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2화
꿀꺽, 꿀꺽…….
마야는 나를 안은 채 따뜻한 우유가 든 젖병을 내 입에 갖다 대었고, 나는 급한 호흡으로 젖꼭지를 빨았다.
제기랄, 젖병이나 빠는 아기 신세라니…… 그래도 배고픈 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어느덧 엄마의 장례가 치러진 지도 세 달이 되어 간다.
나는 팔다리가 점점 통통해져 가는 중이었고, 목도 조금은 가눌 수 있었다.
“우리 아가씨, 우유도 잘 마시네요.”
마야의 따스한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름 한번 본 적 없지만, 아마 그녀는 내 엄마인 트리샤가 친정인 퀠른에서 데려온 시녀인 모양이었다.
시녀장은 마야에게 나를 돌보라는 임무를 주었고, 그녀는 나를 보면 종종 트리샤가 생각나는지 눈물을 훌쩍이다가도 내게 최선을 다했다.
“부인께서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다시 코를 훌쩍한 마야는 내가 젖병을 다 비우자 나를 세워 안았다.
“아무도 아가씨에게 관심도 없고, 다들 너무하시다니까요.”
벌써 가족들에게 잊힌 모양인지, 태어난 날 이후로 누구도 나를 보러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원작 그대로인가.
문득 태어난 날 보았던 푸른 시스템 창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설 등급 운명이라니, 대체 뭘 말하는 거지?’
주인공인 에반 테일러스라면 몰라도, 한미한 엑스트라 샤샤 윈체스터에게는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게다가 마지막에 뜬 창의 의미는 더욱 알 수가 없다.
[다양한 업적을 달성하여 기반을 다지세요.]
‘어떻게 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마야는 내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맨정신으로 아기가 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톡, 톡, 톡, 톡.
그녀의 진득한 두드림에 속에서 뭔가 올라오고 있었다.
“끄억!”
입 밖으로 트림이 터져 나오는 이 과정은 아무리 해도 수치스러웠다.
게다가 내 트림에 마야가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오만 가지 감회를 불러왔다…….
“우리 아가씨, 잘했어요.”
그녀는 나를 칭찬하며 아기 침대에 눕힌 뒤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기저귀 좀 볼까요?”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발버둥 쳤지만, 그녀는 아주 쉽게 내 양발을 한 손으로 잡고 기저귀를 갈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싫어하는 순간 1위였다.
“응애! 응애!”
“기저귀를 안 갈면 엉덩이가 아야 해요, 우리 예쁜 아가씨.”
그건 알지만 이건 정말 싫다고.
“엉덩이가 빨갛게 되면 포블린 크림을 발라야 한답니다. 효과는 괜찮지만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몰라요.”
내가 속으로 무슨 소리를 외치거나 말거나 그녀는 중얼거리며 내 기저귀를 갈았다.
묵직해진 천 기저귀가 철퍼덕하고 선반에 올라왔다.
“다 됐다. 이제 개운하죠?”
솔직히 개운하기는 했다. 나는 한결 뽀송해진 엉덩이를 대고 누운 채 눈을 일렁였다.
마야는 나와 눈을 맞추며 몇 번 웃어 보인 뒤 내 가슴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낮잠 잘 시간이에요, 아가씨. 자장, 자장…….”
어떻게 된 게 일상이 맨날 먹고 싸고 잠자기이다.
하긴, 아기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는 하지만 너무 심심하단 말이다.
나는 다시 ‘으앵’ 하고 울기 시작했고 마야는 나를 안아 토닥였다.
“우리 아가씨, 잠투정하시는구나…….”
아니야. 그냥 심심하고 짜증 나고…… 졸립고…….
아, 왜 졸린데 눈꺼풀이 무겁고 짜증이 나지? 나 원래 이랬었나?
계속 칭얼대다 보니 눈이 차츰 감겼다.
“푹 자고 예쁜 모습으로 일어나셔야죠, 우리 귀여운 아가씨…….”
마야의 어깨는 포근하고 따뜻했다.
* * *
문이 열리며 타닥, 타닥 들려오는 발소리에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은은한 분홍색 머리카락과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아이가 둘 보였다.
‘이 애들은……?’
둘 다 나와 같은 녹안이었으며 만화를 찢고 나온 듯 잘생긴 얼굴이었고, 귀족 학교의 교복 같은 남색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피부는 아빠처럼 흰 톤이었고 꽤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늘색 머리카락은 싸늘한 표정, 분홍색 머리카락은 심술궂은 표정을 말이다.
‘그래. 한번쯤은 볼 애들이지.’
긴장한 것인지 어색한 것인지…… 혹은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 해 놓은 모양새…… 아무튼 이 둘은 윈체스터가의 쌍둥이이자 내 오빠들이다.
하늘색 머리가 진 윈체스터, 분홍색 머리가 오셀로 윈체스터겠지.
나와는 여섯 살 차이의 이복 오빠들.
향후 윈체스터의 가세를 업고 제국적인 악당으로 성장할 아이들이고 말이다.
“공자님들, 샤샤 아가씨예요. 정말 귀엽죠……?”
어머니의 장례식에 당연히 이 둘도 참여했겠지만, 나와는 지금이 초면이었다.
“샤샤 아가씨도 인사해요. 오라버니들이세요. 로젠토에서의 교육이 끝나고 이제 막 돌아오셨어요.”
