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 포효의 맹세
다다다다다.
살아남은 극지바퀴가 멀어진다. 흑표 이마카룸이 숨을 들이마시며 따라붙으려 했다. 투흔의 해일에 영향을 받지 않는 괴수였다. 그냥 놔두면 투흔마를 물어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마카룸이 나설 필요가 없어졌다.
펑!
갑자기 극지바퀴가 터져버렸다. 투흔의 해일이 뒤늦게 효과를 발휘한 건 아니었다.
이마카룸이 뒤쪽을 돌아보자, 왼쪽 팔목에 제 무기를 받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블라네. 극지바퀴를 관통한 건 블라네의 탄환이었다.
신기한 무기다. ‘협곡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탄환을 발사하는 무기를 본 적 있지만, 블라네의 무기는 뭔가 달랐다.
‘발사된 게 아니야. 공중에서 탄환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았는데…….’
분명 그랬다. 총구를 겨누고 있지만, 탄환은 거기에서 발사된 게 아니다. 공중의 어디선가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탄환이 튀어나왔다. 만약 벽이 있었더라도 벽을 관통할 필요가 없었을 터였다.
마법사인가? 이마카룸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투흔을 위해 싸워주는 자라면, 강할수록 좋은 거지.
“벌써 무기를 익힌 것 같군.”
블라네의 무기에 대한 하네케의 감탄이 이어졌다. 블라네는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무기를 거두었다.
“그 무기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암연뢰입니다, 하네케.”
암연을 기반으로 한 탄환 무기라. 총구를 지녔고 격발 장치가 있는 마도구와 비슷하지만, 하네케가 보기에 그 원리는 아예 다른 것 같았다.
그 역시 이마카룸이 신기해했던 걸 똑같이 알아차리고 있었다. 격발이 되는 순간, 총구에서 탄환이 발사된 게 아니다.
“공중에서 갑자기 탄환이 나타난 것 같은데.”
“예, 엄밀히 말해선 폭발력에 의해 날아간 아닙니다. 공중에서 제 암연에 따라 탄환이 조형됐고, 그게 그대로 날아간 겁니다.”
“공중에 화염구나 빙격살을 만들어내는 마법과 비슷해 보이는군. 왠지… 점멸하듯 공격하는 그 방식 하나만 있진 않을 것 같은데?”
블라네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여기에서 ‘암연뢰’의 진가를 모두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점멸탄’은 여러 공격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그녀 본인조차도 아직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공격들도 존재했다.
“제 무기의 진가는 이번 전쟁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기대하지.”
그러면서 하네케는 대족장 앞으로 걸어갔다. 암연뢰의 진가를 확인하려면 일단 전쟁부터 제대로 준비되어야 했다.
다시 ‘일몰 작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
확인시켜주기 전까지 유보적인 태도였던 대족장. 이제는 놀라움이 가득한 얼굴로 숨을 간결하게 내뱉는 중이다.
“이거, 구름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입니다. ‘투흔의 해일’은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았으니까요.”
“그런 것 같군. 그런데 더 심각한 건 극지의 괴수만이 이런 면역력을 지닌 게 아니라는 것이오. 남쪽에선 오크가 올라올 것이고, 그 숫자는 1만은 될 거라 했으니까.”
“1만…….”
“루한이 면역을 무효화하는 약물을 구하겠다고 했지만, 거기에만 기대할 순 없는 일이오. 전사들을 추려서 대항을 준비하는 게 상책이지.”
전사. 즉 전체의 5퍼센트를 차지하는 수인들이었다. 투흔인의 전체 인구를 두고 계산해본다면 그 숫자는 약 2천에 이른다.
투흔초원의 특성상 엄폐나 매복의 장소가 부족하긴 하지만, 상대가 괴수와 오크라면 반격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괴수는 통제 불능의 상태일 테고, 오크도 지휘관 오크를 암살한다면 내분을 조장할 수도 있다.
“대족장이 나서서 수인화가 가능한 투흔인들을 집결시켜 주시오. 지금 제국군은 우리가 ‘일몰 작전’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는 걸 모르니, 분명 기회가 있을 거요.”
그때, 이마카룸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그는 수인체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하네케, 사실 전사들의 숫자는 2천보다 훨씬 많아.”
그와 동시에 대족장을 바라보는 이마카룸. 지금껏 숨겨온 ‘투흔’의 비밀에 대해 말해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하네케도 대족장을 바라봤다.
