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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검가 로이넨-237화 (237/258)

제237화. 은벽의 기계수

쿤달리트를 초원에 들여보낸 이후, 루빈은 칼란타 군영과 히클리온을 오가며 탐색과 첩보를 이어나갔다.

어느덧 칼란타 군영은 작전 투입 마지막 단계에 돌입한 상태였다. 협곡 곳곳에 흩어져 있던 오크들은 각 부대별로 협곡의 상층부로 집결했다.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그곳에서 그랑버드의 탑승이 이뤄질 터였다.

제국군이 지원해준 시설과 장비들 중 전쟁에 쓰이지 않는 건 모두 심층부로 옮겨졌다. 심층부 입구에다가 경비병만 배치시킨 채 그대로 폐쇄한 것이다.

‘여기 있을 거야.’

루빈은 계속해서 폐쇄 구역을 돌아다녔다. 그가 찾는 건 면역 약물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기계.

오크들은 한참 전에 면역체가 형성됐기에 불필요해진 기계를 심층부로 옮겨놓았을 거란 계산이었다.

“…….”

돌아다니는 오크 하나 없는 폐쇄 구역이지만, 루빈은 암연을 퍼뜨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움직이는 내내 기척을 죽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암연에 감지되는 오크는 없다. 그러나 들쥐와 박쥐를 비롯해 갖가지 짐승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들 중 네르하임과 연결된 놈이 있을 수도 있다.

푸르르르르.

박쥐 떼가 날아든다.

루빈은 빠르게 ‘그림자 장막’으로 벽에 스며들었다. 잠깐 천장에 매달려 있던 박쥐들은 루빈의 공격적인 암연에 반응하며 다시 푸드드득 날아가 버렸다.

‘찾았다.’

폐쇄 구역 가장 깊숙한 곳.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기계를 찾아냈다. 기계를 비롯하여 약물의 대량생산을 위한 설비도 그대로.

그런데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역시 핵심 부품을 빼놓았군.’

기계를 가동시킬 핵심 부품이 없다. 마나석을 가공하여 만든 것인데, 그게 있어야만 약물의 대량화가 가능했다. 빠져있는 자리를 보니, 애초부터 부품을 제거한 채 심층부로 내려 보낸 모양이었다.

-루빈.

그때, 루빈의 내면에서 하네케 목소리가 울린다. 내면세계로 막 돌아온 하네케는 루빈 시야에 드러나는 낯선 풍경을 보았다.

‘여긴 심층부입니다. 방금 면역 약물을 대량생산했던 기계를 찾았거든요.’

루빈은 하네케가 확인할 수 있도록 기계를 쓱 둘러봤다.

‘면역 약물을 이 기계 안에 집어넣고 대량생산한 겁니다. 군영의 오크들에게 계속 투여해온 거죠.’

-그런데 지금은 가동되지 않는 것 같구만.

‘예, 지금은 가동시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요. 핵심 부품을 빼놓은 것 같습니다.’

하네케는 루빈이 왜 이 기계를 찾아낸 건지 깨달았다. 만약 대장군이 면역 무효화 약물을 가져온다면, 그걸 얻어내어 대량으로 찍어내려는 것이다.

-설마 계획이 틀어지는 건가?

그건 아니었다. 애초에 루빈은 군단 본부에도 똑같은 기계가 있는 걸 확인했던 터. 기계 안에는 가동부품이 멀쩡했기에, 그걸 가져오면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어차피 하네케도 여러 상황을 가정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중이었다. 그 여러 상황 안에는 루빈이 ‘면역 무효화 약물’을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대량생산하지 못하는 경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투흔인들의 투지는 대단해. 죽음을 각오하고 있어. 아, 맞아. 1시간 전쯤 쿤달리트가 합류했네.

‘생각보다 빨리 만났네요. 몸도 성치 않을 텐데 밤새 달렸나 봅니다.’

-송곳니부족의 영역에 갔을 때, 우연히 그쪽 행렬에 끼어 있는 걸 발견했지. 이제 쿤달리트가 쇄골부족 전사들을 이끌 거야.

기계의 위치도 확인했겠다, 루빈은 심층부에서 나와 군영의 상층부로 향했다.

칼란타 몸속에 1급 마적석이 있는 이상, 루빈은 그의 위치를 계속해서 파악할 수 있었다. 보아 하니 지금은 군영의 지휘소에 있는 모양이었다.

“…….”

‘그림자 장막’을 통해 지휘소의 벽에 은신한 루빈.

