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40화 (240/258)

제240화. 사냥

휘이이이이.

바람 소리가 거세다.

엘키오는 적운을 멈춘 채 그랑버드를 기다렸다. 그랑버드는 두 시간 전쯤 장벽을 넘어 극지로 들어갔던 터.

두 그랑버드 중 하나만 지나갔으니 이 역시 예상대로였다. 나머지 그랑버드는 다른 비행로를 택하여 극지로 향했을 테니까.

콰아아아아…….

둔중한 울림이 아득하게 전해진다. 오크들을 수송했던 운반함을 내던진 모양이다. 이젠 그랑버드가 돌아 나오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밤이 끝나려 하는군.”

엘키오의 눈빛이 한결 짙어졌다.

어느덧 해가 뜨고 있다. 괴수들은 밤새 쇄골부족의 영역을 돌아다녔지만 만족스런 먹잇감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오크 부대 역시 마찬가지일 터. 밤새 전진하여 가장 가까운 부족의 영역을 습격하려 했겠지만, 거기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테니.

“그래도 첫 번째 밤은 고요히 지나간 것 같군.”

프시시시싯.

“그래, 지금까지는 말이지. 해가 뜨면 새로운 국면이 시작될 걸세.”

하네케는 그렇게 말하곤, 투흔 아이들을 위해 피워놓은 모닥불을 꺼트렸다. 스윽 아이들을 둘러보니, 다들 투흔푸 안에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밤을 보내는 중이었다.

“곧 그랑버드가 올 걸세, 엘키오.”

“그랑버드 냄새야 당신보단 내가 더 잘 맡을걸. 그나저나 지상은, 준비는 다 마친 건가?”

“그랑버드가 어디로 추락할지 몰라 흩어져 있네. 미끼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쪽 투흔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때.

휘우우우웅! 휘우우우웅!

어스름해진 세상 속 커다란 날갯짓 소리가 울렸다. 극지로 들어갔던 그랑버드가 이쪽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처음엔 장벽 너머의 작은 점으로만 보였다. 그 거대한 몸체만큼 빠르게 거리를 좁혀왔다.

“왔군.”

“엘키오, 질문이 있는데 말일세. 그랑버드가 방향을 틀어 적운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되지?”

“적운의 결계는 견고하다. 뭐, 그런 사태까지 일어나진 않겠지만 그랑버드의 공격을 열 번 이상은 거뜬히 버텨낼 수 있지. 하지만 놈들은 적운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할 거다.”

더군다나 여기엔 하네케가 버티고 있으니까.

엘키오로선 하네케 덕분에 부담 없이 사냥에 나설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아무리 라유비아가 많이 성장했다 해도, 아직까진 하네케나 엘키오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하네케.”

“말해.”

“오히려 난 그랑버드를 죽인 다음이 궁금해. 내가 이전에 활동했던 때와는 많이 달라진 점이 있으니까.”

“달라진 점?”

“그땐 릴리크 제국과 황제가 없었거든. 거조통제실인가 뭔가, 거기서 그랑버드의 상태를 바로 알 거라고 했잖아.”

“그렇지. 나도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그건 확실하네. 거조통제관은 모든 그랑버드의 상태를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

“그럼 일이 더 어려워지는 거 아닌가?”

“아니, 내 예상엔 황궁에서 곧바로 조치를 취하진 않을 걸세. 애초에 대장군부의 수장이 여기에 와 있잖나. 그쪽에 전달하여 사태를 살펴보라고 하겠지.”

“그럼 결국 제국의 대장군도 참전하는 건가?”

“내 경험상, 그 확률은 반반이네. 사나흘의 시간을 두고 사태 파악에 나설 거고, 일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리면 대장군이 직접 나설 수도 있겠지.”

하네케가 알고 있는 레먼리브의 성격이라면 말이다.

물론, 초원은 아주 넓었다. 대장군부는 하네케가 구획해둔 전장을 찾아내는 데만도 며칠은 걸릴 터.

하네케의 계획은, 사나흘 뒤 대장군이 대략적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될 그 시점이 오기 전에 상황을 끝내는 데에 있었다. 레먼리브가 차마 달려들지 못하게끔 완전히 압도하는 것.

“무슨 말인지 알겠다. 부디 그 자신감대로 일이 펼쳐졌으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세, 엘키오.”

엘키오는 대답하는 대신 머무르던 자리에서 벗어났다. 허공을 밟으며 나아갔고, 그때마다 그 발밑으로 물결이 번졌다.

타닷, 타닷, 타닷.

