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오크사냥꾼 (2)
밀림으로 들어온 루빈.
유유히 말을 몰았다. 오크가 출몰하는 곳이라고 했지만, 어떤 오크도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일정하게 들리는 말발굽 소리가 평화롭게 느껴질 정도.
여기에 오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드문드문 눈동자를 번뜩이며 루빈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놈들은 차마 달려들지는 못했다. 루빈이 견고하게 펼쳐둔 암연에 본능적으로 그 격차를 실감하는 것이다.
오크.
시대 불문하고 딱 무엇이라 규정짓기 애매한 족속. 엘프 같은 이인종(異人種)에 속하지는 않지만 언어를 지녔고, 문화를 전승하는 종족.
엘프는 오크를 괴수라 정의한다. 그렇다면 거꾸로 괴수들에게 오크는? 괴수들에겐 오크를 정의할 지성이란 것조차 없기에 답은 아무도 모른다.
한때 오크들은 인간들의 도시를 연상케 할 만한 군락을 거느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제국이 완성된 이래, 그들은 대륙 곳곳으로 조각조각 흩어진 상태였다. 그마저도 인간들의 잦은 토벌로 빠르게 소멸해가는 중.
-오크의 독특한 점은, 태어날 때 모든 게 정해져 있다는 거지. 계급과 역할, 심지어 경지조차도.
하네케는 오크에 대해 해박한 편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오크 부족을 토벌하면서 제국군 경력을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성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뜻이네. 그러니 수련도 무의미하고.
오크는 태어날 때부터 성체였다. 대장간의 거푸집에서 나온 주물과 같았다.
-한때 나는 6성급의 오크 또한 보았다네. 태어났을 때부터 6성이었던 놈이었어. 이제는 그만한 놈들을 마주하기 힘들겠지만.
오크를 토벌하는 건 쉬웠다. 성장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정상급의 오크들만 죽이면 그만이었다.
우두머리를 잃은 부족은 자연스레 소멸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 밀림만 해도 그랬다. 제법 개체 수가 많았고, 개중에는 오크 전사라 할 만한 놈들도 있는 듯했다.
본래 이만한 개체 수라면 4성급의 전사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가장 강한 놈이라야 2성급에 불과했고, 그 정도는 루빈의 암연에 두려움에 빠지는 게 당연했다. 이는 현시점의 오크가 사멸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뜻이었다.
‘검을 써볼까 했는데, 이런 상태라면 무의미하겠군요. 차라리 괴수가 낫겠네요.’
-또 모르지. 광기(狂氣)가 있잖나. 그거라면 괴수와 다를 바 없을 텐데.
오크의 ‘광기’.
엘프들이 오크를 절대로 이인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두려움이나 굴복감이 일정 수치를 넘어섰을 때 발산되는 분노 상태였다. 광기에 빠진 오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가 된다. 전투력이 소폭 상승하기도 하고.
‘오크의 광기라…….’
물론, 여기 있는 모든 오크가 광기에 싸여도 지금의 루빈으로선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다만.
‘블라네의 경지를 확인하는 데 이용해 봐도 좋겠는데.’
이내, 루빈의 생각이 블라네로 옮겨갔다. 블라네와 함께 ‘2차 선택’을 하고서 어느덧 2년이 지났다. 그사이 어떻게 성장했을지.
블라네를 생각하자, 어쩔 수 없게도 그녀의 화상 자국부터 떠올랐다. 전생에는 없었던 화상 자국. 이번 생에서 루빈이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초래한 변화였다.
골렘을 두고 수련을 하던 중에 화상을 입게 되었고, 블라네는 ‘2차 선택’ 내내 그 트라우마에 시달렸었지.
하지만, 회귀 전 흑영의 자리까지 올랐던 블라네가 무너지는 걸 원치 않던 루빈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화상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제 아비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내가 기대한 만큼 잘해주고 있을까.’
비궁미희(秘弓美姬). 이것이 전생의 블라네에 붙었던 위명이었다. 비밀스러운 활을 쓰는 미인이라는 뜻이었다.
-저격만이 전부가 아니지 않겠나. 흑영까지 올라간 걸 보면.
맞는 말이었다. 흑영은 대결을 통해 승자만이 얻을 수 있는 자리. 블라네에게 저격밖에 없었다면, 다른 가주들과 무위를 겨루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터였다.
루빈이 기억하기로는, 블라네는 사출되는 방식의 무기들을 다양하게 다뤘다.
은신하여 저격하는 것 말고도, 근접해온 상대를 대비한 사출 무기들도 있었다.
‘즉각적으로 대못이 장전되는 손쇠뇌도 썼었어.’
텔마흐와의 전쟁에서 암살검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블라네. 그녀는 본가 편에서 헌신했던 흑영 중 하나였다.
