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저격수
“이제 오크들도 괴수의 진격을 알아차린 것 같구나.”
하네케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칼란타의 지시를 받은 오크들이 방어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괴수에 맞춰 일렬로 늘어선 것이다.
크르르르카아!
크르르.
아직도 하늘에선 독수리 수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면서 죽은 그랑버드한테서 얻어낸 살점들을 투척하는 중이었다.
괴수들 기준으로 살점의 크기는 너무도 작아 침만 더 뚝뚝 흘리게 할 뿐이었다. 운 좋게 살점을 꿀꺽한 괴수들조차 곧바로 허기에 차서 소리를 질러댔다.
독수리 수인들로선 수월한 작업이었지만, 그렇다고 불상사가 없었던 건 아니다. 살점을 내던지다가 괴수들에게 붙들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수인들도 있었다.
또한, 앞서 쿤달리트 돌격대에선 1백여 명의 수인이 목숨을 잃었다.
“흠…….”
하네케는 뒤를 돌아봤다.
초원을 내려다보는 라유비아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쥐고 있는 흑혼검이 부르르 떨렸다. 이제 벌어질 살육전에 따른 긴장이리라.
하네케의 손이 어깨에 얹어진 다음에야, 라유비아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이건 전초전에 불과하단다, 라유비아.”
“알고 있어요. 앞으로는 황제와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겠죠.”
이제, 황제를 향한 라유비아의 분노는 희석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아비 펠키온의 죽음과 투흔인에 대한 핍박 때문이었지만, 이젠 초원을 뺏기지 않기 위한 싸움이었다.
“할아버지, 이건 언제 쓸까요?”
라유비아가 적운 한쪽에 쌓여 있는 자루들을 가리켰다.
루빈이 독수리 수인들을 통해 보내온 면역 무효화 약물. 밤새 날아왔던 독수리 수인들이 동이 틀 무렵에 가까스로 전해준 것이었다.
“저놈들이 싸우기 시작하면 해가 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 거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한데 뒤섞인 놈들 위에 흩뿌리면 될 거다.”
일몰과 함께 발생하는 ‘투흔의 해일’. 면역약물로 인해 지난 두 번의 밤 동안 움츠렸던 ‘투흔의 해일’이 다시 몰아칠 때였다.
거기에다가 쿤달리트가 이끄는 수인 부대와 그랑버드의 사체를 옮겼던 발등부족, 송곳니부족의 수인들까지.
“자정이 되기 전에 이 전쟁도 끝이 나겠구나.”
하네케 입에서 ‘끝’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라유비아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때마침, 독수리 수인들이 속속 적운으로 복귀하는 게 보였다. 더 이상은 괴수들을 살점으로 유인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미였다.
괴수들은 오크 군단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그것들로 허기를 달래려 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괴수들의 진격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앞으로 1시간 안에, 두 침입자들끼리의 살육전이 시작될 것 같았다.
“저는 아이들을 적운의 후미에 집결시킬게요.”
훗날 텔마흐와의 전쟁에서는 ‘수인부대’라는 주역으로 활약하게 될 아이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을 미리 알아봐야 좋을 건 없었다. 괴수와 오크가 섬멸될 때까지, 아이들이 초원을 내려다보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무나. 아, 그리고-”
“네?”
“놈들이 격돌하기 전에 잠시 루빈과 소통을 해봐야겠구나.”
육화를 마치고 루빈의 내면에 다녀오겠다는 의미였다. 라유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루빈은 어디에 있죠?”
“루빈은 지금-”
그런데 그때.
하네케의 예상을 빗나가는 전개가 펼쳐졌다.
콰콰쾅!
콰콰콰쾅!
이전까지는 초원 위에 괴수들의 돌진하는 발소리만 가득했는데, 그 소리를 일시에 뒤덮는 폭발음.
하네케는 뒤를 돌아 초원을 바라봤다.
‘이 폭발음, 어쩐지 익숙한데.’
실체를 파악하기 전부터 텁텁한 예감이 밀려왔다.
폭발에 따라 초원을 뒤덮는 먼지. 그런데 하필 포탄이 내리꽂힌 곳이 오크와 괴수의 중간지점이었다.
‘놈들의 충돌을 막으려는 거야.’
예감대로라면, 이건 필시 제국군의 포환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마격포(魔擊砲). 일반적인 장병이 격발시킬 수 없는, 제국군 내에서도 마법사들만이 가능한 특수포였다.
하네케는 마격포의 격발 지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면서 라유비아를 향해 소리쳤다.
