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02화 (202/258)

제202화. 초원의 아이 (3)

네르하임은 통행증의 확인 절차에 나섰다. 제국감찰관을 증명할 수 있는 가루를 뿌리고, 그 반응을 기다렸다.

“…흐음.”

루빈과 잠시 눈을 마주쳤을 때, 그녀는 음흉해 보이면서도 여유가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환혈족은 멸족했고, 거혈족은 완전한 통제 속에 살아간다. 여타 특수혈족에 비해 수혈족의 처지가 가장 나은 건 사실이었다. 유일하게 입신양명을 꿈꿔볼 수 있고 이동의 제한 또한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특수혈족 중에서 상대적으로 나을 뿐이라는 거지. 이들도 탄압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야.’

그렇기에, 더 인상적이었다. 네르하임이라는 저 수혈족 여인은.

그녀에게선 느껴지는 자신감. 그 근원은 성주라는 직책에 있는 게 아니었다.

루빈이 보기에 그건 귀족에게서나 느껴질 만한 자신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배어 있는 종류였다.

“루한 멜라스 님, 확인되었습니다. 정말이시군요.”

통행증에 나타난 감찰관의 표식에도 불구하고 그녀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급 제국감찰관의 서열은 ‘성주’, ‘영주’, ‘시장’보다 낮거나 같았다. 물론, 그건 명목상일 뿐이니 실제로 감찰관을 하대할 자는 없겠지만.

“감찰관 대하는 것이 익숙하신 것 같군요.”

“그럼요, 여긴 제국의 변경(邊境)이고 또 저는 투흔마를 제국군에 보급하는 책임자이기도 하니까요. 으레 감찰관을 뵙게 되지요. 다만-”

네르하임의 눈길이 뒤편에 있는 쿠제와 블라네를 거쳐, 다시 루빈에게 돌아왔다.

“이렇게 단출한 구성은 처음이군요. 고작 세 명, 심지어 그중에 하나는 어린 여자애… 독특하네요.”

“그렇습니까.”

“무엇보다, 제가 만나본 감찰관 중 가장 젊은 분입니다. 열아홉이라니.”

아마 위조된 나이란 건 꿈에도 모르겠지.

더 이상의 확인 절차는 없었다. 성주는 문을 열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둔중한 울림과 함께 성문이 열렸다.

“제 생각에 열아홉에 감찰관으로 있으시다는 건,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제국귀족이나 왕족에 버금가는 혈통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요?”

“스스로 앞길을 개척해나갈 만큼 대단한 경지를 품고 있다는 것이죠. 제 추측이 맞나요?”

“흠, 황족이라면 어떻습니까?”

“…예?”

처음으로 네르하임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이대로 확답을 내주지 않는다면 볼만하겠군. 루빈은 피식 웃었다.

“농담입니다.”

“…….”

“후자로 하죠. 그 경지의 수준은, 지금 제 발밑에 거대한 뱀이 독니를 드러내고 있다는 걸 파악한 정도로 하고.”

그녀 눈동자가 다시금 빛났다. 흥미롭게도, 이제껏 그녀가 마주한 여러 감찰관 중 땅 밑의 괴수를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알고 계셨군요.”

“덕분에 뛰어난 수혈족 사람은 괴수까지 통제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일단 여기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안으로 드시지요. 타고 오신 말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네르하임이 안으로 이끌었다. 잠깐 사이에 수혈족의 능력을 발휘했는지, 루빈 일행이 타고 왔던 세 필의 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말들은 다소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줄줄이 어딘가로 이동했다.

“혹 초원에 들어가실 생각이라면, 저런 말로는 어림도 없답니다. 하루도 안 되어 퍼지고 말죠. 자, 따라오세요.”

이후, 성주의 집무실로 안내받은 세 사람.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제도에서도 누리지 못할 사치이지요.”

집무실 창밖으로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는데, 정말이지 인간이 한낱 미물처럼 느껴질 만한 풍경이었다.

“극지의 장벽이 보일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북부초원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다들 극지의 장벽부터 찾곤 하죠. 그러나 감찰관님, 아무리 투흔족의 초원이 사분의 일로 줄었을지라도 이것만도 엄청난 면적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덧붙여 말하길, 장벽은 동북쪽 끝에 있기에 여기서부터 직선거리로 며칠이나 밤낮을 쉬지 않고 내달려야 한다고 했다.

괜히 ‘말의 영혼이 돌아오는 곳’이라는 표현이 붙은 게 아니었다. 질주 본능을 억제할 일 없이 쉼 없이 내달릴 수 있으니, 말들에겐 여기야말로 천국일 터.