몰려든 제국군의 공격을 회피하며 근거리에서 쇠뇌를 사출해내는 그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루빈이 보기에도 굉장한 광경이었다.
‘이번 생에도 같은 길을 걸으려나.’
2년 전에 그런 조언을 했던 루빈. 블라네 또한 받아들이겠노라 말했지만, 어찌 될지는 두고 봐야 했다.
‘저격암살로 나아가든, 다른 길을 택하든-’
어차피 그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루빈의 최우선 목적은 블라네를 흑영에 견줄 정도로 성장시키는 것.
-루빈, 블라네를 첫 번째 동료로 택한 이유는 뭔가?
‘여러모로 지원을 못 받았을 것 같아서요.’
쿠니틀리가의 하밀은 형제 없이 그녀 혼자였기에 가문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다. 쿤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러나 블라네는 어찌 됐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재능을 의심하지 않지만, 크리거 가주가 그걸 알아줬을지.
그러니 다른 자제들보다 우선적으로 성장의 토대를 다져둘 필요가 있었다.
“루빈! 빨리 가자. 나 배고파!”
“티나 님! 이제부터는 조심하셔야 해요. 외부에서는 도련님의 위장 신분을 꼭 기억해두어야 한다고요. 루한 멜라스, 제국감찰관이죠.”
앞서나가던 고양이 티나가 불평하자, 쿠제의 반응 또한 이어졌다. 하도 반복되다 보니 이젠 마치 연극 대사를 주고받는 정도가 되어버린 둘의 잔소리였다.
“예, 예, 기꺼이 그리합죠.”
“그리고 또 하나.”
“또……?”
“고양이는 말을 못 한답니다. 명심하세요.”
“후…….”
몸을 부들부들 떨던 티나가 폴짝 뛰어오르며 오크로 변했다. 고양이 상태론 말을 할 수 없으니 오크를 택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쿠제에게, 티나는 오크어를 남발했다. 쿠제 귀에는 꾸레렉, 꾸르르, 꾸렉, 꾸렉 따위의 소음으로 들렸지만.
“꾸이락, 꾸루룩!”
“욕하지 마세요, 티나 님. 다 이해했습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쿠제는 절레절레 고갤 가로젓곤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신나게 오크어를 내뱉는 티나.
“꾸레레그, 꾸룩!”
티나도 오크로 변신하기는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신기한 듯 독특하고 질긴 살가죽을 기다란 손톱으로 툭툭 찌르며 오크의 육체를 만끽했다.
“티나 님. 이제 곧 아베른입니다. 그러니까…….”
어느덧 밀림이 끝나는 지점. 가려졌던 햇빛이 수풀 너머로 엷게 비치고 있었다.
“알았어. 다시 로이네크로우로 돌아갈게.”
그런데 그때, 루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대로 있어.”
“음?”
“바깥에 오크들이 있어.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 같은데.”
티나는 슬쩍 수풀 밖을 쳐다봤다. 루빈이 짐작한 대로 오크들이 열셋이나 모여 있었다.
“순찰 중인 오크들인 것 같아.”
“그런 것 같습니다, 도련님.”
루빈은 말없이 티나를 쳐다보았다. 뭘 말하려는지 알아챈 티나가 되물었다.
“오크 모습으로 가서 인사나 하라고?”
루빈이 고갤 끄덕이자, 쿠제가 걱정스레 속삭였다.
“도련님, 지금 티나 님이 위험할 수도…….”
“확인할 게 있어.”
그러면서 루빈은 티나에게 곧바로 지시했다.
“티나, 밖으로 나가서 저 오크들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붙잡아. ‘그 아이’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자고.”
티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오크어로 불만을 표하면서도 결국엔 루빈의 지시에 따랐다. 어차피 위험해지면 루빈이 나설 걸 알았으니까.
수풀을 헤치며 밀림 밖으로 나가는 티나.
오크들은 난데없이 등장한 티나를 쳐다봤고, 그 눈에는 어느새 적개심이 켜진 상태였다. 녀석들이 오크어로 말을 걸어왔다.
“(이봐, 정신 똑바로 차려!)”
“(…음?)”
“(저기 어딘가에 ‘오크사냥꾼’이 있다. 며칠 전에도 동족들이 그놈 화살에 죽었다. 여기 봐라. 방금 전에도 하나가 죽었다.)”
“(…그러네, 시체가 많네.)”
티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근데 너, 처음 보는 놈이다.)”
“(으응? 난 아닌데?)”
“(너, 이름이 뭐냐?)”
“(어, 음…….)”
말꼬리를 흐리자, 오크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녀석들이 한 걸음 다가오려는 순간.
투웅-
나무를 패는 소리 같은 게 울리더니, 티나에게 말을 걸었던 오크의 목젖에 화살이 박혀 들었다.
“끄으으억.”
