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19화 (219/258)

제219화. 라유비아 브리온 (2)

“이제 쉬는 시간도 끝났겠다, 다시 땀 흘릴 때가 왔군.”

캄누이트가 모루를 쓱 쓸어보았다. 조그맣게 일부분이 뜯기긴 했지만, 모루 그 자체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루빈이 하네케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대장장이에게 망치를 돌려줘야 할 때였다.

“그만 증손녀에게 인사하시죠, 하네케.”

“흠, 흠…….”

하네케는 라유비아와 어색하게 눈을 맞추는 중이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들썩이던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라유비아.”

“…네?”

“이제 보니 펠키온을 많이 닮았구나.”

“그런가…요?”

투흔족은 부족장에게조차 높임말을 쓰지 않는다. 라유비아는 배시시 웃는 한편으로 어법에 신경 썼다. 입을 열기도 전에 말을 정돈하느라, 자기도 모르게 눈썹이 찌푸려졌다.

“꿈속에서 ‘오러’가 아빠의 모습을 보게 해줬어요. 내 몸에 검식을 남겨놓기 직전의 아빠 모습이요.”

“…그때 펠키온은 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구나. 그런 걸 보면, 통찰력 면에선 펠키온이 나보다 훨씬 낫단 말이지.”

“……?”

“나는 죽고 나서도 한참이나 황제에 대한 헛된 믿음을 품고 있었거든. 우리 혈통만은 존중해줄 줄 알았단다. 루빈이 날 설득하기 전까진 말이다.”

“…….”

하네케는 증손녀의 머리를 친근하게 쓸어내렸다.

“검이 완성되면 그때 다시 보자꾸나. 여기에 있는 동안은 루빈이 네게 브리온 검식을 가르쳐줄 거란다.”

“알겠습니다.”

하네케는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루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작별 인사가 끝났음을 확인한 루빈은, 모루 위에다 망치를 뒤집어서 세워 놓았다.

휘이이이.

망치에서 손을 떼자, 하네케는 다시 조각조각 잘려 나가며 루빈의 그림자로 흡수되었다. 곧이어 하네케가 내면세계로 돌아왔다는 게 느껴졌다.

“그럼 시작해볼까.”

캄누이트가 망치를 다시 쥐는 순간, 부재했던 그림자가 다시금 생겨났고 그의 눈동자에도 검은자가 돋아났다.

“흐읍!”

멈췄던 무구 제작이 재개되었다.

망치의 그림자와 모루의 그림자의 충돌. 소리 없는 망치질이 대장간을 침묵으로 가득 채웠다. 이따금 작업 중에 내뱉는 캄누이트의 숨소리만이 유독 크게 울렸다.

한편, 대장간 밖으로 나온 나머지 사람들.

그들은 호수를 건너 숲속으로 들어갔다. 검술 수련을 한다 해도 대장간 안에선 할 수 없을 테니까.

체감으로는 여기에 들어온 지도 열 시간 이상 지난 것 같았다. 그런데 하늘엔 여전히 세 개의 거대한 달이 뜬 채 제각각의 빛을 내는 중이다.

“시간 흐름이 확실히 다른 것 같군. 엘키오, 여긴 밤뿐인가?”

“그래, 여긴 영원한 밤의 세계다. 볕이 드는 날 없이 밤하늘뿐이지. 그리고 네 말처럼 여긴 시간 흐름도 달라. 흐름이 느릴 때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본래 세계보다도 앞설 때도 있지.”

엘키오의 이어지는 말에 따르면, 이곳 시간의 흐름은 바닷물의 만조(滿潮)와 간조(干潮)에 비유할 수 있었다.

세 개의 달이 서로 모여들고, 그 크기가 거대해지는 지금 같은 때엔 ‘시간의 밀물’에 해당됐다. 본래 세계보다 훨씬 긴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보내는 몇 주일이 본래 세계에선 몇 시간에 불과할 거다.”

반대로, ‘시간의 썰물’ 때엔, 오히려 본래 세계보다 시간 흐름이 뒤처졌다. 여기서 며칠을 머무는 사이, 자칫하면 바깥은 몇 달 혹은 몇 년이 흘러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의 밀물’인 지금은 루빈에게 굉장히 유리했다. 도구를 제작하기에도, 라유비아를 가르치기에도 시간적 부담이 없었으니까.

“음, 셀록이 말해준 대로네.”

루빈이 셀록을 언급하자, 엘키오의 눈빛이 달라졌다. 셀록도 세상에 나왔으리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터. 다만, 루빈이 이미 셀록을 만났다는 건 뜻밖이었다.

“셀록을 만났나 보군. 그럼 ‘파휘의 마법사’도 알고 있는 건가?”

“오스카, 아니 페르 로렌치니. 걔는 지금쯤 최적의 장소에서 마나의 경지를 끌어올리는 중일걸.”

물론, 페르의 행방에 관해서는 더 자세히 밝히지 않는 루빈이었다.

페르와 라유비아. 둘 다 루빈을 위해 싸우겠지만, 그들을 서로 대면시키려면 충분한 시간이 흐른 다음이어야 한다.

