이 되어 영원한 불면(不眠)을 얻었다더군. 잠의 개념이 사라진 게야. 그런데 그게 특성인지, 저주인지 애매해. 워낙 과묵한 가신이라.”
“저주죠, 저주! 잠 못 자는 게 뭐가 좋다고. 안 그래, 쿠제?”
“…….”
쿠제는 어깨를 들썩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가만히 루빈을 바라봤다.
6성 암연의 특성, 그리고 수반되는 저주.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이나 티나에겐 머나먼 이야기였다. 평생에 걸쳐 수련을 한다 해도 6성에 올라설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루빈은 달랐다.
지금 루빈은 5성의 벽 앞에 서 있었다. 벽을 넘어서기 위하여, 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무던히도 두드리는 중이었다.
‘어쩌면 도련님은 이번 과업을 수행하는 중에 6성에 오르실지 몰라.’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쿠제의 머릿속엔 루빈이 실패하는 경우 따위는 없었다.
암살검가의 수많은 가주들이 5성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지만, 루빈에겐 그런 미래가 없었으니까.
‘황제에 맞서는 남자.’
쿠제는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렸다. 베닉 덕분에 여기 있는 모두가 미래의 한 장면을 알게 됐다.
제국과 암살검가의 대결. 그 처절한 전쟁의 한 순간.
그 장면은 분명 충격적이었지만, 그나마 쿠제나 티나는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들은 예전부터 루빈의 의지를 알고 있었으니까.
어제 보았던 그림은, 그저 루빈 로이넨에 대한 확신을 더욱 단단하게 해주었을 뿐이다.
‘그게 미래의 장면이라면, 도련님 경지의 끝이 6성이 아니라는 거겠지.’
고유한 특성과 저주,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일 터.
쿠제로서는 미래의 장면에 그 자신이 존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과 별개로, 도련님의 미래만으로도 자극을 받은 것이다.
루빈의 폭발적인 성장에 단단한 디딤돌이 되고 싶었다.
‘베나르 가주님의 말이 사실이지. 티나 님은 환혈족 자체로서 엄청난 무기니까. 그렇다면 나는?’
역시나 암술 연구뿐이겠지.
도련님이 황제와 마주 선 그때, 6성 특성 뿐만 아니라 그에 버금가는 암술을 지니도록 돕는 것이 저의 역할이었다.
쿠제가 주먹을 그러쥐는 그때, 루빈이 말을 전진시키며 신호했다.
“다들 출발하죠.”
늪지대를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새로운 밀림이 나왔다. 이 밀림을 관통하면 곧바로 상업도시 아베른이 나올 터였다.
“길목이군요.”
이제 베닉과는 헤어져야 할 때.
베닉은 후련해 보였다. 그동안 그가 짊어져왔던 미래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는지 느껴질 만큼.
“최근 들어 이 밀림엔 오크가 출몰합니다만… 뭐, 도련님께는 괜한 충고이겠군요.”
“베닉,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베닉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구십을 넘긴 나이였으니 과연 그런 날이 올지 장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흑영 셋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게 낫겠지.’
릴, 아논, 데스릴과 관하여. 베닉에 대한 신뢰가 견고해진 만큼, 세 명의 흑영에 대한 의구심도 짙어진 루빈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지금 루빈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나중에 어떤 실체가 밝혀진다면 그때 나서도 될 테니까.
“아, 그리고.”
베닉이 쿠제에게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건넸다. 펼쳐보니 늪해마 고기를 잘라놓은 것이었다. 곧바로 먹어도 되게끔 요리가 된 상태였다.
“가는 길에 먹게. 티나도 좋아하는 듯하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베닉이 말머리를 돌렸다. 루빈에게 머리를 숙여 보인 노회한 가주는 말을 천천히 몰며 멀어져갔다.
“아깝다. 나도 내 미래를 알고 싶었는데. 지금이라도 오크로 변해서 기습해볼까?”
티나의 이 한마디에 루빈이 피식 웃었다.
“티나, 넌 어차피 살기를 못 담잖아.”
“…평화와 비폭력의 길이 이토록 험난할 줄이야.”
그렇게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어느새 그들 시야에서 베닉은 사라진 뒤였다. 이윽고, 루빈도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 * *
아베른 동쪽 외곽.
여타 상업도시들과 비교해봤을 때, 아베른의 경비 태세는 보기 드물게 삼엄한 편이었다.
늘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최근의 오크 사태로 인해 일시적으로 강화된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오크 부족 일부가 북쪽에서 남하하면서 동쪽 밀림을 주된 근거지로 삼은 터.
“야, 오크들 오나 잘 봐.”
“눈 씻고 봐도 안 보입니다.”
“한 마리 죽이면 3만 릴크래. 알지?”
“그거, 오크 대가리 들고 인증받아야지 않습니까. 대가리 주우러 갔다가 죽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동쪽 외곽을 경비하는 병사들의 잡담. 그 말투에는 지루함이 묻어났다.
출입이 자유롭다는 점이 상업도시의 특징인 만큼, 평시라면 이런 땡볕 아래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형님, 제가 생각 좀 해봤는데요. 지하세계의 불법 검투사들을 데려다가 토벌하는 데 쓰면 되지 않을까요?”
