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23화 (223/258)

제223화. 희생양 (2)

“쿤달리트랑 이마카룸이잖아!”

티나와 오호스가 기절한 두 투흔인을 장벽 아래로 옮기자, 라유비아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여기서는 이틀이 지났을 뿐이지만, 라유비아에겐 3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엘키오는 라유비아를 살짝 뒤로 끌어내며 진정시켰다.

“라유비아, 둘한테서 떨어져. 쇄골부족 영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깨우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알았어. 안 깨울게.”

라유비아는 두 투흔인과 루빈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들은 터였다. 루빈이 쿤달리트를 속였고, 이마카룸과 일전을 치렀다는 것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두 사람을 깨워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루빈과 약속했던 것이기에 참는 수밖에 없었다.

피이이이이잉.

그때, 티나가 새롭게 변신했다. 두 투흔인을 한꺼번에 옮길 수 있도록 코끼리로 변신한 것이다.

옆에 있던 쿠제가 고개를 뒤로 꺾어 위를 올려다봤다. 쿤달리트와 이마카룸을 코끼리 등에 올리려면 힘깨나 들겠다고 생각하면서.

“…소나 말 정도면 충분했을 텐데 말입니다.”

“뭐래? 뭐든 클수록 좋은 거거든.”

라유비아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깡충깡충 뛰었다.

“와, 정말이잖아! 환혈족이라더니.”

“…투흔족 꼬마! 뛰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어라.”

“넷!”

티나가 코끼리 코를 살살 휘저으며 주의를 주자, 라유비아가 힘차게 대답했다.

쇄골부족 영역에 접어들면 다시 다른 생물체로 변할 테지만, 그 전까지는 라유비아도 태우고 이동하기로 했다.

티나가 환혈족이라는 걸 밝힌 것처럼, 라유비아가 ‘선택받은 자’, 그중에서도 ‘적운의 성주’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단, 진실의 공유는 루빈이 허락하는 정도에서만 이뤄졌다. 루빈은 서로 알아야 할 것들만 알도록 조절했다.

“…아까 보았던 노인이 그 유명한 대장군 하네케였다니.”

루빈 곁에서, 감격스럽다는 듯 말하는 쿠제.

“로이넨 저택에서 가주님을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육화된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분은 너랑 티나에 대해서도 잘 알아. 내 안에서 함께 지켜봐 왔으니까.”

“말하자면 숨은 동료였군요.”

루빈은 피식 웃었다. 라유비아가 흑혼검을 쥐고 있지 않은 지금, 하네케는 루빈의 내면으로 돌아간 상태. 내면에서는 그 표현이 만족스러운지 하네케의 웃음이 길게 이어졌다.

정식으로 소개해주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 당장은 따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쿠제, 아까 하려던 얘기를 계속해 봐. 제국의 수상한 움직임이라고?”

이윽고 쿠제의 보고가 이어졌다. 장벽 너머 극지의 괴수들. 그랑버드. 주사를 통해 투여된 미지의 약물에 관하여.

“흠…. 극지의 괴수들에게 뭘 주입하고 있는 거지?”

루빈은 쿠제에게서 주삿바늘을 전해 받았다. 가만히 들여다보았지만, 눈으로는 알아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티나의 보고에 따르면, 일대의 투흔인들은 그랑버드의 비행을 목격하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고 했다. 그랑버드의 활동이 지속적으로 꽤 오랫동안 이뤄져 왔다는 뜻이리라.

다행히 그 추측은 라유비아가 확인해줄 수 있었다.

“맞아, 일주일에 한 번씩 그랑버드가 극지로 넘어가서 뭔가를 뿌려.”

최초의 활동은 4년 전. 그때를 시작으로, 그랑버드는 1주일마다 나타나 장벽을 넘나든다고 했다.

불안해진 투흔족을 대표하여 대족장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돌아온 제국군의 대답은 간단했다.

