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42화 (242/258)

제242화. 피 웅덩이

북부2군단의 그랑버드 이착륙장.

통신석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 지 한 시간 만에, 덤프 장군이 이착륙장에 나타났다. 그를 위시한 ‘일몰 작전’의 지휘부가 모두 집결했다.

“통신석으로 이야기를 나눈 조종사로군. 이쪽 지휘부 전원이 탑승할 필요는 없겠지?”

“예, 황궁에서는 군단장께서 특정 지역을 살피고 그에 관해 보고하시기만을 원합니다.”

“최소한 6성의 무인이 필요하다는 건가. 조종사만 보내기엔 불안한 뭔가가 있나 보군.”

덤프 장군은 담배를 입에 무는 동시에 손가락으로 지휘부 인원들 몇몇을 지목했다. 자신과 함께 갈 사람과 남을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다.

“군단장님, 저는 남습니까?”

“그래, 너는 남는다. 부관.”

그러면서 덤프 장군은 부관을 한쪽으로 끌어당기며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나는 황궁에서 살펴보라는 곳을 확인한 뒤, 곧바로 오크 군단이 작전 중인 지역으로 이동할 거다. 그동안 너는 나와 통신석으로 소통하는데, 병력을 운용해 오크 군영을 살피도록 해라. 대량생산 기계가 가동됐는지 확인하고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순간 말을 끊은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장교들에게 손짓했다. 그 손짓을 이해한 장교들이 먼저 그랑버드에 탑승했다.

“초원에선 통신이 원활하지 않다는 거 알지? 별일이 없다면 날이 저물기 전에 내 쪽에서 너한테 송신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너는 알아서 대장군께 관련 사실들을 보고하도록.”

“어느 정도 보고하면 되겠습니까?”

“무효화 약물이 탈취된 것과 황궁에서 나한테 직접 지시를 내린 사실까지.”

황궁에서 내려온 명이었고 상황이 긴급하기에 대장군을 거치지 않고 따르지만, 어쨌든 그들 소속은 대장군부였다.

시기의 문제일 뿐이지, 원래대로라면 대장군에게 보고되어야 할 사실들이었다.

“별일 없으실 겁니다, 장군.”

덤프는 씩 웃어 보이며 그랑버드 쪽으로 돌아섰다. 그야말로 부디 그러길 바랐다. 아무 일도 없기를.

그러나 정반대의 예감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절대 탈취되어서는 안 되는 약물이 탈취된 데다가, 황궁에서 내려온 지시도 심상치 않았다.

‘대장군을 거치지 않은 황궁의 지시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휘우우웅! 휘우우웅!

그랑버드가 날갯짓과 함께 이륙했다. 그들이 우선적으로 향하는 곳은 장벽 인근. 정확한 위치는 조종사만이 알고 있었다.

“조종사, 우리가 뭘 살피러 가는 거지?”

“거조통제관의 명에 따라, 그건 답변해 드릴 수 없습니다.”

“거조통제관? 흐음… 내가 주도하는 작전에 대해 내가 알 수 없다니.”

조종사는 신경질을 내면서 돌아서는 군단장을 슬쩍 쳐다봤다. 상대가 거조통제관이라면 군단장도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사실, 조종사라 해서 덤프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살피러 가는 게 무엇인지, 그 역시 알지 못했으니까.

다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건 너무도 잘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심각성을 증명하듯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귓가엔 거조통제관의 침음이 울리는 중이었다.

-흐음… 흐음…….

조종사에게만 허가된 통신석. 거조통제관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데다 그 성능도 월등했다.

제국군의 다른 통신석들은 회선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초원 안에서는 불능 상태이기 일쑤였지만, 그랑버드의 통신석은 그 원리부터 달랐다. 그래서 엄청난 거리 차가 있는 황궁과도 끊어짐 없이 연결된 상태였다.

‘이 부근인데. 왜 안 보이는 거지?’

이륙한 지 세 시간이 흘렀을 때,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극지 장벽으로부터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조종사가 살피기엔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그랑버드는 계속하여 선회했다.

-조종사. 그 근처에 뭐가 보이지?

통신석 속 거조통제관이 물었다.

“장벽이 보입니다.”

-혹시 그랑버드가 보이지 않아?

“그랑버드 말씀이십니까? 하늘은 텅 비어 있습니다.”

조종사가 하늘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구름들도 높이 솟았고, 햇빛만 강렬하게 비치는 중이었다.

-하늘 말고, 땅에 말이야!

통신석이 커다랗게 울렸다. 깜짝 놀라 귀를 떼어내는 그 모습을, 탑승자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랑버드를 지상에서 찾는다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종사는 조수를 시켜 그 일대를 살피도록 했다.

그런데 그때.

“이봐.”

“예, 장군.”

“우리가 이 부근을 살피려는 이유, 혹시 저것 때문인가?”