“이 멍청아, 얼마 전에 검투사고 도박꾼들이고 모조리 나가리 된 거 몰라?”
“아… 그랬나.”
이 또한 최근의 일이었다. 대륙 서쪽의 카포티니라는 마법사 도시와 관련된 사건.
그곳 마법학교 교수 하나가 죽었는데, 알고 보니 아베른의 검투사 불법 도박에 휘말렸다는 것이다. 그 교수를 죽인 자도 검투사 중 하나라고 했고.
당연하게도, 그 실체가 무엇인지 이들은 알지 못했다. 로젠탈러가 분노에 차서 가이젠을 죽였고, 그걸 무마시키기 위해 칙명부와 루빈이 짜놓은 설정.
그걸 소문으로만 만들어낼 순 없으니, 칙명부는 실제로 다른 기관의 힘을 보태어 아베른의 지하 도박세계를 모두 뒤집었던 것이다.
검투 도박은 아베른 지하경제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는지라, 이곳 사람들에겐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중이었다.
“걱정 마라, 이 지긋지긋한 경비근무도 곧 끝날 테니까.”
“새로운 소식이라도 들으셨습니까?”
“검술명가든 군영도시든 간에 저 오크들 쓸어버리겠다고 나서지 않겠냐. 저쪽 밀림이 아디엔이랑 연결된 곳인데, 저기에 오크 놈들이 주저앉아 있으면 교역에 얼마나 차질이 생기는데.”
상업도시는 결국 이윤에 따라 움직인다. 상인들이 모여서 용병단을 사들이든, 고명한 검술명가가 나서든 간에 어쨌든 오크들이 적멸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뜻이었다.
“어이, 형씨!”
이내 잡담을 나누던 병사들의 관심이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사내를 불렀다. 그는 그들에 비해 진지하게 경계 근무를 서는 중이었다.
“예?”
“그러니까 너무 겁먹지 말라고. 며칠 지나면 저것들 다 없어질 테니까.”
“…예.”
“하여간 과묵하기는.”
동쪽 외곽의 경계를 맡은 건 정식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약간의 돈을 받는 조건으로 지원한 시민도 섞여 있었는데, 사내가 그런 경우였다.
시민이 자원병으로 나서는 건 흔치 않았다. 그만큼 생활이 열악하다는 뜻이겠지. 그래선지 사내를 향한 병사들의 눈길엔 애잔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자신에게 지급된 망원경으로 열심히 전방만 살폈다.
‘…아가씨.’
원래대로라면 그가 망원경으로 살펴야 하는 곳은 전방의 밀림. 그러나 그는 다른 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밀림으로부터 상당히 앞선 지점. 망원경으로 살펴봐도 잡풀이 우거져 있을 뿐인데.
‘벌써 하루가 지났군. 정말 독종이라니까.’
경계 근무를 서는 사람들 중 사내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실. 저 잡풀 속에 한 소녀가 숨죽이고 있다는 것이다.
무인이 아닌 일반인들이라면 그 옆에 다가간다 해도, 미세한 숨소리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제아무리 망원경으로 들여다봐도 거기에 사람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아내지도 못할 테고.
‘이들 말대로 얼마 안 있으면 오크를 토벌할 자들이 올 거다. 그 전에 서둘러야겠군.’
사내는 눈을 감고 암연을 한쪽으로 흘려보냈다. 이윽고 그의 암연이 은신 중인 소녀에게 닿았다.
공명하는 두 암연.
이윽고, 소녀의 전음이 울렸다.
-무슨 일이야, 부르소?
-아가씨, 오크 사냥은 며칠밖에 안 남은 것 같습니다. 곧 토벌대가 올 것 같아요.
-…….
부르소는 아쉬워하는 블라네의 모습을 상상했다. 오크 사냥은 꽤 괜찮은 돈벌이였으니까. 검투 도박이 파탄 난 이후, 두 사람의 주 수입원으로 자리 잡은 터였다.
병사들의 측은한 눈길. 엄밀히 말해, 두 사람의 상황은 그런 눈길을 받아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궁핍함. 열악함. 벌써 1년 넘도록 그렇게 지내온 두 사람이었다.
크리거 가주의 지원이 있었던 위장 생활 초반은 그나마 나았다. 상인으로 살아가던 부르소의 돈벌이도 그때까진 나쁘지 않았고.
하지만 블라네가 자신의 특장(特長)을 ‘저격암살’로 삼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크리거 가주의 지원이 끊기게 되었다.
‘아가씨처럼 저격암살이라는 길을 택한 선례가 없는 건 아니다. 그 성공사례를 찾기 힘들 뿐.’
다시금 그날을 떠올려보는 부르소였다.
블라네의 위장별채에 들렀던 크리거 가주는 제 딸의 선언을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로선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블라네를 용납할 수 없었다.
‘어디, 얼마나 성과를 내는지 보겠다.’
그렇게 끊겨버린 크리거가의 지원.
가문의 지원 없는 위장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칙명부의 지원도 미비했다.