“라유비아, 서둘러야겠어. 얼른 브리온 검술 수련을 시작하자.”

셀록과 ‘파휘의 마법사’의 근황을 전해 듣자 엘키오도 조급해진 것 같았다.

그는 제 머리로 라유비아의 허리를 밀치며 재촉했다. 그에 떠밀려 루빈 앞에 서게 된 라유비아가 멋쩍게 웃었다.

“나도 농땡이 피울 생각 없었거든! 루빈, ‘파휘의 마법사’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빨리 수련 시작하자.”

“저기가 괜찮겠네.”

루빈이 한쪽을 가리켰다. 나무가 듬성듬성 자리 잡은 곳. 운신과 검격을 동시에 수련하기 적당한 장소로 보였다.

루빈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볼품없는 검을 한 자루를 꺼내 라유비아에게 건넸다. 단검이 아닌 장검이었다.

사실, 그게 당연했다. 애초부터 브리온 검술은 전장에서 극강의 위력을 발하는 검술. 게다가 창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만큼, 장검에 입혔을 때 그 위력이 배가된다.

‘어떤 식으로 가르쳐야 할까.’

루빈은 하네케로부터 브리온 검술을 전수받으면서도 자신의 독창성을 가미해 새로운 길을 펼쳤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루빈에게만 허용되는 이야기였다. 하네케가 조언했다.

-라유비아에겐 순연의 브리온 검술을 가르쳐야 할 걸세. 브리온가를 잇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다른 실질적인 이유도 있지.

‘라유비아의 몸 때문이겠죠. 저 아이의 몸은 이미 브리온 검식에 특화된 상태니까.’

-역시 루빈, 자네도 알아봤군.

그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그 몸엔 브리온 검술의 맥이 트여 있었다. 즉 브리온 오러에 알맞게 그릇이 빚어진 상태.

교정해줄 스승은 없었을지라도, 틈나는 대로 몸에 새겨진 검식을 수련한 덕분이겠지.

그래도 아주 험난한 수련이 되진 않을 것 같다며, 루빈은 안도했다.

* * *

“생각보다 늦어지는군요.”

“그러게. 금방 온다더니.”

쿠제와 티나는 극지 장벽의 망루 위에서 꼬박 밤을 새운 상태였다.

고개를 내밀어 초원과 동쪽 산을 내다봤지만, 허공의 어느 틈으로 사라져버린 루빈과 블라네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해 뜬다, 쿠제.”

어느덧 날이 밝아온다.

햇빛을 받자마자 장벽의 골렘들은 얼음이 녹아내리듯 엄중한 경계를 풀어나갔다. 티나가 로이네크로우의 모습으로 허공에서 얼쩡대도 가만히 놔두었다.

“쿠제. 이 둘은 어쩌지?”

이마카룸과 쿤달리트. 두 투흔인은 서로 등을 붙인 채로 주저앉아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깨어난다 해도 완벽히 결박되어 있기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쿠제는 만일에 대비해 투흔인들의 잠에서 깨지 않도록 암연으로 숨결을 틀어쥐는 중이었다.

“도련님이 지시하신 대로 해야죠.”

애초에 루빈은 자신의 귀환이 늦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지시를 내려뒀었다.

해가 뜬 다음에는 다시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릴 것. 그때까지도 자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두 투흔인을 쇄골부족의 영역에 데려다놓으라는 것이었다.

“티나 님, 주변을 탐색해주시겠습니까?”

어쩌면 쇄골부족에서 쿤달리트나 이마카룸을 찾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귀찮은 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오케!”

마침 지루하던 차에 티나는 그 제안을 냉큼 받았다. 그녀는 투흔초원에서 가장 흔한 새로 변신한 다음, 초원의 하늘을 누비기 시작했다.

‘밤새 울부짖던 괴수들도 잠잠해졌군.’

티나가 돌아다니는 동안, 쿠제는 망원경으로 극지를 살폈다. 밤새 망루에 있다 보니 극지의 괴수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들인지 알게 됐다.

가히 지옥과도 같은, 살벌하고 참혹한 괴수들의 범람지. 거대 괴수들 중엔 그 몸집이 성채만 한 놈들도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협곡에서 튀어나온 놈들은 제 영역을 넓히기 위해 저들끼리 목숨을 걸고 싸웠다.

심지어는, 패배한 괴수의 커다란 머리통 하나가 망루 높이까지 튀어 올라왔던 적도 있었다.

극지 장벽이 워낙 견고했으니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다른 장소였다면 그 머리통만으로도 성벽이 무너졌을 것이다.

거대 괴수들의 싸움이 끝나면, 그때부턴 작은 개체들의 축제가 펼쳐졌다. 포식의 시간. 괴수들이 살점과 뼈를 씹으며 내는 와그작대는 소리가 밤새 끊어지질 않았다. 쿠제로서도 끔찍한 경험이었다.

‘음?’

간밤을 떠올려보던 그때.

쿠제의 시야에 무언가 잡혔다. 황급한 날갯짓과 함께 날아오는 새 한 마리.

좀 전 망루를 떠났던 티나였다.

