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희생양 (1)
“루빈! 이보다 더한 신고식이 없을 걸세!”
하네케가 소리쳤다. 죽은 대장군이 세상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고식. 또, 새롭게 태어난 ‘로젠탈러 비검’의 신고식이기도 했다.
콰콰콰쾅!
도약한 루빈과 하네케. 공중에서 검이 부딪칠 때마다 빛이 점멸한다.
연무장이 반파되면서 격돌의 영향이 숲에까지 미쳤다. 연무장 가까운 나무들은 태풍을 맞은 것처럼 뜯겨나갔다.
둘은 직감적으로 이번 일격이 대련의 마지막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 마음 같아서는 대장장이 세계 전체를 붕괴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싸움의 끝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휘이이이이.
하네케 주변으로 공기가 소용돌이쳤다. 눈을 부릅뜨며 검을 들어 올렸다. 이 순간, 그의 검결은 전장의 절망 속 수많은 시체 위에서 몸부림치는 생동(生動)이었다.
단 한 번의 휘두름일 뿐이지만, 일곱 겹의 오러를 모두 담아내는 검격이 이어졌다.
솨아아아아아.
루빈은 맞서 달렸다. 하네케의 검격이 내리칠 때 그 역시 비검을 두 손으로 잡고 정면으로 받아냈다.
콰콰콰쾅!
7성의 오러와 4성의 오러. 뿌리는 같지만, 뻗어 올라간 가지는 엄연히 다른 두 브리온 오러의 격돌. 검의 부딪침이 주변의 소리를 모두 집어 삼킨다.
오러의 성위에서는 명백한 차이를 보여도, 루빈은 6성의 암연으로 모든 육체적 감각을 증폭시킨 터였다. 두 팔에 응집한 힘이 하네케의 공격을 거뜬히 버텨냈다.
“……!”
하네케의 눈이 부릅떠진다. 루빈이 노리고 있던 역공을 펼치기 시작된 시점이었다.
사삿.
하네케의 눈앞에서 한순간, 루빈이 사라졌다.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건 비검뿐이다.
‘뒤다!’
사라진 루빈은 하네케 등 뒤에 나타났다. 비검은 홀로 하네케의 검을 버텨내고, 루빈이 일격을 노리는 것. 그것이 루빈이 그리는 대련의 마지막이었다.
실전이었다면 루빈 손에 핏빛서리가 들려 있겠지만, 지금은 주먹만 써야 했다. 암연을 모두 응집한 루빈의 주먹이 하네케의 어깨를 노리고 들어갔다.
“……!”
그러나 이번엔 루빈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검과의 격돌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하네케. 검을 거둬들이는 동시에 역수로 바꿨다. 그러고는 등 뒤의 루빈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둘이 죽음을 각오하는 상황이었다면, 하네케는 비검에 가슴이 베어졌을 것이다. 루빈은 하네케의 검에 관통됐을 테고.
그 누구의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다.
두우우웅!
그러나 둘은 각자의 공격을 마지막 순간에 멈추었다. 하네케의 검 끝이 루빈의 가슴을 꿰뚫기 직전, 루빈의 비검이 하네케를 베기 직전이었다.
“하아… 하…….”
“운 좋으면 둘 중 하나가 죽었을 거고, 운 나쁘면 둘 다 죽었겠지.”
“실전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만족해야겠군요.”
비검과 하네케의 신고식이 끝이 났다.
관람하던 라유비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검투를 오래 기억해두라는 엘키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마지막 일격을 멈추지 않았다고 해도, 둘은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을 거야.”
“왜?”
“암연과 오러가 둘을 떨어트려 놓았을 테니까.”
여긴 세 개의 힘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루빈과 하네케라는 그릇은, 암연과 오러에겐 너무도 소중했다. 자기들 눈앞에서 그게 깨지는 걸 두고 보진 않았을 터.
‘물론,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했다면 오러와 암연과 마나 모두 루빈을 보호하려 했겠지만.’
엘키오는 속마음을 감추곤 화제를 돌렸다.
“이제 캄누이트는 연무장을 좀 신경 써서 만들어야겠네.”
아니나 다를까, 심상치 않음을 느낀 캄누이트가 허둥지둥 이리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실제로 ‘맹약의 개입’이 있었다면, 대장장이도 세 개의 힘으로부터 꾸중을, 심하게는 징계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그 지경까지 가진 않았으니 캄누이트에게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 * *
이후, 2개월 하고도 며칠이 지났다.
브리온 검술 교육에 하네케가 전면으로 나서면서 라유비아의 경지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장장이 세계에 머무는 사이, 라유비아의 오러는 3성 직전까지 도달했다. 2개월 만에 그 정도에 도달한 것만도 대단했지만, 본래 세계의 시간 흐름에서 보자면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래 세계 기준으로는 단 이틀 만에 이뤄낸 셈이었으니까.
