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25화 (225/258)

제225화. 작전명 일몰

네르하임은 히클리온 성주가 보낸 공문을 두 번 더 읽었다. 하지만 문서에 나와 있는 사실만으로는 궁금증이 증폭되기만 했다.

-약물의 효과를 확인하는 대대적인 군사 작전이 진행될 것이다. …작전은 대장군이 지켜보는 앞에서 치러진다.

문단과 문단 사이엔, 소수 인원만 짐작 가능한 맥락이 묵음(黙音)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네르하임은 부관을 호출했다.

“히클리온 성주를 뵈러 갈 것이다. 통신석으로 미리 말씀 드려.”

네르하임이 일어나자, 의자 역할을 하던 보아뱀이 빠르게 똬리를 헤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보아뱀은 부관을 지나쳤고, 이제는 익숙해질 만한데도 부관은 자기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이후, 네르하임은 투흔마를 몰아 히클리온 성으로 향했다. 히클리온은 히베르다드와 인접한 군영도시. 서너 시간 만에 도착할 거리였다.

‘군영도시’라는 표현답게, 히클리온은 도시이자 군영이었다. 도시 구성원 대다수가 제국군의 병사들이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도시의 상업과 문화력이 유지되는 형태였다.

드넓은 북부초원을 접하여 이런 군영도시가 아홉이나 포진해 있었고, 아홉 군영도시는 셋씩 묶어서 각 사령관이 다스렸다. 이것이 북부 1, 2, 3군단인데 히클리온 성주의 직책은 북부2군단장이었다.

“군단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리 연락을 받은 부관이 네르하임을 정중히 맞이했다. 이는 당연했다. 투흔마 보급을 담당하는 네르하임의 직책은 그만한 존중을 받을 만했으니까.

더군다나 그녀는 이전에도 여러 번 군단장과 독대를 해왔던 터였다.

“오랜만이군, 네르하임.”

지긋한 장군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자신을 향해 군례를 올리는 네르하임에, 간략한 손짓으로 받았다.

북부2군단장, 덤프.

현재 제국엔 열일곱 명의 군단장이 있었고, 덤프는 그중 하나였다. 바싹 깎은 흰머리에 얼굴 곳곳으로 상처가 선명했다.

가장 도드라지는 건 적갈색의 안대였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볐다는 걸 말해주는 영광의 상처.

“공문을 받고 바로 달려온 모양이지?”

“예, 덤프 장군님. 아무래도 정보의 격차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 당연히 그러겠지.”

덤프 장군은 네르하임에게 의자에 앉으라며 손짓했다. 그 역시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기고는, 익숙한 동작으로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안대와 똑같은 적갈색 담뱃잎이었다.

뻐끔뻐끔. 입 밖으로 내뱉는 담배 연기가 제법 독해, 네르하임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네르하임. 자네가 그 공문을 받았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나? 자네가 이번 작전의 집행부대로 배속됐다는 뜻이야.”

“이번 작전… 그러니까 작전명 ‘일몰(日沒)’ 말이군요.”

공문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작전명 ‘일몰’이라고. 여느 작전명처럼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그래, ‘일몰’ 작전. 10년 전에 계획이 수립됐고, 7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작전이지.”

“장기 작전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그랬군요. 어디서부터 내려온 작전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작전을 살피러 대장군께서 직접 온다고 쓰여 있네. 짐작되지 않나?”

“…황궁이군요.”

덤프 장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푹 내뱉었다.

황궁에서 내려온 ‘일몰’ 작전은 당연하게도 비밀리에 진행됐다. 정보는 소수에게만 공유됐고, 작전의 주축 부대는 여기 북부2군단이었다.

네르하임은 추측했다.

‘북부2군단이 주축이라면… 투흔족, 북부초원하고 관련이 있다는 거잖아.’

사실 북부 3개 군단의 기지는 모두 북부초원에 접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비슷하게 보아서는 안 됐다.

제각기 다른 군사적 목표를 지닌 것이다.

북부1군단과 북부3군단은 남쪽으로 검을 겨눈다. 그들의 군사적 목표는 동북부의 왕국들. 언제든 남하하여 왕국을 밀어버릴 수 있다는, 일종의 위협 장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투흔족은 결집하지 않고 흩어져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을 압박하기 위해선 많은 병력이 필요치 않았다. 1개 군단이면 족한 것이다. 그마저도 투흔인보단 장벽의 괴수들에 대비한다는 의미가 강했다.

‘약물, 북부2군단, 초원.’

개념을 늘여놓고 연결고리를 찾던 네르하임. 순간적으로 무언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려운 유추는 아니었다. ‘약물’과 ‘초원’을 연결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으니.

“장군님. ‘일몰’ 작전은 장벽 너머 괴수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랑버드의 특수 활동 말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랑버드가 장벽 너머로 넘어가 괴수들을 향해 분사하는 주삿바늘.

