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06화 (206/258)

제206화. 내면에 닿는 눈 (2)

태양이 떠오르는 투흔초원.

쇄골부족의 영역을 앞두고, 루빈 일행을 마중 나온 투흔인이 있었다. 라유비아는 멀리서부터 그를 알아봤다.

“저기 가운데 있는 사람이 쿤달리트야. 쇄골부족의 족장.”

쿤달리트는 여남은 명의 장정들을 대동하여 루빈 일행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런.”

침착함을 유지하던 쿤달리트가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난데없이 사라졌던 라유비아가 루빈 일행과 함께하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빠르게 말을 몰아 다가온 쿤달리트. 난감해진 표정으로 라유비아와 네르하임을 번갈아 바라봤다.

“성주, 이 아이와 무슨 일이 있었소?”

“별일 없었습니다, 쿤달리트.”

“정말 별일 없었던 맞소? 혹시 이 아이가 어떤 결례를 범하진 않았는지…….”

네르하임은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모호하게 미소 지었다. 라유비아의 무례함이야 제대로 따져 들고 싶었지만, 루빈의 서늘한 눈길이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쿤달리트와 네르하임.

투흔마 보급과 관련하여 이미 여러 차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네르하임 입장에서는, 대족장 이냐키투가 쇄골부족에 머무르는 지금 만남을 주선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머지 부족장들은 너무도 강성했고 또 무식했다. 쿤달리트가 그나마 말이 좀 통하는 상대였다.

“여기 이쪽이 오늘 대족장을 만나 뵐 분입니다.”

“…….”

루빈을 바라보는 쿤달리트 눈빛이 복잡해졌다. 투흔족 기준으로 아무리 냉철하고 분석적인 사람이라 한들, 루빈에 대해서는 무어라 판단할 수가 없었다.

반면, 루빈은 달랐다.

‘쿤달리트라…….’

펠키온의 기록물에 나와 있던 이름이었다. 물론 그 당시엔 부족장에 오르기 전.

‘초원에서는 ‘투흔의 불꽃’이라며 명망을 쌓은 인물. 무엇보다, 이마카룸이 믿고 따르는 사내라고 했었지.’

누블라가 죽은 지금, 브리온 오러 추적의 열쇠는 단연 이마카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마카룸과 연결된 쿤달리트도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 투흔인을 이용해 이마카룸을 유인하는 것이 루빈의 계획이었으니까. 물론 그전에 대족장부터 만나야겠지만.

“루한 멜라스입니다.”

“쿤달리트입니다.”

대륙의 보편적 인사는 악수였지만, 투흔족의 인사법은 다르다. 루빈은 고개를 돌리며 왼쪽 귀가 상대를 향하도록 했다.

그러자 얼굴에 미소가 살짝 감도는 쿤달리트. 그는 루빈이 드러낸 목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자신도 똑같이 왼쪽 귀가 앞으로 향하게 하며 목을 드러냈다. 마찬가지, 쿤달리트가 했던 방식대로 인사에 응하는 루빈.

‘라유비아가 그새 설명해줬나? 어쩌면 네르하임이 알려줬을 수도 있겠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하는 투흔족 특유의 인사법이었기에, 쿤달리트는 그렇게 추측했다.

하지만 루빈은 펠키온의 기록물을 통해, 이 작은 의례가 쉽게 호감을 사는 방법임을 알아낸 것이었다.

그때, 라유비아가 목소리를 크게 냈다.

“쿤달리트! 여기선 루한이 부족장 같은 거래. 저 수혈인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네르하임이 괜한 기침을 하는 사이, 쿤달리트는 루빈을 다시 살폈다.

‘귀족인가? 아니면 강자?’

이제껏 히베르다드 성주보다 높은 이를 만나본 적 없는 쿤달리트였다. 그는 괜히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하필 탈옥한 이마카룸이 돌아온 이 시점에 통제관이 높은 제국인을 데려오다니. 방금 그가 투흔 친화적인 의례를 보였다고는 하나,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족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죠.”

쿤달리트가 말을 돌려 쇄골부족의 영역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역시 전혀 다른 문명이구나.’

드넓은 초원 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투흔푸의 숫자가 상당했다. 요리 연기가 피어오르고 말들의 투레질이 울리는 사이사이를, 루빈 일행은 천천히 가로질렀다.

투흔족들은 일고여덟의 투흔푸가 한데 모여 최소 단위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들끼리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함께 양육하는 구조.

그런 최소 단위가 또 일고여덟 모여 중간 단위를 이루고, 또다시 이들이 모이면 ‘쇄골’과 같은 부족이 되는 것이다.

이 부족 단위의 인구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규모. 하지만 이들은 밀집하지 않았고, 서열이란 것도 없었다. 족장이나 대족장이라는 것도 이들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닌, 대표자의 성격이 강했다.

“…….”