“브리온 오러의 검맥이 트여 있었고, 무엇보다 너와 하네케 덕분인 거지.”
루빈과 엘키오는 새로 만들어진 연무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덕진 곳 아래에 위치한 돔 구조 연무장. 루빈과 하네케의 대련이 끝나자마자 캄누이트가 착수하여 완성한 건축물이었다.
똑같은 불상사를 겪지 않으려 캄누이트는 상당히 공을 들였다. 심지어는 하네케를 통해 내구성 검증도 마쳤다.
유리처럼 보이는 돔은, 자세히 보면 격자무늬로 이루어졌고, 이전보다 훨씬 강대한 결계를 품었다.
“내가 몇 번을 말했느냐! 그 순간에는 상단이 아닌 하단을 공략했어야 하는 거다.”
“어제는 상단을 노리라면서요!”
“어제와 오늘 상황이 똑같아 보이느냐? 어제는 블라네가 이쪽에서 이렇게 공격해왔는데, 방금 전 대련에서는 저기서 이렇게 공격해왔어!”
“와, 할아버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어요?”
“일주일 전에 네가 블라네와 했던 대련도 되짚을 수 있거늘, 지금 고작 그것에 감탄할 때냐?”
지금, 그곳엔 하네케와 라유비아가 막바지 수련에 열중이었다. 수련을 함께하면서 둘은 상당히 가까워졌고, 티격태격하는 때도 늘어났다.
일어나자마자 하네케에게 검을 배운 뒤 블라네와 대련을 하는 것. 그게 최근 라유비아의 일과였다.
아직까진 블라네가 압도하고 있지만, 당장 5년 뒤엔 어찌 될지 몰랐다. 그만큼 라유비아의 성장세는 대단했다. ‘선택받은 자’의 재능이란, 결코 평범한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엘키오가 루빈을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블라네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겠군. 언젠가 그 아이에게도 이 빚을 갚도록 하지. 그나저나 블라네는 어디에 있는 거지?”
“대장간에 갔어.”
“아, 드디어 본인의 무기를 받을 차례로군.”
일전에 캄누이트에게 들은 적 있었다. 장전된 탄환을 발사하는 무기라고 했었지. 오러나 마나가 아닌, 암연만을 매개로 한 원거리 무기라고.
대륙의 유명 대장장이 중엔 오러나 마나를 이용한 탄환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암연만은 예외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에게 암연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미지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루빈이 임무의 첫 번째 동료로 블라네를 골랐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블라네는 하밀이나 쿤과는 달랐다. 무기에 따라 그 능력이 경이로워질 수도, 평범해질 수도 있었다.
“블라네의 무기가 완성되는 대로 돌아갈 거야.”
“이제 이계의 대장장이한테 볼일은 끝난 건가. 흑혼검, 비검, 그리고 블라네의 무기. 아 하나 더 있었지. 그 팔찌도.”
그러면서 엘키오의 눈길이 루빈의 팔목으로 향했다. 그사이 루빈에겐 ‘글레이튼의 팔찌’ 말고도 또 하나의 팔찌가 추가되어 있었다.
‘캄누이트가 팔찌 이름을 ‘릴리크 팔찌’라 지었다고 했지.’
엘키오는 팔찌의 정확한 용도를 몰랐다. 어째서 이름에 제국의 이름이 들어갔는지도.
비검 제작 이후 만들어진 이 팔찌는 테두리엔 독특한 빛깔이 은은하게 흘렀고, 팔찌 가운데에는 반투명한 막이 씌워져 있었다.
팔찌를 만들기 위해, 루빈이 건넸던 재료는 1급 마적석. 카포티니에서 있었던 장교육성위 시험을 통해 얻었던 마적석 두 개 중 남은 하나였다.
‘이게 지금 대륙의 최상위 마적석입니다.’
‘다른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는 동급의 마적석을 찾으려는 거군. 흠, 그 정도 마도구야 뭐, 간단하지.’
‘릴리크 팔찌’는 4일 만에 만들어졌다. 팔찌의 능력은, 1급 마적석을 찾아내는 것.
마적석을 인식했을 때, 팔찌의 반투명한 막에 변화가 나타나는 방식이었다. 심지어 팔찌와 떨어져 있는 거리를 색으로 구분하고, 방향까지 가리킬 거라 했다.
다만, 1급 마적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루빈과 같은 황족이 아닌 자는 팔찌를 발현시킬 수 없었다.
‘과연, 황궁이 아닌 장소에서 ‘릴리크 팔찌’가 반응할 일이 있을지.’
루빈은 가만히 생각했다.
