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11화 (211/258)

제211화. 흑표의 수인, 흑칠의 오러 (1)

타닥타닥.

모닥불 소리가 동굴을 채운다.

아픈 몸을 진정시키던 쿤달리트는 잠든 지 오래. 루빈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투흔의 바람’ 이마카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라유비아의 숨겨진 정체에 관해선 루빈도 알고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뿐.

‘평범한 늑대는 아닌 것 같은데.’

짧은 마주침이었지만, 루빈의 직감은 남달랐다. 그 이후 늑대에 대한 짙은 의구심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분명 기이한 존재다.’

물론 그럴 거라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확률의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루빈은 그조차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그래서 티나를 블라네 곁으로 보낸 것이었다.

‘선택받은 자’, 그리고 신수.

오스카와 셀록 덕분에, 세계에 대한 그의 인식은 전생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넓어졌다. 불가해한 현상과 미지의 존재들은 분명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혹 셀록과 같은 신수(神獸)인가?’

외형만 보자면, 라유비아의 늑대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그저 평범한 늑대. 푸른 깃털의 그리폰이라는 유일무이한 외형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가 늑대의 숨겨진 위험성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늑대의 전투력을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네르하임의 수혈인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의심하기엔 충분하니까.

‘혹시라도 신수라면…….’

루빈은 셀록의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그는 암연의 존재와 그 일족에 대해 해박하게 알고 있었다.

셀록은 특히 로이네크로우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쩌면 로이네크로우는, 신수들이 암연 일족을 알아차리게 하는 핵심 매개일지도 몰랐다.

이것이야말로 루빈이 티나에게 로이네크로우의 모습으로 블라네 곁을 지키라 지시한 이유였다.

‘신수는 ‘선택받은 자’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로이네크로우가 두 마리라는 건, 곧 두 명의 암살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

루빈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라도, 신수에게 압박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이 깊어 보이는군, 루빈.

하네케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루빈은 순순히 인정했다.

‘고민이 많습니다.’

-이마카룸과의 싸움 때문인가?

‘아뇨, 그게 아니라-’

루빈의 또 다른 고민거리.

그건 바로 라유비아의 실체에 대한 것이었다. 그 아이가 펠키온의 딸, 아니… 하네케의 증손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하지만 아직까진 얕은 수준의 추측에 불과했다. 루빈은 고민을 감추었다.

‘셀록이 알려줬던 길을 다시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어요.’

-숨겨진 대장간 말이지?

‘아마 내일이면 볼 수 있을 겁니다.’

셀록이 알려주었던 경로. 그 토대는 200여 년 전에 머물러 있었다. 그땐 극지의 장벽이 세워지기 전이라, 어느 정도 재해석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장벽의 동쪽 망루였다.

셀록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 올라 해가 가장 낮은 온도로 대지에 퍼지는 순간, 다음 길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

루빈은 잠시 대장장이에게 의뢰할 장비들 목록을 추려보았다.

우선 로젠탈러에게서 얻은 비검을 단검으로 개조할 것이고, 남아 있는 1급 마적석 하나를 재료 삼아 ‘1급 마적석 탐지기’를 만들 계획이었다.

-하나 더. 그자에게 내면세계의 파괴를 막을 방법도 물어봐야 하네.

하네케의 당부에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가 왕국들의 전란기 때부터 생존해 있는 자라면… 초월적인 존재일 수도 있으니까. 마땅한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루 전. 이냐키투가 내면세계에 들어왔을 때, 하네케는 모습을 숨긴 채 둘의 대화를 모두 새겨들었다.

그래서 대족장이 내면세계를 떠나기 전, 그가 어떤 진단을 내렸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내면세계의 대지를 어루만지던 이냐키투는 어렵지 않게 상태를 알아봤다.

‘루한, 당신이 걱정한 것처럼 내면이 뒤틀려 있군요. 어쩌면 당신 스스로가 내면세계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원래는 스스로에게만큼은 감춰져 있어야 하는 지대이니까요. 곧 격동이 일어날 겁니다.’

‘언제쯤일 것 같습니까?’

‘… 3년 내외입니다.’

내면세계가 폭주하기까지 3년이 남았다는, 시한부를 판정받은 것이다. 이는 마령의 진단보다 훨씬 앞당겨진 시점이었다.

이에 하네케는 눈에 띄게 동요했었다. 루빈의 복수가 완수하기까지는 3년은 턱없이 모자랐으니.

하네케는 하루빨리 해결책을 구해서 루빈을 안정시켜 주고 싶었다. 대장장이든 마령술사든, 그 누구를 대동해서라도 말이다.

