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선택받은 자 (1)
-음, 뭐부터 말해줘야 할까? 아니지…. 너한테 어디까지 말해줄 수 있을까.
암연은, 그러니까 이목구비가 부재한 암흑 인형(人形)은 한 손으로 턱을 괴더니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행동엔 장난스러움이 묻어났지만, 오히려 더욱 위화감이 들었다. 심연의 공간 속 장난기 가득한 존재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내 숙명이라고 했나? 그게 뭐지?”
기다리던 루빈이 먼저 나섰다.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이지만, 암연은 저에게 호의적이었다. 대답해 줄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팔짱을 끼는 암연. 그것은 잠깐 말을 멈추고, 암흑 공간에 변화를 일으켰다.
우르르르.
한순간 땅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는 지물이나 사물은 없었지만, 기울어진 지면을 따라 뭔가가 굴러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의 균형을 바로 잡는 것.
“균형?”
-어쩌면 ‘조율하는 것’이라 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몰라.
그때,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이나 조율되지 않은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움 불협화음에 루빈은 두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자 킥킥거리는 암연.
“조율하는 것이 내 숙명이다?”
물론 비유일 터. 어느새 악기 소리도 그치고, 기울어졌던 지면도 다시 돌아왔다.
-루빈, 흑영이 왜 여덟 명인지 알아?
암연이 뜬금없이 물어왔다.
흑영이 여덟 명인 이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흑영 8인.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립되어 있었던, 암살검가의 원형(原形)이지 않나.
그러다 문득,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여덟 왕국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지금 대륙을 이루는 건 7개 국가다. 그중 하나가 릴리크 제국이었고. 거기에 멸망한 왕국 세빌론까지 포함하면 대륙의 국가는 총 여덟이었다.
카포티니 마법학교에서 기습적으로 치러졌던 장교육성위 시험. 그중 최종 단계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덟 왕국의 전투, ‘라스키엔 대난전’은 실제 역사 속 전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니.
-맞았어. 흑영이 여덟 명인 건 여덟 왕국이랑 관련이 있지.
루빈의 생각을 읽고, 암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루빈의 의문을 풀어줄 설명이 좀 더 이어졌다.
무위를 겨뤄 강자로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지금의 흑영. 그러나 대륙이 여덟 왕국으로 이루어졌던 수백 년 전에는 그 역할이 상당히 달랐다.
그들은 이를테면 ‘암연의 영주’들이었다.
-세빌론에 한 명, 릴리크에 한 명, 파무크에 한 명. 이런 식으로 여덟 왕국의 그늘을 차지했던 자들이었지.
“그럼 그들이 각 왕국의 국왕들을 위해 활동했다는 거야?”
암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영은 각 국왕을 위해 활동하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그들의 역할은, 어떤 한 나라의 국왕이 대륙의 패권을 잡는 걸 막아내는 것이었으니까.
-대륙의 균형을 깨트리는 패왕이나 악인을 도려내는 것. 그게 흑영들의 역할이거든.
그만한 역할을 수행하려면 그들은 그 누구보다 강해야 했다. 그래서 꾸준히 최강자를 가려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는 무위 대결의 원형이었다.
“그럼 우리, 로이넨의 역할은 뭐지?”
-내 목소리를 흑영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지.
현재는 칙명부가 제국의 안위를 위해 암살을 명한다. 하지만 ‘여덟 왕국의 시대’에는 암연 그 스스로 목소리를 내었다.
암살은 어떤 한 국가를 위해 행해지지 않았다. 암살이란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대륙의 균형을 위해 행해지는, 일종의 공무였다.
안개고목이 있는 길리필드 수목원. 그곳이 암연의 신탁이 내리는 곳이었다. 안개고목으로부터 암연의 목소리를 들은 로이넨 가주는 그걸 흑영들에게 전달했다.
-물론 이 시절에도 약소국과 강대국은 있었지. 국가 간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화’ 속에 존재하는 소소한 것일 뿐.