덤프 장군이 한쪽을 가리켰다. 조종사는 잠시 조종석에서 나와 아래를 내려다봤다.

처음엔, 초원 위에 번져 있는 얼룩처럼 보였다. 그런데 왠지 그 얼룩이-

“저 정도 피를 흘릴 만한 거라면… 얼마나 큰 괴수이려나.”

덤프 장군의 무신경한 말에 조종사는 괜히 침을 삼켰다. 장군이야 이 임무가 그랑버드를 탐색하는 중이라는 걸 모르니 저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저건 틀림없는 그랑버드의 흔적이었다.

“일단 비행 고도를 낮춰보겠습니다.”

조종석으로 돌아온 그는 통신석에 대고 말했다.

“통제관님, 그랑버드 흔적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래? 상태가 어때?

“상태가…….”

또 호통이 이어질까,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리라는 말을 할 수가 었다. 결국 그는 그랑버드의 시야를 통해 직접 보여주기로 했다.

이윽고, 그랑버드가 방향을 틀어 하강하기 시작했다. 널찍한 연못과도 같은 피 웅덩이를 확인한 거조통제관이 놀라 소리쳤다.

-저게 뭐야?

“아무래도, 피 웅덩이인 것 같습니다.”

-이 머저리 새끼야! 그건 나한테도 보인다고! 그랑버드는?

“…그랑버드는 보이지 않습니다.”

피 웅덩이 위에 그랑버드의 거대한 깃털이 어지럽게 둥둥 떠 있었지만, 정작 그랑버드는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초원 그 어디에도.

-착륙한 다음에 군단장한테 그 주변을 탐색해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곧 그랑버드가 지상에 내려섰고, 조종사는 탑승자들에게 거조통제관의 명령을 전달했다.

지휘 체계에 어긋나는 명령에 장교들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군단장의 손짓에 곧바로 경례를 붙이고는 그랑버드 아래로 내려섰다.

“뭔가 수상한 게 있으면 곧바로 보고해.”

덤프 장군도 초원으로 내려갔다. 그는 담배를 태우면서 초원의 광활함을 두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피의 웅덩이 또한.

‘거대괴수가 죽은 건가? 장벽을 넘어온 괴수들이 이리로 온 거 같은데… 그 과정에서 커다란 놈 하나를 뜯어먹은 건가. 그러기엔 흔적이 너무 깨끗한데…….’

실제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추측들.

해가 떠오르던 시점에 여기에 그랑버드가 추락했고, 투흔의 전사들이 사체 절반은 떼어내고 나머지는 질질 끌며 괴수들을 유인하고 있다는 걸 상상할 순 없었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그들 머릿속엔 그만한 개념이 움트는 것조차 어려웠으니까.

모든 투흔족이 수인화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거대한 적운과 풍뢰의 늑대가 이 전쟁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

거기에 죽은 대장군이 모든 걸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장군, 이걸 확인해 보시지요.”

“뭐지?”

“이 부분부터 땅이 파여 있는데, 죽 이어집니다. 뭔가가 여기서부터 거대괴수 사체를 끌고 이동한 것 같습니다. 방향은 서남쪽이고, 그 뒤를 이어 괴수들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덤프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초원의 중앙으로 향하고 있구나.”

“그리고 이것도…….”

피 웅덩이 한가운데까지 들어갔던 장교가 말했다. 옷 전체가 피로 적셔진 그가 들고 나온 건, 큼직한 깃털들이었다.

“이것들, 그랑버드의 깃털로 보입니다.”

“…그랑버드와 관련이 있는 건가. 게다가 황궁의 명이라고는 했지만, 거조통제관을 통한 것이기도 하고…….”

덤프 장군은 고개를 까딱였다. 일단 다시 그랑버드에 탑승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랑버드와 관련된 것 같다는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은 듯했다.

피에 젖은 커다란 깃털을 들고 그랑버드 쪽으로 다가갔을 때, 마치 동족의 죽음을 체감한 것처럼 그랑버드가 갑자기 우렁차게 울어댔으니까.

그우우우우우우!

귀가 뜯겨나갈 정도의 울음소리에 덤프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조종사. 피는 초원 중앙 쪽으로 이어져 있어. 아무래도 괴수들도 그쪽으로 이동한 것 같고.”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이동하죠.”

“그리고 이거.”

피에 젖은 그랑버드 깃털을 그 앞에 내려놓았다.

“그랑버드 한 기가 실종 상태인 건가? 조종사의 실수로?”

“…….”

“됐어, 자네 입장도 생각해주지. 어차피 ‘일몰 작전’ 중에 벌어진 일이니 나도 수습해야 할 의무도 있고, 자네도 자네 상관의 명을 따르는 것뿐이겠지.”

조종사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떠한 연유로 그랑버드가 추락했고, 괴수들이 그걸 먹어 치우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래도 그렇게 가정해야겠군.”