동료의 죽음에 오크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찾을 수고를 덜었군.’
밀림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루빈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공황에 빠진 오크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루빈과 쿠제의 귀에는 꾸륵거리는 소리로 들렸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명확했다.
“(오크사냥꾼이다!)”
“(찾아라! 놈을 죽여!)”
먼저 죽은 오크를 제외한 열둘의 오크가 두리번거렸다. 큰 실수였다. 곧장 도망쳤어야지.
투웅-
투웅-
또다시 사출되는 화살. 화살이 쏘아지는 간격이 굉장히 짧았다. 한 명이 쏘는 것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아베른의 병사들인가?”
쿠제의 중얼거림에 루빈은 고개를 내저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까아아아악.
원을 그리고 있는 로이네크로우였다.
“블라네야. 저 앞쪽에 있군.”
“블라네 아가씨요? 암연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워낙 멀리 있어서 나도 하마터면 못 알아차릴 뻔했어.”
쿠제는 블라네의 암연을 느끼지 못했다. 이는 그녀가 굉장히 먼 거리에 은신해 있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 장거리에서 오크들을 저격하고 있다니.
하지만.
“조금씩 정확도가 낮아지고 있네.”
투웅-
투웅-
여전히 블라네의 화살에 오크들이 픽픽 쓰러지긴 했지만, 점점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일격에 죽이던 화살이, 이젠 급소를 비껴가고 있었으니.
그렇게 열두 오크 중 절반 쯤 쓰러지자.
크르르르.
“…광기다.”
죽어가는 동족들을 본 여섯 오크가 그만 광기에 빠지고 말았다. 눈이 벌게져서는 고개를 홱홱 돌리는 모습이, 기괴할 정도.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광기는 전이된다. 밀림 속 다른 오크들도 하나둘씩 반응하고 있다는 뜻이다.
저벅저벅.
루빈은 밀림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제는 티나를 챙겨야 할 때였다. 아무래도 이번에 발사된 화살은 오크로 변한 티나를 목표로 하는 것 같으니까.
휘우우웅.
바람을 찢으며 쇄도하는 화살. 루빈은 빠르게 티나 곁에 다다른 다음, 곧바로 그림자 역장을 펼쳤다.
휘이이잉.
반구형의 영역 안에 들어온 화살은 순식간에 속도를 잃었다. 티나는 괜히 민망한지, 엄지를 치켜세웠다.
“티나, 로이네크로우로 변신해.”
“꾸루!”
루빈은 역장 안에 꽁꽁 묶인 화살을 그대로 잡았다.
화살의 궤적으로 보자면, 은신한 블라네는 루빈의 뒷모습만 발견했을 것이다. 물론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해도, 루빈을 못 알아볼 확률이 높았다.
‘블라네의 암연 경지가 충분히 높았다면, 화살의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겠지.’
전생에 6성에 오른 블라네는 암연을 길게 늘여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저격의 완성도를 높였다. 6성이어야 가능한 방식이었다.
암연을 지닌 자에게 그림자 역장은 무효했으니, 만약 이번에도 그런 식이었다면 화살의 속력엔 변화가 없었을 터.
‘2성? 3성?’
루빈은 잠시 블라네의 경지를 가늠해보았다.
지금 루빈과 은신한 블라네까지는 꽤 거리 차가 있지만, 4성 암연을 지녔다면 충분히 닿았을 거리. 다르게 말해, 블라네는 지금 4성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실망인데. 부지런히 성장시켜야겠군.’
이윽고 루빈은 아베른을 향해 돌아섰다. 이미 암연으로 블라네가 은신한 지점을 찾아낸 후였다. 루빈은 일부러 그곳과 거리를 벌리며 걸어나갔다.
까아아악.
때마침 티나가 로이네크로우로 변하여 하늘로 치솟았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블라네의 눈동자가 떨렸다.
‘로이네크로우… 암살검가 사람이라는 거잖아. 누구지?’
그녀는 일단은 은신을 유지했다.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아베른 병사들에게 발각되고 말 테니.
어디서 나타난 암살자인지는 몰라도, 그녀를 해칠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숨을 죽이고 남자를 관찰하는데, 어쩐지 긴가민가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데.
‘우리 가문의 가신인가?’
블라네는 관찰을 지속했다.
“웬 놈이냐!”
경계 근무 중이던 아베른 병사들이 무기를 움켜쥐고 루빈 쪽으로 다가왔다. 오크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인간이라니.
루빈은 제 앞에 일렬로 서 있는 병사들 틈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부르소?’
로이넨가 출신의 재능있는 가신이자 로이넨서. 블라네의 선택을 받아 저택을 떠난 지 2년 만이었다.
루빈은 모른 척 새로운 신분을 연기했다.
