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속임수
‘투흔의 해일’을 이겨내는 약물. 북쪽에서 밀려드는 괴수와 남쪽에서 북진하는 오크. 그리고 멸족을 피할 수 없는 투흔족…….
루빈의 내면세계로 돌아올 때만 해도, 하네케는 그저 ‘적운’이 선사한 놀라운 경험을 들려줄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적운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루빈이 얻어낸 첩보를 들어야 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효율성은 인정해야겠군. 제국군은 손해 보는 게 없으니.
참담했지만, 하네케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건 루빈도 마찬가지였다. ‘일몰 작전’에 대해 말해주면서 루빈은 덤덤하기만 했다.
-루빈. 회귀 전에는 초원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나?
문득 하네케의 머릿속에 그런 궁금증이 스쳐 지나갔다.
앞서 루빈도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북부초원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게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이나 현생이나 북부초원은 제국인들의 관심사 밖이었다.
유목민족만이 살아갈 수 있는 문명의 불모지라는 인식이 강했으니. 접경 지역에 살지 않는 이상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다만, 전생에서도 이와 똑같은 순서로 일이 벌어졌을 거라는 게 루빈의 생각이었다.
사건 흐름을 뒤틀 만한 교차점이 없었으니, 그의 회귀가 지금의 사태를 초래하지는 않았을 터.
‘일몰 작전은 그대로 진행됐을 테고, 실패하진 않았을 겁니다. 다만 그게 대륙에 알려지진 않았겠죠. 어린 시절의 저 역시 초원에 대해서는 들은 적 없었으니까.’
정보가 차단됐을지라도, 암살검가는 북부초원의 진실을 알고 있었겠지. 물론 텔마흐와 전쟁을 치르기 전까진 그저 황제의 야욕 중 하나로 생각했겠지만.
‘전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텔마흐에게 피해를 입히느냐, 그게 중요한 거죠.’
-피해를 입힌다…. 하지만 자네가 말했다시피, ‘일몰 작전’에서 제국군은 투입조차 되지 않는다네. 이 작전이 실패한다고 해도 텔마흐가 입는 피해는 없을 텐데.
어찌어찌하여 괴수와 오크를 막아낸다고 해도, 그건 단지 초원의 개척 시기를 미루는 것에 불과했다.
약물의 효과만 확인된다면, 그땐 제국군이 직접 움직일 것이다. 북부의 3개 군단 중 하나만 움직여도 초원을 정벌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마저도 ‘일몰 작전’의 침입자들부터 해결한 다음의 이야기겠지만.
그때, 루빈의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괴수와 오크를 막아내는 것, 그리고 텔마흐에게 한 방 먹이는 것까지.’
-……?
하네케가 궁금한 눈으로 루빈을 쳐다봤다.
‘내가 텔마흐라면, ‘투흔의 해일’에 대한 면역력만 일으키는 약만 만들도록 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 반대, 면역을 무효화시키는 약도 준비되어 있을 테죠.’
‘일몰 작전’은 오크족이 땅을 할양받는 것으로 종료된다.
그러나 루빈은 오크족이 초원의 일부를 얻어내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텔마흐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같은 결론을 내렸을 터.
그렇다면 텔마흐의 다음 수는 무엇일까. 제국군을 투입, 그대로 밀어붙여 오크들을 청소한다?
물론 그 방법도 있겠지만, 굳이 피해를 감수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초원을 개척하여 그곳에 새로운 도시를 짓더라도, 텔마흐는 개척민들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원할 테죠.’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주는 게 바로 면역 무효화 약물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면역 약물과 면역 무효화 약물? 그거라면 초원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도 설명이 되는군.
‘작전 개시에 앞서, 현 대장군이 북부2군단에 방문한다고 했습니다.’
대장군의 방문이라. 순간 하네케 머리를 스치는 한 생각.
-대장군이 빈손으로 오지는 않을 거다?
‘아마 여기 북부2군단에 면역 무효화 약물이 없다면, 그건 필시 대장군이 들고 온다는 뜻이겠죠.’
하네케는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만약 투흔인들이 무효화 약물을 갖게 된다면, 그리고 그걸 대량생산할 수만 있다면?
‘전쟁의 판도가 달라지겠죠. 일몰 후부턴 투흔족이 승리할 확률이 급격하게 올라갈 겁니다.’
-제국군 또한 ‘투흔의 해일’이 보호하는 초원에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할 테고?