루빈이 예외적인 경우였던 것이지, 원래 칙명부는 로이넨서와의 위장생활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원 대상은 제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독립 암살자들 한정이었으니까.
게다가, 하필 블라네가 선택한 도시가 상업도시 아베른이었던 것도 문제였다.
상업도시는 돈을 벌 기회가 많지만 한편으로는 잃을 위험도 많은 곳.
‘하필 내가 손대는 것마다 망해버리다니.’
추적술에 특화된 로이넨서 부르소는 상업적 재능이 미천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빛을 보는가 싶던 투자도 모두 말아먹었으니.
그래도 검투 도박이 있을 땐, 그들의 요긴한 돈벌이가 되었다. 얼굴을 가린 부르소가 출전하여 꽤 큰돈을 벌었고, 어쩔 땐 블라네가 출전하기도 했다.
마지막 수입원마저 사라졌으니, 이제는 오크라도 사냥해야 했던 것이다.
‘아가씨께선 수련의 기회로 삼긴 했지만…….’
궁핍한 생활을 빼면 블라네의 성장은 탄탄대로였던 것도 사실이다.
부르소가 놀랄 정도였다. 크리거 가주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블라네는 저격암살에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인내, 집요함, 정확도, 치밀함, 계산력…. 블라네 아가씨의 특장은 저격암살이 분명해. 그런데 루빈 도련님은 어떻게 아가씨의 재능을 알아본 걸까.’
블라네에게 저격암살을 추천한 사람이 다름 아닌 루빈 로이넨이라 했다.
이미 2년 동안 블라네에게 여러 수업을 해본 부르소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빈의 조언이 있었기에 시행착오 없이 특장을 찾아낸 거라고.
‘……!’
잠시 상념에 잠겼던 부르소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블라네의 암연에 변화가 일어난 걸 감지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크 표적이 또 하나 등장했다는 뜻이었다.
한편, 수풀 속에 몸을 숨긴 블라네.
지금 그녀의 암연은 저격술에 집약되어 있었다. 시각은 증폭됐고, 호흡은 통제되고 있었다.
아직까진 욕심만큼 암연이 풍부하지 않은 게 답답할 따름이었다. 만약 암연의 환만 따라준다면, 암연을 길게 늘임으로써 바람의 흐름까지도 읽어낼 텐데.
그래도 나름의 묘수로 난점을 극복해가는 블라네였다.
‘본래 저격암살에서 로이네크로우의 역할은 암살자를 비호하는 것이지.’
당장 블라네 본인만 보더라도, 방어가 취약한 상태였다.
모든 암연을 저격에만 집중시킨 터라, 누군가 그녀에게 접근한다 해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심지어 적이 기습을 감행한대도 속수무책이었고.
그런 이유로, 저격암살에서는 로이네크로우의 비호를 받는 게 기본인데, 그녀는 달랐다.
제 주인과 암연이 연결되어 있는 로이네크로우. 덕분에 주인의 위험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차릴 수 있지만, 그건 거꾸로도 마찬가지였다. 로이네크로우 감각의 일정 부분을 공유받는 것이다.
블라네는 바로 그 점을 이용했다.
이를테면 일종의 가늠좌처럼.
부스럭부스럭.
때마침 또 하나의 사냥감이 막 나타난 터, 블라네와 로이네크로우 ‘오호스’가 또다시 실력 발휘를 할 때였다.
‘지금이야, 오호스!’
오크 하나가 밀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블라네의 시야에 딱 들어왔다.
“……?”
이 오크 병사는 수색 중이었는데, 눈앞에 동족이 무수히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간밤에 블라네가 같은 수법으로 저격을 성공한 흔적이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동족의 시체들 쪽으로 다가오는 오크 병사.
블라네의 눈에는 오크가 뭐라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오크들 언어로 ‘이게 뭔 상황이냐’라는 거겠지.
그리고 다음 순간. 오크 병사는 난데없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까마귀를 발견했다. 까마귀는 날개를 접은 상태로 쇄도하고 있었다.
크어어어-
오크가 괴성을 지르는 그 순간, 까마귀는 날개를 펼쳤다.
그때의 감각이 그대로 블라네에게 전달되었다. 로이네크로우의 감각을 가늠좌 삼아, 석궁의 방아쇠를 눌렀다. 미동은커녕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투웅-
“아까부터 이게 뭔 소리야. 어디서 누가 나무를 패나?”
병사들은 그렇게만 생각할 뿐이었다. 석궁이 발사되는 소리가 그와 비슷했기에.
‘흐음, 빗나갔네…….’
블라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머리를 관통시키고 싶었지만, 화살이 뚫고 간 곳은 오크의 쇄골이었다. 결국 죽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로이네크로우를 활용한 저격. 이 방법이 아직까지 미흡하다는 걸 알고 있는 블라네였다.
‘그래도 다음엔 제대로.’
마음을 다잡으며, 블라네는 또다시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어제부터 도합 열다섯의 오크를 잡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순 없었다.
그렇게 한참 후.
부스럭부스럭.
밀림을 헤치며 또다시 누군가가 나타났다. 블라네와 그녀의 로이네크로우 오호스는, 다음 순간을 준비했다.
그런데.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