“부족 사람의 시선을 이해주시기 바랍니다. 악의가 아닌, 그저 호기심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지나갈 때마다 쇄골부족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쪽을 쳐다봤다. 호기심이라 포장하지만 저들의 눈동자에는 씻기지 않는 적의가 가득했다. 라유비아가 그렇듯, 다들 네르하임의 방문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후우…….”

특히나 모든 눈길을 받아내야 하는 네르하임이 유독 긴장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족장이 여남은 명의 장정들을 데리고 그녀를 마중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족장이 없었더라면 분명 불상사가 일어났을 테고, 그 수준은 라유비아의 어린애 장난에 그치지 않았겠지.

“여기서 좀 더 나아가다 보면, 대족장 이냐키투의 투흔푸입니다.”

‘돌산’ 근처에 다다르니 정말 대족장의 투흔푸가 나왔다. 외따로 떨어져 있을 뿐, 다른 투흔푸와 큰 차이는 없었다.

“말을 묶어두고, 절 따라오시지요.”

말에서 내린 쿤달리트가 쿠제와 블라네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투흔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저와 히베르다드 성주, 그리고 루한 멜라스 님뿐입니다.”

그러곤 즉각적인 반발이 뒤따를 거라 예상하며 머릿속으로 적절한 말을 고르려는데.

“그러죠.”

“…….”

의외로 두 수행원은 순순히 따랐다.

사실, 투흔푸 안에 복병이 없다는 건 모를 리 없는 그들이었다. 암연으로 내부를 살펴본 바, 안에 있는 건 한 사람뿐.

만에 하나 그 사람이 루빈에게 위협이 될 거라면, 쿠제와 블라네는 그 자리에 없는 편이 나았다. 방해만 될 뿐이니까.

“왜! 왜 나는 못 들어가는 거야, 쿤달리트!”

오히려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반발한 건, 두 수행원이 아닌 라유비아였다.

쿤달리트는 대답하는 대신 씩 웃으며, 손으로 라유비아의 머리를 친근하게 헝클었다. 그다음, 방문자들을 바라보며 투흔푸 안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들어가도 된다는 뜻이었다.

저벅저벅.

가장 먼저 그들을 맞아준 건, 말로 표현하기 힘든 향이었다. 시취를 맡을 때처럼 불쾌한데, 묘하게 중독적인 면이 있었다.

그리고 연기로 가득한 내부.

콜록콜록.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네르하임이 기침하며 손을 내저었다.

‘저자인가.’

연기 너머로 가려져 있지만, 루빈에겐 암연이라는 또 다른 눈이 있었다.

저쪽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투흔족 노인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자, 연기 속에서 노인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발광하는 육식 짐승의 눈을 보는 듯했다.

어쩐지 오늘의 실질적 방문자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은 단 한 번도 이탈되지 않은 채로 오직 루빈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 * *

“쿤달리트.”

“음?”

투흔푸 안으로 들어간 세 사람이 대족장의 맞은편에 앉기 전이었다.

대족장 이냐키투의 목소리가 울린다. 몸은 말라비틀어진 나무나 다름없었는데, 목소리엔 힘이 가득했다.

“이제 그만 나가봐도 돼. 성주와 함께.”

“……?”

“날 만나려는 사람은 이 청년이잖아. 투흔마 보급에 관한 건 어차피 네가 더 잘 처리할 테고. 괜찮겠지요?”

루빈을 향해 묻는 대족장. 루빈은 고갤 끄덕였다.

“…여기에 오신 이유가 투흔마 때문이 아닙니까?”

쿤달리트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왔다. 네르하임의 안내를 받았기에 당연히 그 용건인 줄 짐작했던 터였다.

“제 용건은 따로 있습니다. 투흔마 건은 네르하임과 이야기 나누시지요. 어차피 저도 대족장과의 독대를 요청하려 했으니까.”

“…뭐, 그렇다면.”

당사자들이 그리 원하니, 쿤달리트도 어쩔 수 없었다. 그와 네르하임은 뭔가 찝찝한지 계속 뒤를 돌아보면서 투흔푸를 나섰다.

“앉으시지요.”

대족장의 권유. 루빈은 그 말에 따랐다.

‘대족장 이냐키투, 의외인데’

루빈은 애초부터 대족장과 독대를 원했지만, 그 절차가 꽤 복잡할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도리어 저쪽에서 갑작스레 독대의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다.

게다가 앞서 네르하임에게 들었던 설명과는 달리, 그는 올해를 넘기지 못할 만큼 늙고 쇠약해 보이지도 않았다.

분명 그 몸은 주름만이 가득하지만, 눈동자와 목소리는 생기를 한가득 품고 있었다.

“루한 멜라스라고 합니다. 대족장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인사를 받는 대신, 루빈을 지긋이 쳐다보는 이냐키투. 거만함이나 무례함이 아닌, 관찰의 시선이다.

