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21화 (221/258)

제221화. 두 개의 검 (2)

“루빈이 들고 있는 저게 ‘비검’이라는 거야?”

“글쎄.”

“아니야?”

“…….”

그들 쪽으로 한차례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잿빛 털을 나부끼며 엘키오는 연무장 가까이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처음에는 루빈이 하네케를 향해 겨누고 있는 저 검, 비검인 줄 알았다. 성능을 확인하겠다며 하네케와의 대련에 나선 거니까.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아도, 검에는 어떤 특별함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라유비아가 쥐고 있는 흑혼검의 고요함이 의심스러웠다. 흑혼검이 보구이고 비검도 보구라면, 필시 ‘검의 울음’이 있어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네케도 루빈 손에 들린 검의 정체를 눈치챈 것 같았다.

“루빈, 그거 비검이 아니잖나?”

하네케는 일주일 전에 대장간에 완성된 비검을 봤던 터였다. 하지만 지금 루빈이 들고 있는 단검은, 외형에서나 완성도에서나 그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비검은 지금 캄누이트의 대장간에 있죠.”

“그럼 갖고 오게. 기다릴 테니.”

“아뇨.”

“음? 그걸로 하겠다고? 비검 성능을 확인하려는 거 아니었나?”

루빈은 대답 대신 하네케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 방향은 캄누이트 대장간. 그러곤 명상하듯 눈을 감았다.

‘대련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는 건가?’

라유비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차 없던 검술 선생 루빈도, 지금만큼은 긴장한 것처럼 보여서 왠지 고소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때.

“엘키오! 이거 봐봐!”

라유비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갑작스러운 흑혼검의 떨림. 그 정도가 너무 거세서 하마터면 검을 놓칠 정도였다. 결국 라유비아는 두 손으로 검을 꽉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검을 꽉 잡아. 놓치면 하네케가 사라질 거야.”

“…으. 알았어. 근데 이거, 왜 이러는 거야?”

“검의 울음이야. 대적해보고 싶은 무기가 근처에 있을 때 보이는 반응이지.”

“루빈이 들고 있는 저 단검?”

“아니, 저건 비검이 아니야.”

그제야 엘키오는 왜 루빈이 대장간을 바라보고 눈을 감았는지 깨달았다. 신수의 오감에 알 수 없는 명징한 기운이 와닿았기 때문이다.

또렷이 느껴졌다. 화살보다 빠르고 마법보다 강한 무언가가, 놀라운 속도로 숲을 가로지르고 있음이.

솨아아아아.

연무장에서 가장 먼 쪽의 나무들부터 크게 휘청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이에 놀란 새들이 일제히 숲 위로 날아올랐다.

“…저게 뭐지?”

라유비아는 점점 거세게 날뛰는 검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저 멀리서 날아오는 희끄무레한 무언가를 보았다.

한편, 캄누이트의 대장간.

아수라장을 연상시킬 만큼 어지러운 내부에 끌끌 웃는 소리가 울렸다.

작업대 앞에 앉아 있는 캄누이트는 방금 전의 상황을 되짚는 중이었다. 엘키오가 라유비아에게 흑혼검을 전해주기 위해 다녀간 이후였다.

막 그림자 망치질을 끝냈던 대장장이의 육체는 잔뜩 벼려진 검과 같다. 비록 시력을 상실한 그일지라도 모든 감각이 곤두선 상태라는 뜻이다.

그 덕분에, 눈으로 보지 않고도 대장간에 일어난 작은 변화도 전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검……?’

루빈이 찾아가기를 미뤄두었던 비검이다. 하네케가 다시 육화하는 그때가 오면, 비검의 진가를 확인해보겠다고 했었지.

그런데 갑자기 그 비검이 둥둥 공중에 떠올랐다. 심지어 검의 상태도 남달랐다. 기압이 올라가고, 고정해둔 연장들이 들썩이는 게 피부만으로 느껴질 정도라면…….

위우우우웅.

이는 분명 검신에 오러가 서렸다는 뜻이리라.

크하하하, 캄누이트로선 크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루빈은 괜히 엄살을 부렸던 거군. 이 검이 자신을 주인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그건 하네케와의 대련을 통해 확인하겠다더니만.

사실, 지금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미 결론은 난 셈이다. 연무장과 대장간의 거리 차이에도 불구하고, 벌써 오러를 발현시키고 있지 않은가.

“검을 부르려는 거겠지?”

비검은 떠 있는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어쩐지 곧장 검의 비행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쾅!

다음 순간, 대장간이 뒤집어질 만한 파공음이 울렸다. 연장들이 바닥에 나뒹구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는 ‘그림자 망치’도 살짝 들썩였다.

스스로 추진력을 일으킨 비검. 그대로 주인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지금.

‘이제 슬슬 비무가 벌어지겠군.’

새삼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졌다. 대륙에 있을 때만 해도 초원 밖으로 나가, 무인들의 검투를 즐겨 봤던 그였으니까.

‘아주 재밌는 싸움이 될 텐데 말이지.’