“라유비아! 흑혼검을 놓으라는 말, 취소해야겠구나.”
지금은 루빈의 내면세계로 돌아갈 때가 아니었다.
그 불길한 예감처럼, 발사 지점에 마법사들뿐만 아니라 대장군 레먼리브가 있다면… 그때엔 하네케가 직접 지상에 내려가야 했으니까.
‘마격포는 마법사여단이 관리하는 전쟁화기. 북부의 3개 군단 중에는 마법사여단에서 파견 나온 마법사들도 있겠지.’
다만, ‘일몰 작전’은 극비로 치러지는 중이었다. 작전에 대한 정보가 없는 마법사들이었으니, 그들을 데리고 움직이는 제국군이 따로 있을 거였다. 필시 그는 작전에 직접 관여된 자여야만 했다.
이윽고.
“흠…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구나, 레먼리브.”
하네케의 망원경 속으로 대장군 레먼리브가 들어왔다. 레먼리브 앞으로 세 개의 포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포구(砲口)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흩어지는 연기 속 레먼리브의 대담한 눈빛이 보였다.
마격포 하나에 필요한 마법사는 세 명이다.그런데 대장군이 대동한 마법사는 정확히 아홉 명에 맞춰져 있다.
‘사태 파악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이려 했던 모양이군.’
“할아버지! 방금 폭발한 곳에서 뭔가가…….”
“결계라는 거다. 방금 포탄은 공격용이 아니었어. 결계를 만들어 괴수와 오크가 충돌하는 걸 막으려는 것 같구나.”
즉, 대장군 역시 ‘일몰 작전’이 원했던 흐름대로 가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뜻이었다.
“탈레스쿤!”
하네케가 독수리 수인을 불렀다. 탈레스쿤이 그 옆으로 다가왔다.
적운으로부터 계단을 만들어 지상에 내려가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다간 적운의 위치를 노출하게 된다.
“할아버지, 직접 내려가시게요?”
“내려가야 한다.”
“망원경으로 보세요. 블라네하고 이마카룸이 저쪽으로 가고 있어요. 두 사람이라면…….”
“그래서 내려가야 해. 저 둘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녹슬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은벽의 기계수’ 레먼리브였다. 이마카룸과 블라네가 함께 덤빈다 해도 7성의 대장군을 이길 확률은 적었다.
“루빈은요?”
루빈이라면 호각을 이루겠지. 거기에 이마카룸과 블라네의 도움까지 받는다면 틀림없이 레먼리브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빈은 당장 그쪽으로 움직이기 힘들 거다. 지금오크들 사이에 섞여 있으니까!”
그렇게 소리치며, 하네케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런 그를 낚아채듯 등에 태우는 탈레스쿤.
하네케는 곧장 검을 빼들었다.
“레먼리브의 제복을 벗기는 정도로 끝내려 했건만, 결국 내 손으로 옛 전우의 목숨까지 거두게 생겼군!”
* * *
“대장군! 결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일단 충돌은 막아낸 것 같습니다.”
“저 괴수들이 포악한 놈들이긴 해도, 결계는 견고하니 당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크들이 어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마격포를 격발시킨 마법사 사수들이 연달아 말했다.
“…….”
레먼리브는 추가 지시를 내리는 대신, 주먹을 쥐었다가 피기를 반복했다. 피이이이잉. 기계수에 감도는 은색과 푸른색의 불빛. 한순간 그 세기가 강해졌다.
“…….”
불빛을 바라보며, 레먼리브는 어제를 떠올렸다. 시찰을 하던 중에 황궁으로부터 그를 찾는다는 전언. 그리고 마주하게 된 황제의 목소리.
황제가 통신석으로 하명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긴급했고 위중한 사태라는 뜻이었다.
‘레먼리브. 지금 작전이 진행 중인 초원에서, 그랑버드가 둘이나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타고 있던 덤프도 어찌 됐는지 알 수 없다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그랑버드의 죽음은 초유의 사태였지만, 하필 장소가 비밀 작전이 펼쳐지고 있는 북부초원이었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조사단을 꾸리고 군대까지 파견하는 데에는, 시간과 공력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일단 제가 직접 가서 살피겠나이다.’
‘그러기를 원하느냐?’
황제 텔마흐의 낮게 깔린 음성이 다시금 귀에서 울리는 듯했다. 단 몇 마디뿐이었지만, 황제가 자신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대장군이 추진해온 작전. 실패를 의심하지 않았던 작전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황제의 분노를 삭이려면 그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우선 사태를 충분히 살핀 뒤, 추후 대책을 내놓겠사옵니다.’
