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34화 (234/258)

제234화. 거조통제실

“끄흐억, 허어흑… 마법사인가?”

“질문 같은 거 하지 말라니까.”

피로 흥건해진 마부석. 죽어가는 칙명부 간부는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리며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검은 로브를 눌러쓰고 있는 데다 복면까지 썼으니 그 얼굴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괴수나 만날 줄 알았는데, 마법사라니.”

“…….”

푸슉!

루빈의 검이 이번엔 간부의 목을 베었다. 간신히 목숨이 붙어 있을 정도로만 정교하게 베어내는 솜씨였다. 피가 콸콸 쏟아지면서, 이제는 말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졌다.

로젠탈러의 비검.

그게 루빈을 마법사로 착각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맨 처음 날아들어 칙명부 간부의 가슴을 베어낸 이후, 허공을 그으며 연속 공격을 펼쳤으니까.

저절로 움직이는 검을 보고 보구라든지 검 고유의 능력이라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염동마법에 탁월한 마법사로 단정한 것이다.

둥둥둥둥.

루빈은 마부석을 지나치면서 저에게 날아든 비검을 가뿐히 받아냈다. 그리고 마차 문을 열었다.

기침에 시달리던 투흔인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루빈은 복면을 내려 제 얼굴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이럴 수가.”

우선 수갑이 채워진 팔부터 자유롭게 해주어야 했다. 루빈이 검으로 내리치자, 수갑이 댕강 끊어졌다.

“이건 제가 처리하죠.”

수갑을 집어 들고는 다시 마차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마차를 끌던 말이 루빈에 의해 죽어 쓰러져 있었다.

푸슉!

루빈은 검으로 죽은 말의 몸을 갈라내고, 거기에 수갑을 밀어 넣었다.

“투흔인들에게 말은 혈족과 마찬가지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나무라진 마세요. 다 필요한 일이니까.”

그러고는, 퍼뜨려놓은 암연을 빠르게 거둬들였다.

지금까지 인근 괴수들이 마차를 피해간 건 우연이 아니었다. 루빈이 깔아 둔 공격성을 띤 암연 때문에 차마 접근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괴수들이 피 냄새를 맡고 이쪽으로 몰려올 겁니다. 우리는 이만 떠나죠.”

“이놈은… 이대로 놔둡니까?”

칙명부 간부의 목숨은 아직 붙어 있었다. 하지만 문제없었다. 일부러 괴수들이 처리하도록 해둔 거니까.

죽은 말도 마찬가지다.

호송 마차가 제시간에 중간 지점에 나타나지 않으면, 머지않아 칙명부가 조사에 나설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루빈의 흔적은커녕 쿤달리트의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할 터.

루빈은 칙명부 놈들이 근처 괴수들 배를 갈라 수갑을 발견하는 상황까지 대비했다. 말을 통째로 먹어 치울 괴수들의 습성을 이용한 셈이다.

이렇게 해두면 칙명부 놈들은 투흔인 역시 괴수 습격에 당한 것으로 판단을 내릴 것이었다.

“크흐흐윽…….”

죽어가는 칙명부 간부가 몸을 부르르 떤다. 내려다보는 루빈의 눈동자는 서늘하기만 했다.

“왔군요.”

크르르르.

크르르카아.

어느새 괴수들이 사방에 몰려들었다. 암연을 전부 거둬들였더니 심지어는 루빈의 앞길까지 막아서는 놈들도 있었다. 루빈은 피식 웃으며 쿤달리트를 이끌었다.

루빈이 정면을 향해 다시 공격적인 암연을 퍼뜨리기 무섭게, 괴수들이 슬금슬금 비켜섰다.

* * *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나면서, 브리온 오러 발현자를 압송해오는 일에 차질이 생겼다는 사실이 칙명부 수장 룰포에게 전해졌다.

“흐음…….”

의외로 룰포는 덤덤했다.

그를 분노케 하는 보고가 있을 땐 피를 보는 일도 허다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애초에 룰포의 분노는 황제의 관심사에 따라 달라졌다. 이미 황제는 루빈이 첫 번째 과업을 완수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성공 여부가 중요했던 거지, 후속 조치 중에 발생한 불상사는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대륙을 주무르는 황제에게 이건 사소하다고 할 수조차 없을 만한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폐하께 말씀은 드려야겠지.’

룰포는 곧바로 황궁에 입궁할 채비를 했다. 알현을 요청하자, 회신이 있기까지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황궁 안에서조차 비밀에 싸여 있는 조직이었지만, 어쨌든 칙명부의 수장은 시종장을 거치지 않고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

피이이이잉.

알현을 요청한 지 삼십 분이 지났을 쯤, 황제의 집무실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던 룰포의 통신석이 빛을 발한다.

룰포가 황제의 목소리를 접하기에 앞서 머리를 조아렸다.

-룰포. ‘거조통제실’로 오라.

“그리하겠사옵니다, 폐하!”