잿빛 털이 나부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랑버드는 장벽을 넘어 초원 안으로 들어왔고, 그저 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랑버드의 정면에 나타난 엘키오. 그렇게 잠시, 뒤를 돌아 적운을 바라봤다. 여전히 그와 적운 사이엔 투명한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적운과의 거리를 유지해야 돼.’

원래 엘키오에겐 허공을 걷는 능력이 없다. 적운의 파수답게 모든 건 적운의 영역 안에 있을 때만 가능했다. 허공을 걷는 것부터 ‘풍뢰의 늑대’가 되는 것까지.

‘성주의 선언’ 의식 때 드러냈던 그 뇌격의 몸. 또다시 엘키오를 중심으로 뇌격이 핏줄처럼 퍼지더니, 공기의 일렁임이 거대한 늑대를 조형하기 시작했다.

프지지짓. 프지지지짓.

엘키오를 둘러싸고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엄청나 적운 위에서 막 아침을 맞이하는 아이들이 놀라 깨어났다.

아이들이 적운 바깥을 내다보려 했지만-

“위험하니까 그대로 있거라.”

하네케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 옆에 서 있는 라유비아도 그 뜻을 따르고 있었기에, 아이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어, 비가 온다!”

투둑, 투둑.

적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비가 올 거라는 엘키오의 말이 있었지만, 그게 적운 위로 떨어지는 비일 줄은 몰랐다. 적운 위에는 비를 품은 먹구름이 없었으니까.

우르르르르, 쾅쾅!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졌다. 비가 드문 투흔초원. 처음엔 신기한 듯 비를 맞던 아이들이었지만, 폭우로 변하자 결국 투흔푸 안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투흔푸 안에 옹기종기 모여 모닥불을 피운 채 몸을 녹이는 아이들.

“그랑버드의 조종사들은 아직 엘키오를 못 알아봤나 봐요.”

시선을 아이들에게서 다시 엘키오 쪽으로 돌리는 라유비아였다.

“그랑버드 앞을 가로막는 날짐승으로 생각했겠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랑버드도 엘키오를 못 알아보는 것 같구나.”

“엘키오가 말했어요, 그랑버드도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변했을 거라고.”

“그랑버드의 수명은 1백 년. 그렇다면 지금 그랑버드들 중에는 엘키오의 위력을 아는 놈들이 없다는 거구나.”

쏴아아아아아.

때마침, 엘키오가 그랑버드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허공을 딛는 물결의 파동이 거세지더니, 서서히 ‘풍뢰의 늑대’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주변으로 뇌격이 거세졌다.

하네케 말처럼, 지금 그랑버드 중에선 엘키오의 위력을 아는 개체는 없다. 그러나 그랑버드라는 종 자체로 확대해보면, 그 위력을 모른다고 할 수도 없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공포가 일종의 본능으로 자리 잡았으니까.

그랬기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조그마한 늑대에 그랑버드는 왠지 모를 공포를 느꼈다.

그우우우우우.

울음소리를 내는 그 순간, ‘풍뢰의 늑대’가 완성되었다. 풍뢰의 늑대 한가운데 자리잡은 엘키오가 달려드는 동작을 취하자, ‘풍뢰의 늑대’ 또한 똑같은 동작을 펼쳐나갔다.

그랑버드가 한낱 작은 새로 느껴질 만큼 ‘풍뢰의 늑대’는 거대했다. 그 아가리를 벌려 저의 목구멍에 박아 넣자, 그랑버드가 퍼드덕거리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풍뢰를 타고, 뇌격이 그대로 전해졌다. 천둥이 쉴틈없이 울어댔다. 이 모든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보는 하네케는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그랑버드의 천적’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랑버드 위에 누구를 탑승시키느냐에 따라 양상이 변할 순 있겠지.

그러나 지금처럼 조종사와 조수뿐이라면, 그랑버드는 절대로 엘키오에 대항할 수 없다.

그우우우우우!

허공에서 버둥거리며 처절하게 울어대는 그랑버드. 제국의 상징과 같은 그랑버드에게 연민을 느끼는 때가 올 줄이야.

“…끝났군.”

‘사냥’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풍뢰의 늑대 입에 물린 채로 축 늘어져버리는 그랑버드.

엘키오는 하네케 쪽을 바라봤다. 그랑버드를 이대로 땅에 내려도 좋겠냐는 의중을 묻는 것이었다. 하네케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엘키오가 입을 벌리며 물고 있던 그랑버드를 놔주었다.

휘이이이이이. 콰쾅!

그랑버드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퍼져 있던 투흔의 전사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악어 수인과 코뿔소 수인들이었다.

“이거, 꿈인가? 정말로 그랑버드가… 죽었잖아.”

거구의 코뿔소 수인이 뾰족 솟은 코로 그랑버드를 툭툭 건드렸다.