대족장은 루빈의 검은 눈동자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눈이 무얼 담고 있는지 파고들려 애썼다.

눈동자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었고, 이냐키투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런데.

“무얼 하시는 겁니까, 대족장.”

“……!”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눈동자. 이 흔들림은 루빈이 아닌 이냐키투에게서 일어난 일이었다.

온화했던 루빈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대체 무얼 시도하시는지요? 의도는 모르겠으나 그게 투흔식 인사법이 아니라는 것쯤은 저도 압니다. 미리 허락을 구해주시면 좋겠군요.”

“…….”

암연으로 오묘한 접근을 느낀 루빈이었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흡사 넝쿨이 몸을 타고 올라오는 듯했는데.

마법이나 흑마법은 아닌 것 같고, 대족장만의 능력인 것 같았다. 문득 짚이는 바가 있었다.

“대족장, 혹시 마령술사입니까?”

루빈이 직설적으로 묻자, 내내 입을 다물던 대족장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묻고 싶군요, 루한.”

“…예?”

“당신이 들어왔을 때부터 마령의 기운이 진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내보낸 겁니다.”

마령이라? 아, 블루캣 호에서 침투했던 그 마령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가? 루빈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래전에 마령과 엮였던 적이 있지요. 곧장 그들 세계로 돌려보냈으니 문제없을 텐데요.”

“…….”

“이제 대족장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마령술사가 맞습니까?”

이윽고 이냐키투도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사람의 내면에 발을 디딜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것이 곧 마령술사임을 의미하는 건 건 아니다.

“마령술사는 아니지만, 가끔 마령세계의 대화들을 훔쳐 듣곤 합니다. 아마 제 예상으론 생모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냐키투는 순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았다. 그의 생모는, 그를 임신했던 시기에 하필 마령술사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생모는 마령술사로서 별다른 일화조차 남기지 않았죠.”

그도 그럴 것이, 마령들에게 투흔초원은 생존하기 힘든 곳이었다. 투흔의 해일에 마령들은 속수무책 소멸될 뿐.

어쨌든 그녀는 임신 중에 마령술사가 되었고, 훗날 대족장이 될 이냐키투를 낳았다. 단지 이러한 이유로 이냐키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그 능력 덕분에 대족장에 올랐고.

“내면세계를 들여다본다…….”

루빈은 나직하게 읊조렸다.

내면세계. 당연하게도, 하네케로 인해 그에게는 낯설기는커녕 친숙하기만 한 개념이었다.

다만 좀 의외였을 뿐이다.

‘일류의 대장장이를 만나는 데 도움이나 받으려 했는데.’

브리온 오러 때문은 아니었다. 대족장은 그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브리온 오러를 쫓는 일은 이마카룸을 통해 해결할 문제였고, 대족장은 그저 대장장이의 열쇠가 되어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상황이 쉬워졌군. 대족장은 아무래도 내 내면세계에 관심이 있는 것 같고…….’

순간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디까지나 가정뿐이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루빈이 말했다.

“그에 앞서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안이요?”

“대족장이 내 내면세계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죠. 나도 마침 내면세계의 상태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어떠십니까. 이후의 대화는 거기에서 하는 게.”

그 말에, 대족장은 끌끌 웃었다. 대족장이 보기에, 루빈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마령을 겪어본 적 있다더니, 내면세계에 대해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그건 들여보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요?”

“방금 내가 당신의 내면세계에 못 들어간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나나 당신이나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종의 필연이니까.”

“필연이라.”

아무래도 착각은 이냐키투가 하는 것 같았다. 하긴,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초원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면, 내면세계를 조작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을 게 분명했다.

물론, 루빈 또한 자신 말고 내면세계를 조작하는 이가 있으리라 확신하지는 않았다. 루빈은 ‘7성의 검혼’과 ‘100일의 암연’이라는, 다시 없을 기연으로 빚어진 결과였으니까.

‘다른 사람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이냐키투만의 이능이다.’

하지만 자신은 하네케로부터 촉발된 내면세계의 지배자가 아닌가.

‘놀랄 얼굴이 벌써 그려지네.’

앞선 이냐키투의 틈입 실패는 순전히 루빈의 의지의 결과였다. 자신의 내면세계로 접근하려는 그를 암연으로 막아선 것이다. 단지 이냐키투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다시 한번 해보시지요, 대족장.”

“다시 해보라…?”

“이번엔 틈입을 허용하겠습니다.”

이냐키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루빈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역시 이번에도…….”

여전히 내면세계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무언가 단단히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

“……?”

그때, 내내 그의 틈입을 막아서던 루빈이 피식 웃는다. 그와 동시에 내면세계를 둘러싼 장벽을 순식간에 허물어버렸다.

“……!”

대족장의 몸이 움찔거렸다. 육신은 그대로였지만, 그의 의식은 이미 루빈의 내면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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