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41화 (241/258)

제241화. 내부의 적

오크 군단이 출격하고 남겨진 칼란타 군영.

군영은 텅 비어 있었다. 폐쇄 구역을 지키는 오크조차 없었다. 덕분에 루빈은 수월하게 폐쇄 구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머지않아 칼란타 군영은 붕괴될 테니까.

오크 군단의 흔적이 남는 걸 원치 않는 북부2군단이었다. 군영을 파괴함으로써 그 흔적을 지우는 것, 이 또한 작전 과정의 하나로 나와 있었다.

‘시작해볼까.’

심층부 폐쇄 구역에 놓여 있는 대량생산 기계.

루빈은 그 앞에 서서 아공간 주머니를 펼쳤다. 아공간 주머니에는 특별 제한 구역에서 탈취한 철제 상자, 그리고 또 다른 제한 구역에서 챙겨온 가동 부품이 있었다.

전에 확인했던 대로, 이곳의 대량생산 기계는 가동 부품이 제거된 상태였다. 그래서 군단 본부의 대량생산 기계에서 부품까지 챙겨온 것이다.

딸각.

예상대로 정확히 일치하는 가동 부품. 마적석 기반이었기에, 장착하자마자 연결 마법이 발현된다. 기계는 불빛을 내뿜으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피이이이잉.

그다음, 철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고이 보관된 ‘면역 무효화 약물’ 10병. 루빈은 빠르게 대량생산 작업에 나섰다.

철커덕, 철커덕.

루빈이 원본 약물을 올려놓자, 곧바로 대량생산이 진행되었다. 약물 일부가 새로운 병에 담기고 그게 희석되는 과정이 반복되어 이뤄졌다.

희석된 약물들은 원본과 똑같은 크기의 병에 담겼다. 그런 다음, 그것들은 수십 개씩 묶여 자루에 실렸다.

루빈은 원액 두 병만 남겨두고 모두 대량생산에 쓸 작정이었다. 그렇게 생산되는 양은 엄청났지만, 다행히 시설과 장비는 충분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무효화 약물은 투흔을 지키는 힘으로 남을 것이다. 제국이 면역력을 갖춘다 한들, 무효화 약물이 있다면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될 테니.

폐쇄 구역은 물론, 히클리온을 완전히 벗어난 루빈은 생각했다.

‘지금쯤 탈취 사실이 알려졌겠군.’

시간을 보니, 제한 구역 병사들의 교대 시점이었다. 하지만 떠들썩하진 않겠지. 군단은 이 사건을 외부에까지 확장시키지 않을 생각이고, 제한 구역의 장교들조차 자신들이 뭘 지키는지 모르고 있으니까.

물론 오크 군영에 있는 대량생산 기계의 상태를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추리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제국군은 언제나 루빈보다 한발 늦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전말을 알아낸 그들이 당장 자신을 쫓는다고 해도, 이미 루빈은 넓디넓은 북부초원으로 들어간 다음일 테니까.

* * *

“빨리 결정해야 해!”

“…알아, 나도 안다고.”

“벌써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알아? 시간이 늦어지면 일만 더 심각해진다니까.”

두 개의 얼굴이 서로를 노려보며 입씨름을 벌였다. 하나의 몸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얼굴, 거조통제관 카랑과 랑카였다.

오른팔과 왼팔이 제각기 가까운 쪽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왜 죽은 거지? 왜?”

랑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면서 ‘그레하임의 심장’을 바라봤다.

거조상황판 ‘그레하임 심장’에선 혈관이 뻗어 나와 제국의 모든 그랑버드의 상태와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몇 시간 전. 북부초원에서 활동 중이던 그랑버드 하나가 죽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그렁버드가 극지에서 빠져나온 그 직후였다. 심장에서 뻗어난 혈관 하나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터져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카랑카가 거조통제관으로 있으면서, 그랑버드가 이렇게 갑자기 죽어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원래 거조통제관은 그랑버드의 시야를 공유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능력마저 발현되지 않았다. 단순히 그랑버드의 죽음을 넘어서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암살검가 가주가 암레트를 죽였던 그때하고 달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렇게 그랑버드가 죽어버리는 게 말이 돼? 어쩌면 극지 괴수한테 당한 게 아닐까? 거긴 엄청나게 거대한 괴수도 있다고 했잖아.”

카랑이 말했다. 수염이 덥수룩한 랑카에 비해 훨씬 말끔한 얼굴이었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피부가 창백해지고 입술이 시퍼레졌다.

그들은 차라리 극지 괴수 때문에 그랑버드가 죽었기를 바라는 입장이었다.

두 얼굴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 죽음의 원인이 자신들한테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레하임 심장’을 잘못 다뤄서 발생한 사고라면?

