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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검가 로이넨-255화 (255/258)

제255화. 혹한의 오러

‘이 정도면 되려나?’

핏빛서리의 고유 능력과 ‘그림자 역장’에 따라, 무효화 약물의 얼음 파편들이 허공에 머물렀다.

루빈은 떠다니는 얼음 파편들에 손을 가져다 대고 ‘파공’의 휘식을 그렸다.

퍼엉, 소리와 함께 얼음 파편들이 지상으로 내리꽂힌다. 괴수와 오크들의 몸에 파편이 박혀 들어갔고, 빠르게 흡수되었다.

크르르카아!

루빈뿐만 아니라, 독수리 수인들 상당수가 제각기 방식으로 무효화 약물을 분사하는 중이었다. 등 위에 표범 수인들을 태우고 있다지만, 이따금 위기에 처할 때도 있었다.

크르르르.

오크들은 저들끼리 몸을 부둥키며 사다리를 급조했다. 하늘의 독수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그때마다, 독수리 수인들을 보호해주는 총성.

타앙- 철컥!

타앙- 철컥!

오호스 등에 올라탄 블라네가 한꺼번에 여섯 방향으로 나아가는 탄환을 발사했다.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킨 탄환은 그대로 사다리 맨 위에 있는 오크들의 목에 박혀 들어갔다. 목숨을 끊어낼 만한 파괴력은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놈들이 바닥에 고꾸라지자마자 괴수들이 들러붙었다. 오크들은 속수무책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루빈, 저놈들은?”

티나의 부리가 가리키는 곳에는 중갑을 착용한 쇤느바르토 오크들이 있었다. 칼란타가 호위 부대로 따로 빼둔 놈들이었는데, 온몸을 갑옷으로 감싼 터라 무효화 약물이 스며들 틈이 없는 것이다.

칼란타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약물에만 의존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면서 루빈은 티나의 등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뜻을 이해한 티나가 지상을 향해 쇄도했다. 목표는 칼란타였다.

칼란타의 도끼가 허공을 가르며 티나를 노렸지만, 루빈이 먼저 뛰어나갔다. 루빈은 검으로 공격을 비껴내며 칼란타를 지나쳤다. 시체들의 산에서 내려온 칼란타가 그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인간, 뭘 뿌려대고 있는 거지?”

“음,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그나저나, 나랑 싸우면서 오크들 지휘할 수 있겠어?”

“곧 죽을 놈이 괜한 걱정은…. 저번엔 내가 방심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칼란타는 쉽사리 전투를 시작하지 못했다. 저쪽에는 루빈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레먼리브와 맞섰던 인간 셋이 있었지. 신중해야 했다.

크아아아!

그때, 칼란타 쪽으로 뭣 모르고 달려드는 괴수 하나. 아가리가 유난히 커다란 놈이었는데, 칼란타는 아가리 사이로 해머를 끼워 세우고는 도끼로 그 대가리를 갈라버렸다.

쿵!

“레먼리브를 대신 죽여줘서 고맙긴 하다만, 어쨌든 네놈들 모두 내 손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칼란타는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러더니 곧바로 다시 시체 산에 올라 전장을 살폈다.

시야를 가리는 폭우가 변수이긴 했지만, 어쨌든 전장에선 여전히 오크가 압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부터 오크들이 연달아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괴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 어떤 오크는 그대로 몸이 경직되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투흔의 해일?”

정말로 투흔의 해일이었다. 먼 쪽의 오크부터 가격한 해일이, 그대로 전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두.

응집된 공기는 비가 내리면서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사방에서 반복되는 해일에 오크들은 무기를 떨어트리며 주저앉았고, 괴수들은 무릎을 꿇어버렸다.

“(이, 일어나라!)”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오크들은 칼란타의 명을 받들려 했지만, 이내 다시 고꾸라질 뿐.

입 밖으로 피를 토해내며 그르렁거리는 모습에 칼란타가 다시 소리쳤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오크들이여. 일어나라고! 고작 바람에 무릎을 꿇을 거냐!)”

지배 능력을 내뻗어도, 아무도 일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또다시 이어지는 투흔의 해일에 마지막 미동조차 멎었다.

두두두두두.

이번에 울리는 발소리는 ‘투흔의 해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던 수인 부대가 일제히 진격해 오는 게 보였다.

선두에 있는 코뿔소 수인은 뿔로 들이받으며 쓰러진 오크들을 내던졌고, 표범 수인들은 쓰러진 오크들 위로 올라타 목 깊숙이 발톱을 꽂아 넣었다.