이곳이 평화지대로 선언된 이후, 이만큼 재밌는 일이 있었던가?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연무장을 좀 더 견고하게 만들 걸 그랬나?’

문득, 그런 불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만들어놓은 연무장이 대충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사실, 벽으로 작용하는 결계만 해도, 웬만한 왕궁 방벽으로 써도 될 만큼 견고했으니까.

하지만 결계를 세울 땐 이런 상황까지 고려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비검을 완전하게 다스리다니. 알았다면 더 견고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설마 연무장이 부서지진 않겠지?’

잠시 휴식을 취하려던 대장장이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잠시 후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네케, 잠시 물러나세요.”

비검이 날아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루빈의 경고에 하네케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아는 루빈은 허풍을 떠는 이가 아니었기에. 게다가 비검에 간단한 귀환 명령만 내린 건 아닌 듯했다.

이윽고, 숲이 요동치며 매섭게 날아드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휘이이이이잉.

번쩍.

달빛 아래 비검이 드러났다. 오러를 품고 있는 비검은 그대로 연무장 한가운데를 향해 날아들었다.

눈으로는 비검을 따라잡지 못하던 라유비아는, 비검이 결계와 충돌한 다음에야 그 존재를 알아차렸다.

지이이이잉.

결계가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저거, 뚫지 못할 텐데?”

“…….”

라유비아는 자신의 경험으로 비추어 단언했지만, 사실 전제부터가 잘못된 말이었다.

저 검은 수련용 검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보구. 더군다나 루빈과 라유비아의 격차도 생각해야 했다.

아니, 그거야말로 결정적인 차이라 해야겠지. 둘 사이 경지의 간극은, 보구와 수련용 검의 간극보다 훨씬 컸으니까.

쩌저적.

비검을 막아내던 결계에 서서히 균열이 일었다. 이제 남은 건 비검의 힘이 소진되거나, 결계에 구멍이 생기거나. 둘 중 하나뿐.

“후우…….”

루빈은 심호흡했다. 지금 비검에 서려 있는 오러는 고작 2성. 거리가 멀 땐 불가능했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니 오러를 최대한으로 주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슬 준비해야겠군.”

비검의 검신에 흑칠의 오러가 한 겹, 또 한 겹 더해지는 걸 바라보며 하네케가 말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결계는 이제 깨질 것이다.

투두두두두.

그 예상처럼 결계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피었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파아아앙!

결국, 결계에 구멍을 내며 연무장 안으로 날아드는 비검. 하지만-

‘아직이야.’

루빈이 확인하고 싶은 건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슈우우우웅!

루빈은 들고 있던 단검을 하늘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그리고 비검으로 하여금 그 단검을 따라붙게 했다.

하네케는 루빈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래서 그 검을 가져온 거군.”

“예. 대장간의 창고에서 얻었습니다. 보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검이더군요.”

슈우우우웅!

그들 쪽으로 다가오던 비검이 경로를 비틀어 수직으로 상승했다. 단검을 쫓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단검을 추월하려는 것이었다. 비검은 엄청난 속도로 단검을 제쳐버렸다. 그러곤 다시 바닥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단검의 검 끝을 겨냥해 수직으로 낙하.

퍼엉!

비검의 검 끝이 루빈이 내던진 단검의 검 끝과 맞닿는 순간. 공중에선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만으로 비검의 격을 가늠한 하네케가 감탄했다.

“허…. 저 정도면 영혼무구의 격이라 해도 좋지 않겠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잘게 쪼개진 단검. 흩날리는 진눈깨비처럼 쇳가루가 떨어져 내린다.

“아쉽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라더군요. 하지만 훗날 한 번 더 개조에 성공한다면, 그땐 영혼무구로 격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루빈과 하네케 사이, 부서진 단검의 쇳가루가 가라앉으며 달빛을 퍼트린다. 비검은 어느새 루빈의 손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제 대련을 시작하시죠.”

루빈은 고개를 돌려 블라네를 바라봤다. 그러자 블라네가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장검 하나를 들고 연무장 안으로 들어왔다.

“장검?”

“이것도 대장간의 창고에서 받아낸 겁니다. 제 비검을 제대로 맛보시려면, 그것보단 이게 나을 겁니다.”

하네케는 블라네가 건네는 장검을 받아들고는 몇 번 휘둘러보았다. 검에 깃든 힘과 균형이 훌륭하다. 역시나 라유비아가 쓰던 연습용 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작품이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시작할까요?”

“얼마든지.”

두 사람의 첫 움직임은 가벼웠다. 검을 간단히 부딪치는 걸 반복하면서, 서로의 기세를 가늠했다. 둘은 서서히 전투태세를 맞춰나갔다.

그러다가 하네케가 눈을 번뜩이며 펼친 공격이 기점으로, 검투의 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졌다. 검격이 매섭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챙! 챙! 챙!

루빈은 피했고, 막아냈다. 그러면서 얼굴엔 미소를 띠었다. 비웃음이나 쓴웃음이 아닌, 희열이 담긴 순수한 미소였다.