“이참에 저희에게 투흔에 대해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저나 제 수행원들은 투흔족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하니.”

“아, 그럴까요. 그럼 식사와 함께 설명해 드리죠.”

때마침, 성주의 요리사가 직접 요리를 내왔다. 수혈족답게 철저하게 고기가 배제된 식단이었다.

“당연히 투흔족의 현재 정세도 필요하겠죠? 다섯 부족들의 족장이 누구이고, 또 대족장은 언제쯤 죽을 것 같은지…….”

“함께 들어도 괜찮겠군요.”

아마 성주 네르하임은 궁금할 것이다. 이 감찰관은 어떤 황명을 수행 중인지.

투흔족에 관한 걸까. 아니면, 변경의 성주들이나 국경의 태세에 관한 걸 조사하려는 걸까.

루빈으로선 성주에게 황명의 내용을 밝혀도 그만이었다. 이번 황명은 극비로 남겨야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또, 밝힌다면 더 적극적인 협조를 받을 수 있을 터.

그러나 루빈은 그쪽을 택하지 않았다.

지금 루빈의 북부 일정은 브리온 오러를 추적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일류의 대장장이를 만나는 것도 동시에 해야 했다.

성주한테는 적당한 도움만 받으면서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편이 더 나았다.

“본래 투흔족은 계절별로 자신들의 대초원을 떠돌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30년 전부터 지금의 면적으로 좁혀졌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본래 겨울엔 서쪽으로 가서 지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는 거죠.”

성주가 투흔족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투흔푸라는 그들 유일의 건축양식이나, 공동체가 함께 양육을 하는 문화 등.

책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루빈은 일단은 경청했다.

“다섯 부족의 역학관계는 어떻습니까?”

“제가 투흔마 보급 때문에 부족장들을 가끔 만나는데, 저들 사이는 크게 나쁘진 않습니다. 대족장은 당장 내일 죽어도 모를 만큼 늙었지만, 그래도 잘 조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네르하임은 투흔의 다섯 부족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발등’, ‘눈동자’, ‘송곳니’, ‘무릎’이라는 이름의 부족들 특징을 잘 새겨 넣던 루빈.

그러다가, 손을 들어 성주의 말을 멈추는 때가 찾아왔다.

콜록, 콜록.

성주는 저쪽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사레가 들린 듯 기침하는 쿠제를 바라봤다.

저 수행원, 왜 저러지? 이마카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는데.

“흠, ‘투흔의 바람’ 이마카룸이 쇄골부족 사람이었군요. 제 수행원은 서부 출신인데, 이마카룸의 이름을 몇 번 들었기에 저러는 겁니다.”

루빈이 그녀의 관심을 다시 자신 쪽으로 집중시켰다.

“그렇군요. 그 이마카룸이 지금은 서부권의 ‘협곡 감옥’에 갇혀 있지요. 처형이 거행됐다면 여기까지 소문이 퍼질 텐데, 그러지 않은 걸 보면 아직은 죽지 않았나 봅니다.”

성주는 이마카룸이 탈옥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칙명부의 간부가 책임자로로 있던 감옥에서 발생한 탈옥 사태였다. 관련 사실이 철저하게 은폐되는 게 당연했다.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다면, 초원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겠는데.’

투흔족은 초원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이들이다. 지금이든 나중이든, 살아있는 한 그 목적지가 초원이리라는 건 자명했다.

마주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텔마흐에게 거짓으로라도 공적을 쌓으려면 희대의 탈주범을 잡아들인다는 시나리오도 나쁘지 않을 테고.

게다가, ‘투흔의 바람’은 5성의 무인. 성장의 발판이 필요한 루빈에겐 일부로라도 싸워야 할 대상이었다.

“성주님, 현재 투흔족에 이마카룸에 버금가는 무인이 있습니까?”

“무인이라… 그들끼리는 ‘전사’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있습니까, 5성이나 그 이상의 전사.”

“한번 비무라도 펼치고 싶으신 것 같군요. 그런데 이마카룸에 대해 말하자면, 놈은 5성의 무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일면에 불과합니다.”

다른 위험 요소가 있다는 뜻이었다.

“들어보신 적 있으실 테죠. ‘수인화(獸人化)’. 이마카룸은 그게 가능한 투흔족입니다.”

수인화. 즉 짐승과 무인의 혼합체.

인간형의 구조에 짐승의 외형이 입혀지는 것으로서, 환혈족의 변신과는 엄연히 달랐다.

차라리 그보다는 거혈족의 ‘거대화’나 오크의 ‘광기’와 비슷한, 일시적 상태였다.