그랑버드의 특수 활동에 대해서는, 네르하임 역시 오래 전부터 파악하고는 있었다. 다만 투여하는 약물이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는 알지 못했다.

“일전에 제가 여쭤봤을 때 장군께선 ‘포악성을 잠재우는 약’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름대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아 그녀 목소리에 힘이 붙었다.

“그러면 이번 작전은, 괴수 일부를 장벽 안으로 진입시켜 그 포악성의 정도를 가까이서 확인하려는 겁니까?”

“뭐?”

덤프 장군의 노골적인 비웃음. 큰 목소리로 한번 웃어젖힌 뒤, 장군은 담배를 눌러 껐다. 그러곤 또다시 담배를 말아 불을 붙였다.

“포악성을 잠재운다… 투흔 놈들도 그런 엉터리 말은 믿지 않을 거라 봤는데, 자네가 믿고 있었다는 건가?”

“아니었군요.”

“당연히 아니지! 누굴 위해서 놈들의 포악성을 죽인단 말인지?”

“…….”

어차피 장벽에는 골렘만 있을 뿐, 제국군 병사는 단 한 명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투흔 놈들을 위해 괴수의 포악성을 다스리는 약을 만든다? 이거, 투흔 놈들 식으로 말하자면, 오크 똥구멍 같은 소리로군.”

“…그럼 그랑버드에서 분사하는 약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거? 그걸 말해주려면 일단 지도부터 봐야겠는데.”

덤프 장군이 끙,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책상 뒤로 돌아가더니 벽면 상단으로 둘둘 말아진 지도를 펼쳤다.

촤라라라락.

대륙 전도였다. 입에 두툼한 담배를 꼬나문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도상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투흔초원이 있는 동북부가 아닌, 서부의 어딘가였다.

“어디에 있더라, 어디에 있나… ‘카포티니’가.”

카포티니? 대륙 서부, 니스 왕국에 속한 마법사 도시?

“아, 여기 있구나.”

마침내 카포티니를 찾아낸 장군의 두꺼운 손가락이 지명(地名)을 덮었다. 그렇다면 약물은 카포티니와 연관이 있다는 건가?

덤프 장군의 손가락이 카포티니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애초부터 카포티니는 ‘그곳’을 짚어내기 위해 찾았을 뿐인 모양이다.

카포티니로부터 살짝 옮겨진 장군의 손가락. 그걸 본 네르하임이 조그맣게 말했다.

“트레스덴이라면…….”

지명 자체보다는, 그곳에 위치한 감옥 때문에 유명한 곳이 아니던가. 바로 ‘협곡 감옥’ 말이다.

“이제 감이 좀 잡히나? ‘협곡 감옥’과 투흔을 잇는 연결고리 말일세.”

“거기라면, 이마카룸이 갇혀 있는 곳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다시 씩 웃는 덤프 장군.

네르하임은 추측을 정정했다. 보아하니 이마카룸과 약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 * *

“루한, 눈속임용 오러는 언제부터 알려주실 겁니까?”

쿤달리트의 물음에 루빈이 대답했다.

“오늘 저녁부터. 2주일이면 가능할 겁니다.”

다행히 쿤달리트는 투흔의 오러를 발현할 수 있는 자였다. 경지는 이마카룸에 비할 바는 아니라지만, 어쨌거나 오러의 환을 지녔다면 시간은 훨씬 단축된다.

게다가 라유비아가 흔적을 남겼던 그 수준이라면, 2주일이면 충분했다.

“2주일 동안 브리온 검술을 터득하고 함께 히베르다드 성으로 이동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마카룸, 너는 라유비아에 집중해. 비밀을 지키고.”

“…….”

루빈은 두 사람을 놔두고 언덕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이마카룸이 그를 뒤따라왔다. 조금은 무례하게 루빈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웠지만, 그 태도가 거칠진 않았다.

“뭐지?”

“…….”

“말해.”

“…루한, 부탁이 있다.”

이마카룸이 고개를 숙였고, 루빈은 그 부탁이 무엇인지 기다렸다. 쿤달리트 대신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달라는 부탁 같은 건 곤란한데.

“나도 알고 있다. 쿤달리트가 희생하는 것만이 투흔과 라유비아를 지킬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저놈을 데려가지 말라고 부탁하진 않겠다. 다만, 혹시라도 너에게 그럴 권한이 있다면-”

그 순간, 이마카룸은 제 몸에 어떤 변화를 주었다. 처음에 루빈은 그가 기습적으로 수인화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걸 곧 깨달았다.

스스스스슷.

그의 우람한 팔뚝부터 시작해서 상체 곳곳에 선명한 붉은 점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

“부디 쿤달리트가 ‘협곡 감옥’에 가지 않도록 해줘.”