그렇게 되면 투흔족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존재감을 대륙에 퍼뜨리게 될 것이다. 대륙의 지배자 릴리크 제국 앞에 나타난 새로운 저항 세력으로서.
‘투흔족에겐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길뿐입니다. 그냥 절멸하던지, 면역 무효화 약물을 통해 제국의 저항 세력으로 떠오를 건지.
-당연히 후자겠지. 자네가 원하는 것도 후자일 테고.
투흔족이 대륙에 얼마큼의 파란을 일으킬지는 몰라도, 어쨌든 릴리크의 지배력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배력의 균열. 그것이야말로 루빈이 투흔족을 도움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이었다.
‘제가 면역 무효화 약물을 찾아내겠습니다. 칼란타 군영 안에 시설이 갖춰져 있는 것 같으니, 대량생산도 문제없을 겁니다.’
-라유비아에게 적운을 다시 쇄골부족 쪽으로 돌려야 한다고 말해야겠군.
‘그리해 주시죠. 대족장과 함께 방어전 또한 준비해야 할 겁니다.’
-수인화가 가능한 이들로 전투 병력을 꾸리도록 하겠네. 최대 5퍼센트만이 수인화가 가능하다는 건 많이 아쉽지만.
‘전쟁이 개시되면, 적당한 때에 군단장 오크 칼란타를 처치하겠습니다.’
군단장 오크를 처치하면 오크 군대는 빠르게 와해될 것이다. 여러 씨족이 모였으니 서로 간의 내분도 기대해볼 수 있었다.
-근데, 놈은 어떻게 찾으려고?
‘저한테 그 오크를 추적할 수 있는 추적기가 있거든요.’
루빈은 릴리크 팔찌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루빈은 쿤달리트를 데리고 숙소 1층으로 내려와 식사를 해결했다. 간단히 빵을 먹으면서 주변을 확인했는데, 군단장이 보낸 장교들이 여전히 쿤달리트를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서쪽으로 이틀을 더 이동해야겠습니다, 쿤달리트. 식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출발하죠.”
“네르하임을 만나러 왔던 게 아닙니까?”
“이제 만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우리 일이나 마무리하죠.”
우리 일이란, 브리온 오러의 발현자를 칙명부 간부에게 인계하는 것을 뜻했다.
루빈이 칼란타 군영과 ‘일몰 작전’에 대해 조사하는 사이, 쿠제는 칙명부와 접선하여 황제의 과업을 어찌 마무리할지 그 일정을 잡은 터였다.
인계 장소는 히클리온에서 이틀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투둠이었다. 그곳에서 쿤달리트가 정말 브리온 오러의 발현자인지 확인한 뒤, 그게 증명되면 곧바로 제도로 압송하겠다는 통보가 있었다.
‘쿤달리트가 제도까지 가도록 놔두지 않겠지만.’
어쨌든 루빈으로서도 서둘러 히클리온을 나서는 게 좋았다.
‘일몰 작전’의 보안 때문에 덤프 장군이 보낸 장교들이 투흔인을 경계하고 있었다. 저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사라져주는 것이 루빈의 다음 행동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갈까요?”
“알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곧바로 짐을 싸서 숙소를 나왔다. 어차피 한동안은 계속 미행이 따라붙을 것 같으니, 군단장에겐 따로 인사를 남길 필요는 없겠지.
아니나 다를까, 히클리온을 나선 뒤에도 하루 동안은 미행이 붙었다. 루빈과 쿤달리트는 미행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움직여야 했다.
그들이 칙명부와의 접선 장소에 거의 다다를 무렵, 때마침 미행도 떨어져 나갔다. 루빈의 방향이 오크 군영과는 정반대인 데다 별다른 동태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접선하기로 한 작은 마을 투둠.
루빈과 쿤달리트는 마을 초입의 숲속에서 두 시간 뒤에 나타날 사람을 기다렸다.
“루한, 마지막으로 확인해 주시지요.”
쿤달리트가 두 손으로 싸구려 장검을 움켜쥔 채 말했다. 이윽고, 얇게 장검에 덧씌워지는 검은색 오러.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브리온 오러의 상태는 불안정하기 그지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칙명부 간부를 납득시킬 것이었다.
“루한, 미리 인사를 남겨야겠군요. 제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쿤달리트가 비장하게 말했다.
“…….”