‘네 용기가 가상하구나. 북부에 파견 나가 있는 마법사여단에서 마격포 세 문을 받아 움직이도록 하라. 그랑버드를 타고 움직이되, 중심부에 다다르기 전까지만.’
‘그 뜻을 따르겠나이다. 폐하. 그랑버드가 다시 죽는 일은 없도록 하겠나이다.’
‘아, 그리고… 마격포는 어디까지나 소모품이니, 아낄 필요는 없다.’
소모품, 아낄 필요가 없다…. 마지막 말의 의미는 명백했다.
이번 작전은 북부2군단 내에서도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고, 황제는 그 작전이 세상에 누설되는 걸 원치 않았다.
마격포를 격발시키기 위해 딸려 보낸 마법사 아홉 명. 그들도 곧 소모품이니, 일을 마치고 나오기 전에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나 역시 소모품으로 전락할 때가 된 건가.’
대장군의 퇴역이 최근 황궁 안에서 오르내리는 대화 소재가 되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황제 역시 마음의 가닥을 그쪽으로 잡은 것 같았고.
만약 더 괜찮은 쓰임새가 남아 있었다면, 단독으로 초원으로 들어가겠다는 레먼리브의 뜻을 불허했을 테니까.
“흐음…….”
레먼리브는 침음과 함께 괴수와 오크 군단의 상황을 확인했다. 한가운데에 여러 겹의 결계가 생김으로써 괴수들이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포환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오크들은 비교적 차분했다. 무기를 내리고 상황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칼란타가 날 알아봤군.’
만약, 오크와 괴수가 초원에 있는 투흔족을 섬멸한 다음 격돌했다면. 그랬다면 굳이 그 충돌을 막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초원에 들어와서 확인한 ‘일몰 작전’은 아주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기에, 멈춰세울 수밖에 없었다.
‘투흔, 이 빌어먹을 유목민족이 제국을 속이고 있었다니. 설마 저놈들이 그랑버드를 죽인 건가?’
모든 투흔족이 수인화가 가능하다는 것. 심지어 그들은 ‘일몰 작전’을 미리 파악한 것 같았고, 그에 따라 전략적으로 행동하며 오크 군단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투흔 놈들을 지휘하는 자가 누구지?’
오크 군단과 괴수를 격돌시켜 양쪽의 전력을 낮추려는 전략. 게다가 괴수의 대열을 보면 놈들을 유인하는 방식이 보통이 아니었다.
“일단 나는 오크 군단의 지휘관을 만나고 오겠다. 거기에 네르하임이 있으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너희들은-”
순간.
레먼리브는 말을 도중에 멈추고는, 기계수를 들어 올려 가슴을 막았다.
“……!”
어디선가 날아든 탄환이 기계수에 가로막혔다. 소리조차 없는 탄환이었는데.
픽.
픽.
저격수가 노린 건 레먼리브만이 아니었다. 마격포 1문의 사수, 부사수의 머리가 기우뚱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머리를 노린 정확한 저격이다.
마격포 운용 때문에 데려온 이 마법사들은 소모품답게 일개 병사에 불과했다. 마법사들은 눈앞에서 동료가 죽자, 소리를 내지를 뿐이다.
“대, 대장군!”
레먼리브는 혼란에 빠진 마법사 하나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저격수를 노려봤다.
흑표에 올라탄 복면의 저격수. 기이한 탄환무기로 이쪽을 조준하고 있었다. 흑표의 속도감에도 불구하고, 놈은 침착하게 또 다른 마법사 하나를 저격하더니-
탕!
뒤이은 한 방으로, 이번에도 레먼리브를 노린다. 대장군은 움켜쥐고 있는 마법사를 앞으로 끌어당겨 대신 맞게 했다.
“으아아악!”
“저만한 저격수가 있었나. 그런데…….”
저격수가 올라타고 있는 흑표가 왠지 낯익었다. 이마카룸. 저놈은 ‘협곡 감옥’에서 탈옥한 이마카룸이 확실했다.
“멀리서 숨죽이고 저격이나 할 것이지, 감히 내 쪽으로 다가와? 겁도 없구나!”
레먼리브는 기계수를 어깨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 순간, 그의 오러가 빠르게 기계수에 덧씌워졌다. 움켜쥐고 있던 마법사는 순식간에 불덩이가 되어 화르륵 타올랐다.
슈우우우웅!
불타오르는 마법사를 흑표 쪽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마법사가 날아가는 동안, 그에 뒤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쪽으로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