내부에선 칼란타와 네르하임이 서로 어긋나는 대화를 지속하는 중이었다. 짧은 관찰이었지만, 루빈은 두 사람이 그다지 친하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네르하임. 출격일은 아직도 안 정해진 거냐?”

“내일 대장군님께서 오십니다. 극지의 장벽을 개방할 수 있는 권한은 그분한테 있죠.”

“여기에 우리 종족을 가둬놓은 지 몇 년째인지 아나? 다들 뭐라도 죽이지 않으면 서로를 죽이기 시작할 거라고.”

“칼란타 장군이 건재한 이상 그럴 리 없다는 거 압니다.”

칼란타는 그르르르 낮게 소리를 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란타는 답답했다. 모든 게 준비됐는데 정작 출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서.

드넓은 초원이 새로운 주인을 부르는 느낌이었다. 그는 어서 그곳에 오크들의 새로운 터전을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어쩌면 대장군님께서 여기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알고 대비해두셨으면 하네요.”

“대비?”

“뭐, 대비랄 것까지도 없습니다. 오크 군단의 군세는 확실하니까요. 칼란타 장군은 그저 전장에 나갈 지휘관으로서 절제된 모습만 보여주면 됩니다.”

칼란타는 발소리를 크게 울리며 네르하임 앞에 섰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너, 지금 나보고 대장군 앞에서 굴종이라도 하라는 거냐?”

“덤프 장군께 들었습니다. 칼란타 장군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바로 대장군이셨다면서요.”

칼란타의 커다란 손이 네르하임의 얼굴을 감쌌다. 뛰어난 수혈인이래봤자 주변에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없으면 그저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손에 힘만 주면 그 얼굴을 곧장 터뜨릴 수 있는데, 그런데도 칼란타는 이성을 잃지 않고 숨소리만 거칠게 내뱉었다.

“마치 대장군을 나의 아비로 생각하라는 것 같군. 부관.”

“…그저 제국군의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군례에 따르라는 충고입니다.”

“네 말처럼, 내가 태어났을 때 너희들 대장군이 앞에 서 있었다. 인간들은 우리를 감자에 비유한다고 하지. 땅속의 덩이줄기에서 끌려나오는 게 비슷하다나.”

“…….”

“나와 같은 줄기에는 오크의 왕이 될 자가 있었다. 내가 지휘관으로 선택받았듯, 왕으로 선택받은 오크였지.”

“그건 몰랐군요.”

“내가 네놈들 눈에 희귀하다면, 나보다 열 배나 더 희귀한 존재가 바로 오크의 왕이다.”

오크의 왕은 칼란타처럼 강하진 않다. 무의 경지를 지니지 않았지만, 오크의 모든 씨족을 아우를 수 있는 권능을 지닌다. 그건 지금 이 군영에서 칼란타가 지닌 절대적인 권력보다도 더 순결한 권력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미 네놈들 대장군이 다 계산을 해둔 거였다. 오크의 장군은 필요해도, 오크의 왕까진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칼란타의 눈이 이글거렸다. 마치 광기에 휩싸이려는 것 같아서, 네르하임은 숨을 들이켰다.

“…….”

그러나 칼란타는 이성을 잃지 않았고, 꿋꿋이 분노를 삼켰다. 그러곤 손을 휘저으며 네르하임을 내보냈다.

대장군이 여기에 들른다 해도 상관없다. 그 빌어먹을 얼굴을 다시 보면 오히려 이 작전을 성공하고 싶은 의지만 돋울 테니까.

‘흠, 그렇단 말이지.’

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던 루빈으로선 뜻밖의 발견이었다. 제국에 대한 칼란타의 반발과 증오. 어쩌면 전쟁 중에 그걸 이용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현재 제국의 대장군으로 생각이 번졌다.

‘하네케, 레먼리브를 알고 있었나요?’

레먼리브 카이트.

회귀 전, 하네케 사후 대장군 직위를 이어받은 자였다. 최근 루빈이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그는 서부군단장과 제도방위단장을 거쳐 대장군에 올랐다.

-알다마다. 전우라면 전우이고, 호적수라면 호적수이지. 레먼리브도 이제 엄청 늙었겠군.

하네케와는 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 노장이었다. 지금은 팔십을 넘어 구십 줄을 내다보는 터라, 황궁과 대장군부 사이에선 차기 대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레먼리브의 무위는 그다지 녹슬지 않았겠지. 그러고 보니, 암살검가 토벌전 당시 레먼리브는 없었다 하지 않았나?

