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잠입 (1)
-티나, 거기가 어디지?
-음, 말로 하자면…….
순간, 루빈은 손으로 비둘기 티나를 조심스레 감쌌다. 손가락으로 날개를 툭툭 만졌다. 설명을 듣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으니까.
‘암연 전이.’
루빈의 6성 특성이 발현되면서 티나의 암연 일부가 그에게로 이동했다. 티나는 이전에도 경험해봤던 탈력(脫力)의 느낌에 구구구구 소리를 내었다.
찰나. 그사이에 루빈의 머릿속으로 티나가 네르하임을 추적했던 과정이 재생되었다. 비록 파편적인 장면들이었지만, 어렵지 않게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히클리온에서 두 시간쯤 떨어져 있는 산악지대.’
아쉽게도, 네르하임의 뒤를 밟았던 티나는 협곡 깊숙이 들어갈 순 없었다. 산악지대 곳곳에는 제국군 병사들의 촘촘한 경비망이 갖춰져 있었고, 더군다나 협곡 심층부에는 무리 지어 다니는 오크들도 보였다.
오크와 제국군의 결탁?
물론, 그게 어떤 형태라고 지금 단정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결탁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티나가 목격한 것만으로도 루빈이 움직일 이유로는 충분했다.
북부2군단과 수혈인 성주, 그리고 수상한 오크 무리. 거기에다가 예정된 대장군의 방문과 그랑버드의 활동, 그리고 장벽의 괴수들까지.
루빈은 별개처럼 보이던 개념들을 하나로 이어나갔다.
-티나, 날이 저물면 출발할 거야.
-나보고 길 안내를 하라고?
-길 안내는 두 번째 임무지. 더 막중한 임무가 있거든.
막중한 임무? 그 표현이 싫지 않은지 티나가 구구구구구 울어대며 궁금해했다. 그 소리에 루빈이 피식 웃었다.
-바로 그 소리야.
-뭐? 비둘기?
-아니. 오크로 변신하면 넌 오크어를 할 수 있게 되잖아.
한밤중.
산악지대로 향하는 길목에 은신한 루빈은 티나를 기다렸다.
숙소 주변으로 제국군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역시나 그들이 주시하는 대상은 루빈이 아닌 쿤달리트.
루빈은 주변 술집으로 들어갔고, ‘그림자 장막’을 통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같은 방식으로 성벽을 통과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군영도시의 삼엄한 경비는 안이 아닌 바깥을 겨냥하고 있었으니까.
-루빈!
티나의 접근이 느껴졌다. 이번엔 로이네크로우의 모습이다. 한순간, 티나가 날개를 접고 지상의 루빈을 향해 쇄도한다.
다시 공중으로 솟구칠 때, 그 등 위에는 루빈이 올라타 있었다.
“루빈, 내가 계속 지켜봤는데 네르하임은 아직 협곡 밖으로 안 나왔어.”
“군단장도 며칠 뒤에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지.”
“제국군이 오크랑 뭘 꾸미는 걸까?”
티나는 그렇게 물었지만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루빈이 이제부터 알아내려는 게 바로 그것일 테니.
휘이이이잉.
둘은 산악지대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나아가는 도중에, 루빈의 암연이 숲에 띄엄띄엄 배치된 제국군을 찾아냈다. 제국군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됐는데, 산악지대에 가까워질수록 경비망이 촘촘해지고 있었다.
역시 뭔가가 있다.
‘그런데 이거…….’
예상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비밀이 숨겨진 걸지도 모르겠다.
피이이이잉.
지금, 루빈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왼팔. 정확하게는 왼팔에 채워진 팔찌였다.
“…….”
팔찌에선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어둠을 찢고 나갈 만큼 강렬한 빛은 아니었지만, 사실 그만한 세기였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릴리크 팔찌’의 불빛은 오직 루빈 눈에만 보이기 때문이다.
‘1급 마적석…….’
‘릴리크 팔찌’가 빛을 퍼뜨리는 단 하나의 이유. 멀지 않은 어딘가에 1급 마적석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피이이이잉.
팔찌 주인에게만 들리는 울림.
팔찌 중앙의 반투명한 막에서 퍼져 나오는 빛의 색깔은 초록이었다. 지금은 초록이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면 빛의 색깔은 변할 터.
‘이계의 대장장이’ 캄누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초록 다음은 노랑이었고 그다음은 빨강이었다.
피리링.
이제, 초록이 노랑으로 변하고.
‘지금 가려는 곳에 1급 마적석이 있다는 건가.’
때마침 쇳조각이 자석에 후두둑 끌려 나오듯 한쪽으로 몰리는 빛의 알갱이.
1급 마적석이 존재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재 루빈이 향하는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1급 마적석 거래를 하는 건가?’
제국군이 오크들에게 건네주는 그림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북부2군단이 독단적으로 벌이는 일은 아닐 것이다. 즉, 릴리크 황궁이 직접 지시한 일이거나, 최소한 파악은 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피리링.
때마침 빛의 색깔이 노랑에서 빨강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목표로 했던 협곡에 도착한 티나도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에 머물렀다.
