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초원의 아이 (5)
다음날, 예정했던 대로 루빈 일행은 초원에 들어섰다. 각자 투흔마 위에 올라탄 채였다.
“정말 엄청난 품종이군요.”
쿠제의 진심 어린 감탄. 이제껏 여러 품종의 말을 타보았지만, 제국군만 독점적으로 다루는 투흔마를 몰아보긴 처음이었다.
그건 루빈도 마찬가지였다. 초원을 종단하기 위해서는 꼭 투흔마가 필요하다는 네르하임의 말엔 어느 정도 과장이 섞였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사실이었다.
드넓은 초원, 투흔마는 쉬지 않고 달렸다. 석양이 지고, 저녁의 어스름이 번질 때까지.
푸르르! 푸르륵!
투흔마가 투레질하며 넘치는 혈기를 드러낼 때쯤, 갑자기 손을 들어 속도를 줄이는 네르하임.
“날이 저물었네요. 투흔마의 속력을 늦춰야 합니다.”
“예?”
쿠제가 되물었다.
북부초원과 투흔족에 관한 그의 지식은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다. 이곳에선 밤마다 독특한 자연현상이 찾아온다는 걸 몰랐던 그로선 의아할 수밖에. 물론, 순순히 속도를 줄이는 루빈을 보곤 군말 없이 따랐지만.
네르하임이 방긋 웃었다.
“…어쩌면 감찰관님께선 ‘투흔의 해일’에 대해 아실 수도 있겠습니다. 연구 자료를 보셨다 했으니.”
맞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연구 자료 중에서도 펠키온의 기록물을 본 덕분이었다.
반역자로 몰리면서 그의 사적인 기록물들이 전량 회수되어 소각되었지만, ‘수인화 연구’ 자료로 구분된 것들은 보존되어 있었다.
십수 년 전, 펠키온 브리온 또한 지금 루빈 일행이 그러하듯 초원의 북단을 향해 나아갔고, 처음으로 ‘투흔의 해일’을 맞이했다.
‘해일에는 전조 현상이 있다고 했지. 바람 소리의 변화라 했는데.’
때마침, 네르하임도 그와 같은 설명을 내놓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바람 소리가 변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때 준비를 시작하면 됩니다.”
“준비?”
네르하임이 꺼내든 건, 폭이 넓은 천이었다. 그녀는 그걸 자신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눈가리개로 쓰라는 의미였다.
“이렇게 묶어서 눈을 가리는 거지요. 그러면 ‘투흔의 해일’이 몰아쳐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을 겁니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든 드넓은 초원에서, 해일은 무슨 소리고 휩쓸린다는 건 또 무슨 뜻인지.
쿠제와 블라네의 얼굴에 다시금 의문이 떠오르는 와중에, 루빈이 입을 열었다.
“투흔의 해일. 초원에 들어선 이민족에게만 영향을 주는 자연현상이다. 투흔족 기준에서의 이민족을 뜻하니까, 결국 우리를 말하는 거겠지.”
펠키온의 기록에 따르면, 바람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시작이라 했다.
그러고서 몇 분 후에 말발굽의 진동이 이어지고, 저 멀리서부터 바람이 밀어닥칠 거라고.
“일반적인 바람이 아니지요. 공기가 응집하여 일정하게 조형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 모습은 마치 지진 후에 바다에서 일어나는 해일처럼 보이는 겁니다.”
네르하임이 덧붙이자 쿠제가 황급히 물었다.
“눈을 가리면 해일이 비껴간다는 말씀입니까?”
“네, 제가 몇 번이나 겪어봤어요. 눈을 가린 자는 피해갑니다.”
펠키온의 기록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다. 바람이 해일처럼 몰아치지만, 눈을 가린 자나 투흔족에게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오늘 밤이 가기 전에 초원에서 투흔인을 한 명이라도 마주친다면, 그것 또한 행운이겠죠.”