‘예, 그때의 대장군은 또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레먼리브는 사망했거나 은퇴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하네케의 머릿속엔 레먼리브의 모습이 그려졌다. 역시나 얼굴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레먼리브의 상징과도 같은 오른팔.

괴수를 토벌하던 중에 팔이 잘려나간 레먼리브는 마공학의 도움으로 골렘과 비슷한 기계수(機械手)를 얻었다.

보이는 각도에 따라 은색과 푸른색이 감도는 그 철공의 팔 때문에, 제국군 내에서 그의 별명은 ‘은벽의 기계수’였다.

여러모로 황제가 좋아할 만한 군인이었다. 황제가 욕망하는 부분을 정확히 알아내어 앞서 움직이는 자였으니까.

아마 치밀하게 준비된 이 개척 계획도 그의 머리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이번 작전에서 레먼리브가 전적으로 나서는 일은 없어도, 실패하면 영향을 받긴 할 테지.

하네케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전우의 제복을 벗기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 * *

휘이이이.

상공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거세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제복에 달린 훈장이 흔들렸다.

“후우…….”

대장군 레먼리브는 숨을 내쉬며 그랑버드의 위를 걸었다. 그의 거한에 맞춰 제작된 붉은 망토가 펄럭였다.

“정말이지 광활하구나.”

떠오르는 태양빛 아래, 시야에 가득히 번져 있는 초록의 땅이 보인다. 북부초원은 기회의 땅이 분명했다. 황제가 욕심을 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깨어나셨습니까, 대장군.”

그랑버드의 조종석까지 걸어가니, 조종사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그랑버드의 일차 통제권은 거조통제실에 있고, 그로부터 조종의 권한을 받은 자가 조종석에 앉을 수 있었는데, 이자가 바로 그였다.

“히클리온까지 얼마나 걸리지?”

“이제 30분 남았습니다. 현재 군단장 덤프에게 통보된 상태입니다.”

“적당하군.”

레먼리브는 몸을 돌렸다. 거기엔 참모를 비롯한 그의 수행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참모.”

“하명하십시오, 대장군.”

“정비사를 불러.”

“팔을 정비받으시려는 겁니까?”

레먼리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참모는 서둘러 병사들에게 지시해 의자와 탁자를 대령시켰다.

대장군은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의자에 앉고, 그 오른팔을 탁자에 쿵 올려놓았다. 곧 새벽잠을 밀어내고 부리나케 뛰어나온 정비사가 긴장한 얼굴로 탁자 앞에 섰다.

“제군. 팔을 정비한 지 꽤 됐다. 녹슨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도록.”

정비사는 침을 꿀컥 삼키고는, 장비를 펼쳐놓았다. 정비사는 골렘 제작으로 유명한 카포티니 마법학교 출신이었다. 마법사이기도 한 그는 오랫동안 골렘을 정비해오다가, 수년 전에 대장군의 정비사로 배속된 터였다.

“대장군에 오르고 나서 지금껏 기계수를 쓸 만한 날이 없었지. ‘모든 면에서’ 정상 작동하는지 확인해.”

“모든 면에서… 말씀이십니까?”

정비사가 알기로, 이번 작전에서 대장군이 그 무위를 떨칠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대장군이라는 직급은 규모가 훨씬 큰 전쟁에서도 쉬이 움직이지 않는 법이었다.

“내가 힘쓸 일은 없어야겠지. 하지만 오래 준비한 작전이다. 모든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살펴보겠습니다.”

정비사는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이고는, 레먼리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기계수 특유의 차디찬 느낌이 전해졌다.

피이이이잉.

어깨에서 빛이 퍼져 나오더니 레먼리브의 기계수 위로 검은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선을 따라 기계수가 척척 갈라지면서, 이내 팔의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인간의 신체와 기계의 연결이라는, 복잡하고 섬세한 마공학의 결과물.

‘대장군이 기계수를 이식받았을 때가 오러 6성이라 했지. 그만한 경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기계수를 살피는 한편, 정비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나 이런 팔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또 제아무리 아메릭마나에서 만든 기계수라 할지라도, 그걸 이식할 수 있는 이는 대륙에서도 손꼽혔다.

“다 됐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이상이 없습니다.”

“대장군, 히클리온 상공에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조종사도 도착 사실을 알려왔다. 레먼리브는 의자에서 일어났고, 고개를 들어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러곤 명령했다.

“하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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