“투흔족 중에서도 극소수만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예, 맞아요.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예외 없이 고유능력을 부여받은 특수혈족과는 구분되는 거죠. 만약 투흔족 누구나 수인화가 가능했다면, 지금의 비좁다는 초원조차 허락되지 않았을 겁니다.”

최근 5년간 투흔족의 수인화 사례는 보고된 적 없었다. 제국의 탄압을 불러올까 봐, 수인화가 가능한 투흔인조차 제 능력을 숨긴 채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 사례가 바로 5년 전의 이마카룸. 그는 수인의 모습으로 제국군의 머리를 터뜨림으로써 5성의 무인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혔다.

“어쨌든 마지막 연구 자료에 따르면, 수인화는 전체 투흔족 중 3에서 5퍼센트 정도만 가능한 능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연구 자료, 지금도 있습니까? 초원에 들어가기 전에 한번 읽어보고 싶군요.”

네르하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받아보실 수 있도록 군영도시에 요청해두겠습니다. 그런데 왜 읽어보려 하시는지 궁금하군요. 호기심이 많으신 건지, 황명이 그만큼 막중한 건지…….”

“개인적인 호기심일 뿐입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수인화는 루빈이 알고 있는 미래와도 관련이 없었다. 그저 이마카룸이나 다른 투흔 전사를 마주했을 때를 가정한 호기심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때.

루빈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국면이 펼쳐졌다. 어쩌면 수인화가, 개인적인 호기심을 뛰어넘는 주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감찰관님. 혹시 하네케 브리온이라는 이름, 들어보셨습니까?”

갑자기 수혈족 성주의 입에서 하네케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전대 대장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 하네케의 손자가 죽기 직전까지 그 관련 일을 했다더군요. 군영도시에서 투흔족의 수인화를 연구하는 장교였다고요. 이름이 뭐였더라…….”

네르하임은 긴 머리칼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제국민 대부분 대장군 하네케는 알아도, 그 빌어먹을 반역자 손자는 잘 모르죠. 흐음…….”

빌어먹을 반역자 손자라. 루빈의 가슴팍 어딘가가 찌르르한 통증이 일었다.

“펠키온 브리온.”

“아. 맞아요. 역시 감찰관님답게 지식이 풍부하시네요.”

드르륵.

어느새 식사를 다 마친 상태였기에, 루빈은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네르하임이 아쉬운 듯 쳐다봤다. 그녀는 황실에서 파견한 이 젊고 잘생긴 청년과 계속 대화하고 싶은 것 같았다.

“흥미롭군요. 반역자 펠키온이 죽기 전에 초원 접경의 군영도시에 있었다는 건 처음 알게 됐으니까요. 이참에 수인화 연구 자료와 함께, 펠키온 브리온에 대한 기록물도 가져다주셨으면 합니다.”

펠키온에 대해서까지? 어떤 황명이기에 오래전에 죽은 젊은 반역자까지 조사하는 거지?

궁금증이 더 일었지만 네르하임은 알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루빈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 보안을 위해 집무실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는 상태. 그런데 그 방식이 좀 독특했다.

‘뱀을 유난히 좋아하는 수혈족이군.’

비늘의 색깔이 독특한 구렁이가, 문의 양쪽 손잡이를 둘둘 동여매고 있었다.

스스스.

구렁이가 대가리를 들어 루빈을 매섭게 쳐다본다.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 한,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처럼.

루빈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암연을 살짝 응집시켰다. 구렁이보다 더 큰 뱀처럼 만들어 성난 아가리를 들이대도록 했다.

“…어?”

네르하임은 문을 동여맸던 뱀이 한순간 촤라락 펼쳐지면서 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지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문을 열어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제가 열었으니 괜찮습니다. 보안 목적으로 기르시는 거라면,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군요. 아, 그리고-”

그녀는 놀란 눈으로 다가왔는데, 어느새 루빈은 문을 연 뒤였다.

“제가 해드려야 할 다른 일이 있다면 말씀하시죠, 감찰관님.”

“성주님께선 투흔족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신다 했으니, 대족장과도 연결이 되겠죠?”

“…그렇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라는 게 그쪽에선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제게 대족장과 자리를 마련해 주시죠.”

“예? 대족장은 이미 너무 늙어서, 여기까지 불러오는 건 현실적으로…….”

루빈은 성주의 말을 잘랐다. 늙었건 아니건, 애초부터 이곳에서 대족장을 만날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까 말했잖습니까, 초원에도 들어갈 생각이었다고. 대족장의 투흔푸에서 만나도 좋습니다.”

“…….”

“성주님은 절 그곳까지 안내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펠키온에 대한 자료를 살펴본 뒤 대족장을 만나는 걸로 하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빈은 집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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