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무너지는 기마
덜컹덜컹.
쿤달리트를 태운 마차가 멀어져간다. 마차의 네모난 창으로 쿤달리트의 초연한 눈동자가 잠깐 비쳤다가 사라졌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루빈. 그 옆으로 수풀 속에 은신해 있던 쿠제와 티나가 다가왔다.
티나는 다람쥐 모습으로 쿠제의 어깨 위에 올라간 채였다. 신기한 걸 발견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쿠제의 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장난치듯 귀를 잡아당겼다.
“아앗!”
쿠제가 비명과 함께 손을 마구 휘둘렀다. 티나는 요리조리 피하며 킥킥 웃어댔다.
‘…하여간.’
둘의 장난에 한숨을 내쉰 루빈은 지도를 쫙 펼쳤다.
“이제부터 너흰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하루 간격으로 도시나 성에 들러.”
“일부러 흔적이 남게끔 관문을 통과하라는 말씀이시죠?”
루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통행증을 티나에게 내밀었다. 다람쥐 티나는 그걸 받아들더니 몸을 기우뚱거리며 꼼꼼히 살폈다.
이제부터 티나는 가짜 루빈이 되어 이동할 것이다. 한동안은 제국감찰관이라는 신분이 유지될 테니, 이동하는 데엔 아무 지장도 없을 것이다.
“휴가라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돌아다녀. 어차피 일주일 뒤에는 다시 초원으로 돌아와야 하니까.”
“휴가? 얼마나 고생시키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쿠제는 티나가 쥐고 있는 루빈의 통행증을 받아들어 품속에 잘 보관했다. 티나에게 맡겨두다간 언제 분실할지 모른다.
“도련님은요? 쿤달리트를 구출하실 계획이십니까?”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칙명부 간부가 생각보다 낮은 급이어서 일이 훨씬 수월해졌지만, 그래도 사나흘의 시간적인 간격을 둘 필요가 있었다.
남쪽으로 나아가는 티나가 충분히 흔적을 남긴 다음이라면, 호송 마차가 습격당한다 해도 루빈이 의심받는 일은 없을 테니까.
얼마 후면 초원에서 펼쳐지게 될 전쟁.
루빈이 굳이 며칠의 시간을 들이면서까지 쿤달리트를 구하려는 건 이 전쟁 때문이었다.
쿤달리트나 이마카룸처럼 투흔의 상징들이 활약해줘야 그나마 투흔족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초원에서 만나!”
멀어져가던 티나가 다람쥐에서 루빈으로 변신하는 게 보였다. 티나는 루빈의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팔을 흔들었다.
티나와 헤어진 루빈은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로브를 썼다.
‘슬슬 따라가볼까.’
마차와 충분한 거리를 벌렸겠다, 루빈은 그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적운 위에 오른 하네케와 라유비아는 다시 쇄골부족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하네케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 이제 막 도착하여 지상으로 내려갈 거라 했다.
아마 지금쯤 대족장 이냐키투와 ‘일몰 작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지.
블라네는 그 자리에 함께 있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일주일 동안 초원의 상황을 관망하다가 다시 루빈과 만나는 것이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적운이 다시 돌아왔으니, 그곳에서 루빈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 *
대족장의 투흔푸.
고요함 속, 이냐키투는 매캐한 연기에 파묻힌 채 명상에 빠져 있었다. 쇄골부족의 청년들이 슬쩍슬쩍 다가와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저들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늙은 대족장이 슬픔에 잠겨 죽어버리지나 않는지.
지금, 쇄골부족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쿤달리트, 이마카룸, 라유비아…. 너무도 소중한 이들이 훌쩍 떠나가 버렸으니까.
심지어 부족 사람들에겐 그들이 떠나간 연유조차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
‘비밀의 무게가 무겁구나.’
쿤달리트의 희생. 라유비아의 숙명.
영혼을 들여다보는 대족장조차도 이런 슬픔들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저 부족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제 더는 그들을 만나지 못할 거라는 말만 남겼을 뿐.
“대족장님.”
청년 하나가 투흔푸 앞에서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눈을 떠서 바라보니 투흔푸에 비치는 인영이 하나가 아니었다. 긴 머리칼이 찰랑이는 걸 보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블라네, 아직 출발하지 않았습니까?”
루한 멜라스의 수행원은 오늘 오전에 초원을 나서기로 되어 있었다. 작별 인사까지 나누었는데 아직까지 출발하지 않은 것은 의외였다.
“출발했다가 말 머리를 급히 돌렸습니다.”
“무슨 이유로?”
“라유비아의 적운. 그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흐음…. 투흔푸를 들추어라.”
대족장의 지시에 청년이 따랐다. 드넓은 투흔초원이 펼쳐져 있고, 하늘을 수놓은 구름도 여럿 보였다.