-물론, 이제 벌어질 싸움을 이긴 다음의 이야기겠지만.

안 그래도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넓게 펼친 암연에 빠르게 다가오는 무언가가 감지됐으니까.

초원을 가르는 ‘투흔의 바람’. 분노가 극에 달했는지 은밀한 접근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체할 수 없는 적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시작해볼까.’

루빈은 ‘투흔의 바람’을 더 광포하게 만들 만한 조치부터 취했다.

암연의 일부를 잠든 쿤달리트에게 향하게 한 뒤, 그의 고른 숨소리를 잠시 멎게 만들었다.

죽일 생각은 없다. 단지 이 ‘투흔의 불꽃’을 잠시 꺼트림으로써 ‘투흔의 바람’이 폭풍처럼 미쳐 날뛰게 하려는 것뿐이다.

* * *

수인 이마카룸.

온몸이 검은 털로 뒤덮였기 때문에 밤의 초원에서 그 모습은 마치 윤곽이 지워진 것 같았다. 더 짙어진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만 번뜩이고 있었다.

‘동쪽과 서쪽.’

바닥에 코를 가져다 댄 이마카룸은 제국인 일행이 두 무리로 나뉘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중 쿤달리트의 투흔마가 향한 곳은 동쪽인 것 같았다.

그는 라유비아로 변신한 티나를 알아채지 못했고, 그래서 동쪽과 서쪽을 두고 잠깐 고민해야만 했다.

서쪽엔 다친 라유비아의 늑대가, 동쪽엔 제국인의 겁박 속에 있는 쿤달리트가 있다.

‘라유비아에겐 미안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족장부터 구해야지.’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부상 입은 늑대는 나중의 일이다.

늦어져서 끝내 죽더라도 어차피 짐승의 죽음에 불과하다. 혈족이라는 투흔마의 죽음조차 지금의 이마카룸을 망설이지 않게 할 텐데, 고작 늑대 따위야.

누가 뭐래도 쿤달리트가 우선이다.

사아아아.

그가 동쪽을 향해 다시 질주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됐을까.

장벽의 동쪽 끝에 다다르자, 묶여있는 두 마리의 투흔마가 눈에 띄었다. 그중 하나는 쿤달리트의 말이 분명했다.

‘저기다! 저기에 쿤달리트가 있어.’

그러자 그가 겪었을지도 모를 갖가지 끔찍한 상황들이 마구 상상되기 시작했다. 제국 사람에 대한 악감정까지 더해지자, 그 분노가 넘실거린다.

스으으으으.

수인의 모습으로 저 동굴로 뛰어 들어가고 싶지만, 쿤달리트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수인화를 풀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웃통은 벗어젖힌 상태였지만, 투흔인의 문화라면서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겠지.

푸르르. 푸르르.

투흔마를 한 번씩 쓰다듬어준 다음, 몸을 숙이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모닥불이 하나 피워져 있었고, 그 앞으로 흑발과 흑안의 청년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쟤가 그 제국 놈인가? 새파란 핏덩이였잖아?’

‘협곡 감옥’에서 이미 한 차례 마주친 적 있지만, 당시 루빈은 복면을 쓴 상태였다. 게다가 지금과는 느낌도 많이 달랐기에 어떤 공통점도 느끼지 못하는 이마카룸이었다.

반면, 루빈은 달랐다.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되는군.’

지금 들어서는 투흔인과 감방 안에 갇혀 있던 죄수의 얼굴이 겹쳐졌다.

역시나 이마카룸은 초원에 돌아와 있었고, 그 예상처럼 쿤달리트를 위해 기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발등부족의…….”

자신이 이마카룸이라는 걸 감추려 하겠지.

피식 웃는 루빈의 한 손에는 핏빛서리가 들려있었다. 검이 한기를 쏟아내어 모닥불을 꺼트리자, 이마카룸이 입을 다물었다.

프시싯.

“드디어 나타났구나.”

“……?”

“투흔의 바람, 이마카룸, 제국의 감옥을 탈옥한 1급 죄수.”

모닥불을 꺼트렸으니 동굴 안은 어두웠다. 그럼에도 루빈은 충격에 휩싸인 이마카룸의 얼굴을 훤히 볼 수 있었다. 루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마카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경직된 이마카룸을 쓱 지나쳐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투흔의 바람’을 ‘눈 먼 폭풍’으로 바꿔버릴 말을 남기면서.

“너를 찾아내느라 애꿎은 족장 하나가 개죽음을 당했다.”