비밀을 밝힐 권리가 있는 자는 투흔의 대족장뿐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따라 투흔의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니. 그가 입을 열었다.
“제국의 목적이 우리를 절멸시키고 초원을 가져가는 거라면… 이 비밀이 밝혀진다 해도 괜찮겠지. 이러나저러나 제국과 적대하게 될 테니까.”
“……?”
“당신과 루한 이전에, 우리 투흔을 구해준 제국인은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200여 년 전에 이곳에서 족장 캄누이트와 내기를 했던 대마법사 글레이튼이었죠.”
‘사라진 대마법사’ 글레이튼이 만들어낸 정설에 따라, 세상 사람들은 투흔인과 다른 특수혈족을 구분하게 됐다.
거혈족, 수혈족, 환혈족 이 셋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지만, 투흔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작 5퍼센트. 너무나도 미약한 이 수치가 그들과 특수혈족의 운명을 비껴가게 했다.
환혈족은 멸족했고, 수혈족과 거혈족은 제국의 도구가 되어버린 현재. 그나마 투흔은 이렇게라도 그들 민족만의 삶을 지켜온 셈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예상한 10퍼센트보다도 많은 것 같군.”
하네케의 추측에 이마카룸이 피식 웃었다. 이냐키투가 말을 다시 이었다.
“그 진실을 알고 있던 또 한 사람이 바로 펠키온 브리온이었습니다. 글레이튼에 이어 우리 민족을 구해준 두 번째 제국인이었죠. 그는 10여 년 전, 수인화 연구를 하면서 정확한 수치를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누블라와 사랑에 빠졌고, 진실을 덮기로 한 것이었다. 진실이 밝혀지면 결국 투흔은 멸족에 이르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제 보여드리죠, 투흔의 비밀을.”
처음은 이냐키투 그 자신이었다.
프스스슷.
그의 피부가 순백색의 털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족보행의 인간형을 유지한 채 골격이 커져갔다. 외형은 이마카룸처럼 표범과 같았으나 그 색깔은 백색.
양쪽에서 청년 둘이 부축을 해야 했던 몸은 이제 건장해져 스스로 지탱할 수 있었다.
그르르르르.
눈동자를 이루는 흑과 백의 위치가 반전되는 것으로 수인화가 끝났다.
“……!”
뒤이어 하네케는 탄성을 질렀다. 알고 보니 대족장의 수인화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대족장이 직접 수인화를 발현했다는 것은 투흔인들에게 딱 하나만을 의미했다. 오랜 ‘침묵의 맹세’를 깨겠다는 것이었다.
‘침묵의 맹세’가 깨지는 순간, 초원과 민족의 운명은 바뀐다. 이제부턴 ‘포효의 맹세’가 울리는 것이다.
그르르르르.
그르르르!
이냐키투를 부축하고 있던 두 청년의 외형도 표범의 수인체로 변했다.
수인화의 물결이 점차 번져간다. 5퍼센트? 아니, 그 반대였다. 모든 쇄골부족 사람들이 표범의 수인체로 변했으니까.
“허, 제국이 제대로 속고 있었군.”
“대륙이 전쟁으로 물들었던 옛 시절, 우리 민족은 ‘포효의 맹세’를 통해 세상에 나가 싸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대마법사 글레이튼이 와서 만류했죠. 우리 민족의 힘은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써야 한다면서.”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해주다니, 고맙군.”
그저 나약하기만 한 투흔족인 줄 알았는데, 사투의 의지를 품고 있었다니. 출정에 앞서 열병식을 할 때처럼 강렬한 전의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투흔족 모두가 표범의 수인체인 것이오?”
“아닙니다. 다섯 부족이 각각 고유의 수인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표범은 쇄골부족만의 수인체였다.
발등부족은 코뿔소, 눈동자부족은 독수리, 송곳니부족은 악어, 무릎부족은 캥거루의 수인체였다.
“그런데 라유비아는?”
모두가 수인체가 되었지만 하네케의 증손녀는 여전히 사람의 모습.
제국 사람의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 걸까?
“수인화가 불가능한 투흔인은 전체 중에서 5퍼센트 정도입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정반대로군. 그럼 라유비아가 그 5퍼센트에 들어간다는 건가?”