극지 괴수들의 포악성을 통제하는 방편이라는 것.

투흔족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애초부터 그들에겐 진상 공개를 요구할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진상을 조사할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루빈. 이건 가볍게 넘길 사항이 아닌 것 같군.

내면의 하네케가 말했다.

-제국 군사력의 핵심인 그랑버드일세. 내가 죽고 나서 달라졌을지 몰라도, 그때까지만 해도 그랑버드 운용은 대장군부의 권한 밖이었어.

운용의 권한은 오직 황궁에 있었다. 정확히는 황궁의 요직 ‘거조통제관’과 황제에게.

그래서 어떤 작전이나 훈련을 위해 그랑버드를 투입하고자 한다면, 대장군조차 황궁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었다.

-그만큼 귀한 몸일세. 그런 그랑버드를 매주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면 이게 제국에게 얼마나 중대한 일일지, 가늠이 되나?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체 왜?

‘괴수들의 잔혹성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명분은 뭔가 수상쩍은데.’

제국의 답변이 맞든 틀리든, 투흔족에겐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극지 괴수들의 잔혹성이 4년 전을 기점으로 위험 수준에 도달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건 그것대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랑버드를 움직이느냐는 의문점이 남는 것이다.

“정말로 극지 괴수의 잔혹성을 다스리려는 거라면, 약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충분할까요? 국경 제국군 전력을 강화하거나, 장벽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일도 함께 진행됐어야 할 텐데요.”

쿠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제국은 장벽의 증축은커녕, 그곳을 경비하는 골렘의 숫자조차 증원하지 않았으니까.

“쿠제, 망루에서 밤을 보내 봐서 알겠지. 괴수들 상태가 어땠지? 약을 주입받고 나서 말이야.”

쿠제는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느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포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물론 양처럼 온순해지길 기대할 순 없겠지만요.”

“라유비아, 네 생각은? 그랑버드가 나타나기 전과 비교해서 괴수들이 크게 달라진 것 같아?”

“다섯 부족이 돌아가면서 장벽의 상태를 살피는데, 그 누구한테도 괴수들이 착해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어.”

“흠…….”

엄밀하게 말해, 극지에서 그랑버드가 벌이는 수상쩍은 활동은 루빈에게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당장 자신을 방해하는 것도, 암살검가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여기 북부초원에 온 목적을 거의 다 이룬 루빈이었다. 이계의 대장장이를 만나 원하던 바를 얻은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브리온 오러를 추적하라는 황제의 과업인데, 그에 관해서도 계획이 다 세워져 있었던 터.

‘하지만…….’

루빈은 판도를 더 넓게 바라봤다.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린 텔마흐. 그의 앞으로의 행보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겠지.

‘뭘 준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번 일엔 텔마흐의 공력이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다는 거지.’

놈이 공을 들이고 있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방해할 이유는 충분했다.

-쿠제.

루빈은 쿠제에게 전음을 보냈다.

-예, 도련님.

-현재 부르소는 어디에 있지?

블라네의 로이넨서, 부르소. 현재 그는 루빈의 지시에 따라 본가에 들러 ‘그림자 역장’을 터득하고, 북부초원 접경의 한 도시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의 소재를 파악한 루빈이 지시했다.

-마침 잘 됐군. 너랑 티나는 내가 시간을 정해주면 부르소를 만나.

-뭘 하면 될까요?

-접경의 군영도시들을 탐문해. 특히 그랑버드가 착륙해 머무는 군영도시가 있을 테니까, 그쪽은 특히 신경 써서 살피도록.

더 깊숙이 파고들기 위해서는 면밀히 살피는 것부터 해야 한다. 루빈이 움직이는 건 그다음이었다.

‘일단은 여기부터 매듭을 지어야지.’

날이 밝아올 무렵, 루빈은 쇄골부족의 영역에 들어섰다.