“…….”
언제부터 대륙의 균형이 깨졌다고 할 수 있을까. 릴리크가 제국을 이룩한 100여 년 전? 아니면,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200여 년 전?
그보다 앞선 때, 그러니까 세빌론의 속국이었던 릴리크가 반란을 결심했던 그때였을지도 모르지.
언제 불균형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는 암연조차 몰랐다. 텔마흐의 핏줄은 어느 순간부터 암연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나? 넌 절대적인 존재로 느껴지는데?”
-내 심판을 비껴갈 만큼 강한 존재가 숨어있는 거겠지. 그 핏줄 속에 말야.
지금 루빈이 암연을 마주한 것처럼, 텔마흐도 어떤 힘을 마주했다는 게 암연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추측은 추측일 뿐. 그걸 알아내는 건 루빈의 몫이었으니.
-릴리크 가문은 ‘암연의 일족’이 대륙 지배의 지름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애초에 무너졌던 대륙의 균형은, 릴리크가 암연의 일족까지 흡수함으로써 회복 가능성을 잃었다. 되돌릴 수 있는 시점을 놓친 것이다.
-나는 지켜보아야만 했어. 내 일족이 릴리크의 암살검으로 전락하는 걸, 릴리크의 혈통과 암연의 순혈이 뒤섞이는 걸.
거기까지 말한 뒤, 암연은 잠시 침묵했다. 무력감이 배어 나왔다. 루빈은 그 감정을 깊이 공유받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태어난 거지. 텔마흐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암연의 그 말은 의외였다. 두 번 태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암연의 영향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뜻인가.
-물론 네 회귀는 나도 알고 있었지만… 나랑 무관한 일인걸.
“무관하다고?”
이내 암연이 암흑 공간 안에서 느릿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루빈도 그를 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으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그저 어둠만이 가득했다.
-나는 절대자가 아니야. 세상을 이루는 구성원, 하나의 힘일 뿐이지. 오러와 마나처럼.
암연은 하나의 힘일 뿐이다…….
암연의 말처럼, ‘절대자’는 암연 너머에 있었다. 오러와 마나를 세상에 퍼뜨리고, 암연을 일족의 권능으로 부여한 진짜 절대자 말이다.
“오러와 마나도 너처럼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암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에게도 인격체가 있는지는 암연도 몰랐다.
알다시피 암연은 오러와 마나와는 구분되는 힘이었다. 세상에 그 존재는 감춰져 있으며 오직 암살검가에게만 허락된 힘.
-그건 나도 몰라. 다만 그들 역시 누군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알지.
이 말인즉, ‘선택받은 자’를 뜻하리라. 루빈의 머릿속에 오스카와 셀록의 모습이 떠올랐다.
루빈의 생각을 읽어낸 암연은, 이번엔 가시적인 무언가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공간의 암흑을 주무르더니 오스카와 셀록의 형상이 만들어냈다. 저의 모습처럼 얼굴이 갖춰지지 않은 그림자의 형태로.
-이미 너는 그중 하나를 만나봤잖아? ‘파휘(破揮)의 마법사’와 그의 신수 셀록.
“파휘의 마법사?”
오스카는 삼휘의 마법사이지 않던가. 그리고 파휘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휘식이었다.
“그게 뭐지? 보여줄 수 있나?”
-글쎄. 그건 나중에 직접 만나서 확인하는 게 좋겠지. 내가 구현하는 것보다 실제로 보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이후, 루빈은 또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아직 추측뿐이지만, 어쩌면 또 하나의 ‘선택받은 자’일지도 모르는 라유비아. 그녀와 늑대를 함께 떠올려보았다.
생각이 전달되자 이번에도 암연은 암흑을 빚어냈다. 그림자의 형태로 투흔족 소녀와 늑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역시 라유비아도 선택받은 자였구나.”