내게 다가온 쌍둥이 형제는 외계 생물체라도 보는 양 뜻 모를 시선으로 한참 동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왼쪽 눈 밑에 점이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애가 손가락을 들어 내 볼을 쿡 찔러 보았다.
“고…… 공자님.”
마야가 당황했지만 남자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어 번 더 찌르더니 감회를 말했다.
“뚱뚱해.”
나는 그 가차 없는 목소리에 발끈했다.
‘아기들은 원래 이렇거든? 내가 우량아에 속한다는 말을 듣긴 하지만 초면에 그런 말은 실례잖아!’
나는 있는 힘껏 나를 찌른 남자애를 노려봐 주었다.
“오셀로, 그만.”
가만히 있던 애가 오셀로라 불린 분홍 머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역시 네가 오셀로라는 말이지? 그럴 줄 알았어.’
조금 더 점잖아 보이는 애는 쌍둥이 중 형인 진일 것이다.
첫째인 진 윈체스터는 잔혹함과 냉정함이라는 수식어구가 붙는 암흑가의 과묵한 지배자가 될 것이고, 둘째인 오셀로 윈체스터는 진한 광기를 드러내는 가문의 실권자가 될 운명이었다.
‘저리 가, 너희들과는 엮이고 싶지 않아.’
나는 팔과 다리를 바동대다 가까이 다가온 오셀로의 턱을 살짝 치고 말았다.
“……?”
헉! 오셀로의 예쁜 눈썹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지만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고 모른 척을 했다.
“얘 뭔가 아는 것 같은데. 눈빛이 뭔가 음흉해.”
오셀로의 나직한 목소리에 어쩐지 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진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오셀로를 핀잔했다.
“아기가 음흉할 리가. 얘는 자기 엄마가 죽은 것도 모를걸. 내가 누구인지, 네가 누구인지,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지.”
……그건 알고 있어.
나는 슬며시 진을 보았다.
진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고, 그 눈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복잡했다.
하지만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 방금 뭐지?’
내가 왜 쟤를 보고 웃은 거지? 의문이 드는 순간 예전에 학점을 채우기 위해 수강한 ‘영유아의 건강’이라는 교양 과목에서 배웠던 ‘사회적 미소’라는 용어가 떠올랐다.
어린 아기들은 눈을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웃고는 하는데 아마도 그 작용인 것 같았다.
“…….”
한편 내 미소를 본 진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예상치 않았던 내 반응에 약간 떨떠름해 보이기도 하고.
뭐야, 불안하게. 왜 자꾸 보는 걸까.
내가 알기로 원작에서의 쌍둥이는 이복 여동생인 샤샤 윈체스터와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암시장과 암흑가에서 잘나가는 두 놈들과 다르게, 샤샤는 밥만 축내는 병약한 막내였으니까.
추후 나의 치료약을 핑계로 테일러스 가문의 사람들을 납치하기는 하지만 그건 그저 명분일 뿐이었다.
“……샤샤.”
그러니까 레카르도나 이 두 오빠들이랑은 엮이지 않고 쥐 죽은 듯 지낼 계획…….
‘……응?’
문득 진의 입술에서 내 이름이 새어 나왔다.
오셀로는 놀란 듯 흠칫 제 형을 바라보았고,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진이 마야에게 물었다.
“샤샤라고 했지? 이 애 이름.”
“네, 공작 전하께서 지어 주셨어요.”
잠시 뒤 진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어울리는 이름이네.”
오셀로보다 조금 짙은 그의 녹안 표면에 내 포동한 얼굴이 비쳤다.
진의 딱딱한 입술 끝이 오묘하게 비틀렸다.
* * *
두 쌍둥이가 내 방을 나선 뒤 나는 한참 동안 진의 말뜻에 대해 생각했다.
전에 마야가 내게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샤샤’란 이 세계의 언어로 ‘검은 연못’을 뜻한다고 했다.
검은 연못이라니…….
연못이 검으면 그냥 썩은 물 아니야?
고작 연못인데 깊어서 검을 수도 없으니 썩은 물밖에 없지……. 아버지란 사람이 딸에게 이런 이름이나 지어 주다니.
진이 나를 싫어하는 것인지,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몰라도 진의 목소리는 한참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가씨, 공자님들께서 부인의 친정인 퀠른가의 손님들을 배웅하셨어요. 분위기가 어찌나 무겁던지.”
마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을 잃었을 때, 그날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눈물 짓는 마야과 달리 나는 생존 본능대로 젖병을 쭉쭉 빨며 배를 채우는 중이었다.
슬퍼해 봤자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까, 마음속으로만 명복을 빌 뿐이다.
‘……그쪽은 부디 좋은 저승사자를 만나길요.’
몸에 따라 정신 구조도 약간은 아기가 되어 버린 것인지, 포만감이 들면 붕 뜬 느낌이 들었다.
잠도 조금씩 오고…….
“참, 돌아가신 부인을 위해 뒤뜰에 추모비를 세우신대요. 이레 뒤부터 공사가 시작되나 봐요. 완공되면 우리 같이 가 봐요.”
우유를 마시며 구름 같은 기분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는데 마야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어머…… 젖병 빨다가 잠드셨네…… 귀여우셔라.”