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199화 (199/258)

제199화. 오크사냥꾼 (4)

루빈과 블라네는 날이 저물자마자 밀림으로 이동했다. 밀림은 고요했다

밀림의 한가운데, 루빈은 주변을 돌아봤다.

“앞으로 5분 뒤.”

“……?”

“여기로 오크들이 밀려들 거야. 그러니까 준비해.”

루빈은 5성과 4성의 암연으로 일종의 담장을 세워둔 터였다.

암연에 압도당한 오크들은 아직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고 있지만, 방금 말한 대로 5분 뒤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암연을 서서히 거둬들이고 있었으니까.

우선 먼 쪽의 담장을 무너뜨렸더니, 가장 멀리 있는 오크들부터 안광이 변하기 시작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블라네는 역시나 적극적이었다.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대비에 착수했다. 긴 갈색 머리를 뒤로 묶은 다음, 단검류 중에서도 조그마한 걸 골라서 고정시켰다.

한순간 드러나는, 목에서부터 팔까지 이어지는 화상 흉터. 그러나 더 이상 화상의 트라우마는 남아 있지 않았다.

우선, 블라네는 주변을 탐색하여 오크들이 발견하지 못할 장소에다가 무기들을 배치해놓았다. 수중에서 무기를 놓치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사사사삿.

사사사사삿.

이쪽으로 향해오는 오크들의 발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루빈이 암연을 더 거둬들임에 따라, 오크들의 포위망도 좁혀오고 있었다.

‘저격용 석궁… 저건 어떻게 하려는 거지?’

밀림의 넝쿨이 튼튼하다는 걸 확인한 블라네. 이윽고 넝쿨에다가 저격용 석궁을 묶어 놓았다.

사거리가 길고 관통력이 상당한 만큼,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무기. 아무래도 그걸로 백병전을 치르긴 힘들 테니 나름의 조치를 하는 것 같았다.

-일대다의 전투를 오랫동안 고심해왔나 보군.

하네케의 칭찬. 루빈이 보기에도, 저격 도중에 고립되는 상황에 대한 대처가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로이넨서인 부르소와 함께 착실히 연구해둔 것 같았다.

이제 오크들이 밀려들기까지 2분.

루빈은 암연으로 세워둔 담장을 모두 허물었다. 이제는 루빈이 흔적을 감추기만 하면 되었다.

스르륵.

“…어?”

블라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순간적으로 루빈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전투에 집중하라는 뜻이겠지. 그런데 모습을 감추는 것까진 그렇다 해도, 어떻게 암연까지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거지?

그러나 여유롭게 도련님을 찾을 때가 아니었다.

사사사사삿.

“끄르릇, 끄르르, 끄”

가장 먼저 등장한 건 오크 둘.

두 오크는 킁킁거렸다. 그렇게 침입자 탐색하는 그때, 나무 뒤로 모습을 감췄던 블라네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한 놈의 목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푸슉!

나머지 하나가 괴성을 내기 직전, 블라네는 손에 쥐고 있던 화살을 힘껏 놈의 목젖에 찔러 넣었다.

“끄르, 끄르…….”

그렇게 본격적인 오크 떼와의 전투가 시작됐다. 오크는 처음엔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블라네 앞에 나타났다.

다행히도 몰아치는 게 아닌 순차적인 출몰이었다.

휘이이, 푸슉!

휘이이이, 푸슉!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오크들이 픽픽 쓰러진다. 오크들은 놀라운 활 솜씨에, 이 인간 소녀가 바로 오크사냥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다른 무리에 전하기도 전에 블라네가 나서서 놈들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집중하자…. 간결하게, 간결하게.’

블라네는 오크의 광기를 지연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광기가 시작되면 그때부턴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의 조절이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크르르르카.

크르르르.

하나둘 젖어드는 광기가 빠르게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실책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오크의 광기를 조정하고 있었던 건 루빈이었으니까.

‘벌써부터 부르소 얼굴이 보고 싶어지네.’

광기에 의해 괴수가 되어버린 오크는 전투력이 약간 올라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까진 오크 전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

-이곳의 오크 전사는 2성급. 숫자도 한둘이 아닌 것 같군. 블라네의 경지가 3성에 가깝다 해도, 쉽진 않을 테지.

하네케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쉬워서는 안 되죠.’

-정말 지독한 교관 같군, 루빈. 위장 신분이 감찰관이 아니라 제국군 장교였어도 재밌었겠는데.

루빈은 하네케의 농담에도 웃지 않았다. 지금 루빈을 감싼 감정은 냉혹함뿐이었다.

블라네는 서서히 위험에 내몰려야 한다. 일촉즉발의 순간이 그녀를 옥죄어야 한다.

위험을 마주해야만 블라네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직접적으로 암술을 가르치고 검식을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실질적인 방식이었다.