“카랑! 내 말 들어! 원인만 생각하다가 일이 더 심각해지고 있잖아. 뜸 들이다 제때 대처하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보다 못한 랑카가 나섰다. 이미 몇 시간을 흘려보냈지만 지금이라도 나서야 했다.

그는 거조통제실 밖으로 나가 현재 상황을 알리려고 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몇 걸음 옮기기 무섭게 우뚝 멈추고 말았다. 나가지 않으려는 카랑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몸이 하나인 이상, 서로 합의가 안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디 가려는 건데? 설마 황제께 이 사실을 알리려고?”

“…그러기엔 너무 늦었지. 일단 룰포를 불러보자.”

“룰포? 칙명부 수장?”

“그자가 조사에 나서면 진상이 바로 파악될 거고, 또 암살검가나 칙명부를 이용하면 어쩌면 수습하는 것도 가능할 거야.”

물론 그렇겠지. 칙명부는 그만한 능력을 지닌 조직이니까. 암살검가는 그보다 더 뛰어난 놈들이고.

그러나 카랑은 주먹을 들어 랑카의 얼굴을 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황제도 아닌데 칙명부를 이용하겠다? 그건 멍청하고도 위험한 발상이었다. 칙명부를 이용할 수 있는 건 오직 황제뿐이었다.

더군다나 칙명부 수장 룰포가 그들을 아니꼽게 본다는 건 바깥에 서 있는 수문장 골렘 ‘롬’조차 알고 있을 터. 룰포가 그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으면 섰지, 도와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어쩌자고? 혹시라도 우리 실수로 그랑버드가 죽은 거면 어떡해? 그럼 황제께 자비를 구하는 건 불가능해.”

“봐봐, 랑카. 지금 북부초원 쪽에 그랑버드 두 기가 더 있잖아?”

랑카는 ‘그레하임 심장’을 돌아봤다. 카랑 말처럼 북부초원 인근으로 그랑버드가 두 기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죽은 그랑버드와 똑같은 임무를 수행했지만 다른 비행로를 통해 북부2군단 본부로 복귀한 그랑버드.

또 다른 하나는, 북부 지역을 시찰 중인 대장군을 위한 것이었다.

“북부2군단장 덤프한테 그 인근을 조사하라고 하자. 그랑버드가 추락했다는 걸 말하진 말고.”

카랑이 말했고, 랑카는 그 의도를 바로 짐작했다.

어차피 덤프 장군은 ‘일몰 작전’의 상황을 살피러 북부초원에 들어설 예정이었으니까. 통보된 이륙 시간을 좀 앞당겨서 그랑버드 추락 현장을 살펴보라 할 수 있었다.

“하긴, 대장군을 이용할 순 없으니까…….”

황제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자들. 대장군, 칙명부 수장, 마법부 수장, 마법사여단장, 시종장 등은 거조통제관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일단 그랑버드로 그쪽에 접근하면 우리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맞아, 시각을 공유하면 되지.”

“그래, 일단 우리가 살펴보고 무슨 일인지 봐야 해. 그다음에 대장군을 이용하든 폐하께 사실을 아뢰든, 그렇게 하자.”

랑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합의에 도달하자 둘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레하임 심장 앞으로 다가가, 북부2군단의 그랑버드를 호출했다.

통신석이 빛을 발했다.

-거, 거조통제관님?

저쪽에선 조종사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그럴 것이다. 그랑버드의 조종사라 할지라도, 거조통제관의 정체를 아는 건 아니니까.

-그래, 나다. 오늘 비행로를 좀 수정하려고 하는데. 아, 참고로 이건 황궁에서 내리는 명이다.

카랑이 대표로 이야기에 나섰다. 황궁에서 내리는 명이라는 말에, 조종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하, 하명하십시오!

* * *

“제기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손에 갖다 대려던 덤프는, 담배 한 개비가 이미 입에 물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멍청하긴!

결국 그는 양손에 한 개비씩 들고 번갈아가며 입에 가져다 댔다. 연기를 뻑뻑 내뱉을 때마다 가슴이 더 답답해졌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내뱉어도 마음이 안정되진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았지만, 그래도.

먼저 피웠던 담배를 바닥에 눌러 껐다. 그리고 나머지 담배는 두 모금 정도 남았을 때, 다른 사람의 입에 물려주었다.

“…….”

입에 물려주어도, 그 장교는 담배를 빨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담뱃재만 자신의 가슴팍에 떨어트릴 뿐.

장교는 목이 꺾인 채로 죽어 있었다. 특별 제한 구역을 지키는 임무 수행 중에 죽은 것이다. 사망 시간은 수 시간 전이었고.

