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검가 로이넨-247화 (247/258)

제247화. 터전

주둔지로 복귀한 칼란타.

그가 오자마자 한 일은, 루빈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 따위가 아니었다.

터벅터벅.

네르하임 앞에 서는가 싶더니 그의 해머와 도끼가 한꺼번에 공기를 갈랐다.

“……!”

네르하임은 주저앉고 말았다. 좀 전까지 두 눈으로 암살자와 이마카룸의 무위를 목격했다지만, 이건 또 달랐다. 지금 칼란타에게는 그녀를 향한 살기가 가득했으니까.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부지할 순 있었다. 다만 그녀뿐이었다. 주저앉은 그녀 옆으로, 페니악이 무너져 내렸다.

콰쾅!

이어지는 칼란타의 고갯짓에, 오크 병사들이 거대한 뱀의 사체를 내간다. 뒤이어 오크 부관에게 지시를 내리는 칼란타.

“(그 괴수를 잘 분배해서 적당히 다친 놈들에게 내줘.)”

“(알겠습니다.)”

“(오늘 부상자 중 2주일 안에 전투 능력을 회복 못 할 놈들은 모두 죽여라. 다른 오크들한테 그 고기를 나눠 주고.)”

인간이라면 따를 수 없는 명이었지만, 오크 부관은 덤덤히 명을 받들었다. 칼란타가 돌아옴으로써 오크라는 종족의 축이 다시 세워진 것이니까. 동족을 죽이는 오크도, 동족에 죽는 오크도 숙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터.

“크, 크허… 허억.”

칼란타는 네르하임의 목을 움켜쥐었다. 악력이 가해지자, 빠르게 흐릿해지는 의식.

“널 죽이진 않겠다. 하지만 이제부터 넌 부관이 아니라, 협상 물품이다.”

협상 물품? 그 말을 곱씹던 네르하임은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두 시간쯤 지나 깨어난 네르하임.

눈을 뜨자마자 흔들리는 밤하늘이 보였다. 주변을 돌아보고는, 오크 군단이 이동 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깨어난 그녀 모습에 오크 병사가 뒤쪽으로 말을 전했고, 뒤이어 오크토프에 올라탄 칼란타가 다가왔다.

“장군….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네르하임의 처지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양손과 양발이 결박당한 상태였는데, 더 심각한 건 그녀가 감금되어 있는 조그마한 케이지였다.

이게 원래 오크들의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기설기 얽혀있는 뼈 무더기 안에 갇혀 있었다. 두 다리를 뻗기도 힘들 만큼 비좁았다.

“윽…….”

심지어 오크의 살점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걸 보니, 뼈는 죽은 오크들에게서 발라낸 것 같았다.

그런 케이지를 긴 쇠사슬로 오크토프에 연결시켜 두고 이동 중이었다. 울퉁불퉁한 땅이 나올 때마다 케이지 속 그녀도 덩달아 들썩거렸다.

“저는 분명 장군의 출격을 말렸잖습니까. 그런데 왜 저를…….”

“거기서 어떤 놈과 싸움을 벌였다.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었어.”

“수인이었습니까? 아무래도 제국이 갖고 있는 수인화 정보에 오차가 심한 것 같군요. 5퍼센트는커녕-”

“인간이었다. 검을 쓰는 자였지. 마법을 쓰는 것도 같았고.”

전투가 다시 떠올랐는지 칼란타는 낮게 그르렁거렸다.

인간이었다고? 수인도 아닌 자가 어째서 초원에 들어와 있고, 왜 칼란타를 노린 거지?

“설마 그자를 제국군으로 판단하신 거라면-”

“그 혀를 뽑아버리기 전에,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네르하임.”

“…….”

“네놈들의 구린 속내를 도저히 참아줄 수 없구나. 물론 단 한 번도 제국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예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이다.”

“…….”

“괴수들을 청소해주겠다는 계약은 부서졌다. 애초부터 네놈들한테 그럴 의지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만.”

수인 돌격대, 부대장을 죽인 두 암살자, 그리고 자신과 대결했던 기이한 인간.

칼란타는 오크 종족을 위협하는 이 모든 것들이 제국군의 계획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 내막이 어찌됐건 중요하지 않아. 이제 우리는 우리의 땅을 일굴 테니까. 괴수는 괴수대로 살아가도록 놔둘 것이다. 오크의 새로운 땅에 침범하면, 그때마다 죽이긴 하겠지만.”

여기까지 들은 네르하임은 문득 오크 군단이 어디로 향하는 중인지 궁금해졌다.

괴수들을 처치하지 않고 자신들의 땅을 일구겠다면, 요새가 될 만한 땅이 필요했다.