그러면서 네르하임은 루빈 일행에게 천을 한 장씩 건넸다. 서둘러야 했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고, 어느덧 그들 귓가에 불어오던 바람 소리가 서서히 음률을 빚어내고 있었으니까.
휘이, 휘리리리, 휘이잇-
이게 정말로 음악으로 완성된다면, 자유로움과 광활함이 느껴지는 장엄한 교향곡이 될 것 같다.
“장벽을 짓는 것 같군요.”
일행의 투흔마가 느린 속도로 나아가는 앞쪽으로, 공기가 묵직하게 응축되고 있었다.
마치 공기계열의 마법을 시전하는 듯했다. 다만, 이 경우에는 마법을 시전하는 주체가 마법사가 아닌 초원이라는 거다.
문득 펠키온이 기록물에 써둔 사견(私見)이 생각났다. 그는 극지의 괴수들이 내륙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건, 장벽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남겼다. 어쩌면 초원의 의지에 가로막힌 걸지도 모른다고.
“…….”
시간이 더 흐르자, 초원의 일렁이는 공기는 진격을 위해 도열해 있는 기마대 같은 인상을 풍겼다. 어둠이 모두 내려앉는 그 순간이 되면, 일행을 향해 돌격해올 기세였다.
“투흔의 해일은 날이 밝기 전까지 약 열 번 정도 몰아칩니다. 한 시간에 한 번꼴이죠. 물론 이건 평균치에 불과합니다. 운이 좋지 않으면 얼마든지 더 시달릴 수 있어요.”
네르하임의 날 선 경고에도 루빈 일행은 눈가리개를 손에 올려둘 뿐, 쉬이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감찰관 루한이 선행하지 않으니 다른 두 사람도 따르지 않는 것이었다.
쿠제가 다시 물었다.
“투흔의 해일이 몰아닥치면 저 멀리 날아가기라도 하는 겁니까?”
“음… 이 바람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허상이나 환상이라 할 수도 없죠.”
“그게 무슨 말씀인지?”
그때 설명을 덧붙인 건 루빈이었다.
“투흔의 해일이 몰아쳐도 육체적 손상은 없어. 내부가 뒤흔들릴 뿐이지. 최악은 심장이 터지는 것뿐이지만 그건 범인(凡人)의 경우이고. 적어도 이 중엔 그럴 만한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오러나 마나의 환을 지닌 자는, 견디지 못하면 그저 쓰러질 뿐이라더군.”
의도적으로 생략했지만, 암연의 환 또한 마찬가지. 일행도 루빈의 속뜻을 알아챈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난 그냥 맞아볼 생각이야. 너희 둘에게 강요하진 않겠다. 어떤 선택을 해도 상관없어.”
펠키온의 기록에도 ‘투흔의 해일’이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투흔족의 초원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진 건 아니어서 마땅한 정론이랄 것도 없었다.
하지만 환에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명백한 이상, 루빈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또 하나의 단련이라 할 수 있겠지.’
회귀 전 기억에 따르면, 어떤 식으로든 환에 영향을 끼치는 자연현상은 대개 환을 강하게 만든다. 이는 마나와 오러, 암연의 존재와 같이, 자연이 빚어낸 섭리 중 하나.
“…하. 뭐, 감찰관님의 결정을 내가 뭐라 할 수는 없죠. 그런데 거기, 어린 수행원은 눈을 가리는 게 좋을 텐데?”
네르하임이 블라네를 콕 집어 말했다.
감찰관의 수행원이었으니 예사 인물은 아니겠으나, 그렇다고 투흔의 해일을 견딜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니까.
“……”
블라네는 눈가리개를 한 번 내려다보곤, 고개를 돌려 루빈과 눈을 마주쳤다. 때마침 루빈의 배경을 시작으로, 초원이 완전히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무신경해 보이는 루빈이었지만, 그 모습이 그녀의 결정을 앞당겼다.