루빈은 쿤달리트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구출 계획이 세워져 있지만, 쿤달리트가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 만일을 위해서 말이다.
“저기 오는군요. 준비하시죠.”
루빈의 암연으로 저 멀리서 다가오는 마차가 느껴졌다.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마부뿐이었다.
콜록콜록.
쿤달리트가 한참 기침을 해대고 있을 때, 마차가 저 앞에서 멈추었다. 루빈은 마부가 이쪽 숲 안으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부스럭부스럭.
곧 막대기로 수풀을 헤치며 사내가 나타났다.
“제국감찰관, 루한 멜라스?”
“…칙명부. 혼자 온 건가?”
칙명부를 거론하자, 사내가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루빈이 피식 웃었다.
“주변에 우리를 알아챌 사람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
칙명부 간부라지만, 로젠탈러나 히탄 같은 요직은 아닌 것 같았다.
루빈으로선 다행이었다. 요직이 오거나 규모를 갖췄다면, 다음 행동이 좀 곤란해질 수도 있었으니까.
예상처럼, 황궁이나 칙명부에선 루빈의 첫 번째 과업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루빈의 경지를 제대로 모르는 그들에겐 루빈이 실패하지 않고 완수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외일 터.
“…일단 룰포 님과 대화를 나누셔야 합니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루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칙명부 간부는 곧바로 마적석을 꺼냈다. 루빈과 쿤달리트를 앞에 두고, 바닥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잠시 후, 빛을 뿜어내는 마적석.
빛이 일정한 윤곽을 만들더니, 이윽고 심드렁한 표정의 룰포가 나타났다. 역시나 그 손에는 술잔이 쥐어져 있었다.
-오랜만이군, 루빈 공자.
“잘 지내셨는지요.”
-뭐, 그럭저럭 지냈지. 황궁의 삶이 얼마나 무료한지 모를 거요.
룰포의 시선이 루빈 옆에 서 있는 투흔인에게 향했다. 미간이 좁혀지며 와락 인상이 구겨졌다.
-투흔족이 어찌 브리온 오러를 발현할 수 있는 거지?
“…….”
-대답이 없네? 뭐, 심문은 제도에 도착하면 그때 하는 걸로 하지. 일단 브리온 오러가 맞는지부터 확인해.
그 순간, 루빈이 쿤달리트에게 눈짓했다. 쿤달리트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싸구려 장검을 빼 들었다.
다시 한번 검신에 흑색의 오러가 씌워졌다. 방금 전 연습 때보다도 더 불안정했기에 검신에 오러가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경지가 워낙 형편없었기에 룰포가 클클클 웃어댔다.
-반역자 가문의 오러가 발견돼서 신경 좀 썼더니만, 괜한 일이었군.
“이 투흔인은 반역자 펠키온의 짐꾼을 했었다 합니다. 아마 그 과정에서 브리온 검술을 배운 것 같습니다.”
루빈이 넌지시 말했다.
-뭐, 그거야 나중에 심문하면 그만이고. 이제 루빈 공자는 어디로 가려 하오?
“본가로 돌아가서 다음 과업을 기다리겠습니다.”
룰포는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수고했다는 폐하의 전언이 있었소. 뭐, 이만한 일로 대단한 칭찬을 바라진 않았을 것 같지만.
루빈은 몸을 낮추었다.
“당연합니다. 그저 다음 과업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래야지. 공자는 지금 징벌을 받고 있다는 걸 명심하길.
룰포가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러자 칙명부 간부가 쿤달리트에게 다가와 팔을 허리 뒤로 틀며 결박하기 시작했다.
순간, 쿤달리트와 루빈의 시선이 교차했다.
쿤달리트는 이렇게 상황을 마무리하게 해주어 감사하다는 뜻이었지만, 루빈은 전혀 달랐다.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룰포의 시선이 다시 루빈에게 향했다.
-본가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대륙을 유랑하는 건 허락하지만, 북부초원 근처론 가지 마시오. 괜히 휩쓸릴 수 있으니.
“휩쓸린다면 무슨… 아, 알겠습니다.”
루빈의 소년다운 연기를 룰포는 알아채지 못했다. 루빈은 굳이 호기심을 품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다시 몸을 낮추었다.
어차피 루빈도 북쪽으로 향하진 않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면서 본가로 향할 거였으니까.
단, 그렇게 움직이는 건 루빈이 아닌 티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