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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검가 로이넨-203화 (203/258)

제203화. 초원의 아이 (4)

히베르다드의 수혈족 성주 네르하임은 성 안에서 가장 안전하고 보안이 철저한 곳에 루빈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루빈이 요구한 자료들을 이곳으로 가져다주기로 했다.

쿠제가 짐을 푸는 사이, 블라네는 밖으로 나가 주변에 그들을 감시하는 자들이 있는지 확인했다.

휘하 병사들뿐만 아니라 성내의 모든 짐승들을 경계해야 해서, 그들끼리의 대화는 오직 전음으로만 나누도록 루빈이 지시했기 때문이다.

-‘짐승들의 왕’과 ‘짐승들과 친구’. 수혈족 사람들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는데, 네르하임은 전자인 것 같습니다, 도련님.

쿠제 말대로, 네르하임은 짐승을 지배하는 유형. 제공받은 숙소로 오는 동안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리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짐승들의 상태가 남달랐다. 눈동자엔 영혼이 없어서, 마치 네크로맨서에 되살아난 데스나이트를 보는 듯했다.

-쿠제.

-예, 도련님.

-본가에 네르하임에 대한 자료를 요청해줘.

-정체가 궁금하신 거군요. 그런데 거점창고가 아니라 본가에 말씀이신가요?

-대충 짐작이 가거든. 내 예상대로면 거점창고의 정보력으론 닿지 않을 거야. 황궁까지 나아가야 하니까.

-화, 황궁이요……?

-어쩌면 저 여자, 그레하임의 후손이 아닐까 싶어. 맞는지만 확인하면 돼.

쿠제는 잠시 머릿속을 이리저리 들춰봤다. 그레하임이라는 이름. 옛 시대의 수혈인 중에 그런 이름이 있었던가?

그러다가 뇌리를 스치는 하나의 이미지. 쿠제의 머릿속으로, 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그랑버드가 떠올랐다.

운송 수단이자, 군대를 상주시킬 기지 역할도 해내는 거대한 새.

-정말로 그레하임의 후손이라면, 저토록 자신감이 넘치는 것도 말이 되지.

괴수를 다스릴 정도로 압도적인 능력, 그리고 제국령 군영도시의 성주란 계급까지. 모든 게 설명된다.

수혈인 그레하임.

그레하임 역시 ‘지배하는 유형’이었다. 그러나 그 능력은 네르하임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였다.

릴리크가 대륙을 통일하기까지, 기꺼이 공신으로 평가받아 마땅한 수혈인이었으니까.

이전까지는 구름처럼 떠돌며 하늘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했을 뿐인 그랑버드를 릴리크의 상징이자 저력으로 탈바꿈시킨 사람이 바로 그레하임이었다.

그랑버드의 정신을 지배한 것도 놀라운데, 그의 능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레하임은 그랑버드에 대한 통제권을 제삼자가 이어받을 수 있도록 했다. 즉, 그가 그랑버드에 탑승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그랑버드를 조종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놓은 것이다.

혹자는 그런 체계가 이 수혈인이 죽으면 끝장날 거라고 비난했지만, 당연히 아니었다. 그레하임의 사후에도 그랑버드의 복종은 유지되었으니까.

심지어는, 새로 태어나는 그랑버드조차 릴리크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각인된 상태였다. 마치 그랑버드라는 종이 새롭게 설계, 창조된 것처럼 말이다.

-알겠습니다, 바로 요청해 놓겠습니다. 만약 도련님이 추측하신 대로라면, 저 수혈인 성주를 저희의 적으로 간주해야 할까요?

루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계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적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칙명부가 수혈인 성주의 생사에 대해 따로 언급해두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절대 죽여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면 그에 마땅한 언급을 해두었겠지.

이는 곧 임무 중에 발생하는 갈등 상황에서 그 처분을 루빈의 재량에 맡기겠다는 뜻. 네르하임의 생사도 여기에 해당되었다.

‘현시점의 그레하임 후손은 고작 황실의 하수인에 불과해. 굳이 죽일 필요는 없겠지.’

물론, 내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만약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 제거해도 그만이었다. 아직은 더 두고 볼 일이었다.

‘당장 중요한 건 저 수혈인이 아니다.’

루빈은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브리온 오러를 추적하기 위한 출발점, 펠키온 브리온. 처음엔, 펠키온과 투흔족을 연결하는 고리가 그리 선명해 보이지 않았다.