“저도 해보겠습니다.”
“에?”
“말리진 않겠다.”
그러면서도 루빈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만족스러운 결정이었으니.
휘이익-
루빈은 손에 들린 눈가리개를 바람결에 흘려보냈다. 그걸 본 네르하임이 한숨을 푹 내쉰다. 결국 눈을 가린 사람은 네르하임뿐.
‘초원을 무시하다니, 답답하네. 분명 후회할 텐데.’
간혹 이런 일이 있었다. 특히, 오만한 제국군 출신들 말이다.
‘직접 겪어봐야 정신 차리지.’
두두두두-
잠시 후, 어둠이 내려앉은 초원 위에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투흔의 해일’이 내는 소리였다.
해일은 이방인을 향한 진격을 망설이지 않았다. 돌격해오는 바람의 기마병들, 울분에 차 들이닥치는 것 같았다.
우르르르르.
눈을 가린 채로 가장 앞쪽에 있던 네르하임은 침을 꿀꺽 삼켰다. ‘투흔의 해일’의 영향을 받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늘 긴장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해일은 루빈을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을 직격했다.
파아아앙!
거대하게 울리는 파공음.
물리적인 가격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네르하임과 투흔마들은 그저 평범한 바람을 맞은 듯 평온하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루빈 일행은 달랐다. 돌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순간, 내면이 크게 요동치는 걸 느낀 세 사람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졌고, 심장이 터질 듯 들썩거렸다. 암연의 환으로부터 알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묘한 불쾌감은 덤이었다.
“괜찮나, 블라네?”
“예, 예. 괜찮습니다, 감찰관님.”
“쿠제, 너는?”
“저도 버틸 만했습니다.”
쿠제와 블라네가 서로를 쳐다봤다. 대답은 그렇게 하긴 했는데, 이걸 열 번 넘게 버텨내야 한다고?
그럼에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순간적인 고통이 지나니, 환에 미세한 내력이 쌓였음을. 버틸 수만 있다면 환이 강대해진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럼 오러와 마나의 환을 지닌 도련님은 어찌 되는 거지?’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쿠제가 슬쩍 루빈을 쳐다봤다. 표정 변화랄 게 없는 루빈. 상태만 보자면 셋 중 가장 나아 보였다.
환이 하나가 아니라면, 고통이 분담되는 걸까? 아니면…….
‘아, 그 반대구나.’
암연의 환 두 겹에, 오러와 마나의 환까지. 루빈은 네 배의 충격을 견뎌내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하네케, 괜찮아요?’
영혼까지 뒤흔든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투흔의 해일’이 몰아쳤을 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바로 루빈의 내면이었으니까.
내면세계엔 물리적인 의미의 해일이 덮친 셈이었다. 하네케의 공간엔 지진이 일었고, 루빈이 구축해놓은 건축물들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괜찮네. 견딜 만해. 여긴 빠르게 복구되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하네케에게 피해를 끼칠까 걱정했었거든요.’
-신경 쓰지 말게. 그러기엔 놓치기 아쉬운 기회야.
‘그렇죠?’
-이런… 손자 놈에게 서운해지는군. 이런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는지, 원.
오히려 하네케는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처음 겪는 단련의 기회는 대장군을 벅차게 하기에 충분했을 터. 이를 미리 알았더라면 생전 8성에 다다랐을지도 몰랐겠다는, 일련의 아쉬움마저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문제가 없다면 계속 부딪쳐보죠.’
-부디 그래 주기를.
안도한 루빈은 블라네를 살폈다.
셋 중 암연의 경지가 가장 미약한 건 블라네였다. 밤이 끝나기 전에 해일을 얼마나 버텨낼지, 가늠되지 않았다.
‘도중에 포기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그 속마음을 읽었는지, 블라네가 그녀 손에 들려 있던 눈가리개를 보란 듯이 바람결에 흘려보냈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네르하임에겐 한심하기 그지없는 결정으로 보였지만.