1급 마적석이 매장되어 있는 장소나 물건. 그건 그 자체로 황궁의 관심사와 중요도를 드러내는 척도였다.
텔마흐를 제거하려는 루빈에겐, 가로채거나 무너뜨려야 할 목표물이 되겠지만.
“루빈. 이곳을 떠난 뒤, 네 계획을 알려줄 수 있겠나?”
넌지시 물어오는 엘키오. 루빈은 되물었다.
“내 어떤 계획이 궁금한 거지?”
“넌 황제의 임무로 여기에 왔다고 했지. 브리온 오러의 발현자를 찾아내고, 그를 잡아가는 것 말이다.”
오러의 발현자는 바로 라유비아였고, 당연히 라유비아를 제국에 넘길 생각 따위 없었다. 이는 엘키오 또한 알고 있었고.
엘키오가 궁금한 것은, 루빈의 대처 방법이었다. 어쨌거나 황제가 납득할 만한 결과물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루빈은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라유비아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설 것이다.”
“나설 것이다? 이미 정해져 있는 건가?”
“아니, 아직까진 내가 그려본 그림일 뿐이지. 내 예상대로라면 투흔인 중에 라유비아를 대신할 자가 있을 거 같거든.”
라유비아를 대신해 제국의 심판을 받을 투흔인? 순간 엘키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이 있었다.
대족장 이냐키투.
투흔의 바람 이마카룸.
그리고, 투흔의 불꽃 쿤달리트.
그래서 엘키오는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루빈의 의중에도 그들이 있는지를 알아봤다.
“그건 말해줄 수 없어.”
루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엘키오, 너한테 중요한 건 그 문제가 아닐 텐데. 라유비아가 어느 정도 성장해서 하늘의 성이라는 게 나타나면, 너흰 그대로 초원을 떠나야 할 거야.”
엘키오는 루빈의 우려에 동의했다. 엘키오는 라유비아의 심성을 잘 알았다. 희생할 자가 누가 되든 간에, 라유비아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난리를 피우겠지. 그냥 저가 끌려가 죽겠다면서.”
‘적운’이 오면, 라유비아를 데리고 투흔초원을 떠나는 것. 엘키오는 그게 라유비아를 살리는 길이라는 걸 인정했다.
다행히 이곳에서 검의 경지를 굉장한 속도로 끌어올린 터라, 라유비아의 적운이 그들 앞에 나타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저기, 블라네가 오는군.”
때마침 대장장이에게서 무기를 수령한 블라네가 보였다. 이제 초원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 * *
장벽의 동쪽 망루.
의식을 잃은 두 투흔인을 앉혀놓고, 쿠제와 티나는 루빈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티나 님, 해가 지려면 두 시간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루빈이 안 돌아오면 저 둘을 쇄골부족 영역에 데려다 놓으라는 거지? 그다음에 우린 철수해서 루빈을 기다리면 되고.”
그게 루빈의 지시 사항이었다. 다만 쿠제는 철수 후에 느긋하게 루빈을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아침에 목격했던 그랑버드의 비행, 그 그랑버드에서 방사됐던 수많은 주사기들.
제국의 비밀스러운 극지 활동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에 관한 정보를 모아둘 생각이었다.
“어?”
갑자기 티나가 동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쿠제는 고개를 내저을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거짓말일 테니까.
티나는 나타나지도 않는 루빈으로, 똑같은 장난을 열 번 넘게 반복했던 터다. 처음엔 놀라며 속았던 쿠제도 이쯤 되니 더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까아아아아악.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쿠제의 귓가에 와닿는 건 로이네크로우의 울음소리. 티나가 아닌 또 다른 로이네크로우, 즉 오호스였다.
“오호스도 자기 주인을 발견했나 보네?”
티나가 한쪽을 가리켰다.
쿠제는 황급히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며 확인에 나섰다. 동쪽 산의 어귀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오는 중이었다.
제일 먼저 루빈과 블라네가 보였고, 라유비아와 늑대도 모습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라유비아의 변화가 눈에 띄었다. 어쩐지 득의양양했고, 손에는 못 보던 검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못 보던 사람이 하나 더 있다. 풍채가 심상치 않은 백발의 노인.
그 노인은 쿠제가 망원경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씩 웃었다. 마치 이전부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때, 기다리던 루빈의 전음이 이어졌다.
-늦지 않게 도착했네.
-돌아오셨습니까! 도련님.
-쿠제. 일단 티나와 오호스를 통해 장벽을 내려와. 이마카룸과 쿤달리트도 함께.
-이제 어디로 움직이실 건가요?
-일단, 대족장부터 만나봐야 해.
-알겠습니다. 마침 보고드릴 사안도 있습니다. 제국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거든요.
루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텔마흐가 슬슬 움직이려나 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