“그건 모릅니다. 열네 살이 되어야만 수인화가 가능해지니까요. 라유비아도 내년엔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라유비아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면역 약물의 실체를 확인한 뒤 모두가 겁먹을 줄 알았던 그녀였다. 투흔의 전의를 마주하자, 그녀 역시 감격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 역병 때문에 우리 부족엔 저뿐이지만… 다른 부족엔 애들이 많아요.”
“그 아이들 모두 아직은 수인화가 불가능할 테고.”
“맞아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투흔의 아이들을 전부 적운으로 피신시켜야 해요. 적운 위라면 안전할 거예요.”
그 말에 대족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적운의 성주께서 기꺼이 그리 해준다면 고맙겠구나. 아이들이 그곳에서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이 전쟁의 결말이 패배일지라도, 최악은 아니리라. 투흔이 멸족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초록의 초원을 떠나 하늘의 백색 초원에서 살아가야 하겠지만.
잠시 후, 라유비아는 다른 부족의 아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적운 위로 올라갔다.
“…쿤달리트가 있으면 큰 힘이 될 텐데.”
이냐키투가 힘없이 말했다. 그는 표범의 일족으로서 대족장에 오른 몸일 뿐, 엄연히 쇄골부족의 부족장은 쿤달리트였다.
쇄골부족 구성원들에 대해 쿤달리트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없었다.
“머지않아 그는 돌아올 것이오.”
“예? 정말입니까? 재판이 잘 처리된 겁니까.”
“지금 그는 마차에 실려 제도로 압송되고 있소. 하지만 며칠 후면 그 마차는 습격당할 예정이지. 루한 멜라스라는 자에 의해 말이오.”
생각난 김에, 하네케는 라유비아에게 소리쳤다. 이제 루빈에게 투흔의 비밀을 알려줘야 할 때였다.
* * *
“제기랄, 죽을병에 걸렸나.”
마부는 고삐를 꽉 움켜쥐며 인상을 팍 구겼다. 벌써 며칠째 밤낮없이 지겨운 기침소리에 시달린 건지 모르겠다.
콜록콜록! 콜록콜록!
“내 귀를 뜯어내든가, 저 투흔인의 목구멍을 막아버리든가 해야겠네.”
마부는 고개를 휙 돌려 마부석과 승객 칸 사이의 차창을 열었다. 두 팔이 결박당한 채 땀을 흠뻑 쏟아내고 있는 투흔인이 보였다.
“솔직히 널 죽이고 사고사로 위장하고 싶은 거, 내 최대한 참고 있다는 걸 알아둬라.”
그러면서 품속에서 약통을 꺼내 쿤달리트를 향해 내던졌다.
“너무 많이 먹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하나만 삼켜, 투흔인.”
“콜록콜록! 이거, 진통제인가?”
“넌 질문 같은 거 하지 마.”
그러면서 창문을 쿵 닫아버렸다.
사실 칙명부에서만 유통되는 그 진통제는, 제도로 향하는 지름길 때문에 준비해둔 것이었다.
‘이쪽 경로에 괴수가 출몰할 가능성이 있다 했는데, 이상하네.’
마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밀림을 관통하는 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괴수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괴수라도 마주쳐야 공적이 조금이나마 쌓일 텐데.’
칙명부 수장 룰포가 직접 내린 임무였다. 4성의 경지는 간부급에 속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수장과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투흔인을 회수해오는 건 분명 간단한 임무.
그럼에도 그는 나름대로 이 임무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룰포가 직접 내린 임무인 데다, 며칠 전에 마주한 자가 바로 로이넨가의 자제라고 했으니까.
좀 더 돋보이려면 도중에 괴수를 만나 활약을 하는 것도 좋을 텐데, 아무래도 그럴 낌새가 아니었다.
“어라, 조용해졌네?”
간부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더 이상 기침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던져준 진통제를 먹었나 보다.
그래도 과다 복용해서 죽어버리면 안 되니 확인을 해야 했다. 간부는 다시 창문을 열고 승객 칸을 들여다보았다.
“……?”
뭐지? 분명 승객칸에는 투흔인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다.
다만, 그 투흔인은 자신이 건넨 진통제를 손도 대지 않은 것 같았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몸을 들썩이며 기침을 해대고 있다.
‘그런데 왜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지?’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루빈의 암연이 그의 청각을 움켜쥐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면, 거기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루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푸슉!
“이… 이게 무슨……?”
“넌 질문 같은 거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