저 아래, 산과 산이 서로 비집고 솟아나면서 험준하기 그지없는 협곡을 형성한 게 보였다. 짙은 어둠 속에 드문드문 점멸하는 불빛들도. 모두 순찰하는 오크들의 횃불이었다.
루빈은 복면을 끌어 올리며 지시했다.
“내려가자.”
경계망이 가장 취약한 지점을 짚어주자, 티나가 날개를 접고 지상을 향해 빠르게 하강했다.
척.
지상에 닿기 전, 루빈은 활강하는 티나의 등 위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러곤 오크들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절벽에 매달렸다. 티나도 조그마한 생쥐로 변신하여 루빈 등에 들러붙었다.
-여기, 오크들 엄청 많은 거 같은데?
-엄청 많은 정도가 아니야.
암연을 넓게 펼쳐 세밀한 탐색을 이어나가는 루빈은 그 이상을 보고 있었다.
여긴 단순한 오크 소굴이 아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암연만으로는 전부 파악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최소 군단급.’
수천, 어쩌면 수만 단위의 오크들. 놈들은 협곡 곳곳에 인위적인 토굴을 만들고 비계(飛階)를 설치해놓았다.
-오크들의 군영이야.
-군영? 캠프가 아니고?
-아니. 오크 군단이야.
은밀하게 돌아다닐수록 확신이 더해졌다. 구성원 모두가 전사인 데다, 하나같이 바짝 군기가 들어 있었다. 게다가 제각각 임무가 무언지 인지하고, 수행 중인 것 같았다.
특이한 건, 오크 전사들이 동일한 씨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대륙 곳곳에서 모집된 것처럼 오크들은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오크 생태계에선 다른 씨족끼리의 상명하복이 쉽게 형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은 군율이 잘 갖춰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말인즉, 놈들을 규합한 강력한 지휘관 오크가 있다는 뜻.
“칼란타를 위하여!”
“칼란타를 위하여!”
놈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완벽히 은신한 루빈은, 오크 군인들의 군례를 지켜봤다.
군량을 보급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오크 군인이 도중에 상관을 마주한 건지, 군례를 올린 것이다. 상관은 팔을 들어 올리며 군례를 받았다.
-쟤네들, 지금 인간어로 경례한 거 맞지? 그런데 칼란타가 뭐지?
-여기에 있는 모든 오크들을 지배하는 놈이겠지. 지휘관이나 왕으로 태어난 놈.
씨족이 다른 오크들의 반목을 잠재울 수 있는 지휘관 오크가 있다면, 지금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이 된다.
-하지만 대륙의 다양한 오크 전사들을 이만큼 모으는 건 지휘관 오크의 힘만으론 역부족이었을 거야.
-제국군이 모아줬을 수도 있겠구나.
-아마도.
일종의 계약?
협곡 외부에 촘촘하게 제국군 경비병들이 배치된 것과는 달리, 군영에 들어온 이후로는 제국군을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제국군의 역할은 오크 군영의 존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걸 방지하는 데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 오크 군영이 만들어졌는지는 알겠어. 지휘관 오크가 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정말 중요한 건 왜 만들어졌냐는 것이겠지.’
루빈은 자신의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루빈 시야에 한정해서 붉게 빛을 퍼뜨리고 있는 릴리크 팔찌가 북쪽을 선명하게 가리켰다.
루빈은 상황을 판단한다.
그러기 위해선, 일의 순서부터 정돈해야 했다.
오크 군영 안에 1급 마적석이 있다는 게 확인된 이상, 최우선 목표는 단연 1급 마적석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오크 군영이 왜 존재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설명해줄 열쇠는 분명 거기에 있을 것이다.
* * *
“어이, 부관! 정신줄 놓지 마.”
칼란타의 날카로운 외침에 네르하임이 놀란 표정을 거두었다. 먼지가 풀풀 날리며 시야를 메웠지만,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오크 군단장의 모습은 또렷했다.
특히나 칼란타가 한 손씩 쥐고 있는 도끼와 전투망치가 선연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위우우우웅.
칼란타의 피부색에 조응하는 듯한 푸른색의 오러였다. 작열하는 오러가 먼지를 밀어내는 중이었는데, 칼란타는 안광을 빛내며 네르하임을 노려봤다.
“오크가 만드는 오러를 처음 보나?”
“…아뇨.”
“아니면, 6성의 오러를 처음 봐?”
네르하임은 군단장 오크의 깔보는 듯한 눈빛이 싫었다.
이전에도 6성의 오러를 본 적은 있었지만, 방금 진심으로 감탄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다가, 태생적으로 경지를 부여받는 오크라는 종족이 새삼스레 두려워졌음도 부정하진 못하겠다.
지난 몇 주 동안 네르하임은 ‘칼란타 군영’을 들락날락했지만, 그 역할은 북부2군단과의 작전 조율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최근 들어 자신이 히베르다드 성에서 부리던 괴수들 대부분을 칼란타 군영으로 이주시켰다. ‘일몰 작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서 그녀의 괴수와 짐승들은 오크 전사들의 전술훈련에서 대항군 역할로 동원되곤 했다.