“나는 루한 멜라스다. 제국감찰관으로서 황명을 수행하고 있다. 북부초원으로 가기 전 정비를 위해 아베른에 들렀다.”
병사들은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지만, 왠지 모르게 눈앞의 청년에게 압도되고 있었다.
그 압도감이 몸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더 신기했다. 식은땀이 나고, 숨이 턱 막힌다. 마치 괴수라도 마주한 것 같았다.
“지, 진짜 제국감찰관인가?”
“아직 말뿐이잖아! 근데 왜 이렇게 몸이 떨리지?”
“저 뒤에서 오크 죽이고 있는 남자는 누구지? 일행인가?”
쿠제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쿠제는 병사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광기에 빠진 오크를 하나씩 처리하는 중이었다.
마치 정원을 손질하듯 여유롭고 절제된 검 솜씨. 보는 이를 소름 끼치게 할 정도로 기이했다. 병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이봐, 누가 가서 지휘관님 좀 모셔와! 제국감찰관인지 확인하려면 그분이 필요하니까.”
“그런 건 자원병 시키면 되잖아.”
“이 멍청아, 지금 저 자원병 얼빠진 거 안 보여? 실성 직전이잖아.”
상황을 지켜보는 부르소는 무표정했다. 아직 루빈을 알아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긴가민가한 얼굴.
하지만 곧 그의 얼굴엔 놀라움이 떠올랐다.
‘…루빈 도련님이 분명해. 그런데 2년 사이에 어떻게……?’
너무도 충격적인 암연의 경지.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사이에 이토록 성장할 수 있을까. 이 정도의 암연이라면, 병사들의 심장이 떨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부르소를 향한 루빈의 전음이 울렸다.
-오랜만이야, 부르소.
-도, 도련님…….
-본의 아니게 귀찮게 됐군. 블라네는 잘 지내고 있지?
* * *
루빈이 아베른에 들어가는 그 시각.
쏴아아아.
쏴아아아.
북부초원엔 장대비가 쏟아지는 중이다. 마치 세상에 얇은 베일을 드리우는 것처럼 모든 시야가 차단되었다.
이토록 비가 쏟아지는 날, 투흔족 사람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행사를 치른다.
병들고 늙은 자를 제외한 모두가 일부러 비를 맞기 위해 초원으로 나가는 것이다.
제국민들에겐 그저 천막에 불과해 보이지만, 투흔족의 유구한 역사 속 유일한 건축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투흔푸’.
그들은 하나둘씩 투흔푸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모두가 비에 젖으며, 초원의 생기를 받아들였다. 이어서 가만히 무릎을 꿇고 대지에 입을 맞춘다.
이내 그들은 바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람을 신성하게 여기는 유목부족답게, 그들의 노래엔 예외 없이 ‘바람’이라는 낱말이 들어가 있었다.
쏴아아아아.
비는 계속 내렸고, 투흔족의 노래는 계속됐다.
그러다가-
“……!”
“……!”
노래가 하나둘씩 잦아들었다. 때마침 비도 멎었고.
웅성웅성.
노랫소리가 끊긴 자리에서부터 놀라움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뭐야, 왜 노래가 끊긴 거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투흔족 노인 하나가 투흔푸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폈다.
모든 투흔족 사람들이 멍하니 북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래?”
“저기… 저길 봐.”
북쪽.
거긴 높다란 장벽이 세워진 곳이었다. ‘극지’의 괴수들을 틀어막기 위해 세워진 제국의 거대한 장벽.
저 멀리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장벽이 세워진 북쪽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결국 괴수가 장벽을 넘은 거냐?”
노인은 눈이 침침했다. 그러나 투흔족 사람들 기준으로 침침한 것이지, 일반 사람들을 기준으로 보자면 월등한 시력을 지닌 터.
그래서 노인은 곧 장벽을 등지고 걸어오는 이가 괴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
터벌터벌 걸어오는 자는 거한이었다. 심지어 괴수의 시체를 한 손에 움켜쥐고 질질 끌고 오는 중이다.
“…어깨에 말을 메고 있군. 불쌍하여라. 친구를 잃었나 보오.”
투흔족에게 말은 친구였기에, 노인은 그 슬픔을 공감했다. 뒤이어 이를 알아챈 투흔족들이 일제히 애도의 노래를 불러댔다.
“죽은 줄 알았던 이마카룸이 살아 돌아왔어. 다른 투흔들에게도 알려야겠구나.”
“이마카룸답구나. 극지의 장벽을 뛰어넘어 돌아오다니.”
거한의 이름은 이마카룸.
별칭은 ‘투흔의 바람’이었다.
얼마 전, 대륙서부권의 1급 감옥 ‘협곡 감옥’에서 살아 돌아온, 제국의 1급 죄수이기도 했다. 이젠 옛 신분이 되어버렸지만.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구나. 이마카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