‘전생과는 정반대가 되어버렸군.’

전생의 블라네가 생각났다. 오히려 그땐 루빈이 가르침을 받는 쪽이었는데.

회귀 덕분에 만들어진 이 반대의 상황. 뭔가 우습기도 하고, 절묘한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좀 속도를 올려볼까.’

오크들이 더 몰아붙일 수 있도록, 오크 전사 하나의 길을 터주는 루빈.

빠르게 이동하며 오크들을 하나씩 죽여 나가던 블라네는, 자신 쪽으로 도약해오는 오크를 알아채고 몸을 뒤로 날렸다.

“……!”

쾅!

2성급의 오크 전사가 바닥에 내리꽂은 도끼를 다시 빼 들었다.

크르르르.

광기에 멀어버린 눈은 터질 듯이 붉다. 오크는 오직 눈앞의 인간을 찢어발기고픈 욕망만으로 가득했다.

당연하게도 돌진하는 속도부터 이제까지의 오크와는 비교조차 안 된다. 블라네는 빠르게 활시위를 당겼지만, 화살은 놈의 도끼날에 튕겨나간다.

크아악!

다음 순간, 블라네 지척에 도달한 오크는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블라네를 물어뜯으려 했다.

활로 막아냈지만, 오크 전사의 힘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콰지직!

활이 허무하게 부러졌다. 순간적으로 블라네 눈에 분노가 켜졌다.

‘이게 얼마짜린데!’

블라네는 일단 눈앞의 오크 전사에 집중하려 했다. 주변의 경계를 위해 펼쳐두었던 암연도 거둬들여 육체적인 힘에 집중, 근접한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암살검가의 검식에 돌입했다.

‘가만 안 둔다!’

그녀는 부러진 두 활대를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양팔을 빠르게 움직여, 오크 전사의 목 양쪽을 향해 단검을 꽂아 넣듯 푹 찍었다.

크르륵!

활대 사이에 고정된 오크의 머리통. 블라네는 암연을 조정하여 양팔의 힘을 증강했다. 그렇게 있는 힘껏 목을 짓눌렀다.

크르! 크르르!

‘너, 질기구나!’

대개 이렇게 하면 죽던데. 역시 광기에 빠진 오크 전사의 생명력은 경이로웠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오른손에 든 활대를 버렸다.

다음 순간-

푸슉.

블라네의 단검이 빠르게 오크 목덜미를 파고들었다가 나왔다. 블라네의 머리칼을 고정시켜 두었던 조그마한 단검이었다.

푸슉! 푸슉!

그리곤 곧장 오크 전사의 두 눈, 마지막엔 목젖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축 늘어지는 오크의 몸뚱이처럼, 블라네의 풀어진 머리칼이 사라락 내려왔다.

“하아… 하아……!”

들썩이는 어깨.

암연을 역동적으로 썼더니 곧바로 몸에 부하가 밀려온다. 블라네는 방금 죽인 오크 전사의 피를 닦아내지도 않고, 다시 싸울 태세를 했다.

-오호.

그 이후엔, 하네케의 진심 어린 감탄이 나올 만한 장면이 이어졌다.

오크 전사를 상대하느라 경계가 흐트러진 사이, 어느덧 그녀 주변은 수많은 오크들이 몰려든 상태였다.

완전한 고립처럼 보였기에 루빈도 자신이 나서야 하나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아직은 아니군.’

블라네가 한 오크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무모한 도약 공격이 아니었다. 넝쿨에 묶어둔 저격용 석궁으로 향하던 것이다.

그녀는 땅에 떨어지기 전에 왼손으로 넝쿨을 움켜쥐곤, 오른손으로는 석궁의 손잡이를 잡았다.

크르르!

카아아!

오크들이 그녀를 둘러쌌지만, 그녀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마치 곡예를 부리듯, 블라네는 넝쿨에 매달린 채로 빙빙 돌며 석궁을 발사했다.

푸슈슉!

푸슉!

오크 셋을 한꺼번에 꿰뚫을 만큼 관통력이 강했다. 광기마저 주춤거리게 할 만한 면모. 바라보던 루빈조차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크를 괴수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텐데.’

틈을 노리던 또 다른 오크 전사가 난입했으니까. 오크 전사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블라네의 넝쿨을 스윽 베었다.

쿵!

넝쿨이 끊어졌고, 블라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나머지 오크들은 곧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오크 전사가 자신의 몫으로 점찍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래, 와라.”

입안에 머금었던 피를 퉤 뱉으며, 블라네가 소리쳤다.

* * *

“이마카룸.”

족장의 투흔푸 안.

이마카룸은 젖은 머리칼에서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이 투흔푸의 주인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투흔족을 이끄는 다섯 족장 중 하나이자, 대족장에 가장 잘 적합한 사람.