내리는 빗줄기에, 멈추지 않는 투흔의 해일. 여기에 수인들까지 더해지자, 전장은 그야말로 지옥에 가까웠다.

투흔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켜냈다는 감격에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때.

“전쟁은 끝났다. 너희들이 뿌리를 내릴 땅은 여기가 아니었어, 애초부터.”

“애초…부터?”

칼란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루빈의 마지막 말을 반복했다.

애초부터라. 방금 공중에서 흩뿌린 액체가 ‘투흔의 해일’을 버티게 했음을 모를 수 없었다. 투흔인들에게 면역력을 없애는 약물이 존재했다니. 칼란타는 허무하게 웃었다.

(“칼란타! 명만 내려주십시오.”)

중갑 덕분에 약물이 스며들지 않은 약 3백의 쇤느바르토 오크들. 절망적인 상황에도 오크들은 칼란타를 향해 전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무의미한 전투였다. 칼란타는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너희는 모두 흩어져 살아남아라. 그게 내 마지막 명이다.)”

생존이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뒤, 칼란타는 몸 안에 흐르는 피에 집중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피가 흐르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광기.’

광기가 의식의 댐을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칼란타는 그걸 막아내려 하지 않았다. 생존이라는 마지막 과제에서 그 자신은 제외시킨 것이다.

대신, 눈앞에 있는 인간에 집중했다. 저자를 처단하는 것이 마지막 과제라는 듯이.

그에 덤덤하게 이어지는 루빈의 말.

“이번엔 끝을 보겠군.”

크르르르르.

광기에 젖은 울음만이 돌아왔다.

“이젠 이야기도 못 하겠네.”

루빈은 쥐고 있던 비검을 휙휙 그어댔다. 그러자 생존을 도모하려는 중갑 오크 셋이 픽픽 목이 잘려나갔다.

“이쪽으론 못 지나가.”

중갑 오크들은 다시 칼란타 쪽으로 돌아섰지만, 거기도 길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살아남으라는 자신의 명을 잊은 칼란타. 이미 광기가 그 몸을 사로잡은 상태였다. 중갑 오크 하나를 움켜쥐더니 단 한 번의 동작으로 몸을 두 쪽으로 찢어냈다.

바로 그때, 루빈의 공격이 시작됐다.

‘혹한의 그림자’

루빈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지금 놈은 광기를 통해 7성에 올라선 상태였다. 파괴력과 순발력 하나하나가 이전과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혹한의 그림자.’ 그건 이번에 6성이 되면서 새롭게 시도하는 검술이었다. 기존의 암살검가 검식에서 탈피한 오직 루빈만의 검술. 그 중, ‘핏빛서리’의 목소리에 따르는 것이었다.

스샤아아아아.

루빈의 동작 하나하나 냉기가 배어 있었다. 다만, 그건 ‘핏빛서리’가 검의 능력으로 뿜어내는 게 아니었다.

이 순간, 루빈의 온몸이 ‘핏빛서리’와 같았다. 검에 조응하면서 그의 암연까지도 혹한을 품게 된 것이다.

만약, 다른 암살검가 사람들이 루빈의 암연을 감지한다면 암연에 감도는 혹한까지도 마주하며 놀라고 말 터.

그뿐만이 아니다.

챙! 챙! 챙! 챙!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루빈의 검격을 막아내는 칼란타. 부릅뜬 그 눈동자에 반사되는 루빈의 오러는 이전과는 살짝 달랐다.

이전까지 루빈이 발현한 오러는 브리온 검술의 흑칠의 오러였지만, 6성에 다다른 지금은 ‘혹한의 그림자’를 통해 이전에는 없던 검술을 품게 됐으니까.

그로 인해 루빈의 오러는 상식과는 벗어난 외형을 띠었다.

검은색 오러의 테두리를 감싸는, 은백색오러. 만약 평생 검을 수련해온 이들이라면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할 광경이었다.

오러란 하나의 색깔만을 품는 법.

그런데 루빈은 오러의 진리를 뒤엎는 미증유의 오러를 발현시키고 있었다. 흑칠의 오러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모습, ‘혹한의 오러’였다.

모든 오러는 작열하는 기운을 품는데, 이 오러만큼은 그 반대였다. 작열이 아닌 냉기를 품는 것이다.

물론 루빈이라고 해서 모든 검으로 이 ‘혹한의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선, 오러의 발현체가 오직 영혼무구 ‘핏빛서리’여야만 한다. 그리고 ‘핏빛서리’로 오직 6성의 검술 ‘혹한의 그림자’를 펼쳐야만, 이 상태가 가능한 것이다.