다른 구름들이 흘러가는 방향과 어긋나게, 불그스름한 구름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다. 순간 낯선 기분이 들었다. 저게 라유비아의 적운이 맞나?
“며칠 전 라유비아가 하늘로 올라가는 그 모습은 아직도 선연한데… 저게 그때 그 구름인지 모르겠군.”
“기다려 보시지요. 다시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돌아오는 것 같으니까요.”
이미 블라네는 로이네크로우 ‘오호스’를 통해 저 구름이 라유비아의 적운이라는 걸 확인한 뒤였다.
적운 외부로 강력한 결계가 발현되고 있어서 가까이 접근하진 못했지만, 구름을 끌고 있던 엘키오와는 마주했던 터.
그리고 엘키오는 블라네의 로이네크로우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전해준 것이었다.
“날 부축해주게.”
투흔인 청년 둘이 다가와 이냐키투를 부축했다. 그는 깡마른 다리를 힘겹게 옮기며 투흔푸 밖으로 나갔다.
거대한 구름. 쇄골부족의 영역 위에 멈추어 있는 구름에서 걸어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구름 아래 허공에 보이지 않는 바닥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발을 디딜 때마다 물결이 번졌다.
“더는 비밀로 할 생각이 없나 보네요.”
쇄골부족 사람들이 웅성댔다.
뭔가 이상했다. 며칠 전 적운에 오를 때와는 달랐다. 그땐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움직였는데.
이제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게라. 도대체 뭐기에? 이냐키투의 눈빛이 짙어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하네케가 가장 먼저 지상에 발을 디뎠다. 뒤이어 라유비아. 그 뒤로 이마카룸이 내려왔다.
이마카룸은 뭔가를 짊어지고 있었다. 자루 속에 들어가 있는 그것은 자꾸만 바둥거렸다.
“이마카룸, 그거 뭐야? 그거 때문에 다시 돌아온 거냐?”
“무슨 소리를. 이놈은 모두들한테 보여줄 증거품이다.”
“증거품?”
뭘 증명한다는 거지? 궁금한 눈으로 라유비아를 쳐다봤지만, 라유비아는 어쩐지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라유비아, 괜찮으냐?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대족장님…. 얼른 이야기부터 나눠야 해요.”
루빈이 알아낸 제국의 계획. 그것이 하네케를 통해 전달되었고, 그래서 라유비아는 충격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처음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루빈이 착각한 거라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장벽 너머 괴수들과 오크들을 통해 초원을 청소한다? 그리고 이 땅을 개척한다니.
사실, 그녀 말고도 대부분의 투흔인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일 거였다.
투흔인들이 제국을 증오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런 증오조차 그들 나름의 상식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투흔인들의 상식에 따르면, 제국이 악독하기로서니 그 정도까지 악독할 순 없는 거였다. 투흔초원의 4분의 3을 빼앗아갔고 투흔족을 극지 가까이로 내몰았다지만, 그래도 저들을 멸족시키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루빈이나 하네케가 보기엔 한없이 엉성한 상식일 수밖에 없다. 제국과 텔마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라서 만들어진 엉터리 상식.
“말도 안 돼…….”
그래서 하네케의 설명이 끝났을 때, 이냐키투가 내보인 반응은 라유비아와 비슷했다.
“말도 안 되긴, 대족장도 라유비아처럼 제국을 모르니까 그러는 거야!”
이마카룸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여기서 제국의 진짜 모습을 아는 유일한 투흔인이었다.
제국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초원 밖의 세상을 여실히 체험했던 터.
“날 두고 뭘 그렇게 실험하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밝혀진 거야! 바로 ‘투흔의 해일’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거라고.”
이냐키투는 침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 문득 이마카룸이 짊어지고 온 ‘증거품’을 떠올렸다.
“그거, 증거품이라고 했지?”
“그래! 이걸로 그랑버드 위에서 신나게 뿌려대더군. 뿌려댄 약물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줄게.”
자루 속에서 버둥거리는 그건 장벽 근처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괴수였다.
일명 극지바퀴. 생김새나 습성은 바퀴벌레와 같았지만, 그 크기는 갓 태어난 망아지와 비슷했다. 장벽에 나 있는 작은 틈으로 극지와 초원을 오가는 놈이었다.
초원에 틈입한다 해도, 극지바퀴들의 생명은 밤을 넘기지 못했다. ‘투흔의 해일’이 덮쳐와 박멸해버렸으니까.
그런데 이놈은 달랐다. 장벽에 기생하면서 약물까지 투여된 놈이었다. 다른 괴수한테 잡아먹히기 전에 이마카룸이 서둘러 낚아채 온 것이었다.