그랑버드는 다시 비행을 시작했다. 이번엔 지상에 근접한 저공비행이었다. 초원에 남아있는 핏자국과 발자국을 추적해 내가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 시간이 흘렀을 때.

“전방에… 괴수가 보입니다!”

망원경으로 전방을 살피던 장교가 외쳤다. 그러자 그랑버드도 고도를 높여나갔다. 시야가 더 트이면서 비로소 앞쪽의 상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괴수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습니다.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길게 늘어서 있다?

덤프 장군은 망원경을 받아 들어 눈에 가져다 댔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정말로 그랬다.

신기하게도, 괴수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이동 중이었다.

“뭔가가 있어.”

그랑버드가 속도를 높여 괴수 행렬을 따라붙기 시작했다. 덤프 장군은 곧바로 어찌 된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괴수들이 도중에 멈춰 서서 고기를 뜯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걸로 괴수 행렬을 조장하고, 속도를 조절하고 있어.”

“장군! 설마 칼란타의 군단의 짓일까요? 나중에 괴수들을 쉽게 궤멸시키려고?”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멍청한 오크들이라 할지라도, 칼란타의 권역 안에 있으면 용맹하고도 전략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

‘하지만… 말이 안 되는데.’

애초에 칼란타와 네르하임의 착륙지점은 여기가 아닌 동남쪽이었다. 거기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투흔부족을 궤멸시키면서 북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존에 세워진 작전을 깨부수고, 독단적으로 움직인다?

“그러기엔 오크들의 시체가 보이지 않아.”

이 정도로 일정하게 괴수 행렬의 속도와 구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든 피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고기를 가까이 가져다줘야 괴수들이 멈춰 서서 그걸 뜯을 테니까 말이다.

“고기 살점을 하늘에서 떨어트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데.”

그런데 그때였다.

“방금 커다란 독수리가 고깃덩이를 떨어트렸습니다! 괴수들이 멈춰 서서 먹고 있는 그 고깃덩이입니다!”

그 보고에 덤프 장군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네르하임.

“그런데, 저 독수리… 아니 독수리들, 뭔가 이상합니다!”

장교의 외침을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놈들이 어느덧 그랑버드 주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 둘, 셋…. 수십이었다. 독수리들은 그랑버드의 비행 속도에 맞추며 가까이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저건 뭐야?”

“장벽에 서식하던 괴수일지도 모릅니다.”

상체는 독수리의 모습이었지만, 인간형의 다리를 지녔다. 부리는 날카로웠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 그 눈동자였다. 특이하게도 흰자와 검은자가 반전되어 있었다.

“탈레스쿤, 왜 또 그랑버드가 나타난 거지? 이건 전술가 할아범이 예상하지 못한 거잖아.”

분명 인간 목소리였다. 탈레스쿤? 예상 밖? 그런 말들을 듣는 순간, 덤프 장군은 본능적으로 제 무기를 찾았다.

저들이 투흔족의 수인체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지만, 괴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으니까.

검을 빼 들며 여섯 겹의 오러를 덧씌우는 순간, 탈레스쿤이라는 놈이 부리를 움직였다.

“일단 우린 빠진다.”

“빠진다고?”

“그래, 막 그랑버드 사냥꾼이 도착했거든.”

“……!”

덤프 장군은 뒤를 돌아봤다.

저 뒤쪽으로, 그랑버드의 비행 속도에 맞춰 허공을 내달리는 거대한 늑대가 보였다.

늑대의 잿빛 털이 흩날린다. 그 주변으로 뇌격이 번지기 시작했다.

-더…덤프 자…장, 군!

기이한 늑대를 바라보던 덤프는, 자신의 품에 넣어둔 통신석이 빛을 발하는 걸 깨달았다.

“네르하임?”

-예, 자… 장군! 접니다.

소통이 원활하진 못했다. 하지만 통신석이 작동한다는 건, 어쨌거나 멀지 않은 곳에 네르하임이 있다는 의미였다.

“어디인가! 혹시 내가 타고 있는 그랑버드를 본 건가?”

-예, 봤습니다. 그… 그런데, 이거 사… 상황이 이상합니다. 투흔… 수인…….

그렇게 통신은 끊어졌다. 왜 끊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눈앞에서, 핏줄같이 촘촘한 뇌격에 감싸인 ‘풍뢰의 늑대’가 완성됐기 때문이리라.

“…….”

덤프는 한 손으로 품속에 넣어둔 두꺼운 담배들을 만지작거렸다. 다시 이 담배들을 맛볼 기회가 있을까.

이제야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네르하임은 배신자가 아니다. 그리고 ‘일몰 작전’의 앞에 정체 모를, 너무도 거대한 저항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

“모두 그랑버드를 꽉 붙잡아!”

그우우우우우!

그랑버드가 울부짖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풍뢰의 늑대’ 엘키오가 아가리를 벌리며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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