원래 중간거점으로 예정해두었던 괴암지대일까? 거기라면 빠르게 요새화가 가능한 곳이긴 했다. 게다가 종의 특성상 오크는 땅을 파고들어 지하에 자신들의 터전을 구축해나갈 수도 있었고.

“……?”

추측을 이어나가던 네르하임의 머리 위로 갑자기 그늘이 드리웠다. 오크 부관. 놈이 뼈와 뼈 사이로 팔을 쑥 집어넣고는 네르하임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허억…….”

죽이려는 건 아니다. 또다시 기절시키려는 것이었다.

네르하임이 다시 깨어났을 땐, 깊은 새벽이었다.

여전히 오크 군단은 이동 중이었다. 이번에도 그녀가 깨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또다시 오크토프를 탄 칼란타가 그 앞에 다가왔다.

“계속 기절시킬 건가요?”

“네가 제법 뛰어난 수혈인인 걸 안타깝게 생각해라. 짐승들을 다뤄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잖나.”

제국과의 계약을 파기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를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덤프한테 들었었는데, 제국군 내에서도 너만 한 수혈인이 드물다고 하더군. 하긴, 변방의 성주를 지냈으니 당연하겠지.”

히베르다드의 성주가 되기까지, 온전히 수혈인의 능력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레하임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네르하임은 그 사실을 짚어내지 않았다. 제국에 굴복한 왕국들과 소수혈족이 그랑버드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다. 오크라고 다를 리 없었다.

“넌 협상 물품이다, 네르하임.”

“하아…….”

오크 군단의 부관으로 있는 것만도 본인이 추구하는 자긍심과는 거리가 먼데, 이제는 포로라니. 아니, 겨우 목숨은 부지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그런데 포로한테 팔다리가 꼭 붙어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드는데.”

“예?”

설마 팔다리를 잘라내겠다는 건가? 공포감이 엄습하는 그때, 또다시 오크 부관이 나타났다. 그는 다시 한번 목을 졸라 네르하임을 기절시켰다.

“흐업!”

다시 두 시간쯤 지나 깨어난 네르하임. 황급히 고개를 돌려 확인했지만, 다행히 팔다리는 말짱히 붙어 있었다.

오크 군단은 여전히 이동 중이었다. 칼란타가 다가왔다.

“네르하임.”

“예…….”

“팔다리를 잃기 싫다면, 대답해라.”

“뭘 말입니까?”

“내 목에 심어져 있던 거. 그게 뭔지.”

그 한마디에 네르하임의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목에 심어둔 1급 마적석을 알아차렸다는 건가?

“무슨 말씀인지…….”

일단은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오크 부관이 자기 앞으로 걸어오자, 생각을 바꿨다. 오크들한테 포로의 팔다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다만, 네르하임은 진실을 털어놓는 그 찰나에도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오크의 포로로서 최대한 버티면 된다. 제국군의 추가 조치가 있을 때까지.

‘덤프 장군이 날 버리지 않았다면 말이지.’

투흔족을 멸족시키지 않았다는 변수가 생기긴 했지만, 면역 무효화 약물을 이용한 오크족 청소 계획은 아직 유효했다.

버티다 보면 결국 제국군한테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품는 수밖에.

그래서 네르하임은 작은 진실을 내주고 대신 큰 진실을 감추기로 했다. 칼란타한테 심어졌던 1급 마적석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 면역 무효화 약물에 대한 비밀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놈들한테는 진실을 토해내게 하는 마법이나 약물 같은 게 없으니.’

오크 중에도 마법사로 설계되어 태어나는 개체가 있긴 했다.

다만, 놈들은 오크 왕만큼이나 위험한 취급을 받았다. 발견하는 즉시 제국군에 의해 제거되는 것이다.

어쨌든, 네르하임은 다가오는 오크 부관이 행동에 나서기 전에 힘껏 소리쳤다.

“말하겠습니다, 말할게요! 칼란타!”

“그래야지.”

“그러니까 말이죠, 장군의 목에 심어져 있었던 것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황족만이 다룰 수 있는 1급 마적석. 칼란타가 광기에 빠질 경우를 대비하여 심어두었다는 사실까지.

“광기에 빠진 나를 간단히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예. 제국의 입장도 생각해주셔야 합니다, 칼란타. 장군이 광기에 빠진다면, 1만 오크… 아 이젠 8천이지요, 8천 오크까지도 괴수가 되어버리잖습니까. 그걸 방지하려는 거였죠.”

“그래서 네가 내 부관이었던 거군. 날 다스리기 위해서.”

“물론, 제국이라 해서 장군이 광기에 빠지는 상황을 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말했다시피 만일을 위한 대비였을 뿐이니까요. 그런데 장군. 그렇다면 혹시 그 마적석, 지금 장군의 몸 밖에 있는 겁니까?”

