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98화 (198/258)

제198화. 오크사냥꾼 (3)

블라네의 위장별채.

아베른이라는 대도시에서 블라네와 부르소가 간신히 구한 이 집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지하의 토굴 같았고, 쥐가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뭐? 아까 그 사람이 루빈 도련님이라고?”

블라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탁자를 탁 치고 일어나는 동작 때문에 천장에선 먼지가 프스스 떨어졌다.

“콜록콜록… 예, 아가씨. 분명합니다.”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2년 사이 그렇게 변할 수가 있어?”

부르소는 어깨를 으쓱였다.

“변한 건 외형만이 아닙니다. 그간 카포티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현재 도련님의 경지는 제 상식 밖입니다.”

“상식 밖?”

“어쩌면 저보다도 강대한 암연을 지녔을지도 모릅니다.”

아가씨가 낙담하지 않도록 배려하여 말했지만, 부르소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짧은 마주침. 그러나 부르소가 체감할 수 있도록 경지를 드러냈던 루빈이었다. 비록 두 개의 암연 중 하나였지만, 부르소가 마주한 건 분명 5성의 암연.

부르소였기에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변화였다. 블라네의 로이넨서가 되기 전까지 로이넨 저택에서 루빈을 죽 보아왔던 그였으니까.

“그러면 저 밖에 있는 남자가 루빈 도련님의 로이넨서라는 거구나.”

“예, 쿠제 마르틴이지요.”

2년 전의 ‘2차 선택’ 때가 생각났다. 쿠제는 크로키슨가의 가신이었다. 쿤은 저 가신을 두고 늘 실패자라 조롱했었는데…….

블라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바깥에 있는 쿠제를 내다보았다. 정확하게는 쿠제의 두 다리를. 그러자 쿠제가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마. 루빈 도련님의 성장이 저 로이넨서 덕분만은 아니니까.”

“…….”

“난 도련님과 같이 몽환거미의 시험을 치렀어. 이미 그때 그분의 재능을 겪어봤으니까. 솔직히 그렇게 놀랍지는 않아.”

꼬르르륵.

진지한 분위기를 깨트리는 허기진 소리. 두 사람의 배에서 동시에 나는 소리였다. 부르소는 헛기침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며칠째 오크를 사냥하느라 힘겨우셨을 테죠.”

“…….”

한편, 집이 비좁아 밖에 나와 있던 쿠제.

블라네의 위장별채는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시장의 좁은 골목에 있었다. 쿠제는 행인들이 자신을 밀치며 지나칠 때마다 멋쩍게 미소 지었다.

-쿠제. 얘네 둘 위장신분 말인데. 혹시 거지 부녀, 뭐 그런 거냐?

쥐로 변신한 티나의 불평에 쿠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도시의 삶이 이만큼 각박한 거 아니겠습니까. 뭐, 저희들이야 본가의 지원이 충분했고, 칙명부의 직접적인 도움도 받았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이건 선 넘었지. 내가 쥐로 많이 변해봐서 좀 아는데, 이 집 쥐들 좀 봐봐. 얼마나 먹을 게 없으면 다들 뱃가죽이 등짝에 붙었다고!

티나의 불평을 애써 무시한 쿠제는 자신의 짐을 살폈다.

베닉이 그들에게 내주었던 늪해마 고기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티나가 먹고 싶다는 걸 한사코 내주지 않았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부르소.

이번엔 부르소를 향한 쿠제의 전음.

형편없는 식사를 준비 중이던 부르소가 고개를 돌렸다. 출입구 높이에 맞춰 몸을 낮춘 쿠제가 부르소를 향해 늪해마 고기를 던졌다.

-베나르가의 가주님께서 직접 요리해주신 늪해마 고기야. 엄청 맛있으니까 먹어봐.

-베나르가라면, 흑영 중 하나인 베닉 베나르?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

이후, 부르소는 블라네에게 고기에 대해 설명했다. 늪해마를 고기로 먹는다고?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던 블라네는 의외로 순순히 먹겠다고 대답했다.

“먹어볼게. 궁금하기도 하고.”

부르소는 곧바로 고기를 다시 익혔고, 좁은 골목에 독특한 육향이 퍼져나갔다.

잠시 후, 블라네가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입안 가득 고기를 담고 있는 사이.

부르소는 쿠제와 대화를 하기 위해 골목으로 나왔다.

“쿠제.”

“……?”

“고마워. 아가씨가 요리를 너무 좋아하시는군.”

“다행이네. 저 맛있는 걸 우리만 알고 있어서 안타까웠는데.”

“블라네 아가씬 겉으로는 도도하고 냉담해 보여도, 먹을 때만큼은 눈동자를 빛내시거든.”

오랜만에 만난 둘은 근처 시장을 돌아다니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웅성웅성.

오크들이 동쪽 밀림에 출몰하는 사태를 모르는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아베른 시민들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쿠제와 부르소는 가판대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살피며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쿠제, 2년 사이 도련님께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어떻게 벌써 우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거야?

-그간의 일들을 다 말하려면 오늘로는 모자라. 너한테 다 얘기해 줄 수도 없고.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도련님이 허락한 것뿐이니까.