다만 오늘만은 좀 달랐다.
오늘, 네르하임은 칼란타의 무위를 처음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의 괴수들이 병사들의 전술훈련이 아닌, 군단장 개인의 수련에 동원됐던 것이다.
“수혈인. 네 부하들 중에 더 센 놈은 없나?”
사실, 방금 전 칼란타가 휘두른 도끼에 두꺼운 목이 댕강 잘려 나간 아이와 내리찍은 전투망치에 머리가 터져버린 아이까지, 이 두 놈은 네르하임이 아끼던 괴수들이었다.
‘일몰 작전’이 개시되면 자신의 안전을 그 두 놈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이젠 그 계획이 틀어져버린 것이다.
“당장 날 지켜줄 괴수부터 수급해야 합니다. 초원에 들어가기 전에 말이죠.”
“이런, 널 지켜줄 놈들이었나? 너무 약해빠진 놈들이어서 죽여도 그만인 것들인 줄 알았다.”
여전히 아쉬운지 칼란타는 양손에 각각 쥔 무기를 휙휙 휘둘렀고, 이에 따라 둔중한 울림이 울렸다. 군단 소속 마법사들이 훈련장에 설치해둔 결계가 그의 오러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이봐, 너희 제국군 영창에 사형수들 바글바글하지 않나? 그중에 쓸 만한 놈을 가져오는 건 어때?”
“강제로 끌려온 놈들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원자. 그래, 지원자를 받으라고.”
“6성의 오크랑 싸우겠다는 사람이 있을 거 같습니까?”
“어차피 죽을 놈들이잖아. 날 이기면 살려준다고 하지, 뭐.”
네르하임은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오크는 인간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편안한 죽음을 원합니다.”
그러자 칼란타가 체념한 듯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런가? 흠, 그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인데. 아쉽게 됐군. 인간 머리를 터뜨리는 맛이 참 별미인데. 괴수랑은 또 느낌이 다르거든.”
“그 차이를 알고 싶진 않네요. 어쨌든, 얼마 안 남았습니다, 칼란타. 초원에 들어가기만 하면 인간 머리도, 괴수 머리통도 맘껏 터뜨릴 수 있을 겁니다.”
칼란타 역시 ‘일몰 작전’이 개시되면 지휘만 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선봉에 서서 도끼와 망친로 살육의 축제를 즐길 생각에 매일매일이 설렐 정도였다.
“게다가 전체 투흔족 100명 중 5명 정도가 수인화가 가능하다고 하죠. 장벽 괴수들은 또 포악하기로 유명하고요.”
“그래도 이왕 달궈놓은 무기들을 이대로 거둬들이긴 싫은데.”
칼란타는 오크 부관에게 괴수들을 더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군영의 깊숙한 지점에는 식량으로 보급된 괴수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죽여서라도 좀 놀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윽고, 오크 부관에 의해 이끌려온 트롤 세 마리. 칼란타는 쿵쿵 훈련장 안으로 들어가며 만족스러운 듯 씩 웃었다. 그의 무지막지한 엄니가 번뜩였다.
그리고 잠시 후-
콰콰콰쾅!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려 퍼졌다.
* * *
세 마리 트롤이 도끼와 해머에 별다른 대항도 못 해보고 죽어 나가는 그때.
네르하임도, 칼란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칼란타의 실체를 파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완벽한 은신 속에 있으면서 칼란타의 무위를 관찰하고 있는 루빈은 그의 경지를 가늠했다.
‘…최소 6성. 저 오크 놈이 열쇠군.’
붉은빛을 퍼뜨리고 있는 릴리크 팔찌. 분명 저 칼란타라는 지휘관 오크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중이었다.
칼란타가 훈련장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크게 움직일 때마다 불빛도 거기에 맞춰 가리키는 방향을 바꾼다.
무려 ‘이계의 대장장이’ 캄누이트에 의해 제작된 릴리크 팔찌다. 잘못 작동하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다.
‘1급 마적석은 저 오크의 몸속에 있다.’
팔찌의 안내에 따라 여기까지 왔던 루빈도 처음엔 의심했다. 귀하디귀한 1급 마적석이 고작 이런 오크들 틈에 있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칼란타의 경지를 두 눈으로 확인한 이후론, 충분히 가능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자신의 몸 안에 마적석이 있다는 걸 저 오크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루빈은 저 둘의 대화 덕분에 알게 된 것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이곳은 칼란타 군영이고, 군영의 이름은 저 오크의 이름에서 따온 모양이군. 오크 군영은 제국군이 주도하는 작전에 투입되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런데 그 작전 지역이 하필 투흔초원이라니.
네르하임이 말한 바에 따르면, 칼란타가 이끄는 오크들은 투흔인과 괴수들을 죽여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은, 장벽의 괴수들이 초원으로 유입된다는 건데…. 작전을 반나절 만에 끝낼 게 아니라면, ‘투흔의 해일’은 어떻게 당해내겠다는 거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아직은 확실하게 풀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답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이 군사작전의 심층에 접근해야 했다.
‘네르하임, 아니면 덤프 장군.’
틀림없이 이들에겐 작전 계획이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