“그래, 이제는 내 몸에 없다.”

칼란타는 자신의 눈앞에서 1급 마적석을 주워갔던 루빈을 떠올렸다. 만약 그놈과 다시 맞붙는 상황이 온다면…….

‘초원에서 날 광기에 빠트리는 게 가능한 인간이라면, 그놈뿐이겠지.’

그러다가, 칼란타는 오크 부관에게 또 하나의 지시를 내렸다. 이윽고 부관은 잘 벼려진 단검 하나를 들고 왔다.

“약속을 어기는 겁니까, 장군?”

기어이 자신의 팔다리를 자르려는 거라고 생각한 네르하임. 그러자 칼란타는 피식 웃었다.

“네르하임. 나한테 심어두었던 마적석, 그건 하나뿐이냐?”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정말이라고요. 그 한 개만 해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확인해보면 알겠지.”

“예, 확인이요?”

이윽고, 칼란타의 단검이 움직였다.

네르하임의 팔다리를 자르는 데 쓰이진 않았다. 단검의 칼날이 닿은 곳은 칼란타 그 자신의 몸속. 푸슉, 소리와 함꼐 검이 꽤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설마, 미친 건가?’

크르르르.

낮게 그르렁거리는 칼란타. 비록 인상을 구기긴 했지만, 그 행동엔 머뭇거림이 없었다.

칼을 찔러 자신의 몸속에 다른 마적석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마적석을 찾아낼 마땅한 기술이나 장비가 없는 상태에서는 결국 이게 최선이니까.

푸슉. 찌이이이익.

푸슉. 찌이이이익.

가만히 바라보기가 힘들 만큼 기괴했지만, 이윽고 네르하임도 그 방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칼란타의 몸이라면…….’

칼란타는 고등한 오크였다. 인간과 같은 지성과 지식, 그리고 수많은 오크를 다스릴 수 있는 지배력을 지니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피부재생력 또한 상당했다. 루빈의 검이 베어냈던 뒷목의 상처 또한 밤사이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간 터였다.

몸 곳곳의 상처를 내어 마적석의 유무를 확인하던 칼란타는 약간 거칠어진 호흡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다행히 다른 마적석은 없는 것 같군.”

“…예, 정말 다행이군요.”

“유희거리로라도 너의 팔다리를 잘라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지. 오크에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취향 따윈 없거든.”

때마침 오크 부관이 네르하임 앞으로 다가왔다. 또다시 기절해야 할 때라는 의미였다.

“그럼, 칼란타. 제가 또 기절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남의 고통을 보면서 즐기진 않는다면서요.”

“어쩔 수 없다. 오크는 인간을 믿지 못하도록 태어난 것 같으니.”

이후, 네르하임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어둠이 가시고 동이 트는 중이었다. 어느새 오크 군단의 이동도 멈추었다.

‘여기가 칼란타가 일구려는 오크의 땅…….’

암벽이 군데군데 솟아난 지형.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아무래도 중간거점으로 예정해두었던 곳이 맞는 것 같았다.

드넓은 초원에서도 요새화가 가능한 곳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오크 군단은 도착하자마자 방어 대형을 갖추었다. 일부는 요새화 작업에 착수했다. 땅을 파헤치고 바위들을 깨부수며 분주히 움직였다.

“깨어났군, 네르하임.”

“언제 또 기절하게 되는 겁니까.”

“좀 더 널찍한 감옥이 완성될 때까진 어쩔 수 없다.”

“하… 그렇다면 일단 감옥부터 만들어주신다면 감사하겠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네르하임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움직이던 오크병사들이 일순간 동작을 멈춘 것이다.

칼란타는 여러 암벽 중 가장 높은 곳을 찾아 뛰어올랐다. 한눈에 담기도 힘들 만큼 드넓은 초원. 동쪽의 지평선에서는 떠오르는 태양이 보였다.

휘이이이이.

바람이 불어왔다. 칼란타는 자신의 두 무기를 빼 들고 힘주어 움켜쥐었다. 마적석을 찾기 위해 그 스스로 베어냈던 살갗은 거의 다 아문 상태.

그리고.

그의 눈이 향하는 곳. 해가 떠오르는 동쪽 지평선을 가득 메운 괴수들이 있다.

우르르르르.

우르르르.

크고 작은 괴수들이 이쪽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마치 전투 대형을 구사하는 것처럼 길게 늘어선 채로.

여기까지 오려면 꽤 거리가 남았지만, 칼란타는 1초라도 빨리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무기를 빼 들고! 전열을 갖춰라!)”

지평선 저쪽으로 유난히 거대하고 붉은 구름이 하나 보였지만, 칼란타는 한가롭게 구름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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