-아가씨의 성장을 돕는 데 참고하려고 했는데.

웅성웅성.

쿠제는 모자를 파는 가판대 앞에서 하나를 골라 써보았다. 입으로는 상인과 열심히 흥정도 하면서.

-아가씨의 성장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제부터 블라네 아가씨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될 테니까.

-뭐?

-그게 도련님이 여기에 온 이유거든.

쿠제는 다음 가판대를 향해 걸어갔고, 살짝 떨어져 부르소가 뒤따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마주했을 때 루빈 도련님은 ‘블라네 때문에 왔다’고 했었지.

-블라네 아가씨는 도련님을 따라 북부초원으로 떠나게 될 거야.

시장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블라네의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쿠제는 부르소가 알아야 할 몇몇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매피스의 죽음.

황제가 내준 과업.

루빈이 첫 번째 동료로 블라네를 선택했다는 것까지.

오랜 타지 생활로 아직 최근 정보가 와닿지 못한 듯했다. 부르소는 놀랐지만,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명엔 어떤 대답도 불필요했고, 암살검가를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은 그가 어찌해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가씨를 위해선 잘된 일인 것 같군.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집 앞으로 돌아왔음에도 그들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주로 부르소가 이야기를 했고, 쿠제가 경청했다. 부르소는 위장생활을 시작한 이래, 블라네가 어떻게 수련해왔는지를 정리했다.

-저격암살이라.

이야기를 듣던 쿠제는 문득 떠오른 궁금증을 꺼내놓았다.

-어떻게 그토록 먼 거리에서 저격할 수 있게 되신 거지? 일반적인 암연의 발현 방식은 아니잖아.

-물론 우리 기준으로는 놀랍지만, 아가씬 아직 만족하지 못하고 계셔. 암연을 길게 늘이는 식으로 저격의 경지를 높이고 싶으신 건데, 너도 알다시피 그게 한계가 있잖아.

뒤이어 부르소는 그걸 상쇄하기 위해 블라네가 강구한 방법을 말했다.

로이네크로우를 가늠좌처럼 활용하는 방식.

쿠제가 생각하기에도 괜찮은 수였다. 그러나 괜찮은 수인 것이지, 최선의 수는 아니었다.

‘대상이 오크라면 이렇게 저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언제까지고 오크만 사냥할 건 아니지.’

오크만 해도 4성급, 아니 3성급의 오크 전사라면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로이네크로우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이는 로이네크로우를 지속적으로 위험에 빠트리는 방식이었다. 이러다가 로이네크로우가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물론 로이네크로우가 다치거나 죽는다고 해서 암살자에게 새로운 로이네크로우가 주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베닉 베나르의 사례만 보더라도, 지금 그의 로이네크로우는 세 번째 동료라 했었다. 이는 곧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자원이라는 뜻.

문제는, 새롭게 로이네크로우를 얻을 때마다 암살자와 로이네크로우는 새로운 연결감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결감이 높을수록, 암살자는 로이네크로우의 감각을 더 세밀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블라네와 그녀의 로이네크로우는 연결감이 상당할 거다. 모든 로이네크로우가가늠좌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쿠제, 로이네크로우에 대해 많이 아네?

부르소로서는 의외였다. 자제를 키워내는 임무의 막중함 때문에, 로이넨서에겐 로이네크로우가 주어지지 않았다.

-루빈 도련님의 로이네크로우랑 자주 소통하거든. 가끔 그놈 덕분에 이것저것 로이네크로우에 대해 알게 됐지.

쿠제는 특히 ‘그놈’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 말에 부르소는 피식 웃을 뿐이었지만.

-농담은.

-어쨌든, 이런 식으로 로이네크로우를 계속 위험에 내던지는 건 좋지 않아. 루빈 도련님도 틀림없이 같은 생각일 거고.

-그러려면 지금보다 사거리와 명중률을 높여야 해. 암연을 성장시키는 수밖에 없지.

-그건 루빈 도련님이 맡으실 거고, 나는 다른 수를 강구해봐야지.

-다른 수?

-일종의 임시방편인데. 말하자면, 흠…….

쿠제가 뭔가를 떠올린 것 같지만, 부르소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에게 쿠제는 암연을 이상하게 활용하려는 괴짜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쿠제에게선 전엔 느껴지지 않던 이상한 느낌이 감돌았다.

‘쿠제의 느낌이 좀 달라졌군. 뭔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훨씬 자신만만해진 것만은 확실해. 이것도 루빈 도련님의 영향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장을 두 바퀴째 돌아 다시 위장별채에 도착했을 때였다.

두 사람은 그곳에 루빈이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위장별채에 들어간 루빈은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았다. 블라네나 루빈이나, 위장신분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기엔 여긴 좀 비좁을 것 같네. 네 아버지와 함께 내 임시숙소로 찾아오도록.”

딱 이 말뿐이었다. 여기서 아버지란 당연히 로이넨서 부르소를 가리키는 것이다.