허락이 떨어졌으니 당장 움직여야 했다. 그의 저택이 황궁 가까이 위치했다고는 해도, 황제의 알현에 늑장을 피울 순 없었으니까.

그는 빠른 걸음으로 황궁에 입궁했고, 곧바로 ‘거조통제실’로 향했다.

거조통제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제국의 그랑버드를 통제하고 파악하는 유일무이한 제국의 지휘소였다. 유명세에 비해 실제 그 위치를 아는 이는 극소수였지만.

‘공간 접속’을 비롯한 고도의 마법건축술에 의해 만들어진 장소였기에, 오감으로는 찾을 수 없는 비밀 공간이었다.

“오셨습니까.”

공간이동을 통해 새로운 장소로 넘어가자, 한가운데 거대한 문이 있는 넓은 홀이 나왔다. 문 너머가 진짜 거조통제실이었다.

통제실을 지키는 건 두 수문장이 전부였다. 거조통제실의 중요도를 생각하면 부실한 경비 태세 같지만, 이는 오만한 생각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게 합당했다. 그 중요하다는 거조통제실을 지키는 자가 고작 둘이라면, 이들이 어느 정도의 경지를 지닌 자들인 건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둘 중, 룰포가 대화를 나눌 만한 상대는 왼쪽 기둥에 서 있는 거혈인이었다. 십여 년 전에 거혈족 여단에서 선발되어 황궁경비대로 배속된 거혈인, ‘하긴’.

방금 전 룰포에게 인사를 건넨 쪽도 바로 하긴이었다. 거혈족으로선 무의 극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 자였다.

등 뒤로 보이는 기둥의 두께가 엄청났지만, 늘 거대화 2단계를 유지하는 하긴으로 인해 얇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랜만이군, 하긴.”

그러면서 룰포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하긴이 언제나 왼쪽 기둥 앞에 서 있다면, 오른쪽 기둥 앞을 지키는 또 다른 수문장.

다만 이 수문장은 살아 있는 존재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긴의 옆에 있어서 그런가. 생긴 것만 보면 더 사람 같은 건 이쪽이란 말이지.’

황궁에 배치된 골렘 중 가장 인간형에 가까운 골렘 ‘롬’이다. 짙은 남색의 철공으로 이루어진 외형은 너무도 인간 같아서, 골렘에 대한 상식을 깨트렸다.

룰포도 실제로 롬의 무위를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골렘에 이름이 부여된 것만 봐도 얼마나 성공적으로 제작되었는지 알 수 있다.

골렘답지 않은 크기는 좀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텔마흐가 직접 배치했다는 점도 중요했다. 다른 곳도 아닌 거조통제실의 수문장으로 임명했으니 뭔가가 있을 터.

지이이이잉.

룰포와 눈을 마주치자, 롬의 두 눈동자가 붉게 점멸했다.

“통과.”

아무리 기계라지만 이런 태도가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룰포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는 정도로 참을성을 보이며 넘어갔다.

“고맙군.”

두우우우.

마침내 거조통제실의 문이 열린다.

내부는 놀랍게도 대나무가 빼곡한 숲이었다. 바람이 불자 대나무가 연달아 솨아아아아 소리를 냈다.

대나무들 사이로 나 있는 단 하나의 길 위를 걸어갔다.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황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룰포는 상체를 움츠리면서 더욱 조심했다.

“룰포. 반갑군요.”

“반갑군요. 룰포.”

겹치듯 울리는 목소리.

룰포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두 사내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한 사내가 그를 쳐다봤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얼굴은 둘이었지만, 몸은 하나였으니까.

태어났을 때부터 두 개의 목, 두 개의 머리를 지닌 인간이다. 한쪽은 말끔한 얼굴인데, 반해 다른 쪽은 털북숭이에 머리도 정돈되지 않은 모습.

“그래, 카랑카. 언제나 서로를 견제하는 그 모습이 참 보기 좋군. 아, 따로 얼굴 하나씩 인사를 나눠야 했나?”

룰포의 짓궂은 인사에 카랑은 싸늘한 표정을 지었고, 랑카는 호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카랑은 깔끔한 쪽, 랑카는 털북숭이였는데, 둘을 한꺼번에 부를 땐 그냥 카랑카라 부르면 된 다는 걸 룰포는 잘 알았다.

“황제 폐하는 잠깐 산책 중이십니다.”

“그 전까지는 거조 상황판을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카랑의 안내에, 질세라 랑카가 이어 말했다.

룰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은 거조통제관이었고, 적어도 거조통제실에서만큼은 룰포도 그들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어찌 보면, 칙명부 수장인 그보다도 더 비밀에 싸인 인물이라 할 만했다. 암살검가조차 ‘거조통제관’이라는 직책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지라도, 누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는 몰랐으니까. 그만큼 요직이라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카랑가였다. 그들의 삶은 거조통제실을 위해 존재했고, 그들의 능력은 오로지 ‘거조상황판’을 다스리기 위해 사용되었으니.

거조통제실이라는 공간에 한해, 카랑카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때였다.

“룰포.”