해일이 지나간 다음, 눈가리개를 벗은 그녀는 아직까진 말짱한 셋을 보고 내심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고개를 내저었다.
“이봐요, 꼬마 아가씨, 오러 키우려다 쓰러지지 말고 이거나 받아요.”
여분의 눈가리개를 건넸지만, 블라네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성주님.”
“…하여간.”
그러고 나서 세 시간 동안, ‘투흔의 해일’이 네 차례나 지나갔다. 루빈 일행은 예외 없이 버텨냈다.
그러나 총합 다섯 번째가 되자, 블라네가 눈에 띄게 휘청거렸다. 루빈은 그녀를 강제로 제외시킬까 했지만, 도리어 더 굳건해지는 그녀의 강한 의지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거봐요, 결국엔… 혼절하네요.”
여섯 번째 해일이 지나간 직후였다.
네르하임은 눈가리개를 벗자마자, 눈동자에서 힘이 탁 풀리면서 쓰러지는 블라네를 목격했다.
“……!”
그녀가 수혈의 능력으로 투흔마를 조종하려는데, 루빈이 먼저 나섰다.
블라네가 말 옆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루빈이 투흔마를 가까이 붙이며 중심을 잡아준 것이다.
“쉬어라, 블라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그러면서 쿠제의 말에다가 블라네를 옮겨 태우려 했는데.
“쿠제, 네가 블라네를…….”
“…예, 감, 감찰, 찰관님?”
쿠제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해봐야 두 번이나 더 버텨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
“…됐다. 너도 멀쩡해 보이진 않네.”
결국, 기절한 블라네를 자신의 말에 태우는 루빈이었다.
“회복은 날이 밝으면 하기로 하고, 계속 나아간다.”
이후로도 그들은 투흔의 해일을 계속 맞이했고, 날이 밝기 전 쿠제마저 혼절하고 말았다. 쿠제의 체구마저 감당할 순 없어서, 그는 투흔마의 등 위에 그대로 엎어놓았다.
‘저 감찰관의 임무가 수행원들 단련시키는 거라고 해도 믿겠어.’
네르하임은 수행원 둘이 모두 기절한 뒤에도 꿋꿋이 버텨내는 루빈에 혀를 내둘렀다.
어떤 임무로 왔는지는 몰라도, 변경의 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놀음 때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다.
‘이 정도까지 버텨낸 걸 보면 최소한 4성의 오러. 나이가 고작 열아홉이라는 거, 정말인가?’
* * *
초원의 북쪽을 향해 나아간 지 4일째.
전령으로 보냈던 독수리가 네르하임에게 돌아왔다. 독수리의 다리에는 대족장의 필체로 답신이 적혀 있었다.
“대족장이 만남을 응했습니다.”
“제가 감찰관이라는 걸 밝히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그건 대족장을 만나고 감찰관님이 결정하시죠. 또 다른 신분을 가장하더라도 저는 적당히 받치겠습니다. 탐험가나 변방 지역에 관한 책을 저술하는 사람이라든가. 뭐든지요.”
“알겠습니다. 생각해보도록 하죠.”
네르하임은 대족장의 투흔푸까지 남은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대족장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과 독수리가 날아온 시간을 계산한 것이다.
“오늘 밤만 잘 보내면 곧 대족장을 만나겠군요.”
문득, 네르하임이 궁금해져서 물었다.
“저, 감찰관님. 펠키온이 수인화 연구를 하면서 여러 투흔인의 협조를 받았다고 하셨죠. ‘투흔의 바람’ 이마카룸이 그가 두 번째로 자주 만난 사람이라 했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가장 자주 만난 사람이, 혹시 지금 대족장 이냐키투입니까?
“아니요.”
루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펠키온의 기록물에는 이냐키투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단 한 차례도.