단지 펠키온이 죽기 직전의 근무지가 초원 접경지역의 군영도시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 네르하임과 대화하게 되면서 투흔족과 펠키온의 연결고리가 또 하나 추가되었다.

바로 ‘수인화 연구’.

‘하네케.’

루빈의 부름에 하네케가 내면으로부터 쑤욱 올라온다.

‘펠키온의 임무가 투흔족의 수인화 연구였단 걸 알고 있었습니까?’

하네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제로 대장군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죽은 손자의 직무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물론, 알려고만 했으면 누구보다 소상히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손자를 위하였기에 알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브리온가의 후계자이자 대장군의 손자라 하여, 장교로서 특권을 누리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네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작은 관심조차 대장군부의 권력적 개입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이를 고려한 하네케는 자신이 내비치는 관심이 펠키온을 나약하게 만들 걸 늘 경계했다.

-전근을 유예했다는 건 또렷이 기억나는군. 변경의 근무를 마쳐 제도로 돌아와도 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그렇습니까. 유예한 이유도 어쩌면 수인화 연구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럴지도. 수인화 연구가 브리온 오러를 추적하는 데 중요한 고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직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성주에게 듣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마주하게 됐을 조각이라는 건 분명했다.

‘일단은 기다려보죠. 네르하임이 자료를 가져와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

그리고 그날 밤.

네르하임이 기다렸던 관련 자료들을 보내왔다. 그녀의 병사들이 내려놓고 간 서류의 양은 상당했다. 층을 쌓으면 성인의 키만큼 될 정도였다.

자료가 도착한 그 즉시, 루빈은 서류를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해나갔다. 방대한 양이긴 해도, 분석의 주안점이 정해져 있었기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물론, 그마저도 꼬박 이틀이라는 시간을 갈아 넣어야 했지만.

자료를 살피는 동안, 루빈은 건물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몇 번인가 성주가 식사를 청했지만, 분석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불가하다며 거절했다.

그렇게 3일째.

“드디어 밖으로 나오셨네요, 감찰관님.”

자료를 모두 확인한 루빈이 비로소 숙소 밖으로 나왔다.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성주의 집무실이었다.

“자료 분석은 끝나셨습니까?”

“사실, 이건 황명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다만, 의외의 소득은 있는 것 같네요.”

루빈은 부드럽게 웃었다.

“자료를 검토하다가 뜻하지 않게 지식을 좀 쌓은 것 같습니다.”

“……?”

“당시 제국군 장교들은 수인화가 오크의 광기처럼 이성을 잃게 만드는 건 아닐지 궁금했던 것 같군요.”

사실 궁금증보다는 두려움이 더 도드라지는 연구였다. 방대한 연구 자료가 알려주는 건, 수인화에 대한 제국군의 우려와 공포였으니까. 제국에 해를 끼치느냐, 아니냐를 가려내려던 것이었다.

“비록 저는 펠키온의 자료밖에 못 봤지만, 아무래도 상반된 두 진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구 자료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죠.”

“혹시, 그 펠키온이란 반역자는 어떤 의견을 냈던가요?”

“옹호론자였습니다. 수인화가 투흔족의 이성을 상실시키지 않는다는 입장.”

그리고 모든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펠키온의 의견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제도로 돌아가는 걸 미루면서까지 밝혀내고 싶었던 건, 이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래요? 이미 중단된 연구이니 결론을 도출할 순 없겠죠. 게다가-”

루빈은, 성주의 입에서 하네케를 언짢게 할 발언이 나올 걸 예상했지만, 구태여 막지 않았다.

“그 반역자야말로 이성을 상실한 사람이었는데, 어찌 수인이 된 투흔족이 이성을 유지한다고 입증할 수 있었겠습니까.”

역시나 끝이 비릿한 말이었다. 루빈은 내면세계로부터 퍼져나오는 미약한 통증을 다시 느꼈다.

저 수혈인이 계속 펠키온을 조롱하게 놔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루빈은 다른 쪽으로 주제를 돌렸다.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건 따로 있었습니다.”

“재미요?”

“그때 펠키온은 연구를 위해 많은 투흔족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그것도 꽤 긴밀하게 소통했던 것 같아요. 개중엔 유명인도 있었고요.”

“유명한 투흔족이라면… 설마 ‘투흔의 바람’이요?”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펠키온의 기록에 따르면, 이마카룸은 지금의 악명과는 달리 당시엔 연구에 진지하게 협조했다.