“쿤달리트, 오랜만이야. 그새 더 늙었네.”

“이마카룸! 정말 돌아왔구나. 내가 유령을 보는 건 아니겠지?”

“나, 살아 있어. 내 투흔푸가 만들어지는 동안 잠깐 들어와 있었던 거야.”

쿤달리트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자꾸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지, 그는 거침없이 이마카룸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이마카룸의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이 알고 있는 ‘투흔의 바람’이 맞는지 계속 확인했다.

“…아프니까, 이제 그만해라.”

“참을성이 좀 생겼네? 그러면 더 의심스러운데.”

“하… 됐고, 어디에 갔다가 이제 온 거야? ‘혈육의 고기’는 먹었어?”

혈육의 고기, 즉 이마카룸이 짊어지고 온 죽은 말을 일컬었다.

“그놈, 내가 극지 장벽을 넘어오는 데 도와줬던 놈이야. 막판에 불행하게 죽어버렸지만. 네가 함께 달래줘야지. 그래야 전생의 슬픔을 잊고 투흔 초원의 말로 다시 태어나지 않겠어?”

“알았어. 그러도록 할게.”

“그래서, 우리의 족장님께선 어디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그렇게 물으면서도 이마카룸은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쿤달리트는 어지간해서는 투흔푸를 비우지 않는 족장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경우는 불가항력적인 이유, 즉 제국에 관련된 일 때뿐이었다.

“또 제국군 때문이지? 말을 내놓으라고?”

쿤달리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제국군의 의사를 전달하러 다른 부족장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야. 제국 놈들 말론, 올겨울까지 2천 마리의 말을 준비해놓으라더군.”

“찢어 죽일 놈들.”

현재 투흔족을 이루는 다섯 부족은 각각 ‘쇄골’, ‘눈동자’, ‘무릎’, ‘송곳니’, ‘발등’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쿤달리트는 쇄골부족의 족장이었다.

이마카룸이 ‘투흔의 바람’이었다면, 쿤달리트는 ‘투흔의 불꽃’.

쇄골부족의 족장으로 유력했던 이마카룸은 제국의 감옥에 갇히기 전부터 쿤달리트가 자신들의 족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무위는 이마카룸에 한참 못 미쳤지만, 그에겐 이마카룸이 가지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지식, 냉철함, 판단력.

‘아마 내가 족장이 되었더라면, 벌써 쇄골부족은 죄다 죽어버렸겠지.’

화가 뻗치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이마카룸이었지만, 유일하게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이가 바로 쿤달리트였다. 이마카룸은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런 잿빛의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자. 그나저나,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내가 장벽을 어떻게 넘어왔는지 궁금한 거냐?”

“아니. 난 다른 게 궁금한데.”

“뭐?”

“어떻게 제국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설마 저들이 널 풀어준 건가.”

“그랬으면 내가 그 으리으리하다는 황궁을 향해 똥 대신 오줌만 누겠다 했겠지.”

그렇게 말하며 이마카룸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제국군 장교 한 놈의 머리통을 터뜨리고 감옥에 갇힐 때까지만 해도, 그 역시 자신이 살아서 투흔 초원으로 돌아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뜻하지 않은 행운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거긴 삼엄하기 그지없는 곳이라며?”

“삼엄한 건 둘째 치고, 살아 있는 것조차 못 견딜 만한 곳이야. 그래, 오크 놈들의 똥구멍 같은 곳이라고.”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준 그날의 사건을 떠올리며, 이마카룸이 씩 웃었다.

대륙서부권을 책임지는 제국의 ‘협곡 감옥’. 제아무리 5성을 넘어 이제는 6성까지 넘볼 그조차, 혼자서 그곳을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했다.

“어느 미쳐버린 멋진 놈이 감옥을 습격했어. 야생마의 허벅지처럼 멋진 놈이었지.”

“……?”

“그놈이 냅다 내 감방 문을 뜯어준 거다, 쿤달리트!”

“지금 농담하는 거냐. 제국의 감옥이 뚫렸다고?”

“말의 눈동자를 걸고 맹세하지.”

“…그렇다면 뭐.”

“그놈이 왜 거길 쳐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놈 하나였어. 감옥을 제대로 뒤집어엎곤 사라졌지. 나를 포함해서 1급 죄수들의 감방 문을 부순 후에.”

“흐음.”

쿤달리트는 턱을 긁적이며 이마카룸에게 자유를 선사한 그자의 의도를 추측해봤다.

이마카룸만이 아니라 다른 1급 죄수들까지 빼낸 거라면…….

“뭔가 노리는 게 있었던 것 같군.”

“뭐? 뭔지 알겠나, 족장?”

“그래. 대충은.”

이마카룸은 족장을 향해 바싹 몸을 끌어당기며, 두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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