-‘적운(積雲)의 성주’ 라유비아. 그리고 그녀의 신수는 ‘적운의 파수’라 하지.
적운의 성주라는 이명이 뭘 의미하는지 궁금했지만, 이 자리에선 그저 그 존재를 알아챈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무튼 이로써 확실해졌다. 오스카는 마나의 선택을, 라유비아는 오러의 선택을 받았다.
-하지만 오러와 마나에겐 그 둘이 끝은 아닐 거야.
끝이 아닐 거라고?
-나는 단 하나의 ‘선택받은 자’를 고를 뿐이지만, 오러와 마나는 달라. 둘일 수도, 셋일 수도 있지.
오스카 같은 마법사가 둘이나 셋이라니.
라유비아는 몰라도, 오스카의 힘만큼은 또렷이 기억했다. 그 압도적인 경지와 위력을 말이다. 그래서 오스카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토록 애쓴 것이었는데.
만약 ‘마나’와 ‘오러’의 또다른 ‘선택받은 자’들이 이미 텔마흐에 복속되어 있다면? 불길한 예감이 루빈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만 충고해줄까?
“……?”
-오러 혹은 마나의 ‘선택받은 자’들을 찾게 되면, 네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소멸시키거나, 내 편으로 만들거나. 오직 그 길뿐이겠지.”
루빈의 무덤덤한 대답에 암연이 키득거렸다.
그건 곧 루빈의 의지이기도 했다. 복수를 위한 강한 의지.
또 다른 ‘선택받은 자’들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알게 된 이상, 그들을 텔마흐에게 내어주는 일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럼 내가 너의 ‘선택받은 자’인가?”
-그래. 암연의 ‘선택받은 자’.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지금껏 복수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걸 그대로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맞아. 너는 복수를 위해 계속 강해지면 돼.
텔마흐의 죽음이란 ‘루빈’에겐 복수의 끝이었지만, ‘암연’에겐 완수하지 못한 과업이었다. 그리고 ‘세상’에게는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는 일이었다.
어느덧 대화는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루빈은 암연이 자신의 특성을 알려주길 기다렸다. 베닉은 미래를 드러내는 꿈을 꾸고, 킬리언은 다른 암살자에게 감지되지 않는 암연을 지녔다.
그렇다면, 나는?
루빈의 의도를 알아챈 암연이 천천히 다가온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루빈을 바라보며 답을 내주었다.
-암연 전이(轉移).
“……?”
-다른 암살자의 암연을 일시적으로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로써 네 힘은 증폭되겠지.
동료의 암연을 빌려 쓸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적의 암연을 훔쳐 쓸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로이넨가는 아직 모든 암살검가를 휘하에 두지 못했다. 앞으로 암살검가를 상대해야 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것도 가능하지.
루빈의 생각을 읽은 암연이 흡족한 듯 말하곤, 이어서 당부했다.
-하지만 조심해. 일족의 누군가는 오염된 암연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염된 암연? 처음 듣는 개념이었다. 그게 누군지도 궁금했으나 물어봤자 알려주지 않으리라는 건 빤했다.
“전이되는 순간 내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건지는 물어봐도 되겠지.”
암연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어. 이건 특성이라기보다는 선물 같은 건데.
“뭐지?”
-발아(發芽). 네 암연이 6성에 도달한 그 순간, 안개고목의 나뭇가지에 새로운 알이 하나 맺혔거든.
“…내 신수인가?”
-선물은 직접 열어보도록 해. 눈을 감고, 안개고목을 떠올려봐. 잠시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
루빈은 그렇게 했다. 눈을 감았고, 대륙의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에 피어난 안개고목을 떠올렸다.
그 순간, 루빈의 의식은 투흔초원과 안개고목 사이의 까마득한 거리를 초월했다. 이 순간만큼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였다.
“…여긴 길리필드 수목원.”