“이마카룸은 펠키온이 ‘두 번째로 자주 만난’ 투흔족 사람이었습니다.”

루빈의 말에 네르하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마카룸이 두 번째라면, 첫째는 또 누구인가. 궁금해서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제일 많이 만난 투흔족은 누구입니까?”

“글쎄요. 그건 제가 직접 방대한 연구 자료를 살피며 알아낸 거라, 가르쳐주고 싶진 않군요. 알고 싶으시다면 저처럼 모든 자료를 확인해야 할 겁니다.”

직접 찾아보라. 하지만 결코 쉽진 않을 거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아니다. 펠키온이 의도적으로 연구 기록에 속임수를 풀어놨기 때문이다.

이는 암호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마치 기록 속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촘촘하고 견고했다. 암살검가의 다양한 암호해독법이 아니었다면, 루빈 역시 함정에 빠졌을 것이다.

물론 루빈은 이런 것들까지 알려주는 친절함을 베풀지 않았다.

“물론 성주님은 바쁘시니, 그럴 만한 시간이 없겠지만요.”

“…….”

“내일 아침에 곧바로 투흔족 대족장을 만나러 길을 떠날 겁니다. 대족장에게 예고해 두십시오, 지금 당장.”

“…….”

네르하임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저번엔 그냥 넘어갔는데, 정말로 투흔족 대족장을 만나려는 걸까.

그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한순간 루빈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내키지 않으신다면, 황궁에 다른 조력자를 요청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대족장에게 의사를 전달하지요.”

“저와 수행원 둘, 그리고 성주님. 이렇게 네 사람이 전부일 겁니다. 호위는 필요 없겠죠? 어차피 성주님에겐 짐승이라는 호위병이 있으니까요.”

당연히 투흔족은 초원에 제국군이 들어오는 걸 용납하지 않을 터. 이는 가장 합리적인 구성이었다.

루빈의 물음에, 네르하임은 체념 기가 배어나는 얼굴로 끄덕였다.

“그래야겠죠. 야만인들이 절 죽이려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상황이라면… 병사들보단 짐승들 쪽이 더 믿음직스러울 테니까.”

숙소로 돌아온 루빈.

그는 창가에 앉아 성주가 자신의 말을 따르는지 지켜보았다. 수혈인이니 초원으로 새를 날려 보내겠지.

퍼드득-

아니나 다를까, 성주의 집무실 창을 통해 커다란 독수리가 날아올랐다. 발목엔 대족장에게 전달할 편지가 묶여 있었다.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리는 것 같군요.’

-내 손자 놈의 기록에서 찾아낸 그 투흔족 사람을 추적하려는 게로군? 가장 자주 만났다던.

‘투흔족은 평생을 초원을 떠나지 않는다죠. 분명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죽지만 않았다면요.’

팰키온의 기록 속, 가장 많이 드러났던 이름. 애너그램과 철자의 의도적 누락 등 다양한 수법으로 그 이름을 숨기려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루빈의 눈에 더 띄었던 사람.

그 이름을 추적하다 보면 브리온 오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루빈은 확신했다.

어쩌면 그자가 팰키온에게 브리온 오러를 전수받았을 수 있다. 아니면, 브리온 오러를 발현시키는 다른 자를 알고 있을 수도 있고.

‘만약 그자를 만날 수 없다고 해도, 이마카룸이라는 차선책이 있습니다.’

이마카룸은 팰키온이 두 번째로 자주 만난 투흔족이었다. 그 역시도 브리온 오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건 그렇다 쳐도, ‘투흔의 바람’이 북부초원으로 돌아왔는지는 어찌 확신하나? 제국이 자신을 쫓아 찾아올 걸 빤히 알 텐데.

‘분명 돌아왔을 겁니다.’

이 역시 추측에 불과했지만, 루빈은 확신했다. 루빈의 회귀 전 기억이 정확하다면, 홀로 남은 투흔족이 향할 곳은 오직 둘뿐이다.

죽음 또는 고향 땅.

그리고 이마카룸은 쉽게 죽지 않을 자다. 감옥에서 본 그의 두 눈동자가 그렇게 말했다.

‘물론 북부초원 어딘가에 숨어있겠죠.’

그는 투흔의 영웅. 투흔족 사람들 또한 목숨을 다 바쳐 그를 숨겨줄 것이다.