“협곡 감옥엘?”

“그래, 내 몸에 난 이 흔적들 보이냐? 5년 전에 수감된 뒤로 운 좋게 거길 빠져나올 때까지… 나는 죄수가 아니라 실험용 쥐새끼나 다름없었다.”

‘협곡 감옥’에서 이마카룸을 두고 실험이라도 자행했다는 건가? 루빈으로서도 뜻밖의 정보였다.

“자세히 말해봐. 생체 실험이라도 당했나?”

이마카룸은 고개를 내저었다. 제국군이 자신에게서 뭘 찾아내려는 건지는 끝내 알 수 없었으니.

다만 실험의 종류는 다양했고 하나같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수조에 담겼고, 구타당했으며, 잠을 재워주지 않았다. 그의 신체가 어떤 상태에 이르도록 한 다음, 그의 피를 뽑아가기도 했다.

“왜 날 실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제발 쿤달리트가 나처럼 실험용 쥐새끼가 되는 것만은 막아줘. 부탁이다.”

“아니, 그 전에.”

“……?”

“난 제국이 너에게서 뭘 찾아내려고 했는지를 알아야겠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원하는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는 루빈이었다. 어차피 이마카룸은 그저 실험체였을 뿐이니까.

‘수인에 대한 연구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투흔인 중 3~5퍼센트만이 수인화가 가능했다. 이마카룸은 거기에 해당됐다. 흑표의 모습으로 제국군 병사의 머리통을 부숴버린 것이다.

수인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된 투흔인이었으니, 제국은 그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혹시, 장벽의 괴수들한테 뿌린 주삿바늘이, 이마카룸과 관련이 있는 건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시기적으로는 맞물리는 게 사실이었다. 4년 전부터 그랑버드의 활동이 시작됐고, 이마카룸은 5년 전에 수감됐다.

이마카룸에게서 얻은 수인화 능력을 제국군에 부여하려고? 그러기에 앞서 괴수들에게 먼저 투여해본 걸까?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제국의 최종 목적은 제국군의 수인화겠군.’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제국군에 수인화 능력을 부여한다면, 제국군은 그만큼 강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루빈이 알고 있는 텔마흐라면 결코 원하지 않을 결과란 것이다.

텔마흐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제국군이라 할지라도.

‘그런데 왜 하필 수인화 능력이지?’

만약 제국군에게 수인화 능력을 부여하여 더 강대한 체계를 만들어내고 싶다면, 어째서 다른 소수혈족의 이능은 노리지 않은 거지?

어찌 보면 수인화보다도 거혈족과 수혈족의 능력이 더 탐났을 텐데 말이다.

‘이마카룸을 통해, 수인화가 아닌 다른 뭔가를 노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제한된 정보였기에 어느 쪽으로도 확신을 할 순 없었다. 다만 이마카룸이 말해준 덕분에 실마리를 잡았을 뿐.

루빈은 새로이 계획을 세웠다.

‘쿤달리트를 압송한 후, 군영도시를 탐색해봐야겠군.’

* * *

“장군님, 혹시 수인화와 관련이 있는 겁니까.”

네르하임의 추측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이마카룸은 수인화가 확인된 투흔인. 수인화라면 제국에서 상당히 탐낼 만한 이능이지 않을까.

그런데.

“아니야.”

덤프가 다시 네르하임 맞은편으로 돌아왔다. 담배를 뻑뻑 내뱉으며 실실 웃었다.

“수인화라는 거, 투흔 놈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가능한 거 아닌가.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고.”

“그렇습니까.”

“물론, 수혈인인 자네한테는 무척 탐나는 능력이긴 하겠지.”

그럼 수인화가 아니면 뭐지?

그때, 덤프 장군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확 열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있었다. 드넓은 초원은 검은 물감을 들어부은 것처럼 어두웠다.

밤에 초원을 내다볼 때마다, 네르하임은 자기도 모르게 거센 바람을 떠올렸다. 단순한 바람이 아닌, 외부인들만 한정하여 공격하는 ‘투흔의 해일’.

흔히들 말하길, 극지 괴수들을 막아내는 건 장벽이 아닌 ‘투흔의 해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설마……?’

그 순간 스치는 생각 한 줄기. 약물의 효과라는 것, 설마 ‘투흔의 해일’과 관련된 건가?

때마침, 덤프 장군도 이제는 밝힐 때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모든 투흔 놈들이 누리는 특혜가 뭘까? 바로 놈들만이 ‘투흔의 해일’에서 자유롭다는 거지.”

“…해일을 이겨내는 약물이군요.”

“그래. 이제 북부초원도 개척해야 할 때야.”

덤프 장군의 담배 연기가 창밖으로, 투흔초원을 향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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