크르르크!

칼란타는 도끼와 해머를 움직이며 루빈의 연쇄적인 공격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다. 광기가 아닌 6성의 상태였다면? 어쩌면 막아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루빈 주위로 내리는 빗줄기는 모두 공중에서 얼어붙고 있었다. 칼란타를 밀어붙이며 그 자리를 지나가면, 그제야 바닥에 떨어지며 깨져버렸다.

“도련님…….”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는 또 한 사람, 블라네. 오호스 등에 올라탄 채로 공중에서 선회하는 그녀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그녀만이 아닐 터였다.

오러의 환을 품은 자는 두 가지 색의 ‘혹한의 오러’에 전율할 테고, 암연의 환을 품은 자는 루빈이 뿜어내는 ‘냉혹의 암연’에 전율할 테니까.

“저 무기가 진짜 대단한 거 같네.”

블라네 곁으로 이마카룸이 다가왔다. 독수리 수인의 등에 타고 있는 그는, 장난스럽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기 때문만은 아니야. 무기와 도련님. 둘 다 서로를 통해 극에 달한 거지.”

루빈은 ‘핏빛서리’를 통해.

‘핏빛서리’는 루빈을 통해.

블라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루빈의 전생에서, ‘핏빛서리’의 주인이었던 세이렌조차 ‘냉혹의 암연’을 뿜어내진 못했으니까.

“춥다 추워. 내가 저런 놈과 싸웠다니.”

블라네는 슬며시 웃으며 이마카룸을 쳐다봤다. 생각해보니, 이마카룸의 공이 없진 않은 것 같았다.

루빈의 암연이 6성에 도달하는 직접적 계기. 그건 어찌 됐건 이마카룸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덕분이니까.

“그나저나 도와줘야 하나 해서 왔더니. 괜찮은 거 같네?”

블라네는 이마카룸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이제 우리도 내려가는 게 좋겠어.”

“왜? 잘 싸우는 거 같은데?”‘

물론 겉으로 보면 그렇겠지. 그러나 암연을 지닌 블라네는 알고 있었다. 루빈의 암연이 빠르게 미약해지고 있음을.

‘혹한의 오러’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경지였다. 지금이 그 첫 무대였고, 칼란타를 이렇게까지 압박한 것만도 대단한 결과.

‘아쉽지만 실험은 일단 여기까진가…….’

프스스슷.

루빈의 오러에서 은백색의 테두리가 사라졌다. 그래도 ‘혹한의 오러’ 덕분에 칼란타에게 수차례 공격을 성공한 터.

주르륵.

칼란타가 입고 있던 중갑을 부숴내고 허벅지와 허리, 어깨에 상처를 냈다. 칼란타는 광기 덕분에 고통 따윈 못 느끼는 것 같지만.

그때.

루빈 등 뒤로 이마카룸과 블라네가 내려섰다. ‘오크사냥꾼’과 ‘투흔의 불꽃’의 합류였다. 블라네는 ‘암연뢰’의 상태를 확인했고, 이마카룸은 제 발톱을 더 길게 뺐다.

이마카룸이 루빈에게 물었다

“자존심에 금이 가는 거라면, 빠져줄까?”

“넌 너희 부족의 미래를 내 자존심한테 걸고 싶나?”

“그렇다면, 제국인이 투흔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저놈을 어떻게 쳐부술래?”

“이제 기회가 온다. 저놈이 흐트러질 거니까, 그때 일제히 공격해서 끝을 보는 거야.”

“흐트러진다고?”

확신에 찬 루빈의 말에, 이마카룸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혹한의 오러’로 맹공을 퍼부을 때, 그 사이 루빈은 칼란타의 목숨을 끊어내는 것에만 집중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블라네는 그걸 알아챘다.

“중갑을 뚫어내고, 거기에다가 무효화 약물을 뿌리신 거군요.”

“아, 그런 거야?”

루빈은 이마카룸을 살짝 뒤로 물렸다. 투흔인과 너무 가까우면 투흔의 해일이 칼란타한테 집중되지 않을 테니까.

곧 칼란타의 등 뒤로 해일이 달려왔다. 칼란타가 양손에 무기를 들어올리는 순간이었다.

우뚝.

해일에 정통으로 관통당한 칼란타. 심장이 멎은 것처럼 경직되었다.

“지금이야.”

가장 먼저 루빈이 쇄도해 나갔고, 블라네와 이마카룸이 양쪽 날개처럼 뻗어나갔다. 각각의 무기를 앞세운 채였다.

그리고, 셋은 전쟁을 끝내는 일격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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