“벌써 쇄골부족의 사람을 발견하신 건가요?”

“아니.”

“그럼요?”

“이쪽으로 그랑버드 하나가 오고 있어.”

그랑버드?

“근데 투흔인들은 그랑버드를 보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어. 정기적인 순찰 비행, 뭐 그런 건가 봐.”

“흠,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긴, 제국군에게 극지의 괴수들이란 늘 동태를 살펴야 하는 과제였다. 티나 말처럼 제국군의 정기적인 순찰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정말로 그랑버드가 오네요.”

저 멀리 거대한 새가 보인다. 처음엔 작은 점이었던 그랑버드는 날갯짓을 반복하며 빠르게 시야의 빈틈을 지워나갔다.

잠시 후에는 장벽에 널찍한 그늘까지 드리우며 그 거대함을 드러냈다.

그우우우우.

그랑버드는 척추조차 진동시킬 만한 육중한 울음과 함께 장벽을 지나치더니, 그대로 극지로 나아갔다. 역시 극지를 순찰하는 건가 싶었는데-

“음?”

쿠제의 시선을 잡아끄는 일이 벌어졌다. 그랑버드가 장벽으로부터 멀지 않은 상공에 멈춰서는 한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망원경으로 살펴보니, 그랑버드에 탑승하고 있던 골렘 네 기가 그랑버드의 등 가장자리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포신(砲身)?’

골렘 네 기가 합심하여 어깨에 짊어진 그것은 분명 커다란 대포의 주둥이였다.

대포를 지상의 괴수들을 향해 겨누는 골렘들. 곧 대포의 꽁무니가 점화되더니, 포탄이 발사됐다.

퍼엉!

“괴수들을 사냥하는 건가?”

“그러기엔 너무 미약한 공격입니다.”

딱 봐도 발사체는 공격용이 아니었다.

지상으로 쇄도하던 포는 상공의 어느 지점에서 폭발했다. 의도적인 폭발. 쿠제는 포탄이 도중에 터지면서 무언가를 방사(放射)하는 것을 포착했다.

바늘? 얼핏 보기엔 그렇게 보였다. 포탄 속에 들어 있던 수많은 바늘들이 폭발로 인해 사방으로 쏘아졌다.

바늘이 예리해 보이긴 했지만, 공격이 될 수 없음은 여전했다. 괴수들에겐 가랑비만큼이나 보잘것없었으니까.

퍼엉!

퍼엉!

같은 방식으로 의문의 바늘들을 방사하기를 수차례. 임무를 끝낸 그랑버드가 선미를 돌렸다. 부대로 복귀하려는 것 같았다.

장벽 가까이 다다를 때쯤, 그랑버드는 급히 하강했다. 쿠제나 티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절차인 것 같았다.

휘우우우우웅.

쿠제와 티나는 그랑버드의 거대한 눈동자에 들키지 않도록 구석에 은신했다. 최대한 존재감을 줄이고, 그랑버드가 멀어지길 기다렸다.

그우우우우우!

스치듯 아슬아슬하게 장벽을 지나치는 그랑버드.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장벽으로부터 멀어져갔다.

“휴, 간 떨어질 뻔했네.”

“티나 님.”

“음?”

“방금 전에 괴수들에게 방사된 바늘을 가져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국군이 괴수들에게 뭘 하고 있는 건지 조사해봐야 할 것 같군요.”

티나는 극지 방향의 난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특정 괴수를 노리고 조준 발사한 게 아닌 말 그대로의 방사였기에, 바늘들은 극지의 바닥 곳곳에도 수두룩하게 박혀 있었다.

티나는 로이네크로우로 변하여 빠르게 지상으로 내려가, 괴수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재빨리 바늘만 움켜쥐고 다시 망루로 돌아왔다.

곧 쿠제가 손바닥 위에 한 줌의 바늘들이 올려졌다. 그걸 본 쿠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단순한 바늘이 아니었다.

바늘 안에 소량의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보아하니 이 액체야말로 그랑버드의 실질적 임무인 것 같았다. 극지의 괴수들에게 이 액체를 투여하는 것 말이다.

문제는 이 액체의 정체였다. 혹시 극지 괴수들의 포악성을 잠재우기 위한 약일까?

그러기엔, 쿠제가 밤새 확인한 괴수들은 너무 포악했다. 하나같이 피에 굶주려 있었다.

차라리 그 반대라 함이 그나마 말이 되었다. 그럼 너무 얌전하지 않도록 일부러 폭력성과 잔혹성을 불러일으키는 약인 건가?

‘하지만 왜?’

왠지 그게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뭐가 되었든 그리 단순한 종류의 이유는 아닐 것 같았다.

또 하나 신경 쓰이는 점은, 북부초원으로 오기 전에 칙명부로부터 제공받은 정보에 이와 같은 내용이 누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칙명부 입장에선 우리가 알 필요가 없는 정보라 배제한 걸 수도 있지만…….’

쿠제는 루빈이 사라진 동쪽의 허공을 바라봤다. 일단은 날이 저물 때까지 도련님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도 루빈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땐 두 투흔인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둘은 그랑버드에서 방사되는 주삿바늘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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