가장 많이 만난 사람. 그 이름은 이제껏 어디에서도 거론된 적이 없었다. 다섯 부족장의 자리를 거쳐 간 사람도 아니었으니, 유명한 투흔인이라 할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펠키온에게만큼은 중요 인물이었다는 것이었다. 수인화가 가능한 것으로 확인된 이마카룸과도 한 달에 여섯 번 접촉했을 뿐인 펠키온.
하지만 ‘그 사람’과는 한 달에 스무 번이나 접촉했다.
펠키온은 공적인 기록상에 그 이름을 완전히 지울 순 없었다. 그저 그 이름을 숨기는 방법은 철자를 비트는 것뿐이었다.
‘단지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어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수인화에 대한 비밀이라도 쥐고 있었던 걸까?’
기록에 따르면, 그 투흔인은 ‘투흔의 해일’로부터 펠키온을 구해준 사람이었다.
펠키온은 단독으로 북부초원에 들어갔던 첫날, 세 번이나 ‘투흔의 해일’을 맞이하고 말았다.
해일을 비껴갈 수 있는 정보가 없어서 결국 혼절하고 말았는데, 깨어나 보니 한 투흔인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가 최초의 접촉…….’
펠키온은 꼼짝없이 대초원에서 굶주림으로 죽어버렸을 수도 있었기에, 그 투흔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투흔인은 내게 투흔의 해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본인의 이름을 선선히 알려주었는데, 그 이름은…….
…루빈이 머릿속으로 막 펠키온의 기록물을 되새기려는 그때였다.
“……!”
넓게 펼쳐둔 암연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들이 나아가는 방향으로부터 빠르게 접근해오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전력 질주를 하는 투흔마를 압도할 만한 속도. 밤이라면 ‘투흔의 해일’이라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대낮이었다.
-도련님,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이윽고, 쿠제와 블라네의 암연에도 그 존재가 감지됐다. 쿠제와 함께 상대를 맞이하기 위해 제 투흔마를 앞으로 빼내는 블라네였다.
그녀는 활을 꺼내 들어 지평선 저쪽을 겨누었다.
“수행원 아가씨, 왜 그래?”
“…누군가 옵니다.”
“온다고? 투흔족인가? 그러면 활을 내려놓아야지. 결례가 될 수도 있으니…….”
“아뇨, 지금 다가오는 건 투흔마가 아닙니다. 다른 짐승이거나 괴수인 것 같아요.”
“짐승이나 괴수라고? 그럼 내가 확인해보지.”
네르하임이 수혈인의 능력을 발현해 접근해오는 미확인의 존재에게 접촉했다. 괴수나 짐승이라면 그녀가 다룰 수 있을 테니까.
“…뭐지?”
하지만 네르하임이 제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그때. 이윽고 무언가가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잘 보이지 않아 네르하임은 망원경을 꺼내어 확인에 나섰다. 이내 망원경에 들어온 그것은-
“늑대?”
그리고 늑대 등에 올라타 있는 한 여자아이.
“뭐야, 쟤는?”
그 궁금증을 곧바로 해결됐다.
여자아이는 짐승의 뿔을 잘라서 만든 도구를 자기 입에 가져다 댔다. 딱 봐도 목소리를 증폭시켜줄 도구였다.
“네가 우리의 말들을 빼앗아가는 그 수혈족 여자냐! 오크의 구린내를 향수처럼 뿌린다는?”
루빈이 피식 웃었고, 네르하임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벌게졌다. 철없는 어린아이의 말이라지만 도를 넘은 모욕이었으니까.
“나는 누블라의 딸, 라유비아다!”
그 순간, 루빈의 눈빛이 달라졌다.
누블라.
펠키온의 기록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이름이었다. ‘유날브’, ‘알분’, ‘블라누’ 등등의 애너그램으로 감추려 했던 본래의 이름.
또한, 루빈이 대족장을 통해 만나려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