덤프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처참했다. 수십 명의 병사가 죽었고, 네 명의 장교가 죽었다. 넷 중 두 명은 4성이었고, 나머지 둘은 5성이었다. 심지어 5성 장교 중 한명은 마법사였다.

“…믿을 수가 없군.”

죽어 있는 병사들의 구도를 살펴보니, 여기서 벌어진 건 완벽한 기습.

지켜내야만 했던 무효화 약물이 탈취당했다는 참담함 속에서도, 감탄이 새어나왔다.

“아무리 기습이었다지만… 이만한 장교들을 전부 처리하려면 7성은 되어야 할 거야.”

이를 들은 부관이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군단장님께선 대장군님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5성 경지의 장교 둘에다가, 4성도 둘이나 배치하지 않았습니까.”

“정상 참작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치 자연재해를 맞이한 것처럼 말이지…. 참으로 고맙지만, 부관! 그 따위 위로나 할 시간에 내가 기다리는 소식이나 전하는 게 어때?”

부관은 움찔거리며 통신석의 반응을 살피는 데나 집중했다.

현재, 습격당한 특별 제한 구역 말고도 다른 제한 구역으로 사람을 보낸 상태였다. 대량생산 기계가 놓여 있는 곳이었다.

무효화 약물을 탈취했다는 건, 현재 초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몰 작전’에 대해 누군가 파악하고 있다는 뜻과 같았다.

‘대량생산 기계의 가동 부품까지 없어진 거라면…….’

문제의 심각성은 엄청나게 커진다. 지금까지는 덤프 장군이 제복을 벗어야 하는 정도지만, 무효화 약물이 제국군이 아닌 자에 의해 대량생산 된다면…….

대장군까지 위험해지는 일이었다.

초원을 제국의 온전한 땅으로 편입시키는 계획. 10년 넘게 쌓아올린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늘 빗나가지 않는 법.

“…가동 부품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빌어먹을!”

덤프 장군의 분노에 순간적으로 그 중심으로 기압이 들썩였다. 오러를 발현하려다가 간신히 참아내는 덤프.

“가동 부품이 없어졌다는 건, 오크 군영의 기계를 작동시키려는 의도일 겁니다. 그렇다는 건 곧―”

부관은 하려던 말을 도중에 멈추었다. 덤프는 이어질 말이 무엇일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내부자의 소행. 그것도 무효화 약물과 대량생산 기계에 대한 기밀에 모두 닿아있는 내부자의 소행을 뜻하는 것이리라.

“…네르하임이군.”

“현재로선 가장 유력합니다.”

네르하임이 배신을 한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시나리오였지만, 부관 말처럼 지금으로선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아직 오크 군영에는 사람을 보내지 않았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군영을 붕괴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인근에 부대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하명하시면 가서 대량생산 기계의 상태를 살피라고 명하겠습니다.”

만약 오크 군영의 기계가 작동한 흔적이 있다면, 네르하임이 제국을 배신했을 확률이 한층 높아진다.

왜? 칼란타에게 무엇이라도 보장받은 걸까?

“네르하임과 통신 가능한가?”

부관의 표정이 한결 어두워졌다.

“지금 계속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응답이 없습니다.”

벌써 부족 하나는 쓸어버리고 다음 영역으로 이동할 시점이었다. 부족 하나를 정리할 때마다 통신을 해오기로 했던 터.

“그런데 왜 안 하는 거지? 제기랄 것! 일단 그랑버드로 가지. 어차피 초원 상황을 살피러 들어가야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이륙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지, 조종사에게 말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부관이 조종사를 찾기도 전에,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왔다. 심지어 부관을 거치지 않고 장군과 소통하기를 요청했다.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무슨 일이지?”

통신석에 대고 덤프 장군이 묻자 곧바로 응답이 왔다.

-기존 이륙 시간보다 일찍 출발해야겠습니다, 장군.

“다행이군. 그건 나 역시 자네에게 부탁하려 했던 것일세.”

-그리고 비행로를 수정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덤프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그 입장에선 기존 비행로여야만 했다. 그래야 네르하임과 오크 군단이 작전 중인 지역의 상공을 지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종사의 입에서 나온 방향은 장벽 근처였다.

“장벽 근처로? 꼭 그리해야 하나?”

-그 인근을 살펴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대장군의 명인가?”

이 부분에서 조종사가 잠시 뜸을 들였기 때문에, 덤프 장군은 이게 대장군부의 명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대장군부의 명이 아니라면 덤프가 굳이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인데.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말은, 그의 잡념을 싹 지워내버리기에 충분했다.

-거조통제관을 통한 황궁의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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