그렇다고 숨은 그를 찾아낼 생각은 없었다.

만약 그가 북부초원에 있기만 하다면, 루빈은 그가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 셈이었다.

* * *

밤에 붉은빛을 띠는 바위지대를 두고, 투흔족은 ‘돌산’이라 불렀다. 대족장의 투흔푸가 바로 이 돌산 근처에 있었다.

투흔의 다섯 부족은 계절별로 돌아가며 대족장을 모신다. 이번 계절은 쇄골부족의 차례였다.

콜록콜록.

“하여간 이놈의 연기는.”

대족장의 투흔푸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붉어지는 이마카룸. 손을 열심히 내저어도 내부에 가득한 연기는 흩어지지 않는다.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이상한 연기. 냄새도 시취처럼 고약하다.

“…….”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구 앞에, 대족장이 앉아 있었다. 이마카룸이 호들갑을 떠는 통에 그의 감았던 눈이 슬쩍 떠진다.

“대족장, 안 잤구나. 잠귀가 밝아서 죽은 줄 착각할 린 없겠어. 라유비아랑 말 좀 뛰어놀게 해주고 왔어.”

“초원 돌아다닐 땐 늘 조심하라 했거늘. 네놈은 황제의 수배자다.”

매캐한 연기 속에 도드라지는 형형한 눈동자. 얼굴엔 더 그어질 자리가 없을 만큼 주름이 가득한데, 눈빛은 팽팽했다.

힐난하는 눈빛에 머쓱해진 이마카룸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대족장의 나이가 몇이었더라, 하는 생각이나 하면서.

“거참, 대족장! 뭘 걱정하는 거야. 날 팔아넘길 투흔이라도 있다는 거냐?”

“초원의 짐승들을 조심하라는 거다. 수혈인 성주가 있으니.”

“우리한테서 말을 빼앗아간다는 그 성주 말이지? 그렇지 않아도 라유비아가 키우는 젖먹이 늑대 놈이 요새 나를 업신여기는 것 같긴 해.”

“…….”

“어째 대족장, 오늘은 더 과민하네. 슬슬 쿤달리트한테 자리를 넘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농담 삼아 한 말이었지만, 대족장한테서는 기대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마카룸 못지않게 걸걸한 성격이었는데. 최근에 부쩍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

대족장이 저를 지긋이 쳐다본다.

그 시선에 이마카룸은 괜히 긴장이 됐다. 대족장은 젊어서 무위를 쌓지도 않았고, 말을 잘 이끌지도 못했다. 이마카룸처럼 수인화가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모든 부족장들이 그를 대족장으로 받든 건, 그가 ‘영혼을 들여다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 그의 눈동자는 드넓은 투흔 초원을 모두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깊었다.

“왜 날 그렇게 봐?”

“…….”

“대족장, 너, 마령도 볼 수 있다고 했지? 설마 나한테 마령이 깃들었나.”

“…마령은 두려움이 극한에 달한 나약한 놈에게나 계약하자고 달려드는 존재다, 이마카룸. 너에겐 평생토록 해당되지 않을 일이니 걱정 말거라.”

“그럼 왜 그렇게 내 눈을 심오하게 쳐다본 거냐.”

“그저 네 눈동자에서 비구름이 보였기에 그랬다.”

“비구름? 내가 장벽을 타 넘어 돌아오던 날에 비가 엄청 오긴 했지. 또 비가 오려나?”

대족장이 쯧쯧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눈동자에 비치는 ‘신언(神言)의 겹’을 들춰보기엔, 이마카룸은 지나치게 맑았다.

저런 놈의 영혼은 안으로 파고들어 가 봐야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가서 쿤달리트나 데려와라.”

이마카룸이 끙, 하며 일어나려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투흔푸 밖에서 아직도 감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쿤달리트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둘은 가만히 기다렸지만, 기침 소리는 당췌 가까워지질 않았다.

“……?”

대족장의 투흔푸라도 거리낌 없이 들추며 들어가는 것이 투흔족의 관습. 하지만 쿤달리트는 투흔푸 밖에서 대족장을 부르고 있었다.

“대족장, 독수리 하나를 잡았는데…….”

쿤달리트의 목소리가 어쩐지 이상했다. 그제야 대족장은 그것이 예사 독수리가 아니라는 걸 알아들었다.

“흐음…. 꿈자리가 괴이하더니만,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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