동시에, 블라네의 머릿속에 루빈의 전음이 울렸다. 내용은 그가 제국감찰관 루한 멜라스로서 제공받은 임시숙소의 주소였다.

이후 루빈은 쿠제와 함께 그곳으로 먼저 이동했고, 블라네와 부르소는 정확히 한 시간 후에 도착했다.

아베른에 출장 온 거상들이 머무르는 고가의 숙소 중 하나. 아베른 시장을 대면하여 신분을 확인받은 루빈에게 제공된 것이었다.

아무리 하급 감찰관이라 할지라도, 황명을 수행하는 이였기에 이것은 당연한 권리였다.

“블라네 아가씨, 여기선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숙소에 도착한 블라네를 향해, 쿠제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르소와 블라네는 이미 이곳이 완전한 보안 속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다.

“…….”

루빈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루빈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췄다.

“루빈 도련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오랜만이야, 블라네, 부르소.”

루빈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서야, 블라네에게 남아있던 미심쩍음이 싹 가셨다. 시간을 뛰어넘는 변화인 줄 알았는데, 웃는 모습에 2년 전의 얼굴이 남아있었다.

상대가 루빈이라는 확인을 마치자, 블라네 목소리에 스르르 절도가 배어났다.

“…도련님, 부르소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북부초원으로 가 오러의 흔적을 추적하는 임무, 최선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블라네다운 대답이라 해야 할까.

2년 전, 각자의 도시로 흩어지기에 앞서 트라우마를 극복했던 블라네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신입 장교처럼 딱딱했었는데, 여전했다.

2년간의 위장생활을 어찌 보냈는지, 잡담이나 떨 사람은 아니란 거군.

루빈도 바라던 바였다. 조용히 임무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테니. 다만, 보좌할 사람이 필요해서 블라네를 찾아온 게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해두어야 했다.

“날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널 찾아온 건 아니야, 블라네. 나는 황제 폐하께 암살검가의 현 육성방식을 증명하기 위해 이 과업을 자처했으니까.”

“…….”

“원래대로였다면 6년이나 7년은 지나야 임무를 시작할 수 있었겠지. 블라네, 넌 그걸 앞당겼다고 생각하면 돼.”

황제에 향한 복심은 아직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어찌 되든 루빈은 블라네가 자신의 편에 설 것임을 굳게 믿었다.

‘베닉의 그림에서 보았으니까.’

어머니의 미래가 그려진 그림 속. 루빈 곁에 여러 동료들 중 블라네 크리거가 있었음을, 그는 또렷이 기억했다.

“내가 암살검가의 무위를 증명하듯, 너도 마찬가지로 암살검가를 증명해 보이는 거야.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지.”

그러면서 루빈은 턱짓으로 블라네의 뒤편을 가리켰다. 거기엔 루빈이 미리 준비해둔 갖가지 무기가 있었다.

거대 상업도시답게 아베른에선 대형 상단이 무구를 취급했다. 하지만 루빈으로선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너한테 최적화된 무기는 없겠지만, 일단은 챙겨놔.”

“하지만 저는 이미 무기가…….”

“북부초원에서 저격만 하게 될 거라는 보장은 없어.”

“알겠습니다.”

블라네는 곧바로 수긍했다.

사실, 전생의 블라네는 자신만의 최적화된 무기를 운용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똑같이 마련해주고 싶어도 당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들 모두 블라네가 직접 제작했던 것이니까.

루빈은 부르소 쪽으로 고갤 돌렸다.

“부르소.”

“예, 도련님.”

“넌 본가에 다녀오도록.”

블라네와 부르소가 무슨 말이냐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본가의 창고에서 블라네에게 적합한 무기를 찾아. 아직 본가에 킬리언이 머무르고 있다면, 직접 물어봐도 되고.”

킬리언은 필리몬드의 거점창고 관리인이었으니까. 그가 보낸 무구들 대부분이 본가 창고에 보관되어 있으니, 그라면 지금의 블라네를 도울 수 있는 무기를 찾아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쿠제가 창안한 암술을 배워둬. 데이몬에게 내 전언을 전하면, 가르쳐줄 거야.”

부르소는 말없이 쿠제를 쳐다봤고, 쿠제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루빈의 시선이 다시 블라네 쪽으로 향했다.

“무기 골랐어?”

“빠르게 고르겠습니다.”

“내일 동이 트면 나랑 함께 북부초원으로 출발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동이 트기 전까진-”

“……?”

“밀림에서 오크를 사냥할 거고.”

“지금부터 말입니까?”

“오크어를 할 줄 아는 누군가가 그랬는데, 오크들은 자신의 동족을 손가락 개수 이상 죽인 인간을 두고 ‘오크사냥꾼’이라고 한다더군. 아마 저기 저 밀림의 오크들은 이미 널 그렇게 부르고 있을걸.”

그러곤 루빈은 곧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간단한 준비면 충분했다. 어차피 오크와 싸우는 건, 그가 아닌 블라네일 테니까.

그녀는 아직 모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오크사냥꾼에 불과하지만, 훗날엔 ‘황족사냥꾼’이라 불리며 제국군에게 악몽을 선사하는 존재가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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