하네케가 내면세계에 깃든 이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겨뤄본 두 사람이었다. 둘은 서로를 잘 알았다. 약점과 강점 모두.

하지만-

‘완전히 다르다. 새로워.’

그 검맥과 검결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실제로 검을 맞부딪치는 이 느낌은 생소한 것이었다.

‘이것이 7성 경지의 무인…….’

루빈은 하네케의 검을 음미했다. 꼭꼭 씹었다. 단 하나의 움직임도 허투루 흘리지 않고 온몸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끊임없이 궁리했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지?’

답은 간단했다.

루빈이 6성에 도달한 이후. 그는 ‘암연 전이’라는 특성을 얻었고, 신수를 발아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더 견고하고 풍족해진 암연이다.

‘검이 나를 이끈다.’

암살검가엔 6성부터는 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본연의 검이 곧 그의 검식이었다.

6성이란, 5성까지 유지해온 체계를 뒤엎으며 순간순간의 모든 선택들이 새로운 체계로 자리 잡는 경지였다.

즉, 루빈 그 자신이 그의 검결이었다.

쾅! 쾅! 콰콰콰쾅!

둘은 전력으로 부딪쳤다. 육화에 취한 하네케는 성위의 차이를 생각지 않고, 곧바로 7성의 오러를 발현했다.

그건 루빈도 마찬가지였다. 6성과 4성의 암연. 그리고 4성의 오러. 심지어 ‘파공’과 ‘연파공’만을 위해 단련했던 마나의 환도 아끼지 않았다.

말 그대로의 전력을 다한 싸움이었다.

‘거리를 벌려야 해.’

하네케는 장검의 길이를 이용해 루빈과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이 곧장 그의 움직임을 잡아버리는 ‘그림자 역장’. 그리고 신체를 휘감으며 관절을 노리는 암살검가식 반격까지.

루빈은 하네케의 방식을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

“……!”

움직임을 읽힌 하네케는 높게 들어 올린 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다음, 칼날에 집약시킨 오러를 전방으로 퍼뜨렸다.

그러자 일순간 대지가 크게 뒤틀리더니, 지하의 바위들이 튀어 오르며 루빈에게 향했다.

루빈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튀어 오르는 바닥을 빠르게 밟아가며, 하네케를 향해 쇄도했다.

“……!”

하지만 놀란 쪽은 루빈이었다. 피어오른 먼지 사이로 하네케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찰나 이후, 하네케의 인영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활처럼 튕기며 ‘파공’을 시전하는 루빈. 파공은 하네케의 어깨에 적중했다.

휘우우!

치명상은 아니었다. 충격을 털어낸 하네케가 검을 내지른다. 묵직한 검격이 공기를 가르며 그대로 결계를 때려버렸다.

콰아아앙!

연무장 전체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엘키오. 7성의 오러라면 대륙에도 얼마 없는 숫자 아니야?”

“그래, 죽은 하네케를 포함한다고 해도 채 10명이 안 될 테지.”

“그런데 왜 저 할아버지가 불리한 거 같지?”

아니, 그건 아니다. 물론 라유비아 눈에는 그렇게 보일 테지만.

엄밀히 말해서 싸움을 주도하고 있는 건 하네케였다. 엘키오의 눈에는 보였다. 이 싸움이 끝까지 이어질 경우, 하네케의 승리로 이어질 거라는 것도.

‘물론 깔끔하지 않은 승리겠지만.’

만약 이 검투의 목적이 상대의 목숨을 끊는 거였다면, 하네케 역시 치명상을 각오해야 한다.

‘거기다가 루빈이 ‘핏빛서리’까지 쓴다면… 그땐 아무리 하네케라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겠군.’

물론 비검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한 검투인 데다, 서로를 죽이려는 게 목적이 아니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

엘키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연무장을 모두 부숴대고 있으니 그 힘의 여파가 세 개의 달에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맹약의 힘’이 아직까진 개입하고 있진 않지만, 이대로 둘의 검투가 더 격렬해지면 어찌 될지 몰랐다.

결국엔 세 개의 힘이 나설 것이다. 대장장이 세계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 전에 최대한 이 싸움을 눈에 담아둬, 라유비아.”

엘키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적운의 파수’는 1,000년 전, 700년 전, 400년 전 그리고 200년 전에 각기 다른 ‘적운의 성주’를 만났다.

그들 모두, 지금의 라유비아와는 비교하는 게 실례일 만큼 상당한 경지의 오러를 지닌 자들이었지만.

그 어떤 성주들도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만한 장면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휘몰아치는 공격과 반격. 변칙적인 역공과 집요함.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오러와 감각들.

“…….”

엘키오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캄누이트가 만들어놓은 연무장은 반파(半破)된 상태.

그럼에도 ‘맹약의 힘’이 개입이 늦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자신이 그러하듯, 오러와 암연도 이 싸움을 좀 더 지켜보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두 무인이 펼치는 무의 극은 과연 어디까지일지, 순결한 호기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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