대나무들 사이로, 바람결에 실려 오는 목소리. 은은함이 감도는 미성(美聲)에, 룰포는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상체를 낮추었다.

“예, 폐하!”

“내 앞으로 오라.”

“알겠나이다, 폐하!”

룰포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등 뒤로 흐흐흐, 허허허 하는 웃음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

텔마흐 릴리크.

제국의 황제는 대나무들 사이에 고고히 서 있었다. 무심한 눈으로 대나무들을 둘러보다가, 이윽고 그 눈길을 룰포 쪽으로 돌렸다.

텔마흐는 가면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룰포는 황제와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빽빽한 대나무들 사이로 어찌어찌 비집고 들어가 몸을 조아릴 뿐이다.

“칙명부 수장 룰포, 폐하를 뵈옵니다.”

“보고할 게 있으면 보고해.”

“예, 폐하! 제가 이렇게 찾아뵌 이유는…….”

룰포의 보고가 이어졌다. 제도로 압송 중이던 브리온 오러의 발현자가 괴수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는 것.

“그 투흔인이 살아 있을 확률은?”

“…근처 괴수들의 배를 갈라보았는데, 아직 녹지 않은 수갑이 발견됐습니다. 살아 있을 확률을 배제할 순 없겠습니다.”

“그 투흔인과 마차에 대해 아는 사람, 누가 있지? 루빈… 그 아이도 아나?”

황제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 것 같았다. 혹시 루빈이 이 일에 개입되어 있을 확률이 있냐는 것이었다.

룰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황제 앞에서 거짓이나 계략은 무의미했으니까.

“같은 시간대, 루빈 로이넨의 행적은 동남부의 도시들에서 확인되었사옵니다.”

“…가능성이 없다는 거군.”

그 말 끝에 아주 약간의 실망감이 스친다. 정작 룰포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어 보인다 생각했지만 말이다.

“알겠다. 어차피 하네케의 핏줄이 발견된 것은 아니었으니 상관없겠지. 그건 그대로 마무리하라. 네 실책은 묻어두겠다.”

“…폐하의 은(恩)을 입었나이다.”

“그나저나, 세이렌의 막내아들한테 임무를 내주고도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두 번째 임무는 내가 더 관심을 가질 만한 것으로 내주도록 하지. 너도 고안해 보라.”

“예, 폐하!”

“일어나라, 룰포. 같이 거조상황판이나 보러 가자. 마침 대장군을 태운 그랑버드 하나가 출발했으니.”

황제가 앞서 걸으며 말했다. 룰포가 후다닥 일어나 뒤를 따른다.

대장군을 태운 그랑버드라. 일전에 황제가 얼핏 말해주었던 북부초원 개척 계획에 관한 일 때문일 터.

사실, 북부초원 개척 계획에 대해서는 룰포조차 한정된 정보만을 접했다. 황제의 뜻에 따라 대장군부에서 벌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장군이 칙명부라는 조직과 암살검가의 존재를 알지 못하듯, 칙명부와 암살검가도 그들이 벌이는 일에 대해 알지 못했다.

대장군부에서 추진하는 이 작전에서, 룰포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의 협조만 해주었을 뿐이다.

결국 그가 죽여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심복 중 하나였던 히탄이 ‘협곡 감옥’의 소장으로 있었을 때. 대장군부가 그곳에서 이마카룸을 두고 갖가지 실험을 하도록 조치를 해준 일처럼 말이다.

이마카룸을 포함해 1급 죄수 둘이 탈옥하는 대사건이 벌어지면서 대장군부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뻔했지만, 어찌저찌 수습이 잘 된 모양이었다.

‘때가 무르익었나 보군. 폐하께서도 내게 알려주시려 하는 걸 보니.’

텔마흐와 룰포가 다시 카랑카 앞으로 왔다.

“폐하, 상황판을 띄우면 되겠습니까?”

카랑카는 확실히 룰포보다는 덜 굴종적인 태도로 황제를 대하고 있었다. 룰포 자신보다 황제와 훨씬 가까운 사이라는 거겠지.

그나마 그들이 황제를 알현할 때 다른 점이라면, 다른 대신들 앞에서처럼 경쟁하듯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화를 전담하는 건 더 깔끔한 쪽인 카랑이었다.

‘모자란 놈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룰포는 거슬리는 눈으로 카랑카를 노려봤다.

7성의 무인이자 칙명부의 수장인 룰포가 그 누구보다 황제에게 굴종적인 건, 황궁의 그 누구보다도 텔마흐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였다.

대다수가 그저 황족의 피를 물려받았기에 대륙을 주무를 수 있는 인물로만 알고 있지만, 그건 사실상 텔마흐를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

카랑카는 제국의 지배자가 대륙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절대적인 힘에 가까운 인간이라는 걸 몰랐다. 반신 그 자체인 것을.

“그래, 상황판을 띄우거라.”

바로 곁에서 텔마흐의 목소리가 울릴 때, 룰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카랑카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흐흐흐, 허허허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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