듬성듬성 펼쳐놓은 투흔푸 사이로, 루빈과 라유비아가 앞서 걸었고 블라네와 엘키오가 뒤따랐다.

“라유비아! 장벽 갔다 오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린 거야? 그나저나 쿤달리트는?”

투흔푸 입구를 들어 올리며 나온 투흔인들이 라유비아를 발견하곤 소리쳤다. 그러면서 경계하는 눈으로 루빈을 쳐다봤다.

“아, 쿤달리트? 음, 그러니까…….”

거짓말이 서툰 라유비아가 붙들려 머뭇거리자, 루빈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라유비아. 서둘러. 대족장을 뵈어야 하니.”

그렇게 라유비아가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루빈, 빠르게 대족장의 투흔푸로 나아갔다.

‘깨어있군.’

투흔푸 안,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집중하는 대족장의 존재가 느껴졌다. 입구를 들추기에 앞서, 라유비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족장님.”

“라유비아? 돌아온 게냐?”

“예, 돌아왔어요.”

“들어오거라.”

안으로 들어가자, 특유의 매캐한 연기가 또다시 시야를 가로막았다.

“…….”

연기를 가르며 다가오는 인영에, 대족장 이냐키투는 눈에 힘을 주었다. 라유비아와 루빈은 있는데, 같이 떠난 쿤달리트가 보이지 않았으니.

“루한 멜라스, 고고학 탐사가 벌써 끝난 겁니까?”

“…….”

“쿤달리트는 안내만 하고 돌아오라 했거늘, 어찌 늦나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오늘 밤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려 했지요.”

그때.

퍼드덕! 퍼드덕!

이냐키투는 커다랗게 울리는 날갯짓 소리를 들었다. 그의 투흔푸 뒤쪽이었다. 이냐키투가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그쪽을 바라보자, 루빈이 말했다.

“쿤달리트입니다. 의식을 잃은 상태지만 죽은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절한 겁니까? 장벽에서 무슨 사고라도 당했습니까?”

이냐키투가 라유비아에게 손짓했다. 다리가 성치 않은 자신을 일으켜달라는 것이었다. 그 뜻을 알아차린 라유비아가 빠르게 다가갔다.

“라유비아, 날 데리고 가서 저길 들춰보거라.”

“예, 대족장님.”

라유비아가 천막의 뒤쪽을 걷어 올리려는데, 엘키오가 다가와 도와주었다.

“흐음.”

엘키오를 바라보는 대족장의 눈에 놀라움이 담기는 것은 당연했다. 제아무리 짐승이라지만,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몸체가 이리도 커질 수 있단 말인가.

“허……!”

천막이 걷어 올라가는 동시에, 이냐키투 입에서 심각한 탄성이 울렸다.

거기엔 쿤달리트만 쓰러져 있지 않았다. 그와 나란히 누워 있는 이마카룸도 보였다.

“이마카룸이 왜 여기에?”

그 순간 이냐키투는 등 뒤가 오싹해졌다. 이마카룸이 누구인가. 제국이 쫓고 있는 중범죄자다.

그런데 등 뒤에는 다름 아닌, 황궁에서 파견된 고고학자가 서 있지 않나.

“수습할 필요 없습니다. 이마카룸은 제가 데려온 겁니다.”

“…그, 그게 무슨.”

“이냐키투, 잠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저 둘은 몇 시간 후에 깨어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야기를 말입니까.”

“지금부터 저와 나눌 이야기를 저 둘에게도 전해주시죠.”

고개를 끄덕인 이냐키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사이, 엘키오와 라유비아가 기절한 두 사람을 투흔푸 안으로 끌어왔다.

루빈과 이냐키투가 마주 앉자, 라유비아가 둘의 눈치를 살폈다.

“나랑 엘키오는 이제 자리를 피해줘야겠지?”

“그럴 필요 없어.”

라유비아가 들어서는 안 되는 대화였지만, 루빈에겐 다른 방법이 있었다. 이냐키투도 오히려 그 방식을 선호할 것 같았다.