“일단 날이 저물어야지. 그래야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하네케가 끼어들었다.
“만약 이놈들이 ‘투흔의 해일’에 면역된 놈들이라는 게 확인되면, 어쩔 거요?”
“…….”
“대족장. 우리 쪽에서 면역 무효화 약물을 구해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전투 중에 그걸 살포할 수 있다면 투흔은 절멸을 피할 수 있소.”
“어쨌든 싸움은 피할 수 없다는 말이군요.”
“공격해오는 적을 두고 포옹할 수는 없을 테니까. 밤까지 버텨내기만 하면, 투흔의 승리도 노려볼 수 있을 거요.”
“정말… 그 면역 무효화 약물이 존재하긴 하는 겁니까? 그리고 그걸 구할 수 있고요?”
하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빈이 그러겠다고 했으니,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밤까지 지켜낼 수 있느냐는 거요. 내가 알기론, 투흔인 중 최대 5퍼센트만이 수인화가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들을 최대한 전투병으로 활용해야 하오.”
그 순간, 이상한 낌새를 느끼는 하네케였다. 이냐키투와 이마카룸의 시선이 마주치면서, 눈빛으로 서로 어떤 밀어(密語)를 나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게 있나?’
그때, 이마카룸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냐키투. 이참에 ‘투흔의 비밀’을 말하는 게 어때?”
비밀이라?
그런데 이냐키투는 고개를 내저었다. 비밀을 지키겠다는 뜻이었다.
하네케가 이번엔 궁금한 눈으로 제 증손녀를 쳐다봤다. 라유비아라면 투흔의 비밀이 무엇인지 말해줄 것 같았다.
그런데 라유비아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할아버지, 저는 반은 제국 사람이지만, 반은 투흔 사람이에요.”
“너도 내게 말해줄 수 없다는 게냐?”
“네, 그 비밀이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건 대족장님만이 결정할 수 있거든요.”
“…….”
다시, 이냐키투의 말이 이어졌다.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투흔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까요.”
“그 비밀이란 것에 투흔의 운명이 있는지는 모르겠네만, 앞으로 펼쳐질 ‘일몰 작전’에도 그 운명이 걸려 있다는 걸 명심하시오, 대족장.”
“…예, 알고 있습니다. 만약 ‘투흔의 해일’이 극지바퀴를 비껴간다면, 그때 기꺼이 비밀을 내놓겠습니다.”
마침내 날이 저물었다.
어둠이 번지는 초원. 쇄골부족 사람들이 투흔푸에서 나와 초원 한쪽에 집결했다.
대족장이 그들을 모아놓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족장.”
“저 제국 사람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겠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투흔족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투흔의 해일’을 피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 초원은 곧 종교였고, 초원의 바람은 신의 숨결이었다. 그들이 ‘투흔의 해일’이라 이름 붙인 그 현상은, 그들의 영토를 지켜내도록 신이 보내준 기마(騎馬)나 다름없었다.
“…….”
검증이 시작되기 전, 하네케는 착찹하게 눈을 감았다. 지금 초원 위엔 밤의 어둠만이 번져 있지만, 이제 곧 공포와 충격이 이를 대신하겠군.
하네케는 그 옆에 붙어 있는 라유비아가 몸을 떠는 걸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많이 놀랄 거예요…. 겁을 먹을 거예요…….”
하네케는 라유비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이마카룸이 팔을 번쩍 드는 게 보였다. 투흔인들은 일반인보다 시력이 훨씬 좋았다. 그들은 이마카룸이 자루 속에서 극지바퀴를 꺼내는 걸 확인했다.
자루 밖으로 나온 극지바퀴. 기다란 더듬이를 움직이며 이마카룸을 노려봤다.
이마카룸은 극지바퀴를 쫓아내기 위해 흑표로 변했다. 검은 털이 이마카룸을 뒤덮고, 흑백이 반전된 눈동자를 번뜩이자, 극지바퀴가 공포를 느끼며 후다다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하.
쇄골부족 사람들이 우스운 연극을 보듯 웃어댔다.
“…….”
이마카룸은 말없이 달아나는 극지바퀴를 노려봤다. 그때, 그의 귓가에 두두두두두두 하는 말발굽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투흔의 해일. 극지바퀴를 노리고 투흔의 해일이 기마대처럼 진격하는 것이다.
두두두두두.
“뭐, 뭐야!”
“내가 잘못 봤나?”
구경 나온 투흔인들 모두 극지바퀴가 배를 까뒤집으며 쓰러질 걸 예상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극지바퀴를 덮치기 직전, 투흔의 해일이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으니까.
프스스스스.
“이럴 수가.”
부축을 받으며 나와 있던 대족장 이냐키투가 휘청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