“……?”

이마카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 말의 의미는 쿤달리트가 죽었다는 뜻인가?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제국 놈이라도 그렇게 마음대로, 쉽게 죽일 리는 없는데.

따져 물을 필요도 없이, 이마카룸은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누워 있는 쿤달리트에게 다가갔다.

“…….”

루빈은 감정이 배제된 눈으로 동굴 안에 있는 이마카룸을 지켜봤다.

저놈이 내게 달려들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1초, 2초, 3초…….

이마카룸은 쿤달리트의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댔다. 루빈의 암연이 그의 청각을 흐트러뜨리고, 기절한 쿤달리트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이마카룸은 아무런 심장 박동이 느껴지지 않음에도, 그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 같았다.

“네가! 네가! 감히 투흔의 불꽃을!”

동굴을 뛰쳐나와 루빈을 공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20초. 루빈의 예상보다는 다소 늦은 때였다.

‘수인화는 아직인가.’

처음부터 수인화를 기대했던 루빈이었지만, 아쉽게도 잠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달려드는 그 순간 이마카룸은 뭉툭한 단검을 빼 들며 5성의 투흔 오러를 발현했다. 그것만으로도 단숨에 목을 끊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으리라.

“……!”

그런데 목을 노리던 이마카룸의 검이 도중에 막힌다. 눈앞으로 예상치 못한 섬광이 일었다.

콰콰쾅!

오러의 격돌.

투흔의 오러를 막아내는 흑칠의 오러였다.

검을 맞댄 두 사람 주위로 공기가 뜨거워지고 기압이 올라갔다. 놀란 투흔마가 재난을 앞두고 날뛰기 시작했다.

“너… 정체가 뭐지?”

둔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

핏빛서리의 검신을 감싼 브리온 오러. 그런데 이마카룸은 브리온 오러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오러를 보고, 뭐 할 말 없나?”

“뭐?”

“설명은 싸움이 끝난 뒤에 하는 게 좋겠군.”

루빈은 교착된 두 검이 만들어낸 짧은 평온을 끝냈다. 그러곤 이마카룸의 수인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맹공을 시작했다.

챙! 챙! 챙!

“……!”

예상치 못한 흐름에 당황하며 방어에만 급급한 이마카룸. 하지만 막아내는 것은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이마카룸의 살갗이 점차 피로 물들었다.

‘역시 투흔의 오러는 둔탁해. 공격술도 형편없고.’

제아무리 오러의 경지가 5성이라 한들, 그 원천이 되는 검술의 격에서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성위는 4성에 불과할지라도, 루빈의 브리온 오러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최상위 검술.

더군다나 루빈은 암살검가의 검식에 기초하였으므로, 이제껏 세상에 없던 극강의 검술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언제 본모습을 드러낼 거냐, 이마카룸!’

오러도, 공격술도 아니다. 루빈이 이마카룸에게서 기다리는 건 수인화였다.

무위의 일시적인 폭증. 전투 감각은 맹수의 본능으로 덧입혀지고, 발톱엔 응집된 오러를 담는 투흔족만의 고유한 능력.

수인이 되어야만 루빈과 균형이 맞을 것이다. 루빈으로서도 그 정도 전투를 펼쳐야만 6성으로의 등반을 기대할 수 있을 테고.

아니나 다를까, 이마카룸도 마음속으로 수인화란 선택지를 매만지고 있었다.

‘이 괴물 같은 놈이……!’

지금 동굴 안에는 쿤달리트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고, 이 분노는 오직 이 괴물 같은 제국 놈 시체만이 씻겨줄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놈을 죽인다. 투흔을 위해……!’

크르르르르.

지척에서 울리는 맹수의 울음에, 루빈은 은근슬쩍 공격을 늦춘다.

놈의 손톱에서부터 검은 털이 번져간다. 인간의 몸에서 흑표의 육체로 변해가는 광경은, 루빈에게도 인상적이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수인화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

순간, 전생부터 이어졌던 암연의 환이 요동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5성의 환이 새롭게 움트는 것 같았다.

‘6성이 기다리고 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암연이 말해주고 있었다. 눈앞의 흑표를 이긴다면, 새로운 경지가 펼쳐질 것임을.

크아아아아!

수인화의 마지막을 알리는 동공의 백화(白化). 흰자와 검은자의 완전한 반전을 끝으로, 거대한 흑표가 길게 포효했다.

섬뜩한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루빈 또한 본연의 전투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와라.”

흑칠의 오러가 꿈틀거리며 암연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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