“이냐키투. 중요한 대화이니, 제 내면세계에서 하시죠.”

잠시 후.

제안에 응한 이냐키투가 눈동자를 통해 루빈의 내면에 진입했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걸어 나가자, 곧바로 루빈이 보였다.

‘며칠 전과 똑같네. 설원에, 탁자에, 카포닐리아라는 음료수까지.’

모든 게 똑같았다. 그사이 세 번의 밤이 지나갔을 뿐.

‘뭐지?’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냐키투는 의자에 앉기에 앞서 내면세계의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지난번 루빈은 자신의 내면세계의 상태를 확인해달라고 했고, 이냐키투는 솔직한 진단을 내렸던 터였다. 이 내면세계는 3년 안에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이냐키투는 숨을 턱 내뱉었다. 고작 며칠 만에 이런 극적인 변화가 가능하단 말인가? 지금 루빈의 내면세계는 너무나도 견고했다.

“루한 멜라스. 장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꽤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라유비아에게도.”

“라유비아요?”

루빈은 대답 대신 눈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이냐키투가 의자에 앉았고, 둘은 마주 보며 카포닐리아를 홀짝였다.

“투흔인이 아닌 저는, 거짓말에 꽤 능합니다.”

“…내면세계의 불안정한 상태가 거짓말이었다는 겁니까?”

“아니요, 방법을 찾아 불안정성을 잡았을 뿐입니다.”

“그러면 거짓말에 능하다는 건 무슨 뜻으로?”

“저번에 대족장이 말하길, 퇴치당한 어느 마령의 말을 엿들었다고 하셨죠. 한 인간의 내면세계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웬 노년의 무인도 함께 있었다고.”

이냐키투는 직감적으로 루빈의 다음 말을 예상했다. 그땐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은 맞았던 거구나.

루빈은 말로 대답하는 대신, 등 뒤로 하네케를 등장시켰다.

스스스슷. 그러나 하네케는 안개 속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냈을 뿐, 곧바로 사라졌다.

“혹시라도 앞으로 마령을 만나게 된다면, 놈이 저에 대해 묻는다면, 꼭 제 말을 전해주십시오. 얼마든지 다시 덤비라고.”

“…당신, 황궁에서 보낸 고고학자가 아니었던 거군요.”

루빈은 부드럽게 웃었다.

“예, 저는 황실에서 파견한 제국감찰관입니다.”

놀란 이냐키투가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 초원을 벗어난 적 없는 그였지만, 고고학자와 제국감찰관의 차이를 모를 리 없었다.

제국감찰관, 그건 너무나 무서운 직책이었다. 오직 황제만이 임명할 수 있는 자들. 그제야 그는 어째서 수혈인 성주 네르하임이 이자를 조심스러워했는지 이해됐다.

“설마 이마카룸 때문에?”

“아닙니다.”

루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어지는 루빈의 말에 이냐키투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마카룸이 아니라, 라유비아 때문입니다.”

“라유비아?”

“라유비아는 브리온 오러의 발현자입니다. 황제는 그 오러를 탐탁지 않아 하고요. 제국감찰관으로서의 제 임무는 브리온 오러를 추적하여 발현자를 데려가는 것이지요.”

이냐키투는 털썩 의자에 앉으며 이마를 짚었다. 대족장도 라유비아 몸에 새겨진 그 검식의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누블라와 제국군 장교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 그게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지금, 라유비아를 압송하겠다는 걸 통보하는 겁니까, 루한?”

“아뇨. 저는 선택을 제안하려는 겁니다.”

“선택?”

“여러 가지 이유로, 저 역시 라유비아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진 않거든요. 다만 라유비아를 대신하여 다른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루빈의 머릿속에, 희생양이 되기를 자처하는 한 투흔인의 얼굴이 그려졌다.

‘물론 누가 되든, 정말로 희생되는 일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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