옆에 있는 악어 수인은 단단한 입으로 그랑버드의 살점 일부를 뜯어냈다. 뜯겨져 나온 살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걸 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꿈은 아니야.”

“어, 저기. 전술가 할아범 내려온다.”

적운에서 내려온 하네케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악어 수인들은 서둘러서 그랑버드를 해체하라. 살점을 잘라내 적운의 후미에 올려놓도록.”

“그랑버드의 몸통 절반은 그대로 끌고 가면 되는 거지?”

“그래, 괴수들이 따라붙게끔.”

작업이 빠르게 이어졌다. 수백의 코뿔소 수인들은 굵은 줄을 통해 그랑버드와 자신의 몸을 연결시켰다. 거기에다가, 수천 마리 투흔마도 동원되었다. 곧 그들에 의해 그랑버드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악어 수인들은 그랑버드의 몸을 헤집었다. 살점들을 큼직하게 뜯어내어 적운 위로 날랐다. 살점들은 나중에 괴수들의 움직임을 유도할 때 쓰일 터였다.

‘괴수들과 오크 군단의 이른 조우.’

그게 하네케 전술의 첫 번째였다. 그 장소는 하네케가 급히 구축해놓은 전장이었고, 이제 거기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예정이었다.

다시 적운으로 올라오자, 라유비아가 물어왔다.

“할아버지. 지금쯤 루빈은 ‘면역 무효화 약물’을 얻어냈을까요?”

“5성의 장교가 둘이나 지키고 있다면… 쉬운 싸움은 아닐 텐데. 생각난 김에, 잠시 루빈의 내면으로 돌아가야겠구나. 현 상황을 알려줄 겸, 필요하면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알겠어요.”

스스스스슷. 하네케가 다시 라유비아의 그림자 속으로 돌아갔다.

* * *

루빈의 내면으로 돌아온 하네케.

‘피… 시체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루빈의 시야가 공유되자마자 보인 광경이다. 루빈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럴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오르락내리락하는 루빈의 시야. 역시나 꽤 거친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네케, 돌아왔군요.’

-내가 싸움이 한창일 때 돌아온 건가? 꽤 버거워 보이는데.

‘지금 막 끝났습니다. 예상 밖이라는 건 인정해야겠네요. 덤프가 대장군의 명을 제대로 받들었거든요. 이렇게까지 준비해뒀을 줄은 몰랐는데.’

원래 은밀하게 ‘면역 무효화 약물’만 탈취해 가려던 루빈이었다. 목격자가 없게끔. 만약 목격자가 있다면 그자만큼은 살려두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덤프 장군은 특별 제한 구역을 아주 견고하게 구축해놓았다. 5성 경지의 장교를 둘 붙여두라는 대장군의 명을 거스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4성 장교도 둘이나 붙였다. 거기에다가 수준급 병사들도.

시간이 충분했다면 더 좋은 때를 기다려 은밀히 움직였겠지만, 루빈에겐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결국 그는 계획을 수정하여 기습과 돌파를 감행했다.

그 결과가 지금 특별 제한 구역에 낭자한 피와 시체들이었다. 이곳을 지키던 병사들이 절명한 모습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끄흐어억…….”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 마지막 남은 생존자였다. 5성의 장교이자 마법사. 그는 자신 앞으로 걸어오는 복면의 사내를 바라봤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군. 우리가 지키던 게… 무엇이기에… 너 같은 자가 노리는 거지?”

너 같은 자. 그건 방금 전까지 목격했던, 경이롭다 말할 수 있을 만한 경지에 따른 표현이었다.

자신의 얼음 마법을 집어삼켜버리는 괴이한 검. 뿐만 아니라, 침입자가 지닌 또 다른 단검은 허공을 날아다니며 병사들의 목숨을 거둬가기까지 했으니.

“…….”

루빈은 아무런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제한 구역 한가운데로 걸어가 철제 상자의 내부를 확인하고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칼란타 군영이 머물렀던 협곡으로 향해야 했다. 그곳에서 무효화 약물을 대량생산해야 한다. 그 과정만으로도 반나절은 소요될 테니, 서둘러야 했다.

그 앞을 지나갈 때, 장교가 그 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

푸슉.

루빈의 비검이 날아들어 장교의 심장에 박혔다. 그러자 다리를 붙잡으려던 손이 스르륵 쓸려 내려갔다. 최선이었다. 적에게 한마디 대답해줄 시간조차 아까웠으니.

루빈은 제한 구역 밖으로 나와, 히클리온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밖에 매어둔 투흔마를 타고 질주를 시작하고서야, 비로소 물었다.

‘하네케. 현재 초원 상황은 어떻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