퓌닉과 길리필드 영감 모두 곤히 잠든 밤, 루빈의 의식은 거대한 안개고목의 나뭇가지를 따라 올라갔다. 근원모를 강한 이끌림이 루빈을 끊임없이 잡아당겼다.
그렇게 마주한 하나의 알. 나뭇가지 끝에 맺혀 있는 로이네크로우 알이 불어오는 바람에 한차례 흔들렸다.
루빈은 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의식 속이었음에도 실재하는 것 같았다. 발아한 까마귀 알이 그를 감지하고 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티나와는 또 다른 연결감이었다. 알 속, 정체불명의 존재의 심장 소리마저 똑똑히 들려왔다.
-라유비아에겐 엘키오, 오스카에겐 셀록이 있듯이.
어느새 암연은 루빈의 의식 옆, 안개고목의가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림자뿐인 두 다리를 장난스럽게 휘저으면서.
-모든 로이네크로우를 하위 종으로 거느리는 암연의 신수야. 수십 번 죽었다 다시 태어나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암연이 다시 일어섰다. 그 순간, 둘은 다시 암흑 공간으로 돌아왔다.
“부화까진 얼마나 걸리지?”
-글쎄.
암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목 빼고 신수만 기다릴 만큼 한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궁금증만은 꼭 풀어야겠다.
-6성에 동반되는 저주가 뭐냐고 물어보려는 거지?
“정확해.”
신수가 특성이라면, 그에 맞는 저주도 있을 터. 베닉은 ‘악몽(惡夢)’, 데이몬은 ‘불면(不眠)’, 킬리언은 ‘혹한(酷寒)’이었듯이.
루빈은 저의 저주가 궁금했다.
-네 저주는, 종말. 네가 텔마흐를 죽이지 못하면 더 이상 세상은 균형을 되찾을 수 없다는 ‘진실’이지.
루빈은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루빈만의 저주가 아닌, ‘암연’의 저주이자 ‘온 세상’의 저주. 루빈이 이를 홀로 짊어지게 되었으니, 저주라고 할 수 있겠지.
“얘기는 여기까지 하지.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어.”
문득 이 대화가 끝나면 이렇게 인격체로서 다시 마주할 수 있을지 루빈은 궁금했다. 그 궁금증을 읽어냈을 텐데도, 암연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루빈은 두 번째 만남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제 막 첫 번째 암연이 6성에 다다랐을 뿐이다. 두 번째 암연이 6성에 오르면 따시 만날 수 있겠지.
이제는 ‘1초의 영원’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돌아가서 얼른 대장장이를 만나고 싶었고, 7성을 향해 질주하고 싶었다.
-잘 가라, 나의 ‘선택받은 자’.
암연은 루빈과 한 발짝 사이를 두고 서서는 덤덤히 배웅했다. 암연의 등 뒤, 어둠만이 가득했던 배경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
암연 또한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루빈의 발밑으로 스며들었다. 그림자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윽고, 루빈이 감았던 눈을 뜨자-
‘돌아왔군.’
거기는 더 이상 암연과 이야기를 나눴던 공간이 아니었다. 살결을 스치는 차디찬 바람. 드넓은 투흔초원 한복판이었다.
휘청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던 루빈 앞으로 블라네와 티나가 다가왔다.
“도련님!”
“루빈!”수저
로이네크로우 모습의 티나가 부리로 루빈을 지탱해주려 했다. 그 순간, 인격체로 마주했던 암연이 루빈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게 암연 전이?’
티나의 부리가 몸에 닿는 순간, 루빈은 자신의 6성 특성이 발현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티나의 암연이 일시적으로 자신의 몸으로 전이되고 있었다.
“티나. 잠깐만, 더 가까이.”
“그래, 나한테 기대!”
티나의 오해에 루빈은 피식 웃었다. 설명은 나중에 해주기로 하고, 일단 티나의 암연을 끌어당겨 보았다.
그런데.
‘…암연만 전이되는 게 아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